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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윤수의 BOOK...ing 365</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link>
		<description>1년 365일 매일마다 그날 중요한 사건이나 사람과 함께 그와 관련된 책들을 두루 살펴봅니다</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Mon, 09 Nov 2009 06:00:58 GMT</pubDate>
		<item>
			<title>[(마지막회) 3월 31일]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 김민기</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265371</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이 블로그를 통하여 서구 주류 음악계가 아닌 남미나 아프리카의 음악을 몇 번 소개한 바 있는데, 그것들을 다시 뭉뚱그려 말한다면, ‘보편’으로 직수입된 음악 언어를 자신들의 ‘특수’한 전통의 역사와 삶의 양식으로 끌어당겨 새로운 음악 문화를 빚어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음악 문화’란 단순한 ‘이국 취미’로 요약할 수는 없는, 제국과 독재의 시련 앞에서 써나간 피의 연대기가 된다. 자메이카의 밥 말리, 칠레의 비올레따 빠라, 아르헨티나의 아리엘 라미레즈와 아스토르 피아졸라, 브라질의 빌라 로보스, 서아프리카 카보 베르데의 밴드 시멘테라, 쿠바의 꿈바이 세군도 같은 예인들...... &lt;br /&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11273354.jpg&quot; width=&quot;240&quot; height=&quot;166&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한국 대중음악의 빛나는 성취를 이룬 김민기&lt;/p&gt;&lt;/div&gt;우리의 현대사에서 이러한 몸부림을 짚어보고자 한다면 1951년의 오늘, 3월 31일에 태어난 김민기를 생략할 수가 없다. 이 70년대의 대중음악가들 중에서 신중현, 한대수, 송창식, 산울림 등은 바로 앞선 세대가 되는 길옥윤이나 이봉조 같은 사람들의 원초적인 기질의 발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당대의 문화와 삶의 조건을 조금은 더 의식했다. ‘긴급조치’와 ‘대마초 파동’은 정치적 지향성이 강하게 드러내지 않았던 70년대의 음악가들에게도 상당한 시련이 되었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어떤 점에서는 이 당대의 음악가들이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지향성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노래가 더 깊고 넓게 퍼져나갈 수 있기도 했다. 70년대 중반 이후에 이주원이 작곡하고 양희은이 불렀던 ‘들길 따라서’, ‘내 님의 사랑은’, ‘한 사람’ 같은 노래들이나 송창식의 허탈한 읊조림은 그 시대의 막막하고 쓸쓸한 풍경을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게 해주거니와 따라서 어쩌다가 방송 프로그램에서 이 70년대 음악을 ‘청바지와 맥주, 대학가 낭만과 포크송’ 같은 식으로 언급할 때는 과연 그 음악들을 그렇게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맥주처럼 기억해도 되나, 의아스러운 심정이 되는 것이다. &lt;BR&gt;
&lt;BR&gt;
김민기의 음악, 특히 그가 스무살 때 발표한 1집 앨범의 수록곡들은 이러한 정황에 의하여 더욱 깊이 들려온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82817151.jpg&quot; width=&quot;210&quot; height=&quot;21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1971년의 1집 앨범 표지&lt;/p&gt;&lt;/div&gt;김민기는 1951년의 오늘, 3월 31일에 전북 익산(옛 이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였고 어머니는 조산원이었다. 하지만 그가 태어나기 직전에 아버지는 패퇴하던 인민군에 의해 피살된 다음이었다. 그의 많은 음악들에 쓸쓸한 정조가 깔려 있는 것은 이러한 원체험이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소년 김민기는 미술에 소질이 있었다. 재동초등학교와 경기중학교를 다녔는데 학과 생활의 대부분을 미술실에서 보냈다고 한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김민기는 1966년 경기고등학교를 입학하였고 그 선물로 클래식 기타를 받았다. 서울음대에 다니던 셋째 누나가 음악 교사 노릇을 해줬다. 그는 1969년에 서울미대 회화과에 입학하였고 바로 그해에 작은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곧 낙제를 하였고 물감을 사기 위해 세차장 아르바이트를 하였으며 고교 시절 동창인 김영세(디자이너)가 ‘도깨비 두 마리’라는 뜻의 ‘도비두’ 결성을 제의하여 대학가와 음악다방에서 활동을 했다. 1970년 6월에는 YWCA 포크 모임인 ‘청개구리’ 창단 멤버가 되는데, 여기서 양희은을 만나게 된다. &lt;BR&gt;
1971년 11월, 스무 살 청년 김민기는 1집 앨범을 취입한다. 당시 cbs 프로듀서로 일했던 평론가 최경식과 김진성 PD의 지원이 있었고 서울음대의 정성조와 김광희가 큰 도움을 줬다. 이 때의 일들이 다소 복잡하게 꼬이면서 ‘1집 앨범’의 cd 재발매가 법정 다툼으로까지 이어졌으나 김민기 측의 자료와 기억이 확연하여 지난 2008년 10월에 승소한 바 있다. 당시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2부는 김민기의 허락 없이 1집을 cd로 재발매하려던 사람들에게 “음반 판매를 중단하고 이미 제작된 음반을 폐기하라&quot;는 판결을 내렸다. &lt;BR&gt;
&lt;BR&gt;
이 1집 앨범에 우리가 애틋하게 기억하는 ‘친구’ ‘저 부는 바람’, ‘꽃 피우는 아이’, ‘그날’, ‘아하 누가 그렇게’, ‘바람과 나’, ‘길’, ‘종이연’ 그리고 ‘아침이슬’이 수록되어 있다. 스무살 청년의 노래가 40년 가까이 전설이 된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02138118.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25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1991년 넉장으로 발매된 음반 중 '3집'의 앞뒷면 표지.&lt;/p&gt;&lt;/div&gt;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장석주는 ‘아침이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quot;‘아침이슬’은 1975년 당국에 의해 금지곡이 되었다. 다른 금지곡들은 분명한 금지사유가 명시되었지만 이 노래에는 아무런 금지사유가 명시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다. 금지될 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금지된 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7,80년대에 이 노래만큼 널리 불려지고 사랑받은 노래도 없다. 수많은 군중의 목소리로 울려퍼지는 ‘아침이슬’은 무서운 감동과 전율을 동반하는 장엄한 레퀴엠 같았다.&quot; &lt;BR&gt;
&lt;BR&gt;
음악 인생 30주년을 기념하는 콘서트를 앞두고 가진 인터뷰에서 양희은은 원래 ‘아침이슬’이 장석주가 표현한 것과 같은 ‘장엄한 레퀴엠’이 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이 노래가 시위와 운동에 참여하라고 독려할 목적으로 작곡된 것도 아니고 그것을 노래하고 취입할 때도(1971년 9월에 양희은이 먼저 1집 앨범에 수록했다) 장차 저항적인 노래의 상징이 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하지만 양희은은 “노래는 노래를 다시 불러 주는 이들의 것이지 작곡자가 가수의 것이 아님을 70년대 시위 현장에서 뼈져리게 느꼈다&quot;고 말함으로써 얼마든지 사적인 감정을 표현한 노래(혹은 예술)도 당대의 정황 속에서 폭넓은 자장을 가질 수 있음을 언급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88319696.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7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1970년대 초, 김민기와 양희은이 공연을 하고 있다. &lt;/p&gt;&lt;/div&gt;
이는 김민기의 또 다른 노래 ‘친구’에도 적용된다. 원래 이 노래는 그야말로 안타까운 사연을 남긴 친구를 그리워하며 작곡된 것인데 7,80년대의 수많은 사연들이 이 노래를 마음 깊이 새기도록 만들었다. &lt;BR&gt;
&lt;BR&gt;
물론 김민기는 1집을 발표한 이듬해, 1972년 봄 서울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우리 승리하리라’, ‘해방가’, ‘꽃 피우는 아이’ 등을 가르치다가 동대문 경찰서에 연행을 되었고 그 가운데 1집에 수록된 ‘꽃 피우는 아이’가 금지곡이 된 이후로 한 시대의 뜨거운 가객이 되었다. 그는 자주 연행되었으며 대학을 마친 이후에는 장일순, 지학순, 김지하 등의 자장권에서 도농을 막론하는 다양한 문화운동과 생명 운동을 펼쳤다. 노래극 &amp;lt;공장의 불빛&amp;gt;이 그 대표적인 성취다. 그 이후는 우리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뮤지컬 &amp;lt;지하철 1호선&amp;gt;을 대표작으로 하는 대학로 학전 시대를 살아왔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69269264.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4&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김민기의 록뮤지컬 &amp;lt;지하철1호선&amp;gt;은 2008년 12월 31일, 4천 회 공연을 마치고 잠시 '정차'하고 있다. &lt;/p&gt;&lt;/div&gt;
김민기의 ‘아침이슬’은, 그리고 이 노래가 수록된 1971년의 1집 앨범은 스무 살 청년의 빛나는 감성의 결실이라는 측면과 더불어 이 70년대의 한국 대중음악이 자신의 일에 대하여 자신의 언어로 말하고자 몸부림쳤던 시대였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번안곡 시대’라고 불러도 될 만큼 미국의 양식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때에 일군의 젊은 음악가들이 그 폭포수 안에서 한사코 자기 목소리와 언어를 찾고자 했다. &lt;BR&gt;
&lt;BR&gt;
맨 앞에 적은,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지에서 거의 동시적으로 펼쳐진 ‘보편’ 위의 ‘특수’라는 문화 양상이 우리에게는 70년대 대중음악 지평에서 확연하였고 김민기의 1집 앨범은 빛나는 예광탄이 되었던 것이다. &lt;BR&gt;
&lt;BR&gt;
더욱이 김민기는 ‘통기타 포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 옛 노래와 형식들을 재해석하였고 그 많은 곡들을 생산 현장 속으로 부단히 실어가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당대 제3세계 예술가의 고뇌와 실천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김민기의 음악과 실천은 단지 ‘예술’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20세기 중엽 이후 이 한반도가 살아낸 쓰라린 수난과 응전의 기억들을 보여주는 거울이 된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29490719.jpg&quot; width=&quot;190&quot; height=&quot;286&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amp;lt;지하철1호선&amp;gt; 포스터&lt;/p&gt;&lt;/div&gt;시인 김지하는 “그의 노랫말에는 죽음이 배어 있다. 그러나 그의 음악을 들으면 부활의 기쁨이 느껴진다. 밑을 흐르는 세계와 삶에 대한 짙은 사랑과 잃어버린 유년의 고향으로 이끌어주는 듯한 강렬한 종교성은 죽음과 고문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그 자체로서 하나의 저항이었고 대안이었다. 그 절정이 ‘아침이슬’이다.&quot;라고 말했다.
&lt;BR&gt;
&lt;BR&gt;
오늘 3월 31일, 김민기의 이야기로 이 블로그를 마치게 되었다. ‘풀잎마다 맺힌 아침이슬처럼’ 일찍 일어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날 이야기를 쓰고는 ‘나 이제 가노라’ 하며 좀더 규칙적으로 살아볼까 했는데, 단 하루도 그리 된 적이 없다. 그나마 '규칙적으로 불규칙'했던 리듬이 많이 헝클어졌다. &lt;BR&gt;
&lt;BR&gt;
많은 분들이, 사실이 틀렸거나 논조가 희미하거나 이래저래 부실한 대목들을 꼼꼼히 지적해 주는 바람에 365회를 끝낼 수 있었다. 몇 분의 아이디와 얼굴이 기억난다. 어수선한 글을 반듯하게 편집해준 분들에게도 감사드린다. 문득, 어느 광고 문구가 생각난다. '내일은 뭐 입지? 아니 뭐 하지?' &lt;/font&gt;&lt;/p&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김민기의 노래와 삶&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45549547.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김민기 | 김창남 엮음 | 한울&lt;BR&gt;
&lt;BR&gt;
  1971년의 1집 앨범을 시작으로 김민기가 20세기 후반의 한반도에서 실험하고 모색하고 실천한 작품과 그밖의 활동을 총망라한 책이다. 본문에서는 소리굿 &lt;아구&gt;, 노래일기 &lt;연이의 일기&gt;, 노래굿 &lt;공장의 불빛&gt;, 록 뮤지컬 &lt;지하철 1호선&gt; 등을 스치듯이 언급만 하였는데 이 책을 따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 책을 엮은 성공회대 김창남 교수의 글을 비롯하여 김지하, 최경식, 주철환, 강헌 그리고 &lt;지하철 1호선&gt;의 원작자 폴커 루드비히 등의 글도 실려 있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46033045&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어둠 속의 아름다운 불빛&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84691733.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공장의 불빛 | 김민기 작곡, 정재일 편곡 연주 | 로엔 &lt;BR&gt;
&lt;BR&gt;
  &lt;공장의 불빛&gt;은 1978년의 노래극이다. ‘1978년’과 ‘노래극’이라는 말 사이에는 유신 시대의 삼엄한 긴장이 끼어 있다. 하루하루 연명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야 했던 70년대의 쓰라린 노동 현장을 다룬 작품이다. 김민기는 이를 단순히 ‘리마스터링’하는데 그치지 않고 정재일에게 모든 편곡과 연주를 맡김으로써 진정한 ‘복원’이 되도록 하였다. 음악평론가 강헌은 “한국 대중음악 사상 가장 깊은 지하에서 제작됐으나 가장 높이 불타오른 비판정신의 극점”이라고 평가했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4775018906&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서산마루에 시들어지는......&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52559460.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김민기 3 집 | 김민기 | 로엔&lt;BR&gt;
&lt;BR&gt;
  6장의 cd와 가사집, 책자 등으로 구성된 전집 ‘Past Life Of 김민기’가 출시된 적 있으나 현재는 절판 상태다. 이 전집에는 1991년에 발매되었던 4장에 1971년의 1집, 김민기의 노래극 &lt;엄마 엄마 우리엄마&gt;, &lt;연이의 일기&gt;, &lt;아빠 얼굴 예쁘네요&gt; 등이 모두 수록되었으나 현재 구매하기 어렵다. 1991년의 4장 앨범도 절판. 다행히 그중 ‘3집’이 중고로 구해볼 수 있다. ‘상록수’, ‘기지촌’, ‘가뭄’, ‘식구 생각’, ‘서울로 가는 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노래 중에 ‘기지촌’을 조심스레 들어보면 서구의 포크와 전래의 타령이 70년대의 하위문화 속으로 스며드는 풍경을 볼 수 있다. 김민기는 그 당시에 지나간 노래를 다시 부를 마음이 없었는데, 어렵게 운영하던 학전소극장을 살리기 위해 4장을 취입했다고 한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4775005421&amp;amp;ttbkey=ttbprague0909002&amp;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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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3월</category>
			<author>jys2003 (정윤수)</author>
			<pubDate>Mon, 30 Mar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3월 30일]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 김사인</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265017</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58668222.jpg&quot; width=&quot;170&quot; height=&quot;227&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시인 김사인 (사진 창비)&lt;/p&gt;&lt;/div&gt;밤에 운전을 하면서 mbc 표준 FM &amp;lt;재미있는 라디오&amp;gt;을 자주 들어왔기 때문에 개그맨 최양락의 '귀환'이 내게는 귀환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나 텔레비전으로 자주 보게 된 것은 작은 즐거움이 되었다. 최근 들어, 오래 전에 인기가 있었던 개그맨들을 더러 보게 되었고 지난 주에도 김학래와 홍기훈이 출연하였는데 꽤 알려져 있다시피 이들은 모두 충청도 출신이다. 충청도도 작지 않은 지역이어서 김학래, 남희석처럼 바닷가 보령 사람들이 있는가 임하룡(단양)이나 신동엽(제천)처럼 내륙 깊은 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도 있다.&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그렇기는 해도 모두들 '충청도' 출신 개그맨들인데 이밖에도 최병서, 김정렬, 이영자, 서경석, 이경래, 이창명, 서세원, 강성범, 김준호, 김미연, 황기순, 최형만, 지영옥, 김학도, 전영미 장동민, 안상태 등 많은 사람들이 그 지역을 연고로 한다. 대전을 포함한 충청도 인구가 대략 650만 명 쯤 되는데 1,500만 명이 넘는 경상도나 각각 1천만 명이 넘는 서울, 경기도에 비해 개그맨 출신 비율은 상당히 높은 것이다. &lt;BR&gt;
&lt;BR&gt;
최양락을 포함하여 이 지역 출신 개그맨들이 방송에 출연하여 그 '까닭'을 언급한 것처럼 확실히 충청도 특유의 느릿느릿하면서도 사안의 핵심을 에둘러 표현하는 방식이나 대화 끝의 소박한 반전이 그 위아래 사람들에게 깊은 정감을 준다. 여기에 경상도와 전라도의 지방말이 너무나 '개성'이 강한 것도 작은 원인이 될 수 있고, 조금은 느슨한 이유지만 이 두 지역을 둘러싼 미묘한 감정선 보다는 충청도(물론 강원도를 포함하여)라는 다소 비정치적인 공간이 그 지역의 말투를 부드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점도 있다. &lt;BR&gt;
&lt;BR&gt;
물론 이 지역의 느릿느릿한 말투와 소박한 반전 그리고 마음 속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특성은 이 지역 특유의 끈기를 넓게 감싸안는다. 이 끈기에 대해 소설가 윤대녕은 '결기'라는 말로 표현한 바 있는데, 충남 예산 출신이 이 소설가는 오래 전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 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43211296.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1&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사진작가 김일주가 찍은 중년기의 소설가 이문구&lt;/p&gt;&lt;/div&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quot;한국의 아득한 풍경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그 작은 나라도 곳곳마다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경상도의 지리산은 억세고 칼칼하지만 전라도는 깊고 아늑하다. 창이 울려 퍼지는 듯하다. 또 ‘강원도의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설악산에 가면 편안해지고 몸이 맑아진다. 마음을 육박하면서 쓰리게 하지는 않는다. 동해 바다, 설악산으로 인하여 탈속하게 되는 것이다. &lt;BR&gt;
&lt;BR&gt;
충청도는 중도적인 결기와 아픔이 있다. 산세도 그러하고 사람도 그러하다. 제주도에 내려가서 짐을 정리하다가 이문구 선생 글을 읽게 되었는데 아주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중략) 돌로 만든 무시무시한 칼이 숨겨져 있는 작품이다. 마흔이 넘어서 정신 차리고 읽으니까 정말 무섭게 느껴졌다. 살아남는 것만이 목표였다는, 일찌감치 삶이 무섭고 두렵다는 것을 어렸을 때 다 깨달은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과 글이었다. 중도스러운 결기가 따로 있구나 하는, 그래서 어떤 때는 충청도 사람들이 돌려 말할 때는 무섭다.”&lt;/font&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57423551.jpg&quot; width=&quot;240&quot; height=&quot;356&quot; alt=&quot;&quot;/&gt;&lt;/div&gt;이렇게 말이 나온 김에 이문구의 작품을 한번 인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래는 &amp;lt;관촌수필&amp;gt; 연작 중에서 '일락서산'인데, 20세기 중엽 이 한반도가 치르게 되는 격변의 시기에 '옹점이'가 소년 이문구의 집으로 들어오는 대목이다. 물론 '옹점이'란 이름은 아래 대목에 이어지면서 소년의 할아버지가 지어 부르게 되는 이름이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맨 처음 그녀를 다잡아 가면서 안팎 범절과 행실을 가르치고 다스린 이도 할아버지였다. 본디 사람 보는 눈이 달랐던 할아버지는 그녀를 보자 대뜸 싹이 있겠다고 판단하여 나이부터 물었었다. &lt;BR&gt;
“그래 너는 몇 살이나 되었다더냐?” &lt;BR&gt;
그러자 그녀는 아무 어렴성 없이 아는 대로 대꾸했다. &lt;BR&gt;
“지 에미가 그러는디 제년이 작년까장은 제우 여섯 살이었대유. 그런디 시방은 잘 몰르겄슈.” &lt;BR&gt;
“늬가 늬 나이를 모른다 하느냐?” &lt;BR&gt;
“예. 워떤 이는 하나 늘어서 일곱 살이라구 허던디 또 누구는 하나 먹었응께 다섯 살이라구 허거던유.” &lt;BR&gt;
“페엥-. 그래 늬 에민가 작것인가는 요새두 더러 보이더냐?” &lt;BR&gt;
“접때 달밭 대감댁(외가)에 왔는디 봉께, 유똥 치마를 입구, 머리는 힛사시까미를 허구, 근사헌 우데마끼두 차구...... 여간 하이카라가 아니던디유.” &lt;BR&gt;
“그래 그것은 시방두 장(늘) 술고래라더냐?” &lt;BR&gt;
“그리기 접때두 취해서 뮁 애비허구 다투다가 고쟁이 바람으루 빙겨났었슈.” &lt;BR&gt;
“페엥- 숭헌…….” &lt;BR&gt;
할아버지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고 한다. &lt;/font&gt;&lt;BR&gt;
&lt;BR&gt;
아무래도 한 사람 더 기억하고 또한 글마저 옮겨봐야 되겠다. 내일이면 이 블로그도 끝인데, 그동안 소설가 김성동에 대하여 따로 간추려 적어보지 못하고 김소진을 비롯한 다른 작가들 얘기에 덧붙였던 것이 마음에 걸린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92343757.jpg&quot; width=&quot;190&quot; height=&quot;28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소설가 김성동 (사진 조경국)&lt;/p&gt;&lt;/div&gt;김성동은, 이 지역 출신의 개그맨들이 태생으로 익히게 되는 말투와 윤대녕이 말한 '중도스러운 결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소설가다. 그는 많은 소설에서 작중의 주인공(대체로 작가 자신인 듯한)을 뭔가 결핍되었거나 더러는 현실 판단력이 부족한 것처럼 묘사하긴 하지만 실은 소설에서도 그렇고 좀더 직접적으로 작가 자신의 드러나는 산문 같은 것으로 보면 세상의 문리와 이치와 속셈을 손바닥 들여다 보듯이 엄연하게 다 읽고 있는, 진정한 작가다. 그는 정말로 '의뭉스럽게 돌려 말하는' 충청도 사람이다. 온 국민의 필독서! 이런 문구가 어릴 만한 책 &amp;lt;천자문&amp;gt;에서 김성동은 다음처럼 썼다. 
&lt;BR&gt;
&lt;BR&gt;
모든 것들이 남김없이 까발려지고 있습니다. 비 오시고 눈 내리고 바람 부는 가닭 또한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 까닭을 몰라 다만 두려워하고 떠받들며 조심하던 그 무엇들 또한 한갓 자연물이요 자연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못 견뎌 합니다. 꿈도 없고 바랄 것도 없으며 놀라운 남모를 세계도 없으니 그리움 또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라는 이름의 중생은 마침내 '단백질의 최고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진 마당에 무슨 꿈이 있고 그리움이 있을 수 있겠는지요.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34922002.jpg&quot; width=&quot;170&quot; height=&quot;261&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김성동 저 &amp;lt;천자문&amp;gt;&lt;/p&gt;&lt;/div&gt;그의 소설에는 여백이 많다. 이 '여백'이란 한가로운 정한이 아니라 숨이 멎을 듯한 아득함이다. 그 아득함은 가계의 비운과 산과 속으로 거듭 방황한 이력과 문장 하나하나를 공들여 쓰고자 한 결기 그리고 앞서 언급한 그 지역 말투의 집합적 유전자까지 더해진 것인데 아래 인용하는 '오막살이 집 한 채'의 한 장면이 특히 그러하다. 
&lt;BR&gt;
&lt;BR&gt;
김성동은 &amp;lt;만다라&amp;gt;를 발표한 이후 곧바로 '엄마와 개구리', '잔월', '오막살이 집 한 채', '눈 오는 밤', '바람 부는 저녁', '비 내리는 아침', '그해 여름' 등 서로 연결되는 작품을 쓰게 된다. 이 소설들은 김원일의 &amp;lt;노을&amp;gt;이나 이문구의 &amp;lt;관촌수필&amp;gt;이 그러하듯이, 김성동의 뼈아픈 유년기를 살필 수 있는 작품이자 동시에 20세기 중엽의 상처입고 고단한 삶 전체를 조망하게 해준다. 아래 인용하는 '오막살이 집 한 채'의 한 대목은 전쟁 와중에 친척 집을 전전하던 모자가 높은 산 밑에 오막살이에 머물게 되는데 마침 어느 손님이 오게 되고 소년이 그와 바둑을 두면서 말을 나누는 장면이다. &lt;BR&gt;
&lt;BR&gt;
인용하는 글의 맨 끝에 보면, 소년의 말 하나는 마침표로 되어 있고 다른 말 하나는 물음표로 되어 있다. 그런데 둘 다 의문형을 품고 있다. 그러니까 물음표가 있는 끝말은 명백한 질문이지만 그 위의 소년의 말은 혼잣말 하듯이 하면서 슬며시 물어보기도 하는, 충청도 특유의 말투가 되는데, 이를 마침표와 물음표가 분간해 주고 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quot;가시먼...... 워디루 가신대유?&quot; &lt;BR&gt;
중년의 입가에 잔물결 같은 모시가 어렸다. 그는 줄이 맞지 않는 돌들을 가지런하게 다독거렸다.&lt;BR&gt;
&quot;왔던 곳으로...... 가야지.&quot; &lt;BR&gt;
소년의 목에서 꿀꺽 하고 침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탁탁, 타다닥탁, 하고 솔가지 타는 소리가 들려왔고, 밥이 익는 구수한 내음이 풍겨왔다. 소년은 다시 한번 꿀꺽 하고 생침을 삼켰다. &lt;BR&gt;
&quot;그럼 거시기...... 다시 산을 넘어서 가신단 말유. 높은 산을.&quot; &lt;BR&gt;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로 중년이 고개를 끄덕였고, 소년이 소맷자락으로 코밑을 훔쳤다. 소년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중년을 바라보았다. &lt;BR&gt;
&quot;증말루 이상허시네유, 아저씨는. 워째 너른 신작로를 놔두구 높은 산을 넘어가신대유.&quot; &lt;BR&gt;
&quot;왔던 곳이니까......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지.&quot; &lt;BR&gt;
&quot;아저씨는 워디서 오셨는데유?&quot; &lt;BR&gt;
&lt;/font&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403546664.jpg&quot; width=&quot;200&quot; height=&quot;212&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시인 김사인 (사진 국민일보 김지훈)&lt;/p&gt;&lt;/div&gt;오늘 3월 30일은 시인 김사인이 1956년에 충북 보은에서 태어난 날이다. 김사인은 서울대 국문과를 마치고 고려대 대학원 국문학과를 수료하였다. '긴급조치' 시대였던 70년대 중반에 그는 소설가 김영현, 철학자 이을호, 출판인 김태경 등과 학생운동을 하였으며 졸업 이후에도 그와 같은 길을 계속 걸었다. 90년대에는 &amp;lt;노동해방문학&amp;gt;의 발행인으로 참여하였으며 그 이후 오랜 잠행의 시간을 보냈다. 현재는 현재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lt;BR&gt;
&lt;BR&gt;
1981년에 '시와 경제'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시를 발표하였고 당시 문학 '운동'의 흐름처럼 1982년에는 &amp;lt;한국문학의 현단계&amp;gt;에 평론 '지금 이곳에서의 시'를 발표하면서 평론가로도 활동하였다. 하지만 급히 글을 완성하거나 책을 내는 경우가 드물었다. 1987년에 첫 시집 &amp;lt;밤에 쓰는 편지&amp;gt;를 발간하였고 이를 계기로 그 해에 제6회 신동엽창작기금을 수혜 받게 되는데 이 경우 2년 안에 시집을 발표해야 했으나 무려 19년이나 지난 뒤에야 &amp;lt;가만히 좋아하는&amp;gt;을 발표하였다. &lt;BR&gt;
&lt;BR&gt;
그가 19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낸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90년대 초 수배 생활을 할 때 시집 한 권 분량의 원고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대학로 다방에서 이창동, 임철우, 최인석, 박인홍 등을 몰래 만나기로 한 날인데 그만 비상한 상황에 의하여 원고가 든 가방을 분실하고 말았다. 시상이 떠올라도 5년 내지 10년은 마음 속에서 만지작거리다가 겨우 시 하나 얻게 되는, 그런 작법 때문에라도 분실된 원고 속의 시는 아득하게 사라져갔고 그로부터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amp;lt;가만히 좋아하는&amp;gt;이 발간되었다. &lt;BR&gt;
&lt;BR&gt;
이 시집 발간이 발간될 무렵에 김사인은 현대문학상과 대산문학상을 받았다. 특히 보수적인 색채가 짙은 현대문학상의 수상자가 되었을 때는 문단에서 즐거운 소동까지 빚어졌다. 엄정하게 분리할 수는 없지만 시인이 아니라 적어도 문학운동가로서 김사인은 가장 '위험'한 진영에서 가장 '격렬'한 기관지로 세상과 맞섰던 사람이고 그 바람에 오랫동안 수배 생활을 겪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17235897.jpg&quot; width=&quot;180&quot; height=&quot;26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amp;lt;노동해방문학&amp;gt; 창간호 표지&lt;/p&gt;&lt;/div&gt;문학평론가 조정환의 회고에 따르면, 1988년 12월 신촌에서 노동문학사 창립대회가 열렸고 그 노동문학사에서 &amp;lt;노동해방문학&amp;gt;과 그밖의 책들을 발간했다. 백무산, 정인화, 정남영, 임규찬, 임홍배, 조정환 등으로 편집위원회가 꾸려졌는데 이 &amp;lt;노동해방문학&amp;gt;에는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과 ‘노동계급 그룹’을 비롯하여 그 당시의 좌파 그룹들이 활동가를 파견하였고 이미 오랫동안 당국의 추적을 받고 있던 박노해의 시와 선동문도 알 수 없는 경로를 통해 전달되었다. 그 십중팔구 감옥 행이 예정된 위험천만한 발행인 자리를, 황석영이 '사슴'이라고 표현한, 김사인이 맡았었다. 
&lt;BR&gt;
&lt;BR&gt;
제50회 현대문학상 수상자로 김사인을 선정하면서 시인 정현종은 “지천명에 이른 지극한 마음, 마음 중의 마음인 참마음”이라고 표현했다. 이에 김사인은 &quot;아이구, 이거 참, 잘 못하시는 일 같은데요, 아이구 이거 참, 한 게 없는데요, 저는, 아이구 참, 그 양반들께서 다시 한번 생각하셔야......&quot;하는 수상 소감을 밝힌 적 있다. 시 하나를 읽어 보자. '노숙'이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를 벗기고 &lt;BR&gt;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lt;BR&gt;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lt;BR&gt;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lt;BR&gt;
미안하다 &lt;BR&gt;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lt;BR&gt;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니 &lt;BR&gt;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lt;BR&gt;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lt;BR&gt;
순한 너를 뉘였으니 &lt;BR&gt;
어찌하랴 &lt;BR&gt;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lt;BR&gt;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lt;BR&gt;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lt;BR&gt;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lt;BR&gt;
어떤가 몸이여&lt;/font&gt; &lt;BR&gt;
&lt;BR&gt;
김사인 시인이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서야 두 번째 시집을 낸 또다른 이유는, 앞서 언급한 뒤숭숭한 정황 속의 가방 분실 같은 이유 말고도, 급히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느긋한 것이 아니라) 시상을 거듭 어루만지면서 사물을 살피고 말을 고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길면 10년이 된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53366502.jpg&quot; width=&quot;180&quot; height=&quot;266&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김사인이 엮은 &amp;lt;박상륭 깊이 읽기&amp;gt; &lt;/p&gt;&lt;/div&gt;시인 신경림은 김사인의 시에 대해 &quot;삶의 큰길에서 조금은 비껴나 있고 조금은 뒤처져 있는 이것들을 삶의 중심에 갖다 다시 세우는 것이 그의 시&quot;라고 말했는데 그런 일을 위하여 대부분의 시들이 최소 2~3년의 '숙성기'를 거친다. 김사인은 '사과를 먹고 싶은 마음과 사과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팽팽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서정주의 말을 언급한 바 있다. 아마도 여기에는 느릿느릿하게, 천천히, 오랫동안 감싸 안고 더불어 생각하는 충청도 사람의 말의 방법도 연관이 되어 있을 것이다. 
&lt;BR&gt;
&lt;BR&gt;
물론 중요한 것은 그렇게 '숙성'된 시가 무엇을 감싸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지극히 순정한 투명한 공백을 감쌀 수도 있고 말의 무늬를 어루만질 수도 있고 삶의 구체성을 찬찬히 들여다 본 것일 수도 있으며 한 편의 시에 그 세 요소를 충만시킬 수도 있는데, 앞서 읽은 시처럼, 김사인의 시는 그와 같은 충일된 세계를 이룩하고 있다. 보잘 것 없고 나약한 삶을 따스하게 바라보되 애상으로 쉽게 버무리지 않고 그러한 삶에 걸맞는 말들로 경건하게 감싸안는다. &lt;BR&gt;
&lt;BR&gt;
아래는 김사인 시인의 시 '풍경의 깊이'다. 아래 주소를 찾아가면 시인이 직접 이 시를 천, 천, 히 읽은 것을 들을 수가 있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munjang.or.kr/mai_multi/djh/content.asp?pKind=03&amp;amp;pID=49&amp;amp;pPageID=51&amp;amp;pPageCnt=1&amp;amp;pBlockID=1&amp;amp;pBlockCnt=1&amp;amp;pDir=S&amp;amp;pSearch=&amp;amp;pSearchStr&quot; target=&quot;new&quot;&gt;http://www.munjang.or.kr/mai_multi/djh/content.asp?pKind=03&amp;amp;pID=49&amp;amp;pPageID=51&amp;amp;pPageCnt=1&amp;amp;pBlockID=1&amp;amp;pBlockCnt=1&amp;amp;pDir=S&amp;amp;pSearch=&amp;amp;pSearchStr=&lt;/a&gt;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바람 불고 &lt;BR&gt;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lt;BR&gt;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lt;BR&gt;
&lt;BR&gt;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lt;BR&gt;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lt;BR&gt;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lt;BR&gt;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 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lt;BR&gt;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lt;BR&gt;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lt;BR&gt;
백년이나 이백년쯤 &lt;BR&gt;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lt;BR&gt;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lt;BR&gt;
&lt;BR&gt;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lt;BR&gt;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가 &lt;BR&gt;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lt;/font&gt;&lt;/font&gt;&lt;/p&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오래 숙성된 시들&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30162879.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가만히 좋아하는 | 김사인 지음 | 창비&lt;BR&gt;
&lt;BR&gt;
   시인 신경림은 김사인의 시에 대해 &quot;삶의 큰길에서 조금은 비껴나 있고 조금은 뒤처져 있는 이것들을 삶의 중심에 갖다 다시 세우는 것이 그의 시&quot;라고 말했는데 그런 일을 위하여 대부분의 시들이 최소 2~3년의 '숙성기'를 거친다. 이 한 권에 19년이라면 결코 가벼운 시간들이 아니다. 김사인은 '사과를 먹고 싶은 마음과 사과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팽팽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서정주의 말을 언급한 바 있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22626&amp;amp;ttbkey=ttbprague0909002&amp;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시인의 첫 번째 시집&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24951882.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밤에 쓰는 편지 | 김사인 지음 | 문학동네&lt;BR&gt;
&lt;BR&gt;
  시가 ‘운동’이었을 때, 단순한 정치적 무기나 도구가 아니라, 시 아닌 그밖의 글과 행동이 통제되었으므로 단단하게 조성된 시어가 최소한의 발언이 될 수밖에 없었던 때에 김사인은 &lt;시와 경제&gt; 동인으로 활동했고 그 과정의 시들을 엮어 이 첫 시집을 1987년에 발간한 적 있다. 낮은 목소리로 현실의 고통을 이겨내는 단단한 언어들을 볼 수 있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2819347&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낮고 따스한 목소리&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87450766.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따뜻한 밥 한 그릇 | 김사인 | 큰나&lt;BR&gt;
&lt;BR&gt;
  시인 김사인은 라디오 불교방송의 심야 프로그램 ‘살며 생각하며’을 진행했다. 그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마다 시인이 직접 오프닝 멘트를 썼는데 그것을 묶은 책이다. 김사인, 김정환, 장석주 같은 문인들이 더러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수가 있는데 대개들 관습적으로 쓰여지는 말들 대신에 직접 그날그날의 감상을 쓰면서 진행한다. 낮고 따스한 시인의 말과 생각을 엿볼 수 있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065020X&amp;amp;ttbkey=ttbprague0909002&amp;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828410&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3월</category>
			<author>jys2003 (정윤수)</author>
			<pubDate>Sun, 29 Mar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3월 29일] 세상의 모든 지식 - 세 권의 사전</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264639</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37790353.jpg&quot; width=&quot;250&quot; height=&quot;19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브리태니커 백과사전&lt;/p&gt;&lt;/div&gt;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백과사전은 영국의 &amp;lt;브리태니커 백과사전&amp;gt;다. 1768년부터 매주 분책으로 발행하여 1771년에 세 권으로 모아 초판을 내며 시작되었다. 이후 세계적인 석학들이 저자로 참여하여 그 충실한 내용과 미려한 편집, 그리고 최고 수준의 문장으로 백과사전의 대명사가 되었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동양에서는 경전을 중시하는 풍토에 따라 유학의 고전과 이에 대한 주해서가 일찍부터 발간되었으며, 방대한 지리 때문에 각 지역의 문물을 기록해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 당나라 때인 624년 구양순이 왕명을 받아 전체 48개 항목의 &amp;lt;예문유취&amp;gt; 100권을 냈으며, 명나라 때는 1408년에 총 2만2877권에 달하고 범례만 60권에 이르는 &amp;lt;영락대전&amp;gt;이 편찬되었다. 청나라 건륭제 때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책을 집성한다는 &amp;lt;사고전서&amp;gt;가 3,458종, 7만 9582권으로 집성된 바 있는데, 이는 엄격한 의미의 사전은 아니다. &lt;BR&gt;
&lt;BR&gt;
우리나라의 경우 시문, 경전, 지리 등에 대한 서적이 간헐적으로 있었으나 본격적인 백과사전은 17세기에 이수광이 지은 &amp;lt;지봉유설&amp;gt;(20권 10책)이다. 광해군 때 영의정까지 지낸 이수광은 이 책에서 천문, 지리, 식생물은 물론 베트남, 타이, 말레이시아, 프랑스, 영국 등의 사물까지 소개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이익의 &amp;lt;성호사설&amp;gt;이 간행되었다. &amp;lt;성호사설&amp;gt;은 중국의 사상, 제도, 풍습, 지리 등을 총정리하고 조선의 정치, 경제, 풍속, 역사 등을 서술한 것으로 프랑스 계몽주의의 백과전서파 운동에 버금가는 학문적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74559040.jpg&quot; width=&quot;200&quot; height=&quot;18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1403년판 영락대전 일부&lt;/p&gt;&lt;/div&gt;현대에는 1958년 학원사가 전 6권의 &amp;lt;대백과사전&amp;gt;을, 1959년에 동아출판사가 &amp;lt;새백과사전&amp;gt;을 냈다. 백과사전 출간의 분기점은 1982년에 동아출판사가 총 30권으로 된 &amp;lt;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amp;gt;을 낸 일인데 무려 13만여 항목과 4만여 점의 원색사진, 8000여 점의 흑백사진이 실려 있다. 이후에도 백과사전의 중흥이 이뤄져 한국학중앙연구원의 &amp;l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gt;(27권), 브리태니커 한국어판 &amp;lt;세계대백과사전&amp;gt;(27권), 두산동아(주)의 &amp;lt;두산세계대백과사전&amp;gt;(30권) 등이 발간되었다. 
&lt;BR&gt;
&lt;BR&gt;
그러나 사전은(백과사전이든 어휘사전이든)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그것을 교양 독서로 읽기에는 부담스럽다. 영어 단어 공부하는 학생이 아니고서는 사전을 독서의 대상으로 삼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어느 집에나 사전이 있다. 오늘 3월 29일에는, 이 블로그가 끝나기 전에 꼭 쓰고 싶었던, 일반 교양 독서로 충분히 읽을 만한 사전 세 권에 대해 쓰고자 한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07731428.jpg&quot; width=&quot;200&quot; height=&quot;276&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이수광 저 &amp;lt;지봉유설&amp;gt; (사진 서울대)&lt;/p&gt;&lt;/div&gt;먼저 A J 제이콥스의 책 &amp;lt;한권으로 읽는 브래태니커&amp;gt;이 있다. 이 제이콥스라는 사람은 상식을 뛰어넘는 상식의 소유자다. 이 괴팍한 저자는 381일 동안 미국의 대도시 한복판에서 자신의 몸을 이용하여 기이한 실험을 가진 적도 있다. 다름 아니라 ‘예수’처럼 살아보기였다. 제이콥스는 꽤 오랫동안이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온갖 형태의 악당들이 판을 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종교는 건재하고 신의 가호를 기다리는 사람은 줄지 않았다. 그래서 저자는 모종의 실험을 하기 시작했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우선 제이콥스는 이 세상의 모든 성경을 다 끌어모았다. &amp;lt;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amp;gt;의 저자답게 그는 개역 개정판 성경, 구어체 성경, 팬시하게 만들어진 성경, 대홍수의 환란 중에도 읽을 수 있게 방수처리 된 성경, 힙합 마이나를 위한 성경 등을 다 끌어 모았다. 16권의 성경에서 무려 700여 개에 달하는 계율, 지침, 조언, 금언 등을 컴퓨터에 입력한 후 목사, 신부, 랍비 등을 찾아가 자문을 구했다. &lt;BR&gt;
&lt;BR&gt;
이렇게 예비 작업을 마친 제이콥스는 성경에 언급된 계율과 지침을 모조리 실천하기 시작했다. 성경이 집필된 시대의 옷차림을 하고 수염을 길렀다. 십일조를 꼬박꼬박 냈으며 사소한 거짓말도 금하였고 안식일을 성스럽게 엄수했다. 펜실베이니주 랭카스터에 있는 아미쉬 공동체도 방문했다. 성경 말씀대로 살아가는 평화공동체다.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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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92208762.jpg&quot; width=&quot;270&quot; height=&quot;21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amp;lt;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amp;gt;의 저자 제이콥스&lt;/p&gt;&lt;/div&gt;잠언에 이르기를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는 말이 있어 한참이나 고심한 끝에 제이콥스는 스티로폼 재질의 장난감 방망이를 사서 아이의 엉덩이를 때렸다. 그렇게 한 후 곧장 죄의식에 사로잡혀 고뇌하고 있는데 아이는 그 장난감 방망이로 아빠의 엉덩이를 때리기 시작했다. 
&lt;BR&gt;
&lt;BR&gt;
그의 실험은 이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성경에 언급된 음식을 먹기 위해 고대 지중해 지역 사람들의 재료를 구하였고 매월 1일에는 새로운 달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나팔까지 불었다. ‘두 가지 실로 짠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레위기 19:19)는 구절에 따라 폴리에스테르와 면 혼방 티셔츠를 입지 않았다. ‘돌을 던지는 사형’(레위기 20:27)을 실천하기 위해 아주 작은 돌멩이를 구하여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말에도 일하는 직장인에게 돌을 던졌다. 물론 곧장 달려가서 사과를 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75060426.jpg&quot; width=&quot;210&quot; height=&quot;287&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제이콥스 저 &amp;lt;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amp;gt;&lt;/p&gt;&lt;/div&gt;그리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현실 종교를 신뢰하지 않았던 제이콥스는 ‘개과천선’하게 된다. 성경 말씀을 엄수하느라 일상 생활에 너무 많은 ‘불편’을 겪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곧이곧대로 지켰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는 빨리 와준 것에 감사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는 케이블이 끊어져 나를 지하 바닥에 메다꽂지 않는 것에 감사한다. 이전에는 이렇게 사소한 것들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다. 나의 매일 매일을 무탈하게 만들어주는 수천 가지의 사소한 일들. 감사를 드리는 대상이 누군지 확실히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감사에 중독되어 어쩔 수가 없다.”&lt;/font&gt; &lt;BR&gt;
&lt;BR&gt;
미국의 유명한 남성지 &amp;lt;에스콰이어&amp;gt;의 편집자인 제이콥스는, 앞서 소개한 성경 말씀 실천하기 프로젝트 말고도 괴팍한 일을 많이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3만 3000쪽에 6만 5000개 항목, 2만4000개의 그림으로 이뤄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완독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백과사전의 A부터 Z까지 완독하였다. 완독한 후, &amp;lt;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amp;gt;을 썼다. 책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볼 만한 책이다. &lt;BR&gt;
&lt;BR&gt;
제이콥스의 ‘한 권’이 3만 3000 쪽에 달하는 브리태니커를 담아낸 ‘잡학 상식 통조림’이라고 한다면 나는 일독을 권할 마음이 없다. 그렇다기 보다 이 책은 풍부한 상상력과 활기로 넘쳐 났던 젊은 청년이 할리우드 연예인들의 시시껄렁한 나날들에 대해 쉼없이 글을 쓰면서 쇠락하였다가 브리태니커 완독으로 재생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54980020.jpg&quot; width=&quot;180&quot; height=&quot;328&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amp;lt;보리국어사전&amp;gt;&lt;/p&gt;&lt;/div&gt;그 과정은 고독한 자기 치유를 고급 유머로 치환해낸 제이콥스 특유의 문장으로 다듬어져 있고 각각의 내용들은 이 세상을 독특한 블랙유머의 시선으로 바라본 절묘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만약 당신이 지적인 활력을 다 잃었고 정신적으로도 지쳐 있다면, 이 책을 구해 보기 바란다. 
&lt;BR&gt;
&lt;BR&gt;
다음으로 권하는 사전은, 이 블로그의 2월 24일자에 변산공동체 윤구병 선생을 소개하면서 언급한 &amp;lt;보리국어사전&amp;gt;이다. 중언부언이 있지만, 얼마 남지 않은 블로그의 잔여 시간을 쪼개서 다시 한번 권장한다. &lt;BR&gt;
&lt;BR&gt;
2월 24일자 이야기에 이 사전과 관련하여 윤구병 선생의 역할을 언급한 바 있으므로 오늘은 편집 실무를 총괄한 남우희 편집장을 소개한다. 남 편집장은 고려대 국문과를 마치고 박용수 선생의 &amp;lt;겨레말용례사전&amp;gt; 제작에 참여하면서 사전 일을 시작하였다. 박용수 선생은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카메라 하나 메고 7,80년대를 기록한 다큐 사진가이며 우리말 사전에 온 생애를 바친 분이다. 87년의 거리에서, 그리고 그 무렵의 어느 단체 사무실에서, 멀찌감치 서서 뵌 일이 있다. &lt;BR&gt;
&lt;BR&gt;
남우희 편집장은 1998년에 보리출판사에 입사하였고 &amp;lt;보리국어사전&amp;gt; 기획 작업을 시작했다. 이 사전을 실질적으로 집필하게 되는 '토박이사전편찬실'에 참여하여 원고 감수 역할을 하였다. 제작 기간 8년에 연인원 수십여 명이 원고, 사진, 디자인, 일러스트로 참여하였고 무려 20여억 원의 제작비가 소요되었다. &lt;BR&gt;
&lt;BR&gt;
아이들이 접할 수 있는 단어를 최대한 섭렵하여 수록하였고 한 단어에 4명씩 각각 뜻을 달고 서로 교차교열을 보는 방식으로 검증하여 올림말에 대한 뜻풀이와 용례달기를 마쳤다. 단어 하나에 최소 8번의 교차 교열작업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93741265.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6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amp;lt;보리국어사전&amp;gt;의 내용 중 일부&lt;/p&gt;&lt;/div&gt;
남우희 편집장의 역할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인데,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인터넷 세상에서 왜 종이사전을 만드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우문이다. 어린이들이 연관어를 찾아가며 어휘력을 늘릴 수 있고, 모국어의 체계를 익힐 수 있는 종이사전을 늘 가까이 하도록 당부하고 싶다&quot;고 말했다. 이 사전을 왜 온 가족이 곁에 두고 읽을 만한지 알 수 있는 말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30779668.jpg&quot; width=&quot;160&quot; height=&quot;213&quot; alt=&quot;&quot;/&gt;&lt;/div&gt;마지막으로 두툼한 사전 한 권을 소개한다. 가격이 만만치 않지만, 사전은 으레 비싼 것이겠거니, 그렇게 우선 생각하기로 하자. 궁리 출판사에서 펴낸 &amp;lt;세계만물 그림사전&amp;gt;이 그것이다. &lt;BR&gt;
&lt;BR&gt;
이 사전의 미덕은, 우선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인체까지 포함하여)을 입체적인 도판으로 확연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무려 6천 컷의 이미지가 수록되어 있고 그 이미지들마다 명칭과 설명 글이 따라붙는다. 5개 나라 언어별로 무려 3만 2천단어가 된다. 저 하늘 높은 곳의 태양에서부터 전기 드릴, 자전거, 응급실, 축구, 옷, 인체, 수많은 식물과 동물들이 끝없이 펼쳐지는, 이 세계의 진실한 축소판이 되는 사전이다. &lt;BR&gt;
&lt;BR&gt;
다음으로 이 사전은, 실용적인 쓰임새를 떠나서, 이 세상의 만물에는 모두 이름이 있다는 존엄한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이 세상에 이름 없는 사물은 없다. 이것을 우리는 깨닫는 것이다. ‘이름 모를 새’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그저 비행기, 자전거, 축구, 컴퓨터라고 부르는 무생물에도 수많은 부품과 기호와 명칭이 있어서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61948688.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0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amp;lt;세계만물 그림사전&amp;gt;의 내용 중 일부&lt;/p&gt;&lt;/div&gt;
마지막으로 이 사전은, 이 세상의 만물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확인시켜준다. 물론 그것이 이 사전의 구체적인 목표는 아니다. 각각의 페이지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항목을 위하여 헌신하고 있다. 그런데 누군가 이 사전을 펼쳐보게 되면 한 군데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다른 페이지로 넘겨보게 된다. 사물이 다른 사물을 계속 호명하게 되고 이미지들은 서로 중첩되면서 큰 항목을 구성하게 되며 마침내 독자는 작은 것들의 총합으로 구성된 큰 세계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lt;BR&gt;
&lt;BR&gt;
세 권의 사전, 그러니까 &amp;lt;한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사전&amp;gt;, &amp;lt;보리국어사전&amp;gt;, &amp;lt;세계만물 그림사전&amp;gt;을 통하여 더 많은 책과 더 깊은 지식과 더 넓은 세상으로 천천히 산책해 보기로 하자. &lt;/font&gt;&lt;/p&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지식 활력 충전&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07117497.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 A. J. 제이콥스 지음 | 표정훈, 김명남 옮김 | 김영사&lt;BR&gt;
&lt;BR&gt;
  ‘인류 지식의 보고’인 브리태니커 사전. 그것을 이 한 권의 책이 다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서서히 중년으로 넘어가는 한 사내가 어떻게 지적인 열정을 회복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제이콥스는 말한다. “나는 우리가 기꺼이 새로운 모험에 나서지 않으면 지루하게 살 수 밖에 없다는 걸 안다. 나는 지식과 지적 능력이 같지 않다는 걸 안다. 그러나 그 둘은 가까운 이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배움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4928301&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온 가족 필독서 &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44210201.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보리 국어사전 | 토박이 사전 편찬실 엮음 | 보리&lt;BR&gt;
&lt;BR&gt;
  시중에 나와 있는 어린이용 사전은, 거두절미하고, 아이들에게 사서 읽히기가 겁날 정도로 조잡한 것이 많다. &lt;보리국어사전&gt;을 반기는 첫 번째 이유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말한다. &lt;BR&gt;
  “믿을 만한 사전 없이 잡동사니 같은 사전만 살아남은 형편이었다. 이런 와중에 &lt;보리 국어사전&gt;은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까지도 쉽게 즐길 만한 사전으로 우리 역사상 최초로 탄생했다.”&lt;BR&gt;
  사전이 단순히 용어 해설집이 아니라 진실한 문화 교육의 가치를 갖고 있음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이 사전을 펼쳐보면 된다. &lt;보리국어사전&gt;을 반기는 두 번째 이유다. 동화작가 황선미는 말한다. &lt;BR&gt;
  “이 사전을 받자마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내가 어렸을 때 이런 사전을 만났다면 나의 언어가 더욱 풍요로워지지 않았을까. 우리 시대의 어린이를 위해 오랫동안 이 작업을 하신 어른들께 경의를 표한다. 사전은 모든 이야기의 창고이며 미래를 지혜롭게 여는 열쇠이다. 부디 많은 어린이들이 사전을 가까이하기 바란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4285439&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세상 만물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57177613.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세계만물 그림사전 | 궁리출판사편집부 엮음 | 궁리출판사&lt;BR&gt;
&lt;BR&gt;
  천문, 지구, 식물, 동물, 인간, 음식, 주택, 의복, 예술, 건축, 기계, 스포츠, 게임...... 온세상이 한 권에 다 담겨 있다. 17개의 대주제 아래에 94개의 소주제. 다시 이 소주제는 세목화된 이미지로 펼쳐진다. 스파게티, 백화점, 사무용품, 오토바이...... 이 책에서 빠진 사물을 언뜻 생각해내기가 어려울 정도다. 명확한 용어와 개념, 그 이미지를 얻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은 물론이고 아무 쪽이나 펼쳐서 무한한 호기심과 상상력을 채우는 비실용의 목적도 충분히 채워지는 사전이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200944&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823056&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3월</category>
			<author>jys2003 (정윤수)</author>
			<pubDate>Sat, 28 Mar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3월 28일] 볼 수 없어서, 아니 보지 않기 위해 떠난다 - 동구 음악가들</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264519</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내가 주로 쓰는 이메일 아이디가 ‘prague'인데, 이빨 사이에 낀 플라그라고 잘 못 읽어 놓고는 이 자본주의 대중문화 한복판에 단단히 박혀 있는 악성 바이러스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게 아니냐고 꿈 보다 해몽을 해주는 분이 더러 있으나, 이는 체코 수도 프라하의 표기다. 이 표기에 대하여 나는 그동안 ’praha'가 영어식 표기이고 ‘prague'가 현지 표기인 줄 알고 있었는데, 아래 댓글에 보듯이, 어느 독자 분의 지적을 살펴 보니 그 반대이다. 'prague'가 영어 표기인데, 꽤 오랫동안 거꾸로 알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의 배낭 여행 붐이나 드라마 &amp;lt;프라하의 연인들&amp;gt;이 방영되기 전에, 오래 전에 선점한 아이디다. &lt;/p&gt;
&lt;p&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24816728.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06&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의 야경&lt;/p&gt;&lt;/div&gt;
그 많은 시간 동안 이 아이디를 쓰면서 프라하에 가봤으면 했으나 여태 가본 일이 없다. 독일 월드컵 때, 드레스덴에서 1시간이면 가볼 수 있었으나 다음 경기 일정 때문에 한나절도 머물지 못할 듯하여 포기하였다. 주마간산 한나절 때문에 이 아이디를 십년 가까이 쓴 게 아니기 때문이다. &lt;BR&gt;
&lt;BR&gt;
그런데 며칠 전에, 1년 동안 동구라파에 교환 교수로 나갔던 분과 얘기를 나누었는데 프라하도 프라하지만 만약 기회가 된다면 헝가리나 크로아티아를 꼭 가보라고 했다. 만약 프라하에 대하여 각인된 이미지가 있다면 그것은 프라하 보다 부다페스트나 두브로브니크에서 더 강렬하게 겪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03166237.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22&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크로아티아의 아름다운 도시 두브로브니크&lt;/p&gt;&lt;/div&gt;
또 한 사람, 한 달 전에 만난 일이 있다. 오래 전의 인연으로 지금은 큰 기업의 홈쇼핑 프로듀서로 일하는 후배인데, 여름이 오기 전에 사직을 해버리고 전문 번역가로 새 인생을 살겠다고 했다. 출판계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나로서는 한사코 말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번역이라니! &lt;BR&gt;
&lt;BR&gt;
극소수 전문가를 빼놓고는, 번역만으로 생계 유지도 어렵고 일에 대한 만족감도 시원치 않은데, 제발 제발, 큰 회사 다니면서 누군가가 잘 번역한 책을 번역자의 심정으로 열심히 밑줄 치며 읽는 것만큼 행복한 것도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직 준비를 착착 하고 있는 모양인 듯, 3월 초에 전화를 해서는, 올 봄에 동구라파로 나간다고 했다. 체코, 헝가리, 폴란드, 크로아티아...... 나는 앞뒤 맥락 없이, 그 여정이 일단 부러웠다. &lt;BR&gt;
&lt;BR&gt;
1년 동안 연재해 온 이 블로그도 이제 나흘 남았다. 그러니까 바둑판처럼 361 회의 원고를 썼고, 오늘을 포함하여 이제 4회만 남았다. 그래서 오늘 3월 28일은 1868년에 소설가 막심 고리키가 태어났고 1894년에 개화파 김옥균이 피살 당하였으며 1941년에는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가 물 속으로 걸어들어갔고 1943년에는 작곡가 라흐마니노프 사망한 날이지만, 언제 또 동구라파를 써볼 수 있을까 싶어 잠시 갓길로 빠지기로 했다. 아참, 오늘은 지난 1985에 화가 마르크 샤갈이 사망한 날이기도 하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97548164.jpg&quot; width=&quot;200&quot; height=&quot;15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헝가리 작곡가 쿠르탁&lt;/p&gt;&lt;/div&gt;그런 많은 사람들 대신 오늘 3월 28일에는 현존하는 동구권의 진지하고 엄숙한 음악가 세 사람을 기억하고 싶다. 먼저 헝가리 작곡가 죄외르지 쿠르탁이 있다. 1926년에 태어났는데 당시 그가 태어난 곳은 루마니아의 루고스 지방으로 현재는 헝가리 령에 속한다. 쿠르탁은 안톤 베베른이나 벨라 바르톡의 영향 아래에서 작곡을 배웠다.
&lt;BR&gt;
1945년 부다페스트에 있는 리스트 음악원을 다니면서 피아노, 실내악, 작곡 등을 공부했는데 이 시기의 헝가리와 동구 일대에는 베베른과 바르톡의 그림자가 짙었다. 또한 쿠르탁은 파리로 건너가서 올리비에 메시앙과 다리우스 미요로부터 작곡의 더 깊은 측면을 들여다보았다. &lt;BR&gt;
&lt;BR&gt;
쿠르탁의 음악은, 20세기 중엽의 작곡가들이 오선지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던 것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그 거리를 무한하게 확장하기 보다는 치밀한 계산으로 견고한 형식을 구축해왔다. 쿠르탁의 곡은 음악이나 미술 같은 예술의 실감 보다는 수학이나 기하학 같은 구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장식이나 수식을 제거한, 앙상한 뼈처럼 남은 세계인데 그러나 양말이나 옷을 입지 않은 우리의 신체처럼 그 가느다란 불연속의 선들이 질서의 모든 것을 지탱하고 있는 듯이, 팽팽하다. 자코메티와 베케트가 그의 음악 속에 들어 있는 듯하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86613897.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58&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에스토니아의 아름다운 도시 탈린&lt;/p&gt;&lt;/div&gt;
다음으로 에스토니아의 아보 패르트가 있다. 에스토니아는 동구의 많은 나라들처럼 스탈린 치하의 예속 지방이자 하위 문화로 전락하였다. 1944년 독일이 러시아와의 싸움에서 패퇴할 때 많은 예술가들이 에스토니아를 떠났고 1950년대에는 서구주의, 국수주의, 형식주의 등의 죄명으로 투옥과 유배와 추방의 시련을 당했다. &lt;BR&gt;
&lt;BR&gt;
1990년에는 종이 부족으로 국가 행정과 일상에 필요한 책만 출판하는 문화 불모까지 겪었다. 그럼에도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와 동구 일대의 자치 물결에 의하여 가난한 대지 에스토니아에도 봄의 전령이 찾아왔고 그 한복판에서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가 활동을 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14635766.jpg&quot; width=&quot;250&quot; height=&quot;176&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에스토니아의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lt;/p&gt;&lt;/div&gt;아보 패르트는 1935년 9월 11일 에스토니아에서 태어났다. 7살에 음악을 시작해 십대 중반에 전문적인 작곡을 시작했으나 에스토니아가 소비에트 연방에 속해 있었고 당시 소련의 대외정책 때문에 패르트의 음악은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패르트의 초기 작품은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에프, 바르톡과 같은 신고전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여기에 쇤베르크 기법이 추가되었다. 
&lt;BR&gt;
&lt;BR&gt;
하지만 이러한 아방가르드 음악 기법과 소련의 예술 정책이 불협화음을 빚고 그 파열음 속에서 창작을 하는 것에 염증을 느끼게 되어 패르트는 바로크 이전의 그레고리오 성가와 르네상스 시대의 음악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패르트의 음악은 단순한 변화 발전이 아니라 아예 이전의 음악 세계와는 전혀 다른, 중세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 복잡한 화성보다는 3화음 체계 또는 극단적으로 하나의 음만으로 곡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를 패르트는 &quot;틴티나불라’(tintinnabular, 종의 울림)&quot;이라고 표현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23437972.jpg&quot; width=&quot;180&quot; height=&quot;158&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패르트 작품 &amp;lt;동양과 서양&amp;gt;&lt;/p&gt;&lt;/div&gt;지극히 평온한, 그러면서도 언제 끝날 지 모르는 화성에 의하여 기이한 불안감마저 조성하는 아르보 패르트의 걸작으로는 &amp;lt;동양과 서양&amp;gt;(Orient &amp;amp; Occident)이 있다.
&lt;BR&gt;
&lt;BR&gt;
성서의 시편을 바탕으로 작곡한 종교적 신성함으로 가득한 작품으로, 이슬람의 정서를 반영한 ‘동서양’, 시편 42편에 극동 아시아의 전통적인 감각을 더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가 대표작이다. &lt;BR&gt;
&lt;BR&gt;
아래 영상은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타불라 라사’(Tabula Rasa)를 미구엘 로블레스가 무대 위의 춤으로 만든 것이다.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25&quot; height=&quot;344&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www.youtube.com/v/6OwdlKiB_ro&amp;amp;hl=ko&amp;amp;fs=1&quot;&gt;&lt;/embed&gt;&lt;BR&gt;
&lt;BR&gt;
&amp;lt;리타니&amp;gt;(Litany)도 패르트의 음악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이다. 동방교회 예배 기도서의 기초가 되는 성 요한 크리소스텀이 하루 24시간 동안 행했던 기도문에 의거하여 작곡한 음반이다. 구원을 향한 기도 또는 기도하는 사람을 뜻하는 이 작품은 독일의 명 지휘자 헬무트 릴링에게 헌정되었으며 패르트 음악 세계의 핵심어인 '틴타나불리즘'의 평온한 기운을 따르면서도 서서히 격정으로 향하는, 물론 그 격정을 종내는 그윽하게 다스리는 작품이다. &lt;BR&gt;
&lt;BR&gt;
이밖에도 ‘거울 속의 거울’(Spiegel im Spiegel)이 수록된 &amp;lt;알리나&amp;gt;(Alina)도 기억할 만한데, 구스 반 산트 감독은 2002년 작 영화 &amp;lt;제리&amp;gt;에서 이 음악을 아름답게 활용하였다. 이 영화에서, 아르보 패르트의 음악은 5분이 넘도록 캐세이 애플렉과 맷 데이먼의 여정을 함께 한다. 아래 영상이 그것이다.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25&quot; height=&quot;344&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www.youtube.com/v/-_JiB4N-0Ro&amp;amp;hl=ko&amp;amp;fs=1&quot;&gt;&lt;/embed&gt;&lt;BR&gt;
&lt;BR&gt;
그리고 기야 칸첼리가 있다. 그루지야 사람이다. 1936년에 병합되어 1991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에 속했던 이 발트 해 연안의 그루지야는 최근까지도 불안한 화약고가 되고 있다. 옛 영화를 되찾고자 하는 러시아와 이를 경계하는 미국이라는 기본 대결 구도 위에 서서히 친서방 정책을 표방하는 몇몇 나라를 블라디미르 푸틴이 ‘손을 봐주는’ 상황이 거듭 되었고 그 한복판에 그루지야가 있었던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97487748.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7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그루지야의 수도 트빌리시 전경&lt;/p&gt;&lt;/div&gt;
물론 발트해 연안의 역사를 상세하게 살피지 않은 상태에서 어느 한쪽을 심정적으로 편들 수는 없을 것이다. 제국의 영화를 꿈꾸는 푸틴의 강공 드라이브를 비판할 수는 있지만 친미 성향의 미하일 사카슈빌리 대통령이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남오세티야 자치주를 대대적으로 공습한 것도 빌미가 되었다. &lt;BR&gt;
&lt;BR&gt;
여기에는 코소보 사태의 처리 방식, 미국과 폴란드의 MD 기지 협상, 러시아의 발틱함대 핵탄두 무장 계획, 친서방 노선을 천명한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내의 세바스토폴 항구 러시아 해군 임대 연장, 산유국 카자흐스탄에서 시작하는 BTC 송유관 등 동구라파 전역의 문제가 그루지야 사태로 촉발되었던 셈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07191319.jpg&quot; width=&quot;160&quot; height=&quot;209&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작곡가 기야 칸첼리&lt;/p&gt;&lt;/div&gt;아무튼 그곳에 작곡가 기야 칸첼리가 있다. 그의 대표작 &amp;lt;거대한 신비&amp;gt;에 수록된 ‘시미’(simi)는 그의 개성을 확연히 드러낸 작품이다. ‘시미’(Simi)는 줄, 즉 현(鉉)을 뜻하는 그루지야 단어. 이 제목 안에는 첼로 협주곡 형태의 작품의 외형과 현악 중심의 자신의 음악세계, 더 나아가 인생의 끈이라는 철학적인 내용까지도 함축되어 있다.
&lt;BR&gt;
&lt;BR&gt;
로스트로포비치에게 바쳐진 이 작품은 독주자와 작곡가 사이의 음악적인 교감이 일구어낸 소중한 결과물이다. 독주자에 대한 작곡가의 존경심과 작곡가에 대한 독주자의 인간적인 신뢰가 결합하고 오랜 세월 작곡가의 음악적 동반자였던 그루지야 출신 지휘자 카키체가 참여해 작곡가가 의도하던 이상적인 연주에 가장 근접한 성과를 낳았다. &lt;BR&gt;
&lt;BR&gt;
이 곡을 포함하여 칸첼리는 자신의 많은 작품 속에 그루지야의 성직자의 성탄 메시지, 이 나라 전통의 구리안 민요, 그루지야 정교회의 성가 등을 활용한다. 이런 종교적 장치들은, 그의 또다른 대표작 &amp;lt;상복을 입은 땅&amp;gt;이나 &amp;lt;보지 않기 위해 떠났다&amp;gt; 같은 작품에서 잘 나타나듯이 단순한 종교적 메시지가 아니라 거의 모든 희망이 사라진 대지 위에서 삶과 죽음, 죄의식과 구원이라는 종교적 주제를 끊임없이 되묻고 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57873016.jpg&quot; width=&quot;300&quot; height=&quot;30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기야 칸첼리의 대표작 &amp;lt;보지 않기 위해 떠난다&amp;gt; 표지&lt;/p&gt;&lt;/div&gt;
쿠르탁, 패르트 그리고 칸첼리. 우리의 음악 소비 문화에서는 조금 낯선 대지의 작곡가들이고 서구의 조형성과는 전혀 다른 속도와 질감을 들려주기 때문에 대번에 귀에 와서 착착 감기는 그런 경우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이 맹렬한 속도의 시대에 지극히 평온한 느림을(패르트), 인간적 가치가 보잘 것 없이 사멸해 가는 시대에 존재의 진정한 의미를(쿠르탁), 그리고 무엇보다 구원을 말하기조차 어려운 시대에 참된 구원을 찾아가는 진지한 성찰을(칸첼리)를 엿보고자 한다면 이 세 사람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lt;/font&gt;&lt;/p&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구원의 종소리 &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22282403.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아르보스 | 아르보 패르트 작곡, 데니스 러셀 데이비스 지휘 | ECM&lt;BR&gt;
&lt;BR&gt;
  마치 고딕 성당의 오르간처럼, 아니면 지리산 화엄사나 청도 운문사의 저녁 예불처럼, 종소리가 멎은 후에도 여음이 울려나온다. 패르트의 ‘틴티나불리즘’의 구현한 대표작 ‘아르보스’가 그렇다. &lt;솔라리스&gt;, &lt;희생&gt;, &lt;노스탤지아&gt; 같은 영화를 만든 타르코프스키를 추모하는 음반이기도 한데, 감독이 그러했던 것처럼, 패르트 역시 구원의 소리를 빚어내려고 하였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2283195926&amp;amp;ttbkey=ttbprague0909002&amp;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상처 입은 대지의 노래&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14347755.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상복 입은 땅 | 기야 칸첼리 작곡, 데니스 러셀 데이비스 지휘 | ECM&lt;BR&gt;
&lt;BR&gt;
  두 곡이 수록되어 있다. 앞에 수록된 ‘아 라 두두키’는 칸첼리 음악의 대표적인 특징을 함축하여 보여준다. 죽음과 구원에 대한 강렬한 테마가 울부짖는 듯한 관악기로 표현된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lt;상복 입은 땅&gt;은 신이 없는 대지의 공허함으로 가득차 있는데 그의 다른 작품 제목처럼 ‘보지 않기 위해 떠나는’ 막막한 심정을 느낄 수가 있다. 다른 번역으로는 ‘볼 수 없었기에 떠난다’가 되는데, ‘보지 않기 위해’와 ‘볼 수 없었기에’는 확연히 다른 뜻이어서 한번 더 확인해 보기로 한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45785027&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앙상하게 뼈만 남은 &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91926189.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사인, 게임, 그리고 메시지 | 지외르지 쿠르탁 작곡 | ECM&lt;BR&gt;
&lt;BR&gt;
  컴컴한 지하실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사람의 목소리가 간헐적이며 신경질적으로 들려온다. 선율이 화사한 오선지가 아니라 단어들이 흩뿌려져 있는 메모지를 읽는 듯하다. 아닌 게 아니라 횔덜린과 베케트의 시를 바탕으로 쿠르탁이 작곡했다. 서로 협주를 하기 보다는 대결을 벌이는 듯한 현악 삼중주 위에 바리톤이 수시로 들락거리고 이따금 타악기가 중심을 잡아나간다. 쿠르탁은 프란츠 카프카의 일기와 편지로 40개의 연작품을 짓기도 하였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46183322&amp;amp;ttbkey=ttbprague0909002&amp;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818850&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3월</category>
			<author>jys2003 (정윤수)</author>
			<pubDate>Fri, 27 Mar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3월 27일] X-선, 인간의 신체를 들여다 보다 - 뢴트겐</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264037</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의학드라마 &amp;lt;뉴하트&amp;gt;의 한 장면. 지금은 고인이 된 고 박광정 씨가 열연했던 장면인데, 가족들을 미국으로 떠나보내면서 온 가족이 다함께 X-선 촬영을 한 적 있다. 그 실제 주인공은 영동세브란스 영상의학과 정태섭 교수다. 지난 1995년, 정 교수는 의학 연구와 활동으로 바쁘게 지내다가 가족들과 함께 소중한 기억을 남기기 위하여 영상의학이라는 ‘전공’을 살려서 ‘가족 X-선 기념 사진’을 찍었다. 온 가족이 해골 사진을 찍은 것이다. &lt;br /&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19891940.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209&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정태섭 교수의 X-선 작품 '청포도'(왼쪽)와 '입 속의 검은 잎'&lt;/p&gt;&lt;/div&gt;
그때 이후 정 교수는 컴퓨터단층촬영(CT), 자기공명영상 장치(MRI), X선 등 영상의료라는 본업 와중에도 이 ‘X-선 작품’의 가능성을 더 많이 탐색하게 되었다. 한국 시사의 주요 작품을 소재로 하여 X-선 이미지 작품을 하였고 그것으로 전시회까지 가진 것이다. 한가로운 여가 취미가 아니라 중진 화가들이 대거 참여하는 전시회의 한 작가로 참여했던 것이다. X-선을 쬔 골프공이 더 멀리 날아가고 역시 같은 조치를 취한 와인이 더 깊은 맛을 낸다는 의견도 정태섭 교수의 발상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13061681.jpg&quot; width=&quot;300&quot; height=&quot;238&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스티븐 마이어스의 X-선 작품 '바람'&lt;/p&gt;&lt;/div&gt;다 빈치나 베르메르가 ‘카메라 옵스큐라’ 장치를 이용하여 정교하게 계산된 기하학의 그림들을 그림들을 그렸던 것처럼 예술은 끊임없이 과학의 도움을 받아왔다. 앞에 소개한 X-선 기법 또한 헝가리 예술가 라즐로 모홀리 나기의 서늘한 ‘포토그램’과 그 원리를 공유한다. 생명 없는 사물의 건조함이 오히려 모든 가식이 사라진 상태의 존재를 보여준다.
&lt;BR&gt;
&lt;BR&gt;
추리 소설가인 잭 리치는 ‘누가 귀부인을 가졌는가’라는 단편에서 X-선 사진을 절묘하게 사용하게 있다. 아래 인용문에서 ‘뢴트겐 사진’은 X-선 사진의 발명가인 뢴트겐의 이름을 앞에 붙인 것이다. 생전에 뢴트겐은 자신의 이름이 앞에 붙는 것을 거절했다고 한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무료해진 나는 방안을 어슬렁거리며 이것저것을 손에 들고 바라보다가 아무 생각 없이 파일링 캐비닛을 열어 보았다. 그러다 '귀부인'의 뢴트겐 사진을 발견한 것이다. 엄중하게 보관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놀랐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귀부인' 자체는 몇 백만 달러나 하겠지만, 뢴트겐 사진은 그다지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이것이 증거품으로 법정에 제출되는 것도 이 년이나 삼 년에 한번 있을까말까 할 정도인 것이다. 물론 일부러 훔치려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때 내 머리에 모사 작가인 바니스의 탁월한 솜씨와 우리 두 사람이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나는 순식간에 이번 계획을 세웠다. 아르노가 돌아왔을 때 나는 뢴트겐 사진을 코트 속에 숨긴 채 시치미를 떼고 벽에 걸린 루벤스의 스케치를 감상하고 있었다.&lt;/font&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58371584.jpg&quot; width=&quot;260&quot; height=&quot;33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주디스 맥밀란의 X-선 작품 '백합과 나방'&lt;/p&gt;&lt;/div&gt;미술의 경계가 확산되고 그 도구의 형태나 이름이나 원래의 쓰임새에 대하여 질문하는 것이 무의미해진 20세기 후반의 미술계 흐름에서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X-선, 복사기, 마스터 인쇄기 같은 도구로 ‘작업’을 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중요한 것은 ‘도구’가 아니라(유화 물감이든 아크릴 물감이든 비디오든 X-선이든) 그것으로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하는 점이기 때문이다. 
&lt;BR&gt;
&lt;BR&gt;
국내의 전업 미술가로는 한기창이 X-선 작품을 많이 했다. 추계예대에서 동양화를 익힌 한기창은 1997년에 대한민국 청년미술제로 이름을 알리면서 많은 작업을 해왔는데, 그만 1993년에 유학을 앞두고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을 다녀오던 중에 큰 교통사고를 겪었다. 온 몸에 철심을 박은 채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아야 했고 1년이 넘게 입원을 해야 했다. 그 좡에 한기창은 병원에서 자주 볼 수 있는 X-선에 주목하게 되었다. 동양화의 깊은 농담이 X-선과 닮아 있었던 것이다.&lt;BR&gt;
&lt;BR&gt;
그의 연작 &amp;lt;뢴트겐의 정원&amp;gt;은 이 과정에 의하여 얻어진 성취다. 한기창은 X-사진과 그 필름을 통하여 사멸해 가는 신체 이미지를 채집하거나 복원하였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한 방울의 혈흔도 맥박도 동작도 없어 보이는 건조한 이미지이지만 그 이미지의 안팎으로 다른 빛들이 넘나들면서 치유의 행위가 미세하게 느껴진다. 부러지고 마모된 건조한 이미지들이 라이트박스 장치에 의하여 ‘정원’으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60072031.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50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한기창의 X-선 작품 '뢴트겐의 정원' 연작 (사진 네오룩닷컴)&lt;/p&gt;&lt;/div&gt;
여러 차례 이름이 등장했듯이 오늘 3월 27일은 X-선을 발견한 과학자 빌헬름 콘라드 뢴트겐이 1845에 독일 레네프에서 태어난 날이다. 어머니가 네덜란드 출신이라서 일찍이 네덜란드에 가서 공부를 하였는데 그곳에서 학업을 다 마치지는 못하고 1865년에 취리히 연방공과대학(ETH) 기계공학과로 입학하였다. &lt;BR&gt;
&lt;BR&gt;
1869년, 취리히연방공과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뢴트겐은 뷔르츠부르크 대학의 물리학자인 아우구스트 쿤트 교수 밑에서 연구 작업을 시작하엿다. 그는 1874년에 교수자격 과정을 마치고 이듬해 뷔템베르크의 작은 대학에서 가르치다가 슈트라스부르크, 기센 등을 거쳐 뷔르츠부르크 대학에 자리를 잡았다.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12754634.jpg&quot; width=&quot;160&quot; height=&quot;20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빌헬름 뢴트겐&lt;/p&gt;&lt;/div&gt;1894년 11월 8일, 뢴트겐은 몇 개월에 걸친 다른 실험의 와중에 놀라운 현상을 보게 된다. 그때 일을 뢴트겐은 당시 신문 인터뷰에서 다음처럼 회고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quot;그날 나는 검은 종이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는 히토르프-크룩스 관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백금시안화바륨 종이 한 묶음이 놓여 있었다. 관에 전류를 흘려보내고 나자, 종이 위에는 이상한 검은 선이 비스듬하게 생겼다. 당시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빛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그러나 전기 아크등에서 나오는 빛조차도 이렇게 뒤덮인 종이는 통과할 수 없기 때문에 관에서 빛이 나온다는 것인 완전히 불가능했다.&quot;&lt;/font&gt; &lt;BR&gt;
&lt;BR&gt;
히토르프-크룩스 관에서 륌코르프 고전압 발생장치에 의해 음극선이 유리관의 금속 벽에 빠른 속도로 충돌하여 X-선이 검은 종이를 뚫고 나와 백금시안화바륨을 감광시켰던 것이다. 몇 차례 더 이 실험을 한 뢴트겐은 12월 22일에 아내의 손을 찍어보았다. 최초의 X-선 사진이 된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05673364.jpg&quot; width=&quot;200&quot; height=&quot;29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뢴트겐이 찍은 아내의 X-선 사진&lt;/p&gt;&lt;/div&gt;이듬 해, 뢴트겐의 실험과 논문은 금세 독일의 과학자와 의학자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해부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신체의 내부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가능해진 것이다. 황제 빌헬름 2세의 축전까지 받을 정도로 뢴트겐의 X-선은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lt;BR&gt;
&lt;BR&gt;
놀라운 것은 뢴트겐이 이 ‘놀라운’ 실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을 크게 앞세우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과학 발명’의 시대에 물리, 화학, 생물 등에서 그 선구적인 학자의 이름을 붙이는 사례가 많은데(전기의 볼트처럼) 뢴트겐을 그것을 사양했다. 그저 X-선이면 충분했다. 특허권도 거부했다. &lt;BR&gt;
&lt;BR&gt;
1901년, 뢴트겐은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되는데 막대한 상금 전부를 대학에 기부했다. 그는 1923년 2월 10일, 악성 종양으로 사망했다. 일부에서는 그가 자신의 실험에 의하여 병환에 시달린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데, 그의 방사선 연구 기간이 짧았고 보호장치를 주의 깊게 사용했기 때문에 확실한 근거는 되지 못한다. &lt;BR&gt;
&lt;BR&gt;
오늘날 어떤 목적이든 간에 인체를 들여다 보는 과학 기술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다. X-선을 포함하여 컴퓨터단층촬영(CT), 자기공명영상 장치(MRI), 내시경 등이 대표적인데, 이러한 기술이 찬반 양론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공항 검색대에서는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54026412.jpg&quot; width=&quot;190&quot; height=&quot;25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밀리미터파 검색기 모습&lt;/p&gt;&lt;/div&gt;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시 스카이하버 국제공항에서는 검색기를 여행자의 몸에 대고 더듬어는 팻 다운 검색 대신 X-선 검색기를 활용하고 있다. '밀리미터파 화상기'(millimeter wave imaging) 또는 ‘전신 이미지 검색기(Whole Body Imaging)’로 불리는 이 검색기는 피닉스 뿐만 아니라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의 JFK 국제공항에도 설치되었다. 미국의 주요 법원과 영국, 스페인, 일본, 멕시코, 네덜란드, 태국 등의 일부 공항에도 도입되었다고 한다. 
&lt;BR&gt;
&lt;BR&gt;
일반적인 검색을 마친 후 ‘의심’이 가는 여행자에게 따로 요청하여 높이 2.7m, 폭 1.8m의 부스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데, 그 안에서 여행자는 두 손을 든 채 2~3초 쯤 있으면 검색이 완료된다. 부스 안에 설치된 두 개의 안테나가 RF 에너지 빔을 투사하며 온몸을 스캐닝하게 되는데, 이때 컴퓨터는 RF 에너지 파형이 신체나 물체에 맞고 튕겨 나오는 입체 정보를 3차원 이미지로 추출해 내는 것이다. 이 검색기는 대개의 공항에 설치되어 있는 물품 검사대 기술로는 탐지할 수 없는 액체 폭탄이나 플라스틱, 세라믹 등으로 된 비금속성 물체도 들여다 볼 수 있다. &lt;BR&gt;
&lt;BR&gt;
당연히 반대 여론이 뜨거웠다. 이 X-선 검색기는 너무나 정밀하고 정교해서 여행자의 몸을 그대로 비추기 때문이다. 공항 보안 관계자와 개발자들이 ‘스캐닝한 정보를 즉시 삭제하기 때문에 별도 저장하거나 인쇄하는 일이 차단된다’고 밝혔지만, 그 후속 절차의 확실성 뿐만 아니라 전신 스캐닝의 과정 그리고 무엇보다 온몸의 윤곽이 3차원의 영상으로 드러나는 것 자체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21411087.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282&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밀리미터파 검색기에 의하여 촬영된 인간 신체 이미지&lt;/p&gt;&lt;/div&gt;
물론 보안 관계자들은 여행자의 얼굴 이미지를 블러링(blurring, 뭉개기) 처리 한다고 밝혔지만, 문제는 그 이미지의 선명도가 아니라, 기계장치를 거쳐 결국 누군가에게 자신의 온몸이 고스란히 포착된다는 점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lt;/font&gt;&lt;/p&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인간의 몸, 그 미시 세계&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13473311.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The Body Book 바디북 | 데이비드 보더니스 지음 | 생각의나무&lt;BR&gt;
&lt;BR&gt;
  몸을 다룬 책이 많은데, 대부분 단순한 정보 나열의 책들이다. 이 책은 다르다. 몸의 ‘인문학’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인류 문화의 많은 지식들이 몸을 설명하는데 활용되고 있다. 감정, 통증, 식사, 스트레스, 재채기, 성, 호르몬 등 우리의 몸이면서도 사실은 그 동작과 반응을 느끼지도 못할 ‘미시 세계’를 이 책은 백과전서파 식으로 보여준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4989355&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인간 행동의 비밀&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34674940.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피플 워칭 | 데스몬드 모리스 지음 | 김동광 옮김 | 까치글방&lt;BR&gt;
&lt;BR&gt;
  만약 데스몬드 모리스 같은 학자가 국내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면 당장 달려가서 청강을 하고 싶다. 만약 그가 이 책의 문장과 예화와 이론과 실험처럼 강의를 한다면 말이다. 그만큼 흥미진진한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왜 카페에서 남자들이 소매를 걷고 있는지, 그것을 본 여자들이 왜 긴 머리카락을 목 뒤로 넘기는지 알게 된다. 그 정도로 그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원숭이나 개미핥기나 코뿔소에 비하여 나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엄연한 사실도 알게 된다. 1994년에 &lt;맨워칭&gt;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것으로 전면 개정한 책이다. 타고난 동작과 훈련된 동작을 비롯하여 인간의 수많은 행위와 신호와 동작의 비밀을 밝혀준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13723&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신체에 대한 시선과 권력&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95401179.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감시와 처벌 | 미셸 푸코 지음 | 오생근 옮김 | 나남출판&lt;BR&gt;
&lt;BR&gt;
  푸코의, 그 많은 어려운 책들 중에서, 이 책은 비교적 쉬운 편에 속하고 더욱이 그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드러나 있는 책이라서, 필독서라고 부를 만하다. 그는 감옥, 학교, 군대, 공장, 학교 같은 기구의 ‘감시와 처벌’이라는 측면을 살핀다. 물론 인간의 신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병원이 빠질 수 없다. 그것을 통하여 ‘근대’를 구조를 해부한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0032486&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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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3월</category>
			<author>jys2003 (정윤수)</author>
			<pubDate>Thu, 26 Mar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3월 26일] 책에 미친 사람들의 책 이야기 - 조지프 캠벨</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263881</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33997804.jpg&quot; width=&quot;240&quot; height=&quot;372&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책에 '미친' 이야기를 '광인'들이 쓰고 옮겼다&lt;/p&gt;&lt;/div&gt;'책 동네'에 소문난 고수들이 많다. 책벌레들이다. 전작주의로 유명한 조희봉, 탐서주의자로 널리 알려진 표정훈, 헌책방 순례자 최종규, 꼼꼼한 독서가이자 왕성한 번역가인 박중서, 출판평론가이자 인문학 탐색자인 최성일 같은 사람들이 있다. 만약 어느 대학의 고문학 전공 교수 연구실에 책이 1만 권 쯤 있다고 치면, 그것은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풍경이다. 노련한 중장비 기술자가 굴착기 위에 올라앉듯이 공부하는 게 직업인 사람에게 책이 많은 것은 그저 당연한 풍경이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그런데 앞서 언급한 사람들은 제도와 분과의 체계로 볼 때는 많은 책에 둘러싸여 있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들은 수천 권 이상의 애장가다. 표정훈와 박중서에 소설가 김연수를 더하면 '1만권 클럽'이 되는데, 이 1만 권 이상의 독서가들은 &amp;lt;젠틀 매드니스&amp;gt;를 함께 번역하기도 했다. &lt;BR&gt;
&lt;BR&gt;
이들 중에서 대중적인 지면에서 글을 많이 쓰는 사람은 표정훈이다. 그 스펙트럼이 &amp;lt;한겨레&amp;gt;에서 &amp;lt;조선일보&amp;gt;를 망라한다. 나는 이것이 '무색무취'가 아니라 그 많은 미디어가 표정훈이라는 보물을 앞다퉈 사랑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삼성출판박물관을 전시 기획 및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한국관 기획에도 참여한 바 있다. &lt;BR&gt;
&lt;BR&gt;
이런 사람들은 도서관의 십진분류표나 대학의 분과 학문과 전혀 무관한, 자기만의 라이브러리 체계와 범주와 방식으로 책을 구입하고 독파해버린다. 이들에게는 초급인 중급 같은 단계도 없고 근대사 다음에 현대사 책 읽는 식의 기계적인 과정도 없다. 그렇다고 닥치는대로 읽는다? 그렇게 넘겨짚는다면 큰 실례가 될 것이다. 구본준 기자의 책 &amp;lt;한국의 글쟁이들&amp;gt;에서 표정훈은 말한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quot;책을 읽으면 참고문헌에 있는 책이나 관련있는 책, 거론된 책을 찾아서 읽거나 체크를 해놔요. 저자가 마음에 들면 그 사람 다른 책을 조사해서 알아놓아요. ‘이 짓’을 한 10년 넘게 했어요. 그렇게 하니까 책의 그물이 지어지는 거죠. 외국에 가서 책을 보다가도 참고도서 목록이 충실하면 정작 그 책 내용은 별로라도 사는 경우도 있어요. 책이 전경이라면 그 전경을 둘러싼 배경을 조사하고 알아가는 것, 그게 즐겁기도 하고 그렇게 하면 더 잘 볼 수 있으니까요.”&lt;/font&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83552660.jpg&quot; width=&quot;210&quot; height=&quot;187&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신화학자 조지프 캠벨&lt;/p&gt;&lt;/div&gt;한 권의 책이 또 다른 책을 권하고 그 책 속의 문장이 또다른 문장을 가리키고, 그리하여 이 세상의 모든 책과 문장과 사람들 사이로 오랫동안 걷고 또 걷게 되는 길을, 여느 대학의 전공 교수는 바쁘거나 전공과 무관한 것이라서 걸어가 볼 수 없을 것이다. 전작주의요 탐서주의인 애장 독서가들만이 그러한 길을 걷게 된다. 
&lt;BR&gt;
&lt;BR&gt;
만약 이들이 '전작주의자'나 '탐서주의자'가 아니라 단순히 5천 권, 1만 권, 2만 권 하는 식의 '물량주의자'라면 그런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분과 학문의 낡은 체계로는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그 자신만의 지식의 숲을 헤매고 있기 때문에 심지어는 저자 자신도 까맣게 잊어버렸을, 오래 전에 절판된 책까지도 구입하여 읽는 것이다. 어떤 책과 문장에 의하여 오래 전의 책을 찾도록 명령하게 되면 이들은 '신고'를 가리지 않고 '숨어있는 책'을 찾아나서 마침내 '고구마'를 캐내듯이 책의 '뿌리'까지 훑어내는 것이다. 아참, 이 ' ' 속 이름들은 모두 애장독서가들이 자주 찾아가는 헌책방 이름들이다. 이를테면 박중서가 쓴 칼럼 '남이 하지 않는 일에 10년 간 노력하면......'을 보자.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지금은 모두 절판본이 된 석주명의 &amp;lt;나비채집 이십년의 회고록&amp;gt;과 김병철의 &amp;lt;세월 속에 씨를 뿌리며&amp;gt;는 이 두 사람이 연구에 바친 20여 년의 세월이 어떠했는지를......(중략) 아무리 하찮은 일도 1백년 이상 지나면 ‘역사’가 된다. 그렇게 보자면 각각 20년과 반세기에 이르는 특별한 연구 경력을 지닌 전문가 두 사람이 남긴 기록은 비록 잡문의 범주에 든다 하더라도 이미 역사가 되어 가는 와중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절판된 지 오래인 책 두 권을 펼쳐놓고 이토록 구구절절 떠들어 대는 까닭은, 나 역시 최근에 이 두 권을 발굴(?)하여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이며, 과학 및 인문 분야에서의 교양서로는 매우 독특한 것들이라 그냥 파묻히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lt;/font&gt; &lt;BR&gt;
&lt;BR&gt;
이런 사람들이 책을 쓰거나 번역하게 되면 우선 신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애장독서 십수 년의 세월 속에서 오류 투성이의 번역이나 이리저리 짜깁기한 저서들을 너무나 많이 봐왔기 때문에, 적어도 자신의 작업에서는 그와 같은 헛기침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 결과가 다 좋다고는 할 수 없어도, 그 과정이 아름답고 심지어는 결과에 대해서도 진솔하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47479405.jpg&quot; width=&quot;210&quot; height=&quot;15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방송 대담 중인 조지프 캠벨&lt;/p&gt;&lt;/div&gt;최근 발간한 조지프 캠벨의 저서 &amp;lt;신화와 인생&amp;gt;은, 비록 이 책이 조지프 캠벨의 대표작이나 역작은 아니지만, 상당한 흥미와 즐거움을 주는 까닭은 바로 번역자 박중서가 책의 끝에 붙인 해체들이다. 캠벨은 인류가 빚어낸 모든 문화와 지식을 그 탐구 대상으로 삼는 신화학자다. 그가 단순히 고대 신화와 문헌의 해석자에 멈추지 않았다는 점에 각별한 의의가 있다. 그는 이 우주의 기원과 인간 종의 탄생과 고대 신화와 다양한 대륙의 역사를 두루 망라하면서 책을 쓴다. 
&lt;BR&gt;
&lt;BR&gt;
그러니 번역자는 캠벨의 저서에 등장하는 저 기원전에서 오늘날 최첨단 예술의 관련자와 저서와 개념을 샅샅히 살펴야 한다. 박중서 같은 '만 권 클럽'의 회원 정도가 해볼 만한 일인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캠벨의 이름을 국내에 널리 알린 &amp;lt;신화의 힘&amp;gt;도 이런 젊은 애장 독서가들의 선배 격인 이윤기 선생의 번역이다. &amp;lt;신화와 인생&amp;gt;은, 캠벨의 책 중에서도(에설런 연구소의 강의 내용을 발췌한 까닭에) 가장 쉬운 편에 속하는데 그러나 책 끝에 달린 번역자 박중서의 해제를 보면 실로 무궁무진한 지식의 미로가 실핏줄 같이 펼쳐져 있음을 알게 된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29175214.jpg&quot; width=&quot;190&quot; height=&quot;297&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조지프 캠벨의 대담집 &amp;lt;신화의 힘&amp;gt;&lt;/p&gt;&lt;/div&gt;아닌게 아니라 캠벨은 &amp;lt;신화의 힘&amp;gt;에서, 대담 방송을 그대로 엮은 자연스러운 흐름 과정에서, 과연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몇 마디 하고 있는데, 이는 표정훈이나 박중서 같은 사람의 책 읽기와 흡사해 보인다. 캠벨은 말한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lt;BR&gt;
&lt;BR&gt;
마음에 드는 작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lt;BR&gt;
&lt;BR&gt;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다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 됩니다. &lt;BR&gt;
&lt;/font&gt;&lt;BR&gt;
조지프 캠벨은 1904년의 오늘 3월 26일에 미국 뉴욕주 화이트플레인스에서 태어났다. 다트머스대학에서 생물학과 수학을 전공했지만 컬럼비아대학으로 옮겨서 중세 영문학으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았다. 캠벨은 1927년에 컬럼비아대학의 장학금으로 유럽으로 건너가 파리대학과 뮌헨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29년에 귀국하여 학부 과정 때의 영문학 대신 인도 철학과 미술 쪽으로 연구하려 하였으나 대학 측의 반대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못하였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10488581.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6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학제'의 틀을 벗어난 시기에 조지프 캠벨은 동서양의 문명을 자유롭게 연구하였다. &lt;/p&gt;&lt;/div&gt;
그 무렵 대공황이 불어닥쳐 캠벨은 5년 가까이 독서와 개인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가 그에게는 공부의 '황금시대'가 되었다. 이미 미국과 유럽의 명문대학에서 체계적인 공부를 마친 캠벨이라는 저수지에 생물학, 수학, 신화학, 종교학, 영문학 같은 다양한 학문이 그만의 방식대로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발간된 &amp;lt;신화와 인생&amp;gt;에서 캠벨은 회고한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85979343.jpg&quot; width=&quot;220&quot; height=&quot;326&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캠벨의 저서는 국내에도 많이 소개되었다&lt;/p&gt;&lt;/div&gt;&lt;font color=&quot;#0000ff&quot;&gt;&quot;나는 학위 취득을 위한 필수과목을 모두 수강한 상태였고, 이제 그 망할 놈의 논문만 쓰면 땡이었다. 하지만 대학 측에서는 내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공부를 계속하도록 허락해 주지 않았다. 결국 이까짓 것 개나 줘 버리자고 생각했다. (대신) 나는 숲 속으로 들어가 5년 동안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하여 나는 박사학위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자유로웠고, 아무런 책임질 일도 없었다. 그야말로 경이로웠다.&quot; &lt;/font&gt;
&lt;BR&gt;
&lt;BR&gt;
그러니까 조지프 캠벨은 표정훈, 박중서, 김연수, 최종규, 조희봉 같은 사람들의 위대한 선배였던 셈이다. 책에 미쳐서 책 사이를 헤맨, 그리하여 아름다운 책을 쓴 사람들이다. 캠벨은 그 경이로운 시간 끝에 1934년에 명문 여대 새러 로렌스 칼리지의 문학부 교수가 되어 37년 동안 가르쳤다. 1987년 10월 30일, 83세의 나이로 타계 했다. 캠벨과 함께 대담을 나누어 독자로 하여금 &amp;lt;신화의 힘&amp;gt;을 읽게 한 빌 모이어스는 이 책의 서문에 아래와 같이 썼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quot;그가 우리에게 열어준 많은 가르침의 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살았던 삶 자체의 진정성이다. 그는,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이며, 신화야말로 우리를 기쁨과 환상, 심지어는 황홀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믿는 한편, 우리를 그 세계로 불러들이기를 좋아했다.&quot;&lt;/font&gt; &lt;/font&gt;&lt;/p&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역사 저 너머의 시간을 어루만지기&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40228503.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신화의 힘 | 조셉 캠벨 지음 | 이윤기 옮김 | 이끌리오&lt;BR&gt;
&lt;BR&gt;
  이윤기 선생은 캠벨의 초기 대표작 &lt;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gt;을 1985년에 처음 번역을 했다. 아무도 그런 책과 분야에 관심이 없었을 때였다. 1992년에는 이 책 &lt;신화의 힘&gt;을 번역했다. 10년 후인 2002년에는 개정판을 다시 출간하였다. 다른 나라 언어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나로서는 이윤기 선생의 번역에 대해 논평할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런데 들리는 소리로는 몇 권의 책에 대한 '질정'이 있는 것으로 안다. 이윤기 선생은 그것을 모른 체 하지 않고 기회가 닿는대로 개정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점까지 깡그리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책은 캠벨의 사상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이다. 비교적 크기가 큰 문이고 제법 쉽게 열린다. 그러니 일독해보자. 그 다음으로 &lt;신의 가면&gt;을 한 권씩 읽어가는 것이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770430&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당신만의 희열을 따라가라 &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87241851.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신화와 인생 | 조지프 캠벨 지음 | 박중서 옮김 | 갈라파고스&lt;BR&gt;
&lt;BR&gt;
  이 책은 신화학자인 캠벨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에설런 연구소의 수강생들에게 일종의 '인생론'을 훈강하고 있는 책이다. '당신의 희열을 따라가라'는 말이 그 훈담 속에서 나온다. 그런데 여느 유명 인사의 '인생독본' 같은 책에서 머물지 않고 동서 문명의 예술과 신화 사이로 유영한다. 캠벨은 말한다. &quot;신들의 힘은 자연 속에 있는, 그리고 여러분 본성 속에 있는 힘이 의인화된 것이다. 여러분이 그 층위를 발견하게 되면 여러분은 놀이를 하게 된다. 이것이 예술 작품이다.&quot;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809266&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책에 미친 사람들&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49977465.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젠틀 매드니스 | 니콜라스 A. 바스베인스 지음 | 표정훈 외 옮김 | 뜨인돌&lt;BR&gt;
&lt;BR&gt;
  젠틀 매드니스(Gentle Madness), 책에 미친 수집광을 뜻한다. 이 책 속에 그 '미치광이'들이 등장한다. 아내가 죽자 자신의 시 원고들을 같이 묻었다가 7년 후 무덤을 파헤쳐 &lt;시집&gt;이란 책으로 출간한 시인, 다빈치 필사본을 3,080만 달러에 낙찰받은 빌 게이츠, 미국 전역 268개 도서관에서 2만3,600여권의 희귀본을 훔쳐 자신의 이름을 붙인 컬렉션을 만든 책도둑 스티븐 블룸버그 등. 아마도 책에 '미친' 사람들에 대하여 '미치광이'가 쓰고 '미치광이들'이 번역한 듯싶다. 표정훈, 김연수, 박중서 등 세 사람의 공역이다. 책의 후기에 세 사람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우리 책 문화의 씁쓸한 풍경이 엿보인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071486&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804931&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3월</category>
			<author>jys2003 (정윤수)</author>
			<pubDate>Wed, 25 Mar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3월 25일] 보편을 뛰어넘은, 보편을 향한 욕망 - 류현진</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263735</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89221424.jpg&quot; width=&quot;220&quot; height=&quot;244&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제 2회 wbc 대회 로고&lt;/p&gt;&lt;/div&gt;냉전이 데탕트로 흘러가던 1970년대에 미 국무부장관을 6년이나 지낸 헨리 키신저는 소문난 축구광이다. 어느 정도 '소문'이 났는가 하면 &amp;lt;타임&amp;gt;이나 &amp;lt;뉴스위크&amp;gt; 같은 시사주간지가 4년마다 월드컵이 열릴 때면 펠레 다음으로 꼭 인터뷰나 칼럼을 청탁하는 사람이다. 아마도 키신저가 '비축구인'이지만 그 자신이 맡았던 '국무'의 대부분이 외교 분야였기 때문에 에 축구광으로서 세계 각지의 역사와 문화와 현황을 훑어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대체로 키신저는 그런 기대에 부응해왔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이 블로그의 지난 해(아, 벌써 '지난 해'가 되었구나) 5월 27일자에서 그에 관하여 쓰기도 했거니와 그는 ‘월드컵을 보고자 근무 일정을 조정’한 사람인데, 현대 축구의 경향에 관하여 &quot;대표팀은 무엇보다 실점하지 않는 경기를 한다. 골 가능성이 줄면서 잘 훈련된 수비진을 갖춘 팀이 개인기가 우월한 팀을 이기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2004년 유럽선수권에서 조직력의 그리스가 개인기의 포르투갈을 이겼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lt;BR&gt;
&lt;BR&gt;
다소 기계적이기는 해도, 세계 정치와 외교에 깊숙이(문제는 그가 공화당 정권의 책략가라는 점이지만 오늘은 잠시 논외로 한다) 관여한 키신저가 각 나라의 축구 스타일을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입하여 설명하는 것은 그런대로 솔깃하게 들린다. &lt;BR&gt;
&lt;BR&gt;
예컨대 북부산악 지방을 중심으로 발전한 이탈리아는 서유럽과 아시아 제국 사이에 끼어 부단한 전쟁을 치러야 했고 그 때문에 옹벽을 치고 수성을 하다가 상대가 지친 기색이라도 보이면 역습을 하는 방식으로 연명해왔는데 이것이 '빗장 수비'의 한 유전자가 된다는 것이다. 중세 이후 300여 개 공국이 영방을 이뤄 살아온 독일이 1871년 통일 제국으로 재조직되는 과정은 베켄바우어가 야전사령관 역할을 맡은 '스위퍼' 시스템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역사 상식에 축구를 대입한 정도지만 그런대로 들어볼 만한 얘기인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71700157.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21&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아름다운 혈투를 보여준 한국의 봉중근(왼쪽)과 일본의 이와쿠마&lt;/p&gt;&lt;/div&gt;
제2회 wbc 대회 준우승이라는 쾌거를 이룬 한국 야구 대표팀에 대해서도 우리는 좀 더 '확장된' 시선으로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여러 매체가 언급한 대로 우리의 야구가 '빅볼'이나 '스몰볼'이 아니라 그것의 조화 또는 하이브리드의 한 면모를 보여줬다. 이어령 식으로 말하자면 '비빔밥 문화'의 한 면모가 드러난 셈이다. &lt;BR&gt;
&lt;BR&gt;
그런데 이를 좀더 '확장'하여 보면, 한국 야구의 쾌거는 '보편’에 도달하고자 했던 한국 현대사의 욕망을 반영하는 듯이 보인다. 여기서 ‘보편’이란 이미 수 세기 앞서서 '근대'를 이룩한 서구의 문법을 말하는 것이다. 정치, 행정, 사회, 교육 심지어 종교까지도 오랜 전통의 양식이 아니라 서구의 것을 '보편'으로 승인하고 받아들여야만 했던 근현대사를 이 한반도는 겪어냈다. &lt;BR&gt;
&lt;BR&gt;
'보편'에 대해 한반도는 양가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손쉽게 악수 할만한 그런 것이 아니라 황석영의 소설이 말해주듯이 갑자기 등장한 '손님'이었다. 그 손님과 치른 근현대의 격동은 너무나 뜨거웠고 시련이 많았다. 대립과 혼란이었다. 동시에 그 '손님'은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 경제 발전과 민주화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이 두 감정이 교직하여 도달한 한 성취다. 비록 그것이 민족 분단과 사회 소외라는 구덩이까지 만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요즘 들어 경제 위기가 극심하고 민주화의 소중한 결실마저도 후퇴시켜 버리려는 양상이 극심하지만 그러나 '2보 후퇴'는 있어도 반드시 '1보 전진'이 이뤄질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403472574.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17&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2009년 1월 8일, 신라호텔에서 열린 대표팀 출정식에서 인삿말을 하는 김인식 감독 (사진 연합뉴스)&lt;/p&gt;&lt;/div&gt;
그런데 지난 세기말과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면서 문제의 그 '보편'이 모든 인류가 함께 도달해야할 공동의 미래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비서구'의 전통적이며 자발적인 삶에 대한 관심이 '세계화'가 촉진될수록 확대된 것이다. 이는 '보편'을 완성한 '서구' 쪽에서도 제기되었다. 그들은 이미 1960년대에 산업화, 도시화, 물신화 등에 대한 환멸과 거부의 한 방식으로 '비서구'에 대한 지적, 정신적 관심을 쏟았다. 1997년 세계 경제 위기 때에 '아시아적 가치' 논쟁이 벌어진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여전히 '보편'의 위상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반드시 그것만이 정답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많이 퍼져 있는 상황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69563095.jpg&quot; width=&quot;106&quot; height=&quot;129&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류현진 선수&lt;/p&gt;&lt;/div&gt;야구 몇 경기, 짜릿하게 보았다고 해서 너무 과장된 얘기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며칠 동안 함성을 지르고 열광했던 그 면모들이 단순히 '승패'의 짜릿함 혹은 '한일전'의 역사적 무도회라고 축소시킬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다.
&lt;BR&gt;
&lt;BR&gt;
나는 '투지', '애국심', '매너' 이런 모호한 감정 상태로 경기 결과를 설명하는 것이 그렇게 깔끔해 보이지는 않는다. 멕시코나 베네수엘라 선수들이 우리 선수들보다 ‘애국심’이 부족하다고 판단할 만한 그 어떤 근거도 없다. 그들은 다만 패배한 팀의 일원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글러브를 던지거나 했을 뿐이지 그러한 단면이 '애국심'의 혈흔을 측정하는 바로미터는 아닌 것이다. '애국심' 운운한다면 그것은 함께 아름다운 승부를 펼친 맞상대 팀이나 그 나라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이다. &lt;BR&gt;
&lt;BR&gt;
마찬가지로 일본의 하라 감독이 김인식 감독 보다 선수들을 조금은 덜 신뢰했다고 볼 만한 구석도 거의 없다. 우리는 '형님, 아우님' 하면서 동질성의 야구를 했는데 일본은 '사무라이'처럼 상명하복의 조직 야구를 했다는 식으로 넘겨짚는 것도 상대팀이자 우승팀에 대한 '매너'는 아닌 것이다. 전략과 기술 측면의 선수 교체만으로 '믿음'과 '신뢰'라는 주관적이며 추상적인 감정을 잴 수는 없는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92384498.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77&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대표팀과 한화이글스의 연습경기에서 투구를 하고 있는 류현진 선수 (사진 한화이글스)&lt;/p&gt;&lt;/div&gt;
그렇게 때문에 김인식 감독의 야구 철학과 이번 대회에서 보여준 한국 팀의 스타일을 좀더 심도 있게 분석하고 평가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빅 볼’과 ‘스몰 볼’에 대해서는 두루 언급이 되었다. 우리 대표팀은 이 두 양상을 적절하게 섞어 활용했다. 야구의 본산인 북중미의 오랜 전통이나, 그들의 현대사가 그랬듯이, 일찌감치 대륙의 야구를 자기들에게 맞게 내면화한 일본의 야구가 굵직한 스타일로 확연한 가운데 우리 대표팀은 두 스타일이 적절히 드러나면서도 완전히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는 않는 양식을 보여줬다. &lt;BR&gt;
&lt;BR&gt;
이에 대해서는 우리 야구의 역사와 인프라와 선수 성장의 과정과 프로리그의 현황을 두루 분석해야 할 것이다. 김인식 감독을 포함하여 현재의 한국 야구를 형성시킨 지난 20여 년의 주요 감독들에 대한 섬세한 해석이 필요하다. 아마도 그 20여 년은 '보편'을 받아들여 그 경지에 이르고자 하였으나 그들도 모르게 '한국적 스타일'을 빚어나간 흐름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그동안 '야구 야사'는 많았어도 '한국 야구 역사, 스타일, 교육 연구'는 거의 없었다. 이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가 제출된다면 나는 밤을 새워서라도 통째로 암기해 버릴 것이다. 그런 바탕 속에 '투지'나 '애국심'이 스며들 때, 모두 의미가 있는 것이다. &lt;BR&gt;
&lt;BR&gt;
오늘 3월 25일은, 한국 대표팀의 투수 류현진이 1987년에 인천에서 태어난 날이다. 우선 생일 축하! 짝짝짝! 류현진은 인천 창영초등학교, 동산중, 동산고교를 대전대학교를 거쳐 2006년에 신인 드래프트 2차 1순위 지명으로 한화에 입단했다. 고교 재학 때 모교 동산고교의 6번째 청룡기 우승을 일궈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20603839.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5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한국 야구의 새로운 역사에 동참하고 있는 류현진 선수&lt;/p&gt;&lt;/div&gt;
그의 연고권은 SK 와이번스에게 있었는데 SK는 인천고 출신의 이재원을 포수 자원으로 선택했다. 고교 기대주인 김광현에 대한 포석도 있었고 류현진이 고교 시절에 팔꿈치 수술을 받은 게 꺼려진 점도 있었다. sk 다음으로 롯데 자이언츠가 선택권이 있었는데 롯데는 나승현을 택했다. 그래서 류현진은 한화의 부름을 받았다. 프로 데뷔 첫해인 2006년에 다승, 평균 자책, 탈삼진 1위로 투수 삼관왕에 올랐다. '괴물'이라는 닉네임이 따라다녔다. 결정적인 순간에 갑자기 멈춰진 시공간 사이로 유영하는 너클볼을 던지기도 했다. 신인상과 최우수 선수상을 동시에 석권했다. &lt;BR&gt;
&lt;BR&gt;
150km 대의 직구와 서클 체인지업을 주무기로 하는 류현진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본선부터 국가 대표로 참가하여 쿠바와의 결승전에 선발 등판하였다. 그리고 2009년 wbc 대회에도 참가하였다. 류현진, 새롭게 열린 '토털 베이스볼'의 주역이 되길 바란다. &lt;/font&gt;&lt;/p&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거의 유일한 야구 교과서&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39477570.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야구란 무엇인가 | 레너드 코페트 지음 | 이종남 옮김 | 황금가지&lt;BR&gt;
&lt;BR&gt;
  10년 전 쯤에 발간된 책이다. 거의 유일무이한 야구 교과서다. 미국 야구 서적 중에서도 '클래식'으로 통한다. 저자도 세상을 떠났고, 그야말로 거의 최초의 '야구 전문기자'였던 번역자 이종남 기자도 타계했지만 그들의 야구 혼은 이 책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뭐라도 암기하고 인용해 볼만한 야구 책을 원한다면 최적의 유일한 책이다. 그밖에는? 정말로 아무 책도 없다고 해도 될 만큼, 우울하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0170704&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흥미로운 야구 소설&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71838661.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야구 감독 | 에비사와 야스히사 지음 | 김석중 옮김 | 서커스&lt;BR&gt;
&lt;BR&gt;
  야구의 '준종주국' 일본. 그곳의 스포츠 문화는 수많은 기록과 서책으로 인하여 풍요롭다. 단지 돔 구장이 많고 관중만 많은 게 아니라 책과 자료가 있어서 이 스포츠 열정을 뒷받침해준다. 그런 점만 본다면 우리는 좀더 '보편'을 향해 더 많이 걸어가야 한다. 이 소설은, 자신이 진정한 야구광인지 측정해 볼 만한 소설이다. 하룻밤 만에 다 읽어낸다면, 님은 좀 짱인 듯!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5862432&amp;amp;ttbkey=ttbprague0909002&amp;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선수와 팬들의 아름다운 기억들&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90846888.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돌아오지 않는 2루 주자 | 김은식 지음 | 도서출판 풀로엮은집&lt;BR&gt;
&lt;BR&gt;
&lt;BR&gt;
  '김인식'이 아니라 김은식이라서 조금 그렇지만, 그러나 &lt;오마이뉴스&gt; 독자이면서 동시에 야구팬이라고 한다면  지난 4년 가까이 김은식의 연재 '야구의 추억' 때문에 너무나 행복하였을 것이다. '투지', '애국심' 같은 모호한 감정 보다 야구인과 야구팬의 기억과 기록 사이를 샅샅이 누빈 김은식의 글은 야구에 대한 열정과 꿈,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부터는 야구를 연구하고 해석하는 일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431999&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798252&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3월</category>
			<author>jys2003 (정윤수)</author>
			<pubDate>Wed, 25 Mar 2009 02:21:00 GMT</pubDate>
		</item>
		<item>
			<title>[3월 24일] 사진의 독립선언 그리고 열애 - 에드워드 웨스턴</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263009</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20세기의 미국에 한하여 말하건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사진을 미술부의 하위 종목에서 끌어내어 하나의 독립된 장으로 만든 이후 거목들이 속속 등장한 것은 1920년대 이후의 일이다. 대공황 때문에 몇 년 동안 주춤거리는 했지만, 미국은 1차 대전 이후 세계 최강국이 되었고 급속히 대도시 문화가 형성되었으며 수많은 매체가 등장했다. 예컨대 시사주간지 &amp;lt;타임&amp;gt;은 1923년에 창간되었다. 보다 뛰어난 사진이 필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lt;br /&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38648917.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99&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에드워드 웨스턴 작 '양배추 잎' (1931년)&lt;/p&gt;&lt;/div&gt;
그 거목의 명단에 에드워드 웨스턴이 반드시 포함된다. '즉물 사진', 즉 주관 요소를 배제하고 대상 그 자체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냉정하게 기록하는 스타일을 말한다. 여기서 내가 '스타일'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순수한 진공 상태의 즉물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관을 배제하고 냉정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주관'의 사진이 곧 에드워드 웨스턴의 즉물 사진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29685967.jpg&quot; width=&quot;250&quot; height=&quot;20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사진을 회화로부터 독립시킨 에드워드 웨스턴&lt;/p&gt;&lt;/div&gt;즉물 사진은 어떤 면에서 사진가들이 진정으로 미술가와 다른 많은 예술을 향하여 독립 선언문을 읽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사진은 서서히 픽토리얼리즘(Pictorialism, 회화주의)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lt;BR&gt;
&lt;BR&gt;
1920년대 이후의 일이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치, 폴 스트랜드 그리고 에드워드 웨스턴으로 이어지는 혁신이다. 웨스턴의 즉물 사진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물을 냉정하게 기록하지만 이미 그 '객관적 거리' 자체가 회화주의는 물론 초상, 기술, 보도 같은 실용성으로부터도 이탈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리하여 얻어진 엄격한 조형미와 사물(곧 세상)의 낯선 이미지는 '기록' 이상의 작업이 된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409715605.jpg&quot; width=&quot;230&quot; height=&quot;29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에드워드 웨스턴 작 '누드' (1936년)&lt;/p&gt;&lt;/div&gt;바로 그 에드워드 웨스턴이 1886년의 오늘, 3월 24일에 미국 일리노이주 하이랜드 파크에서 태어났다. 16살 되던 해에 코닥 불스아이 #2를 선물로 받아 사진을 찍기 시작하였으며 곧 프로가 되어 1903년에 시카고사진협회의 주선으로 첫 번째 전시회를 가졌다. 17살 때의 일이다. 일리노이사진 대학을 마친 후 1906년에 웨스턴은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였으며 1910년에 캘리포니아 트로피코(현 글렌데일)에 스튜디오를 열었다.
&lt;BR&gt;
&lt;BR&gt;
1922년부터 그의 사진 세계가 펼쳐졌다. 그는 조개, 배추, 나무, 바위 그리고 무생물에 흡사해 보이는 인물을 찍기 시작했다. 이 작품들로 뉴욕에서 큰 전시회를 가져 성공을 거둔 웨스턴은 사진그룹 &lt;f&gt;를 창설했다. &lt;BR&gt;
&lt;BR&gt;
안셀 아담스, 윌라드 반 다이크 등이 함께 한 이 그룹은 사진의 기념비적인 역사를 쓰게 된다. 이들은 조리개를 최소구경으로 설정하여 극단적으로 깊이 있는 광학 심도를 이용해 사물의 디테일을 완벽하게 그려냈다. &lt;BR&gt;
&lt;BR&gt;
특히 안셀 아담스는 '존 시스템'이라는 과학적 방법론으로 '풍경 사진'이 일반적 회화의 시선과 방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하는 획기적인 대형 풍경 사진을 남겼다. 안셀 아담스는 &quot;필름은 악보요 프린트는 연주이다&quot;라고 말하였는데, 그 말처럼 필름 현상과 인화에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94273796.jpg&quot; width=&quot;408&quot; height=&quot;314&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에드워드 웨스턴 작 '텐냐 호수' (1937년)&lt;/p&gt;&lt;/div&gt;
이처럼 에드워드 웨스턴과 그의 동료들은, 스티글리츠의 영향에 의하여, 미술 쪽에서 흔히 말하는 영감이나 착상 같은 주관적인 말 보다는 철저히 '카메라 렌즈'의 엄밀한 과학성을 신뢰하였다. 에드워드 웨스턴은 &quot;사진은 카메라의 눈인 렌즈를 통해 바라본 것을 카메라의 기계적인 능력에 의지하여 사실적으로 재현한 것이지 인간의 눈으로 바라 본 것을 카메라의 능력에 의지하여 사실적으로 재현한 것이 아니다. 카메라의 렌즈는 인간의 눈보다 더 많은 것을 본다.&quot;고 하였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44502709.jpg&quot; width=&quot;230&quot; height=&quot;29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에드워드 웨스턴 작 &amp;quot;피망' (1930년)&lt;/p&gt;&lt;/div&gt;에드워드 웨스턴은 두 차례의 대전과 대공황 시대의 미국을 찍었다. 그가 찍은 사진은, 그 방법론을 차치하고, 현대 사진예술 초창기의 순수하고 경건한 눈을 보여준다. 그의 카메라가 담아낸 식물과 인간과 사막은 모든 인위가 사라진 상태의 물질성을 보여준다.
&lt;BR&gt;
&lt;BR&gt;
그는 파킨슨씨 병에 걸려 1948년 이후에는 사진을 더 이상 찍지 못하였다. 1952년에 그의 아들에 의하여 사진 작업 50주년 기념 포트폴리오가 출간되었으며 1958년에 캘리포니아주에서 사망하였다. &lt;BR&gt;
&lt;BR&gt;
자, 한 사람 더 얘기해야겠다. 티나 모도티. 사진작가이며 에드워드 웨스턴의 동료이다. 영화 &amp;lt;프리다&amp;gt;에 보면, 프리다 칼로와 함께 탱고를 추던 멋진 여성이 바로 티나 모도티다. 그녀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멕시코에서 활동하였다. 웨스턴과 모도티가 만났을 때, 그리하여 서로의 작업을 하면서 둘의 작업을 하였고, 그래서 사랑까지 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이미 아이를 넷 둔 유부남이었고 또 다른 남자의 부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과 작업은 멈추지 않았다. &lt;BR&gt;
&lt;BR&gt;
티나 모도티는 웨스턴의 조수로 사진을 익혔다. 이후 멕시코에서 사회주의 단체에 가입하였고 혁명 운동에 투신하였다. 멕시코의 정치적 혼란기에 강제 추방을 당하여 독일을 거쳐 러시아로 도피하게 된다. 그 이후 행적은 의심스러우면서도 어두팀침하다. 소비에트 연방에 정착한 티나 모도티는 스탈린의 비밀 경찰이 되어 프랑스, 스페인 등에서 일을 하다가 멕시코의 택시 안에서 사망하였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91076360.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42&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티나 모도티 작 '노동절 행진' (1929년 작). 사진 중앙에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가 있다.&lt;/p&gt;&lt;/div&gt;
1919년에 처음 만난 에드워드 웨스턴과 티나 모도티는 1923년에 멕시코로 떠난다. 멕시코로 떠나던 해에 모도티는 천연두로 남편을 잃은 상태였다. 두 사람은 멕시코에서 함께 사진관을 운영하면서 디에고 리베라, 다비드 에이 시케이로스, 프리다 칼로 등 사회주의 계열 아방가르드 예술가와 교류하게 된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78916463.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441&quot; alt=&quot;&quot;/&gt;&lt;/div&gt;&lt;BR&gt;
이곳에서의 5년은 웨스턴과 티나 모도티 모두에게 획기적인 방향 전환이 된다. 그 당시 멕시코의 디에고 리베라, 클리멘트 오르즈코 그리고 디나 모도티 같은 사회주의 계열 예술가들과 교유하였으나 그 주관성에 대한 긴장과 거리감이 오히려 웨스턴의 즉물 사진을 낳게 하였다. 모도티는, 멕시코에서 강제 추방 당하기 전까지는, 에드워드 웨스턴과의 멕시코 체류 시절에, 웨스턴 보다는 좀더 뜨겁게 근접한 거리에서 멕시코의 가난과 고통을 다뤘다. 그것이 유한 취미 생활이 아니라 온 몸을 던진 사회 활동의 일환이었다는 점에서, 티노 모도티의 사진 또한 기억될 필요가 있다. &lt;/font&gt;&lt;/p&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격동의 한복판에서 &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52033920.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티나 모도티 | 마거릿 훅스 지음 | 윤길순 옮김 | 해냄출판사&lt;BR&gt;
&lt;BR&gt;
  &lt;망치와 낫&gt;, &lt;깃발을 든 멕시코 여인&gt;, &lt;메이데이 행진&gt;...... 멕시코 혁명기의 한복판을 찍은 사진들이다. 얼핏 남성 작가를 연상하기 쉽지만 이 강렬한 흑백의 사진들은 본문에서 언급한 티나 모도티의 작품이다. 18살 되던 해, 시인이자 화가인 남편을 만났고 동시에 사진작가 에드워드 웨스턴의 작품을 접하게 된 모도티는 그 두 사람보다 더 뜨거운 한 생애를 살았다. 1928년 멕시코 대통령 암살 기도와 관련하여 추방을 당하였고 그 후에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혁명 활동을 했던 그녀는 1942년에 택시에 사망하였다. 혁명의 시대, 그 한복판을 살다갔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3376357&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현대 사진의 이해&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90709696.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사진가 50 | 빌프리트 바츠 지음 | 최은아 옮김 | 해냄출판사&lt;BR&gt;
&lt;BR&gt;
  지식과 상식의 비빔밥 같은 책들이 함량 미달인 경우가 많은데 ‘클라시커 50’ 시리즈는 일반 교양 독서로 손색이 없는 수준과 넓이를 갖고 있다. 문학, 음악, 건축, 미술, 역사 등으로 많은 시리즈가 출간되었다. 이 책 ‘사진가’는 그 21번째 책이다. 에드워드 웨스턴을 포함하여, 근현대 사진 예술을 일별하고 그 작가들을 일목요연하게 살피고자 한다면 읽어볼 만한 책이다. &lt;BR&gt;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3374516&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에드워드 웨스턴은 아니지만 &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23848341.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구본창 | 김승곤 지음 | 열화당&lt;BR&gt;
&lt;BR&gt;
  이 블로그도 이제 일주일 남짓 남았다. 그 사이에 사진작가 구본창을 다룰 일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에드워드 웨스턴은 아니지만(그의 단독 사진집은 출간되지 않았다), 구본창의 사진집을 골랐다. 한길아트에서 상당한 재질과 그에 합당한 가격으로 사진집이 연속 간행되고 있지만, 일단 교양 독서를 위하여 이 책 한 권으로 일별해 볼 수 있다. 감정의 일렁거림이 거의 없어 보이는 관조이지만, 부분으로 전체를 말하려는 사진을 계속 들여다 볼수록 화면 속에서 뭔가 일렁거린다. 작은 사진집이지만 말이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0100732&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790329&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3월</category>
			<author>jys2003 (정윤수)</author>
			<pubDate>Mon, 23 Mar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3월 23일] 실의에 빠진 사업가, 그린피스로 거듭나다 - 데이비드 맥타가트</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262968</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01286873.jpg&quot; width=&quot;200&quot; height=&quot;20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생태학자 아르네 나에스&lt;/p&gt;&lt;/div&gt;올해 초, 1월 13일에 노르웨이의 등반가이자 철학자이며 환경운동가인 아르네 나에스가 서거했다. 향년 97세. 그는 '심층생태학(deep ecology)'이란 개념을 처음 제기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심층생태학'을 김우창 같은 사람은 '깊은 생태학'으로 번역한다. '심층'과 '깊은'은 엇비슷한 말의 정경을 가리키면서도 그 뉘앙스는 사뭇 다르다.
&lt;BR&gt;
&lt;BR&gt;
노르웨이 오슬로의 금융가와 사업가 부모 밑에서 태어난 나에스는 오슬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27살 나이로 최연소 교수가 됐다. 그는 1954년에 파키스탄의 7708m 티리크 미르산을 처음으로 등정하기도 하였다. 이 등반대의 리더였다. 이 등정이 어떤 '정복욕'이나 '루트 개척'에 있지 않음은 두말 할 것도 없다. &lt;BR&gt;
&lt;BR&gt;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할링스카르베트 산속에 작은 집을 짓고 70여 년을 살았다. 높은 산을 오르는 것도 그런 맥락일 뿐이다. 그 산속 오두막에서 나에스는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을 더없이 귀중한 자연의 풍요로운 선물로 여기며 살았다. 등산화는 50여 년이 넘도록 신었다. 교수라는 사회적 신분이었지만 말이다. 그의 '최소한의 삶'과 경건한 태도는 5,60 서구 지식인들이 2차 대전의 폐허와 극단적인 산업화에 따른 비인간적 상황을 회복하기 위해 '자연과의 합일'을 강조한 경향을 보여준다. 이 목적을 위해 당시 서구 지식인들은 인도의 명상이나 불교의 선 철학에 몰입하기도 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quot;자아가 확장되고 깊어져서 내가 편안하게 자연을 돌보는 행위가 우리 자신의 보호로 인식될 때, 모든 우려는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우리가 호흡할 때 어떤 도덕도 필요하지 않듯이. 만약 넓은 의미에서 당신의 '자아'가 다른 존재를 포용한다면, 당신은 우려를 나타내기 위해 어떤 도덕적 훈계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어떤 도덕적 압력도 느낄 필요 없이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quot;&lt;/font&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69983396.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19&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노르웨이 할링스카르베트 산속의 아르네 나에스&lt;/p&gt;&lt;/div&gt;
이 짧은 인용에서 잠깐 느낄 수 있듯이 아르네 나에스는 정신적 수련과 지혜를 역설하였다. 그의 사상에 대해, 일종의 '마음의 생태학'이랄 수 있는 나에스의 문명 성찰에 대해 머레이 북친은 오늘의 생태 위기가 '사회구조의 산물'이며 따라서 사회구조의 변혁이 중요하다고 비판하였다. &lt;BR&gt;
&lt;BR&gt;
김우창 선생도 '경향신문' 칼럼을 통하여, 나에스의 깊은 생태학 또는 생태적 자아실현의 ‘생태지혜학 (echosophy)’으로 오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언급한다. 그러면서도 '그의 철학이 오늘의 문제를 밝히는 큰 거울이 되는 것임은 분명'하다고 썼다. 왜냐하면 그의 우리 사회가 &quot;더 넓은 삶의 지혜의 견제와 균형을 멀리 떠난 정치와 경제 계획의 허영에 사로잡혀 있는 사회&quot;이기 때문이다. &lt;BR&gt;
&lt;BR&gt;
나예스는 1970년 교수 직을 마친 후에는 좀더 본격적으로 환경 생태 운동에 뛰어들었다. '심층(깊은) 생태학에 대한 논문을 마친 후 나에스는 마르달 폭포의 댐 건설에 항의하여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폭포 근처의 바위에 몸을 동여매고 투쟁했다. 1988년에는 그린피스 노르웨이 지부 초대 책임자를 맡았으며 노르웨이 녹색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68629111.jpg&quot; width=&quot;481&quot; height=&quot;31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실의에 빠진 사업가에서 그린피스 운동가로 거듭난 데이비드 맥타가트&lt;/p&gt;&lt;/div&gt;
이 블로그의 취지에 부합되도록 좀더 오늘의 이야기와 직접적으로 연관하도록 살피면, 오늘 3월 23일은, 그린피스 운동에 커다란 기여를 한 데이비드 맥타가트가 2001년에 사망한 날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48520224.jpg&quot; width=&quot;220&quot; height=&quot;151&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그린피스 상징 로고&lt;/p&gt;&lt;/div&gt;외신 뉴스를 통하여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린피스의 ‘게릴라식 비폭력 행동’은 20세기 후반의 뜨거운 몸부림이었다. 그 시작은 1969년 10월 암치카 섬에서 미국이 지하핵실험을 실시한 날이 된다. 지진으로 인한 해일 피해를 겪었던 지역 주민들이 미국과 캐나다간의 국경을 막고 ‘해일을 일으키지 말라’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시위를 무시하고 1971년에 2차 핵실험 계획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것을 막기 위해 5명의 평화운동가들이 ‘해일을 일으키지 말라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로써 그린피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lt;BR&gt;
&lt;BR&gt;
1971년에 저항 시위를 위한 항해를 준비하는 중 창립 멤버의 한 사람이 '녹색 지구와 반핵 평화'의 뜻으로 그린피스라는 용어를 쓰게 되었다. 활동용 소형 어선 ‘필리스 코맥’호의 이름을 그린피스호로 바꾸는 과정에서 그린피스가 굳어졌다. 미국 정부는 1972년 암치카 섬에서 핵실험을 포기한다는 발표를 하였다. &lt;BR&gt;
&lt;BR&gt;
그리고 1972년. 그린피스의 이름을 전세계에 널리 알리는 사건이 벌어진다. 남태평양의 작은 섬,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뮈뤼로아 환초에서 프랑스 정부가 핵 실험을 갖기로 하였는데 이를 그린피스가 저지한 것이다. 그린피스 활동가들이 핵 실험 반대를 위해 뮈뤼로아 환초까지 항해를 도와줄 사람을 찾는다는 광고를 뉴질랜드의 은퇴한 사업가가 본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데이비드 맥타가트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49658219.jpg&quot; width=&quot;430&quot; height=&quot;286&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작은 보트에 몸을 실은 맥타가트와 동료들이 핵 실험에 반대하는 해상 투쟁을 벌이고 있다&lt;/p&gt;&lt;/div&gt;
'은퇴'한 사람이지만, 그는 이제 막 마흔을 넘긴 사람이었다. 1932년에 캐나다에서 태어난 맥타가트는 샌프란시스코 동부의 스키 휴양지 베어밸리 개발 사업 도중에 큰 사고를 겪게 되어 전 재산을 팔아버리고 뉴질랜드로 이주한 상태였다. 그는 오로지 바다에 의지하고 바다를 사랑하고 바다에 모든 것을 맡기며 살고자 하였다. 그런데 멀지 않은 곳에서 핵 실험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리고 그것을 저지하기 위한 활동에 도움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의 요트 ‘베가’를 제공하는가 하면 함께 참여할 선원까지 모집했다. &lt;BR&gt;
&lt;BR&gt;
1972년 6월, 맥타가트와 동료들은, 이날 이후로 우리가 수많은 그린피스 투쟁에서 자주 본 대로, 작은 요트 '베가'에 타고 뮈뤼로아 환초 실험장소를 지키는 프랑스 해군 소해정과 순양함, 헬기에 맞섰다. 탄탄한 방어벽을 향해 돌진하던 맥타가트의 요트 베가는 소해정에 부딪혀 부숴졌다. 이듬해 8월, 맥타가트와 동료 선원 그리고 그린피스 대원들이 또다시 저항하였다가 프랑스 수병들에게 두들겨 맞았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60247394.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일본의 거대한 포경선 사이에서 그린피스의 작은 요트가 멸종 위기에 처한 고래를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lt;/p&gt;&lt;/div&gt;
이것을 은폐하려다 발각이 나자 1975년에 프랑스 정부는 일단 대기권 핵실험을 포기했다. 하지만 1985년에 다시 핵실험 재개를 발표하자 그린피스는 ‘평화의 선단’을 조직해 본격적인 해상시위를 벌였다. 이 격전의 세월 끝에 프랑스는 1995년 9월부터 1996년 5월까지의 실험을 끝으로 남태평양에서의 핵실험을 전면중단했다. &lt;BR&gt;
&lt;BR&gt;
맥타가트는 그린피스의 '세계화'를 추지하였다. 북미, 유럽, 대양주 등으로 각 지부를 만들어나갔다. 1979년 10월 14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그린피스국제본부가　공식출범하였고 이 자리에서 맥타가트가 의장 겸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72073907.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29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런던 히드로 공항 인근의 부지 일부를 '알 박기'로 매입하여 활주로 확장 공사 반대를 하고 있는 그린피스(사진 afp 멀티비츠)&lt;/p&gt;&lt;/div&gt;
현재 그린피스는 지구 곳곳에서 급박하게 터지고 있는 환경 재난 현장에 즉시 투입할 수 있는 ‘레인보우2’ 등의 선박 4척을 보유하고 있다. 게릴라식 저항 시위에만 머물지 않고 일정한 기반과 영향력을 지닌 다양한 국제기구 및 개별 국가의 환경단체들과 지속적이고 다채로운 공동 연대 운동을 펼치고 있다. &lt;BR&gt;
&lt;BR&gt;
기후변화, 원시림 보호, 해양 보호, 고래잡이 방지, 유전자조작 반대, 핵 실험 및 확산, 독성물질 위협, 미사일 및 전쟁 반대 등이 그린피스의 활동 목표들이다. 이를 위하여 그린피스는 유엔환경계획,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생물 종의 국제 교역에 관한 국제협약, 자연과 천연자원 보호를 위한 국제 연맹, 유독물질의 투기와 처리에 관한 오슬로 및 파리 협약, 남극조약 체제를 위한 회의 등에 참여하고 있다. '알박기 투쟁'도 벌였다. 런던 히드로 공항의 제3 활주로 건설을 막기 위해 활주로 건설 예정 부지의 땅 일부를 매입하여 이를 '상징 투쟁'의 공간으로 쓴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49568061.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2008년 12월, 그린피스와 환경운동연합이 참치장례식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 환경운동연합)&lt;/p&gt;&lt;/div&gt;
우리의 생태환경 운동도 그린피스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1993년 동해에서 벌어진 러시아의 핵폐기물 투기 저항 운동이 그 시발이며 1994년에 그린피스 환경조사팀이 우리나라의 자연생태의 현황과 그 보호 상태를 보기 위해 그린피스호를 파견한 일도 있다. 이밖에도 1997년 대만 핵폐기물의 북한 반입저지, 1999년 일본의 플루토늄　수송　반대 시위, 2001년 러시아의 핵폐기물　수입저지정책 저지 운동 등이 지속적으로 펼쳐졌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97800049.jpg&quot; width=&quot;230&quot; height=&quot;34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다대포 앞바다에 쓴 그린피스 구호&lt;/p&gt;&lt;/div&gt;2008년 12월에는, 환경운동연합과 함께 그린피스는 부산에서 '참치 장례식'을 치르기도 했다. 당시 열린 제5차 중서부태평양수산위원회(WCPFC) 회의에 '참치 보호 의제' 제출되었는데, 이것이 상당히 미흡하다고 판단한 환경운동연합과 그린피스가 지난 12월 12일 부산 다대포 바닷가에서 '참치장례식' 퍼포먼스를 벌이면서 멸종 위기에 처한 참치 보호 캠페인을 벌인 것이다. 
&lt;BR&gt;
&lt;BR&gt;
이런 점들을 두루 감안할 때, 그린피스의 '그린' 즉 '녹색'이 단순한 자연 보호나 생태 운동 차원이 아니라(물론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은 말할 것도 없고) 좀더 적극적인 의미의 평화 운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lt;BR&gt;
&lt;BR&gt;
사실 1970년대의 서구에서 '그린'은(예컨대 독일이나 노르웨이의 '녹색당'은) 환경 보호 보다는 반전 반핵 평화 운동의 의미가 더 컸다. 그린피스의 '그린' 역시 그러하다. '신성장 녹색산업'이라는 기묘한 조어의 시대에는 더욱 이 '그린'의 정치적, 문화적 의미가 각별하다. &lt;BR&gt;
&lt;BR&gt;
평범한 사업가였다가 실의에 빠진 바다 사나이였다가, 남은 생애를 그린피스 운동에 바친 데이비드 맥타가트가 2001의 오늘 3월 23일에 사망했다. 그래서 한번 두루두루 생각해 보았다. &lt;/font&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782616&quot;&gt;&lt;/embed&gt;&lt;/p&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3월</category>
			<author>jys2003 (정윤수)</author>
			<pubDate>Sun, 22 Mar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3월 22일] 멈춰 서라, 너는 진정 아름답구나! - 괴테</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262811</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30665933.jpg&quot; width=&quot;160&quot; height=&quot;21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고전주의 완성자 괴테&lt;/p&gt;&lt;/div&gt;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를 달리 표현하면 ‘세계주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지도로는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이 서로 나뉘어진 ‘국가’들이지만 농업 기반의 중세는 물론 근대에도 유럽은 느슨한 형태의 거대한 제국들과 촘촘한 인간적 유대로 맺어진 농촌혈연 관계로 형성되어 있었다. 
&lt;BR&gt;
&lt;BR&gt;
서로 다른 지역의 귀족들이 각각 서로 다른 나라의 군주로 군림하기도 하였다. 오늘의 지도 개념으로 말한다면 독일 출신의 왕들이 영국, 스웨덴, 폴란드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스페인 출신 왕이 나폴리 공국을 통치하고 독일 출신 공주가 러시아 여제로 등극하였다. 아울러 프랑스 출신의 철학자 볼테르(Voltaire)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제 궁정에 머물렀으며 파리에는 독일 출신 음악가들이 몰려들었고 이탈리아의 시인 메타스타시오(P. Metastasio)는 빈의 독일 황제 궁에 초대를 받았다. &lt;BR&gt;
&lt;BR&gt;
예술가와 지식인에게는 응당 다른 도시와 세계로 진출하여 더 많은 새로움을 경험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인식되었다. 밀로스 포먼(Milos Forman)의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도 이와 관련된 인상 깊은 장면이 있다. 마차에 올라탄 모차르트가 술에 취한 채 다음은 어느 도시에서 만나자고 소리치는 장면이다. 이 에피소드는 당대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새로운 것을 찾아 곳곳으로 방황하던 유행을 잘 말해준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33176093.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9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북유럽의 괴테는 지중해 문화를 통해 고전주의의 아이디어를 얻었다&lt;/p&gt;&lt;/div&gt;
이러한 흐름은 당대의 지적·예술적 내용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18세기 중엽의 음악학자 미셀 샤바농은 “오늘날 전 유럽에는 오직 하나의 음악이 있을 뿐이다. 이 음악이야말로 우리 대륙의 공통 언어다”라고 선언하였다. &lt;BR&gt;
&lt;BR&gt;
세계주의는 철학사적으로 계몽주의를 동반하고 있다. 백과전서파에서 배태된 계몽주의는 초자연적인 권력을 구가하고 있던 교회와 궁정에 반대하는 한편 시민계급의 일반 생활상식과 윤리규범, 새롭게 창출된 과학과 사회학의 신선한 잣대, 권위보다는 자유를 갈구하는 지적 경향, 동등한 권리와 보편적인 교육에 대한 열망 등을 모조리 상징하는 거대한 물결이었다. &lt;BR&gt;
&lt;BR&gt;
로크, 흄, 볼테르에서 루소로 총합되는 계몽주의는 문학 쪽으로 레싱과 헤르더의 ‘질풍노도’를 열어주었으며 음악에게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견실한 고전주의를 가능케 하였다. 기존의 관습에 젖어 있던 예술가들로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물결이었지만 대세는 사회적 발전과 예술적 발전, 그리고 이에 기초한 자기 개인의 발전(여기 쓰인 발전은 역사적으로 ‘진보’이다)을 높은 차원으로 결합시키고자 했던 독창적인 예술가들에게는 기꺼이 동승할 수 있는 기차였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22312996.jpg&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30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바이마르 광장의 괴테와 실러 동상. 맞은 편 건물은 바우하우스 기념관&lt;/p&gt;&lt;/div&gt;
익명의 여행자로 2년 가까이 이탈리아를 여행한 괴테의 행로는 위와 같은 의미에서 볼 때 오늘날의 배낭여행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모색하려는 철학자이자 정치가 괴테의 오랜 사색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lt;BR&gt;
&lt;BR&gt;
괴테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태어났다. 법률가인 아버지와 시장의 딸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다. 1765년에 라이프치히대학에 입학하여 법률을 공부하였으며 1768년 각혈로 고향에 돌아와 요양을 하다가 경건파 신앙을 접했다. 1770년 법학 공부 때문에 스트라스부르에서 머물다가 질풍노도 시기의 작가인 헤르더를 알게 되어 자연성의 회복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이 무렵 마을 목사의 딸을 사랑하였다가 파혼을 겪게 되는데, 이 열정의 병이 훗날 그의 마음에 깊은 문학적 주제를 드리웠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88722847.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2006 독일 월드컵 당시, 바이마르 시민들이 괴테와 실러 동상 밑에 독일 팀을 응원하고 있다&lt;/p&gt;&lt;/div&gt;
괴테는 1771년에 변호사가 되어 프랑크푸르트에서 개업을 하게 되는데 이때 겪은 샤롯테 부프와 비련이 &amp;lt;젊은 베르테르의 슬픔&amp;gt;을 낳았다. 이 작품으로 괴테는 '슈투름 운트 드랑(Sturm und Drang, 질풍 노도)’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이 무렵 야심만만한 젊은 대공이 괴테를 찾아온다. &lt;BR&gt;
&lt;BR&gt;
1775년의 일로 비교적 작은 규모인 바이마르 공국의 카를 아우구스트가 그 사람이다. 그의 거듭된 초청으로 괴테는 바이마르로 가서 공직을 맡게 된다. 10년 동안의 정치적 실험은 비교적 성공적이었으나 위기를 한번 겪게 되어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의 여행은, 한가로운 나들이가 아니라, 정치적 실험의 실패와 문화적 모색의 겹쳐진 것으로 그는 지중해를 통하여 새로운 동기를 얻고자 하였다. 이탈리아 여행 과정에서 괴테는 지중해 일대의 모든 것을 성찰하고 연구하였다. 사회질서나 문화유산뿐만 아니라 식물학, 기상학, 동물학, 색채학 등 광범위한 영역을 관찰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58840084.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괴테의 시구가 적혀 있는 건물 밑에서 담소를 나누는 바이마르 시민들&lt;/p&gt;&lt;/div&gt;
이탈리아 곳곳을 여행하면서 남긴 그의 글, 예컨대 이탈리아 사람들의 행동양식, 풍습, 도시 환경 등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북구 유럽의 지식인이 자신을 답답하게 만들었던 낡은 체제와는 전혀 다른 사회, 곧 르네상스 시대를 거친 이탈리아의 생동감 넘치는 삶과 문화에 대한 동경의 기록인 것이다. 그는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 등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을 일일이 찾아 보고 스케치까지 하면서 고전주의 예술의 어떤 원리를 찾아내려고 했다. &lt;BR&gt;
&lt;BR&gt;
괴테의 청년기 시대를 문예사에서는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한다. 괴테 역시 숨 막힐 듯한 기존의 체제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한 의지와 열정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한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이탈리아 기행을 거치면서 괴테는 탁월한 문예사가 빙켈만의 표현대로 ‘조용한 위대성과 고귀한 단순성’을 깨닫게 된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33998441.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하늘에서 내려다본 고색창연한 도시 바이마르&lt;/p&gt;&lt;/div&gt;
마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씨앗이 아름다운 꽃이나 풍성한 나무로 성장하듯이 괴테는 벽돌 하나로 시작하여 거대한 성당이 완성되어가는, 단순하면서도 정교한, 그리하여 마치 세계를 축소해놓은 듯한 웅장미를 자랑하는 이탈리아 고전 건축과 예술에 사로잡혔다. &lt;BR&gt;
&lt;BR&gt;
괴테는 고대 그리스와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통하여 새로운 지평을 느끼게 되었고, 곧 바이마르로 돌아와 동료 프리드리히 실러와 함께 이와 같은 통찰에 따른 작품 활동과 사회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한 &amp;lt;파우스트&amp;gt;나 자전적 성장소설 &amp;lt;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amp;gt;는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탄생한 걸작이다. 근대 도시의 살롱으로 속속 집결한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괴테와 같은 정치적, 예술적 기행을 자신들의 문화로 받아들였다.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은, 한 개인의 여행 중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과 영향력을 남긴 여정이 되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29280088.jpg&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30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악마 메피스토펠레스를 만나고 있는 노학자 파우스트. &amp;lt;파우스트&amp;gt; 삽화&lt;/p&gt;&lt;/div&gt;
괴테는 1789년 이후 프랑스 혁명의 격동기에 바이마르의 아우구스트 대공을 따라 프랑스로 종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실러가 있다. 두 사람의 지적 교류와 우애는 1805년 실러가 사망할 때가지 지속되었다. &amp;lt;파우스트&amp;gt;와 &amp;lt;벨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amp;gt;가 이 무렵의 성취다. 특히 &amp;lt;파우스트&amp;gt;는 괴테가 23세 때 시작하여 1831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그는 60년에 걸쳐 &amp;lt;파우스트&amp;gt;를 완성하였고 그 이듬 해인 1832년의 오늘, 3월 22일에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바이마르 대공 가문의 묘지에, 아우구스트 대공과 실러 곁에 안치되었다. &lt;/font&gt;&lt;B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멈춰 서라, 너는 진정 아름답구나&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14671560.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파우스트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 이인웅 옮김 | 문학동네&lt;BR&gt;
&lt;BR&gt;
  괴테의 &lt;파우스트&gt;는 그 자신만의 걸작이 아니라 200여년의 문화 유산이 되었다. 거듭 해석되고 재창조된다. 당장 기억나는 것만 해도 토마스 만이 &lt;파우스트 박사&gt;라는 제목으로 19세기 후반의 예술가를 다룬 바 있고 그의 아들 클라우스 만은 히틀러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좀더 직접적으로 괴테의 생각을 인용하여 쓴 &lt;메피스토&gt;를 남겼다. 최근까지도 이 전토은 이어진다. 러시아 비평가 선정 황금마스크상을 4차례나 수상한, 리투아니아 출신의 연극연출가 에이문타스 네크로슈스가 오는 4월 3~5일에 &lt;파우스트&gt;를 LG아트센터 무대에 올린다. 한국일보 기사에 따르면, 네크로슈스는 &lt;파우스트&gt;의 &quot;멈춰 서라, 너는 진정 아름답구나!&quot;라는 대사로 예로 들면서 &quot;삶의 최고의 순간을 정지시키고 싶어하는 것은 모든 인류의 어리석은 꿈, 그런 소망을 말하고 싶다. 관객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멈추지 말고 항상 노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가져갔으면 좋겠다&quot;고 말한 바 있다. 괴테의 필생의 대작을,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으로 받아들여, 오랜만에 심호흡 한번 하고 읽어보자.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01529&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질풍노도 시기의 한 삶&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08843368.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 안삼환 옮김 | 민음사&lt;BR&gt;
&lt;BR&gt;
  이 소설은 주인공 빌헬름이 유년 시절로 시작하여 온갖 사랑과 경험과 공부를 통하여 자신을 둘러싼 작고 제한적인 세계를 벗어나 진심으로 넓고 큰 세계와 일체감을 얻게 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루카치 식으로 말하여 '거대한 세계와 단독자로 맞서는 인간의 운명'을 예고한다. 그리고 근대의 초기에 그것은 빌헬름처럼 아름답고 조화롭지만 근대가 깊어갈수록 줄리앙 솔렐이나 므이슈킨, 라스콜리니코프이 되어 세계와 불일치되고 혼란을 겪고 파탄에 이르게 된다. &lt;BR&gt;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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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그림과 글로 떠나는 여행&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71151296.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괴테의 이탈리아 여행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박영구 옮김 | 생각의나무&lt;BR&gt;
&lt;BR&gt;
  괴테는 37세 생일 날, 축하 파티가 깊어진 새벽에 축하객 무리를 벗어나 훌쩍 이탈리아로 떠났다. 1년 9개월의 여정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북유럽의 재상이자 소설가이자 젊은 지성이었던 괴테는 지중해의 푸른 빛에서 문학과 정치와 세계의 힘을 얻었다. 이 여행으로 바로크(그리고 로코코까지 포함하여)의 한 시대는 그렇게 저물고 고전주의가 시작되었다. 그 여정이 그림까지 덧붙여진 글로 기록되어 출간된 것이다. 어느 한 시절, 음악적 고전주의 완성자 베토벤이 괴테를 흠모하여 따르기도 했다.&lt;BR&gt;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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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777613&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3월</category>
			<author>jys2003 (정윤수)</author>
			<pubDate>Sat, 21 Mar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3월 21일] 엄마야 나는 왜 갑자기 보고 싶지 - 조용필</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262676</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23404934.jpg&quot; width=&quot;330&quot; height=&quot;26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조용필은 한국문화사의 '위대한 탄생'이다&lt;/p&gt;&lt;/div&gt;조용필은, 그의 음악적 유전자가 완전히 형성된 70년대를 청춘기로 보냈는데, 이 어둡던 시절은 그에게 축복이면서 시련이 되었다. 우선 축복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이 시기가 '장르의 미분화'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 무렵 경향 각지의 젊은 청춘들은 기타를 메고 다녔다. 기타 연주를 하면서 음악의 꿈을 키웠다. &lt;BR&gt;
&lt;BR&gt;
장르의 성격이 완강한 트롯트 혹은 혼자 힘으로 연예계의 중심에 들어서기 어려웠던 여성 아티스트의 경우를 제외해 놓고 본다면 신중현이나 안치행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익숙하게 기억하고 있는 조용필, 윤수일, 최헌, 조경수 같은 이른바 '메인스트림'의 가수들도 모두 '밴드' 생활을 하며 자신에게 맞는 장르와 무대를 찾아나서던 때였다. &lt;BR&gt;
&lt;BR&gt;
조용필은 이미 경동고교 3학년 때 서소문 대한일보 건물 13층 스카이 라운지에서 첫 무대를 가졌다. 프로 활동은 아니고 어떤 사람 대신으로 잠깐 들어가서 한 것이지만 금세 그의 음악성이 소문나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 조용필은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를 연주했다. 그밖의 사이키델릭 곡들을 많이 연주하면서 컸다. &lt;BR&gt;
&lt;BR&gt;
이러한 점은 70년대의 수많은 '밴드' 가수들을 새롭게 보게 만든다. '오동잎'의 최헌과 불나비, '안개 속의 두 그림자'의 함중아와 양키스, '잊게 해주오'의 장계현과 템페스트, '나를 두고 아리랑'의 김훈과 트리퍼스, '사랑만은 않겠어요'의 윤수일과 솜사탕...... 이 대열 속에 조용필과 그림자가 있고 이는 훗날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으로 거듭난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23285329.jpg&quot; width=&quot;200&quot; height=&quot;197&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조용필, 1972년도 앨범&lt;/p&gt;&lt;/div&gt;이 무렵의 가수와 밴드와 히트곡이 언제나 완전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고 멤버 구성이 자주 바뀌었는가 하면 윤수일과 함중아처럼 한 밴드에서 동고동락하기도 하였는데, 바로 이러한 '미분화'의 시기에 이르들은 록 밴드의 기조 위에 소울, 트롯트, 고고 등을 얹어가면서 자신의 음악적 자존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지평을 저마다 찾아나섰다. 
&lt;BR&gt;
&lt;BR&gt;
나는 이 시대의 수많은 밴드와 가수들이 좀더 적극적인 평가와 해석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록'이 우월하고 트롯트는 '저열'한데, 알고 보니 함중아, 윤수일, 최헌 등이 록 사운드 배경을 갖고 있다, 그러니 좋다, 이런 식의 기계적인 칭찬을 하자는 게 아니다. &lt;BR&gt;
&lt;BR&gt;
70년대의 음악을 신중현, 산울림, 조용필로 요약하거나 대학가요제의 말랑말랑한, '새로운 듯' 하면서도 상당히 진부한, 그런 곡들로 기억하기에는 그 당대가 너무 혼란스러웠고 복잡하였다. 그 혼란기에 수많은 가수들이 자기들의 시대를 겪어나갔다. 그것을 기억하고 또한 복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함중아 노래를 들어보자. 아래 영상은 함중아의 '내게도 사랑이'다. 그 시절 그 화면은 아니지만, 이 곡을 들으면 한국형 '트롯트 록'의 기묘한 변형 과정을 느낄 수 있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youtube.com/watch?v=Ttg7A0vDUkU&amp;amp;feature=related&quot; target=&quot;new&quot;&gt;함중아 내게도 사랑이&lt;/a&gt;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youtube.com/watch?v=Ttg7A0vDUkU&amp;amp;feature=related&quot; target=&quot;new&quot;&gt;http://www.youtube.com/watch?v=Ttg7A0vDUkU&amp;amp;feature=related&lt;/a&gt; &lt;BR&gt;
&lt;BR&gt;
70년대 대중음악을 신중현, 산울림, 조용필이라는 3두 체제로 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황이지만 이 무렵의 수많은 밴드와 가수들이 미분화된 상태 속에서 다양한 장르의 지평을 열어나갔던 모습만큼은 적극적인 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더욱이 이들이 '대학가요제'라는 매우 정화되고 깨끗하고 순도 높은 세계가 아니라 서울과 인천과 지방 각지의 나이트클럽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라는 점은 내 개인적으로는 적극적인 사랑의 기억이 된다. &lt;BR&gt;
&lt;BR&gt;
풍수학자 김두규는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쌍정리가 '길마' 형상으로 한쪽으로 짐이 너무 실려 기운 형상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조용필이 태어났다. 1950년의 오늘, 3월 21일이 된다. 물론 '한쪽으로 기운' 형상 때문에 정미소까지 소유하고 있던 부잣집이었으나 선대에 이르러 급격히 가세가 기울어 생가는 없어지고 주인이 바뀌었다. '길마'란 짐을 싣기 위해 소 등에 얹는 안장과 같은 도구를 말한다. 서정주의 시집 &amp;lt;질마재 신화&amp;gt;에서 '질마'는 이 '길마'의 변형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길마'는 짐을 적당히 실었을 때에는 좌우 균형이 쉽게 잡히지만 어느 한쪽으로 짐이 많으면 기울어진다. 그래서 '딜레마'가 되는 형상이다. 김두규에 따르면 재산이 적을 때에는 큰 탈이 없지만 재산이 많아지면 가세가 기우는 형상이라고 한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47483222.jpg&quot; width=&quot;260&quot; height=&quot;269&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수록된 1975년 앨범&lt;/p&gt;&lt;/div&gt;그런 유년 시절을 보낸 후 조용필은 1968년에 경동고교를 마치고 이듬해부터 그룹 사운드 애드킨스와 파이브 핑거스를 결성해 보컬로 나섰다. 이합집산의 밴드 시절이었으므로 그 이듬해에는 김트리오의 멤버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조용필과 그림자를 결성했다. 
&lt;BR&gt;
&lt;BR&gt;
1973년의 일이다. 이 '그림자' 시절부터 조용필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 1974년에 서울에 전세 아파트를 얻었고 부모님을 모시게 되었다. 연주와 노래 실력이 출중했기 때문이었다. &lt;BR&gt;
&lt;BR&gt;
그리고 드디어 1975년, 킹레코드사에서 한 장의 앨범이 출시된다. 앨범 표지에 조용필이 얼굴이 큼직하게 박혀 있었지만 독집 앨범은 아니었다. 앞면은 조용필, 뒷면은 '달무리', '정든 배', '등불' 등으로 공연 퍼포먼스에 뛰어난 실력을 보인 안치행의 영사운드 노래로 짜여져 있었다. 앞면의 표제곡은 ‘너무 짧아요’. 그리고 '정', '돌아오지 않는 강',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섞여 들어갔다. 다들 아다시피, 바로 이 앨범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최고의 히트곡이 되었다. &lt;BR&gt;
&lt;BR&gt;
당시 조용필의 매니저는, 놀랍게도 현재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을 맡고 있는 전 국가대표 공격수 이회택 씨였다. ‘최헌과 호랑나비’로 기획 수완을 인정 받은 안치행 씨에게 조용필의 음반 제작을 부탁했고 이에 안치행 씨가 킹레코드에 제작 의뢰했지만 일명 '킹박'으로 불리는 박성배 사장이 '일본 스타일'이라는 이유로 거절한다. 이에 안치행 씨가 앞뒷면을 나누어 수록하는 방식으로 음반 제작을 강행한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04814044.jpg&quot; width=&quot;230&quot; height=&quot;241&quot; alt=&quot;&quot; style=&quot;cursor: pointer&quot; onclick=&quot;open_img('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04814044.jpg')&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조용필의 '공식 1집'이 되는 1980년 앨범 &lt;/p&gt;&lt;/div&gt;이 앨범은 당시로서는 가히 메머드급 빅뱅이랄 수 있는 100만 장 판매고를 날렸고 김부자, 나훈아, 황금심, 조미미, 박성희, 김세레나 등 수많은 가수들에 앞다투어 리메이크로 불렀으며 1978년에 같은 제목의 영화가 만들어졌고 1979년엔 폴 모리아 악단이 녹음하기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온 국민의 애창곡이 된 것은 물론이다. 
&lt;BR&gt;
&lt;BR&gt;
조용필의 본격적이며 사실상의 1집은 1980년 지구레코드에서 발매된 &amp;lt;창밖의 여자/단발머리&amp;gt;로 꼽는 수가 많다. 70년대의 기나긴 연마와 실험과 대마초 파동은 '공식 1집'의 매듭 하나도 제대로 만들 수 없던 상황이 되었다. 기타 곽경욱, 베이스 김택환, 키보드 김청산, 피아노 이호준, 드럼 이건태, 베이스 송홍섭, 기타 김석규, 키보드 유재하 등이 이합집산하위대한 탄생과 조용필의 80년대가 열린 것이다. 아래는 '창밖의 여자'다.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25&quot; height=&quot;344&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www.youtube.com/v/GsIbYLXUfDk&amp;amp;hl=ko&amp;amp;fs=1&quot;&gt;&lt;/embed&gt;&lt;BR&gt;
&lt;BR&gt;
그의 수많은 곡들은 그 자신의 기억이나 체험을 반사적으로 노래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 많은 히트곡과 아름다운 곡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기 보다는, 조용필은 아이디어와 영감과 빛나는 창의의 힘으로 곡을 만들었다. 아래는 그가 대중음악비평가들과 나눈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58045870.jpg&quot; width=&quot;230&quot; height=&quot;241&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허공'이 수록된 조용필 8집&lt;/p&gt;&lt;/div&gt;&lt;font color=&quot;#0000ff&quot;&gt;&quot;내 삶과 음악하고의 직접적인 연관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음악이라는 것은 무수히 많은 음악을 들으면서 반사적으로 나오는 아이디어, 영감,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지 자기 삶이 순탄치 않고, 좀 그렇다 해서 음악에 연관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렸을 때는 내가 부모님 속을 썩였으면 썩였지, 부모님이 내 속을 썩인 것은 아니었거든요(웃음). 
&lt;BR&gt;
&lt;BR&gt;
삶에서 어떤 영향을 받고 그런 것 없어요. 그렇다면 '한'이라는 것은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갖고 태어나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이 영화나 음악에서 자연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생각해요.&quot; &lt;/font&gt;&lt;BR&gt;
&lt;BR&gt;
자, 아래의 동영상을 보자. 백 마디 말이 필요 없는 시대의 곡이다. 불멸의 히트곡들, &amp;lt;창밖의 여자&amp;gt;, &amp;lt;돌아와요 부산항에&amp;gt;, &amp;lt;촛불&amp;gt;, &amp;lt;자존심&amp;gt;, &amp;lt;비련&amp;gt;, &amp;lt;꿈&amp;gt;, &amp;lt;친구여&amp;gt;, &amp;lt;킬리만자로의 표범&amp;gt;, &amp;lt;허공&amp;gt;, &amp;lt;그 겨울의 찻집&amp;gt;, &amp;lt;생명&amp;gt;...... 아마 이렇게 적은 곡보다 더 많은 곡들을 지금 당장 제출해내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불멸! 그런데 나로서는 아래의 곡을 각별히 기억한다. &amp;lt;고추잠자리&amp;gt;, 왜 그런가? 아래 영상을 본 후 마저 얘기하기로 한다.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25&quot; height=&quot;344&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www.youtube.com/v/YU25Hxb_toY&amp;amp;hl=ko&amp;amp;fs=1&quot;&gt;&lt;/embed&gt;&lt;BR&gt;
&lt;BR&gt;
나는 이 곡이 그의 수많은 히트곡들의 젖줄이 되는 곡이라고 생각한다. 세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13039712.jpg&quot; width=&quot;260&quot; height=&quot;318&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조용필과 그림자' 시절의 공연 안내 포스터&lt;/p&gt;&lt;/div&gt;첫 번째 이유는 가성과 진성, 탁성과 미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그 어떤 노래도 능란히 소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amp;lt;비련&amp;gt;, &amp;lt;자존심&amp;gt;, &amp;lt;허공&amp;gt; 등의 목소리, 그리고 &amp;lt;촛불&amp;gt;의 시작하는 대목 '그대는 왜 촛불을 키셨나요?'의 목소리를 생각해보라. 
&lt;BR&gt;
&lt;BR&gt;
그가 본격적으로(그리고 제대로) 민요와 판소리를 배운 바는 없지만, 대마초 파동의 시련기 동안 자신의 미성이 결국 자신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춘향가' 중에서 장원급제한 이도령이 서울에서 내려와 구걸하는 대목을 수백 번이고 불러댄 끝에 얻은 소리다. 그는 소화하지 못할 노래가 없는 가수가 되었다. &lt;BR&gt;
&lt;BR&gt;
두 번째 이유는 그가 김희갑, 정풍송 같은 당대 최고의 작곡가에게 곡을 많이 받기도 했지만 그 자신의 작곡으로 만든 대표적인 노래이기 때문이다. 김순곤의 가사에 곡을 붙인 조용필의 이 곡은 4분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수시로 화성이 바뀌고 템포가 달라지며 그 위를 달리는 연주와 노래가 능란하게 변화되어 나간다. 연주와 작곡의 신중현이 있다면 작곡과 보컬의 조용필이 있는 것이다. &lt;BR&gt;
&lt;BR&gt;
세 번째 이유는 이 노래가 7,80년대 청년들의 어떤 공허함이나 무기력함을 속절없이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조용필은 초기의 무명을 빼놓고 나면 이십대 후반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최고 자리를 내놓은 적이 없는 불멸의 스타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11036965.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6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1980년대 비주류 정서를 그린 최민화의 '분홍' 연작 중 한 작품&lt;/p&gt;&lt;/div&gt;
그런데 나는 그 불멸이 빼어난 가창력이나 작곡 실력만이 아니라 한 시대의 비주류 아웃사이더 정서를 언제나 자신의 음악의 그림자로 삼았던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화는 나지만 어디에다 대고 화를 내야 될지 모르는 상태, 사랑과 열정의 힘은 넘치지만 마땅히 그 목적과 대상을 찾지 못한 상태. 요즘은 '장기하와 얼굴들'이 이러한 노래를 부르고 있던가. &lt;BR&gt;
&lt;BR&gt;
마치 황석영의 단편 &amp;lt;섬섬옥수&amp;gt; 같고 최민화의 그림 '분홍빛 양아치' 연작 같은 그런 7,80년대 도시의 변두리, 그 비주류 아웃사이더의 헛헛함이 조용필의 노래에 짙게 묻어 있는 것이다. 특히 위에서 감상한 바로 그 &amp;lt;고추잠자리&amp;gt; 속에...... &lt;BR&gt;
&lt;/font&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한국 문화사의 분기점&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37998956.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조용필 1집 - 창밖의 여자 | 조용필 | 지구&lt;BR&gt;
&lt;BR&gt;
  이 앨범은 오버그라운드 위에서 터진 아웃사이더 정서의 꽃이다. 다양한 장르가 한 앨범 속에 있다. 한 곡에서 다른 곡으로 넘어가는 동안 슬며시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이후 조용필은 그 당시 한국 대중음악계에 통용되던 모든 장르를 다 소화했다. 한 곡에서 다른 곡으로 넘어갈 때마다, 아니 한곡 안에서 수많은 장르가 뒤섞였다. &lt;고추잠자리&gt;를 '명곡'으로 기억하고자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5115000822&amp;amp;ttbkey=ttbprague0909002&amp;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오버그라운드 위에서의 실험들&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32394547.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조용필 4집 - 못 찾겠다 꾀꼬리 | 조용필 | 지구&lt;BR&gt;
&lt;BR&gt;
  1집, 3집, 4집, 6집, 8집...... 그리고 수많은 기억들. 조용필이라면, 요즘으로 말하여 홍대앞이나 청담동의 정서만을 대상으로 할 수 없는, 가히 온국민을 대상으로 작곡하고 노래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이토록 다채로운 만화경을 펼쳐보일 수 있다니, 거듭 생각하게 만드는 앨범이다. '못찾겠다 꾀꼬리', 이런 노래는 지금 홍대앞에서 어느 인디 밴드가 발표했다 해도 믿을 만한, 무려 20여 년 전의 기록이다. &lt;BR&gt;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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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어느 시대에나 비주류 청춘들이 있다니&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63143714.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장기하와 얼굴들 1집 - 별일 없이 산다 | 장기하와 얼굴들 | 붕가붕가레코드&lt;BR&gt;
&lt;BR&gt;
  '싸구려 커피'가 큰 히트곡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 앨범의 타이틀 '별일 없이 산다'고 기억하기 바란다. 그 가사부터 아래에 적어본다. &lt;BR&gt;
  니가 깜짝 놀랄만 한 얘기를 들려주마 / 아마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거다 / 뭐냐하면 /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없다 /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lt;BR&gt;
  니가 들으면 십중팔구 불쾌해질 얘기를 들려주마 / 오늘 밤 절대로 두다리 쭉뻗고 잠들진 못할거다 / 그게 뭐냐면 /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없다 /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 이건이건 니가 절대로 믿고 싶지가 않을거다 / 그것만은 사실이 아니길 엄청 바랄거다 / 하지만 / 나는 사는게 재밌다 하루하루 즐거웁다 / 나는 사는게 재밌다 매일매일 신난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9267370154&amp;amp;ttbkey=ttbprague0909002&amp;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775203&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3월</category>
			<author>jys2003 (정윤수)</author>
			<pubDate>Sat, 21 Mar 2009 04:36:50 GMT</pubDate>
		</item>
		<item>
			<title>[3월 20일] 지상에 척도는 있느냐 그러한 것은 없다 - 횔덜린</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262372</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lt;font color=&quot;#0000ff&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39491573.jpg&quot; width=&quot;180&quot; height=&quot;257&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김지하 회고록 &amp;lt;흰 그늘의 길&amp;gt;&lt;/p&gt;&lt;/div&gt;“나는 김지하를 생각할 때마다 횔덜린이 떠오른다. 김지하의 위대한 사상 역시 극한의 고통 속에서 점화된, 성스러운 광기의 진리이다.”&lt;/font&gt;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이렇게 말한 사람은 시인 황지우다. 10년 전 쯤, 실천문학사에서 발간된 &amp;lt;김지하 사상기행 2&amp;gt;에서 10시간이 넘도록 김지하 시인과 대담을 나눈 황지우 시인이란 이런 정도의 말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lt;BR&gt;
&lt;BR&gt;
그런데 황지우가 김지하를 말하면서 횔덜린을 언급한 것은, 김지하의 시와 사상과 생애를 일별한 후 그와 ‘흡사한’ 서구의 어떤 전형을 찾아 단순히 겹쳐 놓은 것만은 아니다. &lt;BR&gt;
&lt;BR&gt;
그 무렵에, 그러니까 1995년에서부터 1997년 즈음에 시인 김지하는 ‘횔덜린’이라는 시를 쓴 적 있다. 아래에 소개한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횔덜린을 읽으며 &lt;BR&gt;
운다 &lt;BR&gt;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lt;BR&gt;
즐거워서 사는 것도 아니다.' &lt;BR&gt;
&lt;BR&gt;
어둠이 지배하는 &lt;BR&gt;
시인의 뇌 속에 내리는 &lt;BR&gt;
내리는 비를 타고 &lt;BR&gt;
거꾸로 오르며 두 손을 놓고 &lt;BR&gt;
횔덜린을 읽으며 &lt;BR&gt;
운다 &lt;BR&gt;
&lt;BR&gt;
어둠을 어둠에 맡기고 &lt;BR&gt;
두 손을 놓고 거꾸로 오르며 &lt;BR&gt;
내리는 빗줄기를 &lt;BR&gt;
거꾸로 그리며 두 손을 놓고 &lt;BR&gt;
횔덜린을 읽으며 &lt;BR&gt;
운다 &lt;BR&gt;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lt;BR&gt;
즐거워서 사는 것도 아니다.' &lt;/font&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47768975.jpg&quot; width=&quot;180&quot; height=&quot;24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독일 시인 횔덜린&lt;/p&gt;&lt;/div&gt;성급한 사람들에게는, 그러니까 김지하의 시와 그밖의 많은 일들을 오래 전의 ‘죽음의 굿판’이라는 깔때기 혹은 ‘생명 운운하고 도사연’ 한다는 식으로 우선 접고 보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시가 호시절 다 보낸 유명인사의 청승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나 혹은 꼭 그렇지는 않아도 조금은 껄끄러운 사람이라면 시집 &amp;lt;검은 산 하얀 방&amp;gt;을 다시 읽을 필요가 있고, 그럴 시간 내기도 어렵다는 사람이 있다면 시 ‘무화과’를 찾아 읽을 필요가 있다. 시 ‘무화과’ 정도면 검색 포털 한두 번 클릭하면 다 찾아볼 수 있다. 
&lt;BR&gt;
&lt;BR&gt;
물론 김지하의 시와 생명 사상에 대한 평가와 해석은 엇갈릴 수 있다. 시인 특유의 직관과 사상적 성찰이 빚어낸 결실이라고 볼 수도 있고 국수주의와 신비주의의 비빔밥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전남대 철학과의 김상봉은, 김지하가 여러 이론을 지적 성찰 없이 필요한 대목만 끌어들이는 아마추어리즘이며 지적 허영과 자기 감상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반면 외국어대 철학과 이기상은 동서의 사유를 재해석하여 오늘날 온 세계의 화두인 생명 문제로 성찰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lt;BR&gt;
&lt;BR&gt;
그는 ‘하이데거의 시적 언어와 근대성’(&amp;lt;현대시&amp;gt; 1999년 4월호)에서, 하이데거가 파악한 횔덜린의 시와 언어를 살펴본 후 ‘이러한 혼란의 시대에, 고향상실, 신 부재의 시대’에 시인의 신성한 역할을 강조하면서 김지하의 시 ‘빗소리’를 인용한 바 있다. “하늘에서 내려와 / 땅을 돌아 다시 하늘로 / 비 솟는 소리 / 듣네”라는 구절이 있는 시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67062050.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48&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1790년 경, 횔덜린의 자필 메모와 실루엣 모습&lt;/p&gt;&lt;/div&gt;
여러차례 언급된 대로 오늘 3월 20일은, 시인이자 소설가인 횔덜린이 1770년에 독일 슈바벵의 네카 강변 라우펜에서 태어난 날이다. 수도원 관리인 아들로 태어난 횔덜린은 1784년에 덴켄도르프에 있는 수도원 부속학교를 마치고 1788년에 튀빙엔대학 신학과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고전 그리스어, 철학, 시 등을 익혔고 헤겔, 셸링 같은 명민한 사람들과 교유했다. 튀빙엔대학을 마친 후 고향 선배가 되는 시인 실러의 주선으로 가정교사가 되었다. 이 근대 초기의 유럽에서는 귀족 가문이나 부유한 시민계급의 집에 뛰어난 지식인들이 가정 교사로 일을 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68257117.jpg&quot; width=&quot;220&quot; height=&quot;26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횔덜린의 대표작 &amp;lt;히페리온&amp;gt;&lt;/p&gt;&lt;/div&gt;1796년 프랑크푸르트의 은행가 집의 가정교사가 된 횔덜린은 주제테 부인과 사랑을 나누게 되면서 작품 활동에 활기를 띄게 된다. 주제테 부인은 디오티마(Diotima)라는 이름으로 &amp;lt;휘페리온&amp;gt;이나 그밖의 많은 시에 나타난다. 
&lt;BR&gt;
&lt;BR&gt;
하지만 이뤄지기 어려웠던 사랑으로 나눈지 3년 만에 횔덜린은 주제테 부인과 헤어지게 되고 이 슬픔을 견디기 위해 유럽 여러 도시를 전전하게 된다. 그러다가 1802년 경에 정신착란 증세를 겪게 된다. 1806년부터는 심각한 상태가 되어 튀빙엔으로 오게 되고 그곳의 목수 치머 일가의 보호를 받으며 무려 36년 동안이나 고통스럽게 살다가 죽었다.&lt;BR&gt;
&lt;BR&gt;
독문학자이자 번역가인 서울대 전영애 교수는 계간 &amp;lt;시인세계&amp;gt;에 기고한, 독일 지역 문학 순례기에서 횔덜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그의 긴 생애의 나중 절반은 광기의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죽은 후에도 어둠에 묻혔다가 사후 한 세기쯤이 지나서부터야 조명되기 시작했다. 광인 횔덜린이 이따금 정신이 들 때 기록해놓은 시편들은 삶의 핵을 꿰는 절창이다. 그가 잠겨 있던 36년쯤 되는 긴 광기의 어둠의 세월에 그의 육신을 거두어 준 목수의 집이 튀빙엔 네카 강변 물가에 아직도 있다. 그 집 ‘횔덜린 탑’은 내게 손바닥 위처럼 훤하다. 오래 전 내가 처음 독일에서 공부를 해보겠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가야 할 곳은 당연히 튀빙엔이었다. 그 ‘탑’집 꼭대기 방 하나 때문에.&lt;/font&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14291934.jpg&quot; width=&quot;320&quot; height=&quot;257&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튀빙엔 네카 강변 집에서 횔덜린은 30여 년 동안 살았다&lt;/p&gt;&lt;/div&gt;횔덜린은 살아 생전에는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의 친구였던 헤겔이나 셸링 같은 철학자들 그리고 가까이 지냈던 괴테나 실러 같은 문호들이 ‘완전성’을 실천해 나가는 삶이었던 것에 비하여 횔덜린은 거의 100년 가까이 잊혀진 사람이었다.
&lt;BR&gt;
&lt;BR&gt;
20세기 초에 들어서서 비로소 다시 부각되었는데, 이는 철학자 하이데거의 적극적인 해석에 따른 것이거니와 내 생각에는 1차 대전을 전후로 하는 현대 독일의 위기가 횔덜린을 호명한 것은 아닌가 한다. &lt;BR&gt;
&lt;BR&gt;
범우사판 &amp;lt;히페리온&amp;gt;을 번역한 고 홍경호 한양대 교수는 역자 서문에서 ‘1,2차 대전 당시 전선에서 전몰한 독일 병사들의 배낭에는 반드시 그의 작품이 보물처럼 간직될 정도’라고 썼다. 그의 소설 &amp;lt;히페리온&amp;gt;은(제목에 쓰인 신화 속의 거신이 아니라) 터키의 지배에 놓인 그리스에 참전한 병사의 서간문으로 된 작품으로, 그 작품성과 상관없이, 참호 속의 병사들은 이 작품 속에 깃들어 있는 빛나는 자연과 강렬한 사랑의 문장들을 읽고 또 읽었을 것이며 더러는 애틋한 대목을 옮겨 적어 고향의 가족과 애인에게 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예컨대 &amp;lt;히페리온&amp;gt;의 다음과 같은 대목 말이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93769698.jpg&quot; width=&quot;200&quot; height=&quot;267&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튀빙엔 네카 강변의 횔덜린 타워&lt;/p&gt;&lt;/div&gt;“디오티마여, 나는 이 자라나는 행복을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화려했던 어느 시기와도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하잘 것 없는 승리도 내게는 마라톤이나 테르모피레나 프라테아의 승리보다 기쁜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까? 우리들의 마음에는 쾌유라는 생명이 아직 병을 모르는 더러움 없는 생명보다 더욱 거룩한 것이 아닐까요. 청춘이 지나간 후에 우리들은 비로소 청춘을 사랑하며 잃어버린 청춘이 돌아와 주었을 때 비로소 그것은 혼을 속속들이 행복으로 넘치게 합니다.”&lt;/font&gt; 
&lt;BR&gt;
&lt;BR&gt;
횔덜린은,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 활동한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를 자연스럽게 떠올려 준다. 시 만큼이나 중요한 미술 작업을 남긴 블레이크는, 바로 그 시와 미술을 통하여 근대에 문턱에 이른 서구 문명의 위기와 불안을 섬뜩하게 묘사해냈다. 횔덜린이 36년 동안이나 튀빙엔의 작은 집(타워)에 유폐된 삶을 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블레이크 역시 동시대 사람들에게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다. 환영에 시달리는 사람만이 써낼 수 있고 그릴 수 있는 작품을 남긴 블레이크는 그 자신의 위태로운 삶과 작품으로 조화로운 황금 시대의 꿈이 사라지고 인간의 인간성이 파괴되어 가는 근대의 위기를 담아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95738274.jpg&quot; width=&quot;190&quot; height=&quot;227&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횔덜린 기념 우표&lt;/p&gt;&lt;/div&gt;횔덜린이 고전 그리스의 신화와 비극과 서사시의 형식으로 담아낸 것 역시 다름아닌 18세기와 19세기 사이의 유럽 문명이었다. 횔덜린은 ‘궁핍한 시대’의 시인의 역할을 물었고 ‘지상의 척도’를 물었다. 그의 대표작이 되는 시 ‘빵과 포도주’는 모든 고통과 혼란을 이겨낸, 흡사 율리시즈의 모험과 오르페우스의 시련을 다 이겨낸 다음의 상태를 노래하며 끝이 난다.
&lt;BR&gt;
&lt;BR&gt;
모든 고통과 시련이 끝났을 때, 머리가 3개이고 꼬리는 뱀 모양으로 되어 있는 지옥 문을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마저도 술에 취해 잠이 드는 새로운 시대가 오는 것이다. 그러한 시대를 횔덜린은 보지 못하였다. 그는 36년 동안이나 광기에 사로잡혀 지내면서 ‘천복의 나날’을 희구하였으나 그가 아래처럼 노래한 시대는 여전히 오지 않고 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천복을 입은 현자들은 그것을 알리라, 사로잡힌 영혼으로부터 &lt;BR&gt;
한 점 미소 반짝이고, 굳었던 눈도 빛 받아 다시 풀리리라. &lt;BR&gt;
거인은 대지의 팔에 안기어 꿈에 취해 쿨쿨 잠자고, &lt;BR&gt;
시기심 많은 지옥의 개 케르베로스마저도 술 마시고 잠들리라.&lt;/font&gt; &lt;/font&gt;&lt;/p&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지상에 척도는 있느냐&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81412289.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횔덜린 시선 | 횔덜린 지음 | 장영태 옮김 | 유로서적&lt;BR&gt;
&lt;BR&gt;
  횔덜린의 작품 가운데 85편의 시를 모은 시선집이다. 독일어 원문과 해설을 덧붙인 것으로 횔덜린 연구에 많은 시간을 바친 장영태 교수의 결실이다.  국내 문학의 한 풍경으로 그의 시는, 문학평론가 김우창의 비평집으로 인하여 깊이 알려진 바 있다. 첫 비평집 &lt;궁핍한 시대의 시인&gt;도 횔덜린의 시와 연관 있거니와 특히 두 번째 비평집 &lt;지상의 척도&gt;는 아예 그의 시를 따온 것이다. 그 책 앞에 시의 한 대목이 적혀 있다. 아래와 같다. &lt;BR&gt;
&lt;BR&gt;
  땅 위에 척도가 있느냐? 그러한 것은 없다. 천둥의 길을 창조자의 세계는 막지 않는 것이 아니냐. 햇빛 아래 피어난 한떨기 꽃 또한 아름답다. 눈은 삶 가운데 때로는 꽃보다 아름답다 이름할 것들을 본다. &lt;BR&gt;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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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황금 시대의 희구하며 &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24615052.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휘페리온 | 횔덜린 지음 | 장영태 옮김 | 을유문화사&lt;BR&gt;
 &lt;BR&gt;
 본문에서 소개한 것처럼 1,2차 대전 당시 전장터의 병사들이 그의 작품을 보물처럼 간직했던 것은 그가 고전 그리스 운문을 독일어로 재현해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전장터에서 독문학 공부할 병사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작품이 신과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완전성’을 희구하였고 그것이 불가능한 상태를 절망하였으며 그럼에도 한가닥의 비탄 속 희망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에 전장터의 병사들이 읽고 또 읽었을 것이다. 이 작품이 바로 그러하다. 터키 압제 하의 18세기 후반 그리스가 배경이다. 완전성, 존재의 시원, 삶의 근원을 찾아가려는 주인공 휘페리온이 성찰이 서간체로 이어진다. &lt;BR&gt;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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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시인으로서의 김지하 &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99466285.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화개 | 김지하 지음 | 실천문학사&lt;BR&gt;
&lt;BR&gt;
  이 시집으로 김지하는 두 개의 큰 상을 받았다. 2002년 제10회 대산문학상 시부문과 제 16회 만해문학상이 그것이다. 이미 한국 시문학사의 큰 자취를 남긴 시인이 이 두 개의 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리 중요한 요소는 아닐 지 몰라도, 실은 그가 시력이나 명성에 비해 문학상을 많이 받은 시인은 아니고, 더욱이 90년대 이후 생명 담론과 율려 운동을 펼쳤으나 그것에 대해서 찬반 양론의 반향이 되었으나 시 만큼은 확실한 성취를 이뤘다는 점을 말해준다. &lt;검은 산 하얀 방&gt;, &lt;중심의 괴로움&gt;, &lt;화개&gt; 이렇게 읽으면 된다. 이 시집 이후에 &lt;유목과 은둔&gt;이 나왔지만, 이 시집은 그의 담론이 시의 옷을 입은 것처럼 보인다. &lt;BR&gt;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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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766010&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3월</category>
			<author>jys2003 (정윤수)</author>
			<pubDate>Thu, 19 Mar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3월 19일] '병원' 컨셉의 카페? 카페처럼 꾸민 병원? - 제너럴 닥터</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262083</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14529180.jpg&quot; width=&quot;200&quot; height=&quot;298&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홍대앞의 병원 '제너럴 닥터'&lt;/p&gt;&lt;/div&gt;나는 처음에 그곳이 하루 낮밤마다 이색적인 카페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홍대앞의 한 풍경인 줄 알았다. 카페였는데, 아늑한 곳이었다. 진품명품은 아니지만, 테이블마다 서로 다른 살집과 뼈대와 근육을 가진 의자들이 있어서 한 곳에 자리를 잡기 전에 여기저기 의자에 다 앉아보는, 그런 작은 재미가 있었다. 그런 카페인 줄 알았다. 출입구 옆의 세로로 길게 내려오는 창문 아래의 테이블에 오후의 햇살에 다소곳이 떨어지고 있었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지난 연말에 어느 방송국 사람들과 밥을 먹고 난 후의 일이었다. 홍대 정문앞, 놀이터 옆, 2층의 식당이었는데 맛있었다. 밥을 다 먹고 난 후, 그 식당의 위층에 있는 카페로 잠시 올라갔다. 실은 내가 그때 몸살이 조금 있었는데 가까운 병원에 잠깐 갔다 오겠다고 하자 일행 중에서 '작가'로 일하는 분이 그냥 위의 카페에 올라가면 다 잘 될 거라고 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채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lt;BR&gt;
&lt;BR&gt;
3층의 카페에서, 자리를 잡고 앉은 후, 커피나 그 무슨 음료 같은 것을 시키고 나자, 방금 서서 주문을 받던 사람이 '누가 아프다고 하셨죠?'라고 물었다. 손님의 주문을 받고 원두 커피를 내려서 서빙을 하는 그 사람은 의사였다. &lt;BR&gt;
&lt;BR&gt;
의사? 매일이다시피 '이색 카페'들이 문을 여는 홍대앞, 그런 지역의 카페인데 '의사'라면 흰 가운에 약장이나 주사바늘 같은 게 '컨셉'으로 장식되어 있는 그런 곳? 혹시나 일본 성인 영상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간호사 복장에 그 무슨 요란하고 어색한 곳? 그런 곳은 아니었다. 그 카페의 이름은, 아니 그 병원의 이름은 '제너럴 닥터', 진짜 의사였고 진짜 병원이었다(정확하게 말하자면 '의원'이지만, 의료법상의 개념이 아니라 '아프면 병원에 가봐' 할 때처럼 오늘은 '병원'이라고 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44924441.jpg&quot; width=&quot;250&quot; height=&quot;17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amp;lt;제너럴 닥터&amp;gt; 진찰실 (사진 제너럴닥터 홈피)&lt;/p&gt;&lt;/div&gt;'제너럴 닥터'. 2007년 5월 1일에 문을 열었다. 연대 의대 출신의 김승범 원장이 아름다운 실험을 시작한 것이다. 환자 1인 당 진료 시간이 보통 30분에서 심지어는 1시간을 넘기기도 했다. 따로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서 커피도 제대로 내려서 서빙까지 했다. 사업자등록도 카페와 병원 모두 냈다. 그러니까 '병원' 컨셉의 카페도 아니고 카페처럼 일부러 '꾸민' 병원도 아닌, 병원이자 카페이고 의사이자 바리스타인 공간이다. 인테리어를 전공한 동생이 실내를 따스하게 꾸몄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그러다가 한 사람이 더 참여했다. 단대 의대를 나온 정혜진 원장이다. 나를 진료한 의사다. 정혜진 원장도 처음에는 친구 만나러 '카페'에 들렀다가 김승범 원장과 7시간이 넘게 대화를 나눈 끝에 합류하게 되었다고 한다. &lt;BR&gt;
&lt;BR&gt;
진료를 받았다. '진찰실', '주사실', '원장실' 뭐 그렇게 따로 분류된 공간이 없었다. 카페의 한쪽 구석이 그 세 기능을 다하고 있었다. 30분 가까이 받았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이 잡듯이 진찰한 것은 아니고(몸살이니까), 진료 상담이었다. 대화였고 공부였다. 정혜진 원장은 나보다 더 내 몸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내 건강에 대해, 내 생활 습관이나 체질에 대해, 나보다 더 관심이 많아 보였고,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열정적이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09322804.gif&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4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amp;lt;제너럴 닥터&amp;gt; 정혜진 원장이 블로그에 연재하는 진료 이야기의 일부분&lt;/p&gt;&lt;/div&gt;
큰 병은 앓아본 일이 없지만, 가을에서 겨울 사이에 꼭 한번은 마른 기침에 오한을 하는 수가 있어서 해마다 병원을 다닌 셈인데, 진료 시간이 3분을 넘긴 기억이 없다. 그런데 30분이 넘게 진료를 하고 상담을 하고 대화를 하였다. 내게는 또다른 공부가 되었다. &lt;BR&gt;
&lt;BR&gt;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 자료에 따르면 2007년 7월 현재 하루 동안 서울시 소재 개인병원 중 내과 방문 환자는 평균 55명(이비인후과 59명, 소아과 51명). 55명은 평균이고 조금 '잘 되는' 병원은 100여 명 이상의 환자를 본다고 한다. 게다가 환자가 몰려오는 시간대가 있다. 1분 정도 진료하는 것도 빠듯한 현실이다. 그런 사정을 전체적으로 감안하더라도 30분 가까이 진료를 하는 '제너럴 닥터'의 실험(그들에게는 일상)은 아름답게 느껴졌다. 나는 내가 처음으로 '진료'를 받는다는 느낌을 가졌다.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54127830.gif&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269&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amp;lt;제너럴 닥터&amp;gt;는 환자들과 일일이 상담하면서 가벼운 질환의 '통념'까지 바꿔준다. &lt;/p&gt;&lt;/div&gt;
정혜진 원장은 처방전을 써줬다. 그런데 약국에 갈 필요가 없는 처방전이었다. 30분 가까이 감기, 몸살, 항생제, 온기, 진통제 등에 대해 설명한 만화풍의 그림과 글씨가 적혀 있었고 그 끝에 '따뜻한 물 자주 드시고 푹 쉬세요'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약국에 제출할 사항이 없는 처방전이었다. &lt;BR&gt;
&lt;BR&gt;
물론 그날 이후로 내 몸이 원기왕성해지고 활력 넘치게 변한 것은 아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그 여의사에게는 진심으로 미안한 얘긴데), 나는 하룻밤을 더 한기를 참다가 다음 날 가까운 약국에 가서 종합감기약을 사서 먹었다. '따뜻한 물'을 자주 마시라는 처방은 일일이 지켰지만 '푹 쉬세요'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처방이었다. 이 블로그 연재 원고에 다른 일들과 원고를 더하여 대략 1만 매의 원고를 써내야 했던 과정이었으므로 나는 얼른 약국에 가서 종합감기약을 먹은 후, 그날 치 원고에 매달려야 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10876178.jpg&quot; width=&quot;100&quot; height=&quot;100&quot; alt=&quot;&quot;/&gt;&lt;/div&gt;그 후에 한 번 더 그곳을 갔다. 아파서 간 것은 아니고 모임이 있어서 일부러 그곳을 약속장소로 잡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병원'에 간 게 아니라 '카페'에 간 셈인데, 아늑하였다. 일행들이 수런수런 떠드는 사이에 잠시 둘러보았다. &lt;BR&gt;
&lt;BR&gt;
아름다운 곳이었다. 소도구나 커피잔 세트나 의자 등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얼마든지 다른 방향으로 질주할 수 있음에도 정갈한 실험을 하고 있는 모습, 그 자체가 아름다워 보였다. &lt;BR&gt;
&lt;BR&gt;
오늘 3월 19일은 SF 소설의 선구자 아서 클라크가 지난 2008년에 사망한 날이고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공'한 칼 아이히만이 지난 1906년에 태어난 날이며 브루스 윌리스와 조광래 감독의 생일이 되는 날이지만, 이제 며칠 남지 않은 이 블로그에서 꼭 한번은 두 젊은 의사의 소박한 실험을 소개하려는 마음에서, 잠시 갓길로 빠져 보았다. &lt;BR&gt;
&lt;BR&gt;
더 많은 이야기는 최근 발간된 &amp;lt;제너럴 닥터&amp;gt; 및 아래의 주소로 찾아가면 된다.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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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어느 이상한 동네병원 이야기&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408086549.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제너럴 닥터 | 김승범, 정혜진 지음 | 이상미디어&lt;BR&gt;
&lt;BR&gt;
  두 사람이 함께 썼다. 의대 출신이니까 공부를 잘 했을 것이다. 그런데 글도 잘 쓴다. 이 병원의 사이트를 방문해보면 알겠지만 만화풍의 그림도 잘 그린다. 어렵고 복잡한 것을 도해하여 쉽게 설명하는 재주가 있다. 사진도 잘 찍는다. 커피도 잘 내린다. 이런 세상에나, 말로만 듣던 바로 그 '엄친아, 엄친딸'이다. 그런데 시샘이나 질투 보다는, 아름답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lt;BR&gt;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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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현대의 구조, 그 질병&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99075035.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죽어가는 자의 고독 |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 김수정 옮김 | 문학동네&lt;BR&gt;
&lt;BR&gt;
  지난 해, 6월 22일자 이 블로그에서 다룬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책을 다시 꺼내들었다. 그의 사상적 면모를 알 수 있는 다른 책으로 &lt;기득권자와 아웃사이더&gt;를 꼭 살펴보기 바란다. 아무튼 이 책은 현대의 죽음과 질병과 문명과 삶에 대한 성찰이다. 엘리아스는 말한다. &quot;우리는 극단적인 형태 속에서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일반적인 문제 중의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죽어가는 이들에게, 그들이 다른 인간 존재로부터 떠나갈 때 절실히 필요로 하는 도움과 사랑을 줄 수 없다는 점이다. 단지 그들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을 상기시킨다는 이유로 죽어가는 이들을 멀리하는 것이다.&quot;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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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왜 질병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오는가&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28359658.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권력의 병리학 | 폴 파머 지음 | 김주연, 리병도 옮김 | 후마니타스&lt;BR&gt;
&lt;BR&gt;
  의사이자 인류학자인 폴 파머의 귀한 기록이 최근에 출간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지구가 23.5도 보다는 훨씬 더 많이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회적 약자, 나아가 전지구적 차원의 약자는 이 최첨단의 과학과 의학의 관심으로부터 저 멀리 동떨어져 있다. 비용이나 효율성은 큰 나라 큰 도시 중심의 의료 구조를 만든다. 저자는 그 어느 시대에서나 가난한 사람들이 병원균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고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고통 속에서 죽어간다고 본다. 그래서 의학(의사)은 가난과 싸우는 사람을 위해 헌신해야 할 임무가 있다고 폴 파머는 말한다. 이런 주장이나 말을 하기 위해, 저자가 수많은 자료와 현황을 검토한 점이 이 책을 신뢰하게 만든다. &lt;BR&gt;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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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758346&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3월</category>
			<author>jys2003 (정윤수)</author>
			<pubDate>Wed, 18 Mar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3월 18일] 사랑, 고독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기 - 에리히 프롬</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261817</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어린아이 때, 욕실에서 화장수 병을 들고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 연설을 연습했었다고 하는 케이트 윈슬렛. 올초에 &amp;lt;더 리더&amp;gt;와 &amp;lt;리볼루셔너리 로드&amp;gt;로 그 연습한 바를 톡톡히 실천했다. 영국 출신의 이 여배우는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amp;lt;리볼루셔너리 로드&amp;gt;로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amp;lt;더 리더&amp;gt;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amp;lt;더 로드&amp;gt;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lt;/p&gt;
&lt;p&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58300540.jpg&quot; width=&quot;421&quot; height=&quot;274&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영화 &amp;lt;더 리더&amp;gt;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케이트 윈슬렛 (사진 누리픽쳐스)&lt;/p&gt;&lt;/div&gt;
다른 경쟁작이 약세였던 점도 있지만, 두 영화에서 케이트 윈슬렛은 화면 바깥의 한 점을 한참이나 응시하는 표정으로 치명적인 상황의 긴장과 불안을 절실하게 보여주었다. 원래는 니콜 키드먼이었다고 한다. 몇 장면을 찍기도 했는데 임신하는 바람에 케이트 윈슬렛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니콜 키드먼이었다면,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왜 이런 허튼 소리를 하는지는 지난 6월 20일자 이 블로그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lt;BR&gt;
&lt;BR&gt;
&amp;lt;더 리더&amp;gt;는 법학과 교수인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원작 &amp;lt;책 읽어주는 남자&amp;gt;를 영화로 한 것이다. 1988년에 레몽 장의 원작을 영화로 한 &amp;lt;책 읽어주는 여자&amp;gt;도 있었는데, 그것은 소품이었고 봄날의 커튼 빛이 나는 영화였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이 영화는 심호흡을 거듭해야만 하는 영화다. 영화의 전반전은 15세 학생과 36세 여인의 에로티즘 때문에 심호흡을 하게 되고 후반전은(스포일러 때문에 생략함) 이 여인이 처한 비극적인 정황과 그에 한발짝도 들여놓을 수가 없는 남자의 망설임 때문에 심호흡을 하게 된다.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25&quot; height=&quot;344&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www.youtube.com/v/QLBNhYtHs3Y&amp;amp;hl=ko&amp;amp;fs=1&quot;&gt;&lt;/embed&gt;&lt;BR&gt;
&lt;BR&gt;
이 영화는 ‘사랑’ 영화이지만 그러나 흔히 말하는 남녀의 치명적인 사랑, 그 이상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영화의 수입사는 ‘당신의 가슴을 두드릴 단 하나의 감동 멜로’라는 광고 문구를 쓰고 있는데, 대중적인 문투를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인지 몰라도, 너무나 상투적이고 진부하다. 영화를 꼼꼼히 보면 이 문구가 실은 케이트 윈슬렛이 열연한 것과 상당히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게 된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41857128.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4&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영화 &amp;lt;더 리더&amp;gt;의 한 장면 (사진 누리픽쳐스)&lt;/p&gt;&lt;/div&gt;
두 사람의 사랑은 ‘진공 상태’의 사랑이 아니라 전후 독일 사회라는 그물망 속의 사랑이 된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에 멈추지 않고 고백, 죄의식, 참회 같은 윤리적인 테마와 겹쳐진다. 이 영화(혹은 소설)에 대하여 미국 쪽의 감상평은 '십대 소년과 삼십대 여인의 사랑'이 초점이었고 유럽(특히 독일) 쪽은 '죄의식과 참회의 방식'이었다고 한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20654227.jpg&quot; width=&quot;180&quot; height=&quot;129&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사상가 에리히 프롬&lt;/p&gt;&lt;/div&gt;오늘 3월 18일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적인 사회학자인 에리히 프롬이 지난 1980년에 사망한 날이다. 그는 적어도 국내에서는 &amp;lt;사랑의 기술&amp;gt;로 유명하다. 어느 헌책방에서나 이 책을 볼 수 있다. 많이 팔렸기 때문이기도 하고(최인훈의 &amp;lt;광장&amp;gt;처럼 많이 팔린 책일수록 헌책방에서 더 많이 볼 수 있다), 누군가는 사랑의 ‘기술’을 익힐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샀다가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밖에 없어서 내다팔았는지도 모르겠다.
&lt;BR&gt;
&lt;BR&gt;
에리히 프롬은 1900년 3월 23일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프랑크푸르트대학,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사회학과 심리학을 공부하였다. 1929∼1932년에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의 연구원으로 활동하다가 히틀러의 집권하자 1933년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망명한 유럽 지식인 중에서는 특이하게도 미국 시민으로 귀화하여 컬럼비아대학, 멕시코 국립대학, 예일대학 등에서 가르쳤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17150901.jpg&quot; width=&quot;170&quot; height=&quot;242&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에리히 프롬 &amp;lt;존재의 기술&amp;gt;&lt;/p&gt;&lt;/div&gt;히틀러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프롬은 2차 대전 직후 극도의 보수적인 냉전 분위기 속에서 기승을 부린 매카시즘에 맞섰고 1950년대 중반에는 미국 사회당에 가입해 활동을 했다. 베트남전 시기에는 반전평화 운동에 참여하였다. 반전을 앞세운 민주당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의 예비후보 경선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는 1974년에 스위스 무랄토로 이주했으며 그곳에서 1980년의 오늘, 3월 18일에 타계하였다. 저서로 &amp;lt;사랑의 기술&amp;gt;을 포함하여 &amp;lt;자유로부터의 도피&amp;gt;, &amp;lt;건전한 사회&amp;gt;, &amp;lt;불복종에 관하여&amp;gt; 등이 있다.
&lt;BR&gt;
&lt;BR&gt;
에리히 프롬의 주된 관심은 인간의 마음이 사회와 어떤 연관 아래 변화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결정판이 &amp;lt;사랑의 기술&amp;gt;이다. 프롬에 따르면, 현대인들은 사랑이란 즐거운 감정이라고 믿고 있으며 따라서 사랑에 대해 무엇인가 배워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 사실 그렇다. 누가 사랑에 대해 ‘학문적으로’ 배우려고 하겠는가. 그럴 시간이 있다면 성 상담을 하거나 직접 사랑을 찾아 나서는 게 빠를 것이다. &lt;BR&gt;
&lt;BR&gt;
하지만 프롬은 ‘사랑의 기술’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사랑에 대한 이론은 인간의 실존이라는 상황으로부터 시작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모태로부터 분리되어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으로 추방당하게 된다. 확실한 것은 오직 죽음 뿐. 이 때문에 정신의 밑바닥에는 버림받은 감정, 자신의 쓸모 없음에 대한 학대의 감정, 죽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 같은 실존적 의식이 ‘이미 그리고 언제나’ 깔려 있게 된다. 프롬은 말한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따돌림의 상태를 극복해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려는 욕구이다. 이 목적의 실현에 절대적으로 실패할 때 광기가 생긴다. 모든 시대, 모든 문화의 인간은 동일한 문제, 곧 어떻게 따돌림의 상태를 극복하는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결합하는가, 어떻게 자신의 개체적 생명을 초월해서 상대와 합일을 찾아내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lt;/font&gt; &lt;BR&gt;
&lt;BR&gt;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찾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합일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을 갖게 된다. 그래야만 실존적 불안감과 고독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거부 당할 때 인간은 극도의 비참한 상태로 전락한다. 이로써 사랑의 진정한 가치가 확인되는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34609593.jpg&quot; width=&quot;190&quot; height=&quot;29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프롬 저 &amp;lt;자유로부터의 도피&amp;gt;&lt;/p&gt;&lt;/div&gt;사랑은 인간에게 있어서 능동적인 힘을 부여한다. 서로를 분리시켰던 벽을 허물어 버리며 인간을 타인과 결합시키게 한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한다. 그렇다고 원시적인 상태로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인격과 성과 가치를 존중하면서 서로가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다.
&lt;BR&gt;
&lt;BR&gt;
사랑은 두 존재를 하나로 일치시키면서 동시에 고유한 인격체로 남아 있게 만든다. 이런 상태의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적극적인 감정이 되며 이러한 고결한 감정에 의해 연민, 보호, 책임, 존경 같은 것이 나타난다. &lt;BR&gt;
&lt;BR&gt;
이 개인적 사랑은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에는 이 세계가 더 없이 아름다우면서도 뭔가 극복해야 할 것이 많은 연민의 대지로 여기지는 것이다. 반대로 실연에 빠진 사람에게 이 세상은 저주를 내뱉고 싶은 환멸의 땅이 되기도 한다. 프롬은 만일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lt;BR&gt;
&lt;BR&gt;
프롬의 ‘사랑학’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 이어진다. 이 점이 그를 조잡한 연애학 박사들과 확연히 구분해준다. 자본주의 사회는 정치적 자유의 원리와 시장에 의한 경쟁 원리에 따른 사회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 구조는 자본 집중화와 노동의 조직화를 낳게 하고 이는 비극적인 인간 소외로 이어진다. 개인은 개성을 잃게 되고 거대한 산업 체계 속에서 얼마든지 소모해도 괜찮은 나사처럼 전락하는 것이다. &lt;BR&gt;
&lt;BR&gt;
자본주의는, 자신에 대해 집단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사람들, 왕성하게 소비하는 사람들, 취미가 표준화되어 쉽게 영향 받는 사람들, 어떤 소비 성향과 취향을 갖게 될 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사람들을 양산한다. 개인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틀에 박힌 생활 양식에 따라 왕성한 소비자가 될 뿐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74487817.jpg&quot; width=&quot;190&quot; height=&quot;274&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프롬은 '현대의 내면'을 분석했다&lt;/p&gt;&lt;/div&gt;그 결과 현대의 개인은 동료, 사회, 자연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 현대 도시는 많은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있는데(사무실, 지하철 역, 학교, 거리), 그 모든 곳에서 개인은 공동체의 건강한 구성원이 아니라 집단 속의 군중이 될 뿐이다. 고독, 불안감, 죄책감의 일상적으로 개인을 지배하게 된다.
&lt;BR&gt;
&lt;BR&gt;
이런 상태임에도 현대인은 자신의 고독과 불안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자본주의가 고독을 깨닫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완화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문화 오락들에 의한 규격화된 볼거리 때문에 개인은 자신의 절망감을 깨닫지 못한 채, 끝없이 리모컨을 돌리며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카우치 포테이토, 즉 소파(카우치)에 앉아 감자칩이나 팝콘을 먹으면서 텔레비전을 보며 지내는 현대인들에게 사랑의 기술, 사랑의 회복, 사랑의 사회가 절실하다고, 프롬은 말한다. &lt;BR&gt;
&lt;BR&gt;
이론적으로 지당할 뿐만 아니라, 이제 곧 봄 아닌가, 사랑밖에 아무 것도 모르는 그런 계절풍마저 불고 있다. 꼭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사랑을 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애틋해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치명적인 불치병이다. &lt;/font&gt;&lt;/p&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에리히 프롬의 사상과 생애&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77483182.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에리히 프롬과의 대화 | 박찬국 지음 | 철학과현실사&lt;BR&gt;
&lt;BR&gt;
  에리히 프롬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으로 연구하고 활동했지만, 그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정통 맑스주의의 갓길에 서서 다른 사상과의 접목이나 호응을 시도하였다. 프로이트 사상이나 불교 사상이 프롬의 비판 이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물론 그 근간은 자유와 저항의 정신이었다. 프롬의 사상과 생애를 일별할 수 있는 책이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7753465&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새로운 사랑학&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02140180.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 앤서니 기든스 지음 | 배은경 옮김 | 새물결&lt;BR&gt;
&lt;BR&gt;
  '제3의 길', 바로 그것의 주창자인 앤서니 기든스의 역작이다. 앤소니 기든스는 건조하게 진행된 좌우 이념 대립의 틀을 넘어 제 3의 길을 모색하였고 그것이 토니 블레어 시대의 이론적 틀이 되기도 하였다. 본문에서, 프롬의 &lt;사랑의 기술&gt;을 언급하였거니와, 이 고전적인 원론을 바탕으로 좀더 현실감 있는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사람은 앤소니 기든스의 이 책이 적절하다. 이 책은 성적인 다양성과 가족 구조의 변동이 심화된 20세기 후반기의 사랑과 성과 관계를 보여준다. 그는 '감정 민주주의'를 말한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8336984&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사랑과 진실&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07580657.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 김재혁 옮김 | 이레&lt;BR&gt;
&lt;BR&gt;
  이 소설과 영화는, ‘사랑’을 다루고 있지만 ‘나이를 뛰어 넘으려 했는데 그것도 잘 안되고, 신분을 뛰어넘으려 했는데 그것도 잘 안되고......’하는 식의 이야기는 아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원작이 그러하거니와 &lt;빌리 엘리어트&gt;, &lt;디 아워스&gt;를 만든 스티븐 달드리는 스크린 위로 흐르는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 아래에 전후 독일의 사회 사정을 깊게 깔고 있다. 영국의 거목 이언 매큐언의 소설 &lt;어톤먼트&gt;가 단순히 후반부의 놀라운 반전이 전부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7090347&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751506&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3월</category>
			<author>jys2003 (정윤수)</author>
			<pubDate>Tue, 17 Mar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3월 17일] 남아공 월드컵, 남북한 동반 진출의 꿈 - 박두익</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261365</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41434739.jpg&quot; width=&quot;260&quot; height=&quot;31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66년잉글랜드월드컵 때, 왼쪽 네번째 박두익 선수&lt;/p&gt;&lt;/div&gt;우리가 ‘제3자’의 입장에서, 그러니까 지구 위에서 각 대륙 위에서 펼쳐지는 국가간 대항전(a-매치)를 관조하게 된다면, 아마도 ‘남북축구’는 ‘팔레스타인-이스라엘전’이나 ‘크로아티아-세르비아전’ 만큼이나 ‘흥미롭고 뜨거운’ 경기가 될 것이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이 세 경기는, 이를테면 ‘세네갈-프랑스전’, ‘잉글랜드-아르헨티나전’, ‘핀란드-러시아전’ 같은 a-매치들보다 훨씬 더 ‘뜨거운’ 경기가 된다. 20세기의 역사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상황 속의 a-매치가 바로 ‘남북축구’이기 때문이다. 그 ‘세기의 대결’이, 4월 1일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리게 된다. &lt;BR&gt;
&lt;BR&gt;
오늘 3월 17일은, 북한 축구의 대명사요 ‘인민영웅’인 박두익 선수가 1942년에 태어난 날이다. 그래서 한번 ‘남북축구’를 생각해본다. &lt;BR&gt;
&lt;BR&gt;
우선 그 역사를 훑어보기로 한다. 한국 전쟁 이후 1978년까지 남북한은 A매치를 갖지 않았다. 일단 북한이(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을 제외하고는) 국제무대에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아시아축구연맹(AFC)은 1963년 정기총회에서 북한 가입에 관한 의제를 논의했는데, 이 당시 남한 정부가 다양한 외교 루트를 통해 이를 저지하려고 했다. 물론 그 기도는 실패하였고, 북한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8강의 ‘사다리 신화’를 이룩했다. &lt;BR&gt;
&lt;BR&gt;
이때 남한은 잉글랜드 월드컵 예선 불참을 결정한 다음이었다. 당시 북한은 강력한 다크호스였다. 북한에게 패하게 되면 ‘체제 우열 경쟁’에서 밀릴 수도 있는 양상이었다. 남한의 불참 결정으로, 국제축구연맹(FIFA)은 대한축구협회에 벌금 5천 달러를 부과하기도 했다. 북한의 8강 신화 이후, 곧 남한은 중앙정보부 주도로 양지팀을 만들었음은 익히 아는 바와 같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96320078.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8&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대니얼 고든 감독의 다큐멘터리 &amp;lt;천리마 축구단&amp;gt; 포스터&lt;/p&gt;&lt;/div&gt;
70년대에도 남한의 ‘북한 기피증’은 여전했다. 1974년 9월 이란 테헤란 아시안게임. 당시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이 터진 이후라서 경기 결과가 대단히 ‘예민한’ 감정을 자아낼 수 있는 환경이었다. 남한은 1차리그 A조 경기에서 약체 쿠웨이트에게 0-4로 대패했다. 일부러 졌다는 얘기가 떠돌았다. 2차 리그 마지막 경기도 비슷한 결과가 났다. 이 경기를 승리를 거두게 되면 3-4위전에서 북한을 만나게 되는데, 남한은 말레이지아에 2-3으로 ‘분패’하였다. 남북한 맞대결을 피하려는 고육지책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많았다. &lt;BR&gt;
&lt;BR&gt;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는 남북이 오랜만에 정면대결을 펼쳤다. 결승전에서 만난 것이다. 분단 이후 첫 남북 A매치, 양팀은 연장 접전까지 펼쳤다. 결과는 0-0 무승부. 공동 우승. 호각지세요 용쟁호투였던 것이다. &lt;BR&gt;
&lt;BR&gt;
이때 시상대의 에피소드가 전해내려온다. 남한팀 주장 김호곤(현 울산현대 감독)이 북한 주장 김종민에게 시상대를 양보한 다음 올라서려 하자 김종민이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던 것이다. 김호곤은 억지로 비집고 올라섰다. 그때 뒤에서 북한 골키퍼 김광일이 김호곤을 밀치는 바람에서 시상대에서 떨어졌다. 그래도 다시 올라갔다. 아마도 이 ‘장외 경기’가 김호곤 축구 인생의 가장 ‘치열한’ 한 판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양팀의 주장은 결국 시상대에 나란히 섰고, 사진기자들 앞에서는 다정스럽게 포즈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59876110.jpg&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267&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2002, 남북 친선 축구 대회 종료 후 유니폼과 운동화를 교환하는 북한 리경인과 남한 최태욱 선수&lt;/p&gt;&lt;/div&gt;
80년대에는 이렇다 할 일이 없었다.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경기 도중에 북한 팀이 심판을 가격하는 바람에 국제대회 출전 금지를 당한 것이다. 1989년이 되어서야 남북이 맞붙었다. 그해 10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이탈리아 월드컵 최종예선 2차전. 황선홍이 헤딩 결승골. 이듬해 1990년에는 평양과 서울을 오가는 남북통일축구가 벌어졌다. 당시 남한 대표팀은 박종환 감독이 맡았다. &lt;BR&gt;
&lt;BR&gt;
이 ‘해빙무드’는 1991년 5월, 포르투갈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단일팀(코리아) 구성으로 이어졌고 서우로가 평양에서 1,2차 선발전을 치러 구성된 단일팀은 본선 8강까지 진출했다. 당시 노태우 정권의 ‘실세’라고 하는 박철언 씨가 체육청소년부 장관이었는데 그는 회고록 &amp;lt;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amp;gt;(랜덤하우스중앙)에서 이 당시의 남북한 협상 과정과 경기들을 적절히 언급한 바 있다. &lt;BR&gt;
&lt;BR&gt;
또한 이 대회 당시 ‘코리아’ 단일팀의 북한측 코치를 맡았던 문기남 씨가 지난 2004년 3월에서 북한을 탈출하여 남한으로 내려온 일도 있다. 단일팀 이후 실력을 인정받았던 문기남 씨는 2000년에 북한 남자대표팀 감독을 맡아 태국에서 열린 아시안컵에 78∼82년생을 주축으로 세대교체를 단행하여 국제무대에 나섰다가 저조한 성적으로 내고 물러났으며 그 이후 북한의 축구구연맹 지도원(기술위원)으로 일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98512972.jpg&quot; width=&quot;230&quot; height=&quot;32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축구전문지 &amp;lt;포포투&amp;gt;의 표지인물 정대세&lt;/p&gt;&lt;/div&gt;남북한 스포츠 외교는, 김일성 사후, 약간의 조정기를 거친 다음 ‘햇볕 정책’과 맞물리면서 좀더 진전되었다. 약간의 마찰음이 있었지만 북한은 2003년 대구유니버시아드에 참가하였다. 2005년 8월 동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인공기가 게양되고 북한 국가가 연주되었다.
&lt;BR&gt;
&lt;BR&gt;
남북 축구 현황은 5승 7무 1패로 남한이 우세. 하지만 2005년 동아시아연맹선수권대회의 0-0을 시작으로 2008년 9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2010남아공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1차전 1-1까지, 최근 5경기는 연속 무승부다. 6:4로 남한이 경기를 이끌었음에도 양팀 모두 득점은 저조했다. &lt;BR&gt;
&lt;BR&gt;
현재 진행되고 있는 아시아 최종예선은 B조 다섯 팀 모두 4경기씩 소화한 상태다. 남한이 승점 8점으로 1위, 그 바로 아래에 북한이 7점으로 2위다. ‘남북 동시 본선 진출’을 상상해볼 수 있는 상황이다. 오는 4월 1일, 양팀이 맞붙는데, 북한의 경우 3월 28일에 B조 최약체 아랍에미리트연합(UAE)과 평양에서 홈 5차전을 갖는다. 이 경기를 이기게 되면 북한은 B조 선두 자격으로 서울에 오게 된다. &lt;BR&gt;
&lt;BR&gt;
남북한 모두, 수십 년의 역사 속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남한은 꽤 오랫동안 축구와 그밖의 스포츠가 이데올로기화된 ‘국위선양’의 깃발 아래 머물러 있었으나 정치 민주화, 경제 발전, 문화 다양성 등의 효과로 축구가 정치나 그밖의 상황에 따른 부속물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사회문화적 행위로 인격체로 거듭났다. 물론 최근의 ‘이천수 깃발 도우미 파문’에서 보듯이 아직은 그 잔해가 남아 있고 특히 국제 정세에 따라 대단히 유동적인 ‘남북한 상황’이 여전하지만 말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28334299.jpg&quot; width=&quot;220&quot; height=&quot;316&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부산 아이파크에서 뛸 때의 안영학 선수&lt;/p&gt;&lt;/div&gt;북한도 많이 변했다.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북한의 지배체제는 축구뿐만 아니라 그밖의 모든 사회적 행위를 수직계열화된 구조 속에서 진행시켜왔다. 그럼에도 의미 있는 변화를 모색해왔다. 90년대 초반 외교 정책을 급선회한 김일성의 결정과 그 이후 김정일 체제의 전반적인 유연성이 북한 축구를 80년대로부터 벗어나게 하였다.
&lt;BR&gt;
&lt;BR&gt;
물론 90년대 중반 이후 북한 사회를 치명적으로 강타한 지독한 기근 및 핵 문제에 따른 외교 고립의 상태가 여전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전처럼 축구와 스포츠를 단절의 빗장으로 무조건 활용하지는 않는 듯 보인다. &lt;BR&gt;
&lt;BR&gt;
2007년 3월에는 북한 U-17 대표팀이 한 달 동안 제주 등지에서 전지훈련을 가졌다. 2008년 6월, 월드컵 3차예선 원정 경기 때는 북한 선수들이 남한의 선수단과 관중들에게 일일이 악수와 화답을 보냈고, 관중이 물러간 뒤에는 인공기를 펼쳐놓고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lt;BR&gt;
&lt;BR&gt;
게다가 철저히 실리축구를 구사하여 60년대의 ‘8강 신화’를 재현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투박했던 북한 팀 색채가 안정적인 실리축구로 변하고 있음은 최근 몇 차례 경기를 통해 확인된 사항이다. 비록 ‘홈구장’이긴 했지만 북한은 강호 사우디아라비아와를 1-0으로 물리쳤다. 정대세(J-리그 가와사키), 홍영조(베자니아 베오그라드), 안영학(수원) 같은 북한의 ‘해외파’가 축구의 기술적 측면뿐만 아니라 문화적 측면까지 변모시키는 촉매제로 작용하는 듯 보인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37599293.jpg&quot; width=&quot;120&quot; height=&quot;139&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박두익 선수&lt;/p&gt;&lt;/div&gt;오늘 3월 17일은, 북한 축구의 상징 박두익 선수가 1942년에 태어난 날이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때 이탈리아와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은 장본인이다. 북한 대표팀을 8강으로 이끌었다. 앞서 언급했지만 당시 북한팀은 남한보다 몇 수 위의 실력을 갖춘 다크호스였다.
&lt;BR&gt;
&lt;BR&gt;
개마고원에서 체력훈련을 하며 무쇠 체력을 단련했다는 북한은 쉬지 않고 이탈리아를 밀어붙인 끝에 박두익의 결승골로 승리를 거뒀다. AFP 통신은 ‘월드컵 최대 이변 6대 경기’를 꼽으면서 2002한일월드컵 당시 세네갈이 프랑스를 물리친 일 등과 함께 북한의 이 대이변을 꼽기도 했다. &lt;BR&gt;
&lt;BR&gt;
&amp;lt;축구, 그 빛과 그림자&amp;gt;(예림기획)의 저자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축구팬이라면 반드시 책상머리에 놓고 틈날 때마다 볼 만한 이 책에서 66년 대회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런던에서는 젊은 아가씨들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녔으며, 카나비 스트리트는 유행의 첨단 거리가 되었고, 모든 이들이 비틀즈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와중에, 제8회 월드컵 축구대회가 개막되고 있었다.(중략) 16개국이 참가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10개국, 아메리카에서 5개국, 그리고 매우 희귀한 경우인데, 북한이 참가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북한 대표팀은 '박'선수의 골로 이탈리아를 꺽었는데, 이 선수는 평양의 치과의사로 자유시간에 축구연습을 했다고 한다.&lt;/font&gt; &lt;BR&gt;
&lt;BR&gt;
‘의외성’을 신봉하는 갈레아노의 회상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사실이 틀린 대목이 있다. 골을 넣은 ‘박’ 선수, 즉 박두익은 평양의 치과의사가 아니다. 아마도 폐쇄적인 북한 사회의 정보를 저 남미 우루과이의 소설가가 꼼꼼히 확인하지는 못한 듯하다. 박두익은 한국전쟁 직후 인쇄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축구를 시작했다. 금세 그 실력을 인정 받아 1957년에 평양시 최우수 선수단에 들어갔다. 이 때 20살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406230758.jpg&quot; width=&quot;450&quot; height=&quot;388&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동아시아축구 대회 당시 골을 넣고 기뻐하는 정대세와 북한 선수들 (사진 동아시아축구연맹)&lt;/p&gt;&lt;/div&gt;
현재 그의 손자 박성일이 4.25축구단 청소년팀에서 성장하고 있다. 북한 축구 ‘꿈나무’인 셈이다. 파괴력 있는 기술을 보유한 북한의 홍영조의 부친은 바로 이 4.25축구단의 홍현철 단장이다. 한편 지난 1990년 10월 10일 평양 고려호텔에서는 이회택(현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 씨가 전쟁 때 헤어진 부친 이용진 씨와 해후했다. 남북통일축구경기 당시의 훈담이다. 이 극적인 상봉을 주선하고 진행한 사람이 북한의 박두익 선수였다. &lt;/font&gt;&lt;/p&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짜릿하고 역사적인 축구 다큐멘터리&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90092669.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천리마 축구단 | 대니얼 고든 감독 | 태원엔터테인먼트&lt;BR&gt;
&lt;BR&gt;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와 다큐멘터리가 꽤 많이 소개되었다. 오래 전에 실베스터 스탤론, 막시 폰 시도우, 마이클 케인 그리고 전설적인 축구 선수 에드손 아란테스 도 나시멘토가 출연하는 &lt;승리의 탈출&gt;이 있었다. 누구냐구? 바로 펠레다. 최근 기록으로는 &lt;골&gt;, &lt;레알&gt;, &lt;마라도나를 찾아서&gt;가 의미 있고 지네딘 지단의 90분 경기를 18대의 카메라로 포착한 다큐 &lt;지단, 21세기의 초상&gt;도 기억할 만하다. &lt;BR&gt;
  그리고 대니얼 고든의 &lt;천리마 축구단&gt;이 있다. 맨체스터 출신의 다큐 감독이다. 이탈리아 전을 승리로 이끈 박두익을 비롯하여 당시 북한 최고의 스트라이커 박승진, 골키퍼 리창명 등이 소개된다. 2004년 시애틀 영화제 다큐멘터리상을 비롯하여 수많은 상을 탔다. 당시 북한이 속했던 조의 경기가 열렸던 작은 도시 미들스브로의 영국 팬들은 북한을 열광적으로 응원하면서 꽤 많은 팬들이 8강전이 열린 리버풀까지 원정을 가서 북한을 응원했다. 그런 인연까지 담겨 있는 기록이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9178070643&amp;amp;ttbkey=ttbprague0909002&amp;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북한의 오늘, 그 일상문화&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31991511.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북한의 우리식 문화 | 주강현 지음 | 당대&lt;BR&gt;
&lt;BR&gt;
  이 책의 제목에 쓰인 ‘우리식’이라는 것은 오랜 전통의 그 무엇이 아니라 90년대 이후 북한이 슬로건으로도 삼고 있는 ‘우리식대로’라고 할 때의 그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에는 북한이 오랫동안 전승하고 보존하고 있는 ‘우리 옛 문화’가 아니라 현재 북한 사회의 일상 문화가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저자 역시 ‘어제의 북한'이 아니라 '오늘의 북한'을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책이 될 것이라고 썼다. 평가나 진단 보다는, 오늘의 북한, 그 문화를 일차적으로 알 수 있게 하는 내용과 풍부한 자료가 있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1630550&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더 많은 축구 책을 기다리며&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84788681.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피버 피치 | 닉 혼비 지음 | 이나경 옮김 | 문학사상사&lt;BR&gt;
&lt;BR&gt;
  이 블로그를 통하여, 이 책을 두어번 소개했는데, 또 소개한다. ‘3권’을 추려긴 해야겠는데, 마땅한 책이 여전히 부족하다. 아직 읽지 않은 축구팬을 위해, 그리고 축구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또 한번 이 책을 강추한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0126759&amp;amp;ttbkey=ttbprague0909002&amp;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744142&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3월</category>
			<author>jys2003 (정윤수)</author>
			<pubDate>Mon, 16 Mar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3월 16일] 가슴 속 골짜기까지 불어오는 깊은 소리 - 이생강</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261207</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20789385.jpg&quot; width=&quot;220&quot; height=&quot;22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전통/현대' 이분법을 넘으려한 황병기1집&lt;/p&gt;&lt;/div&gt;'국악'의 가장 비극적인 측면은 그 음악이 '국악'이라고 불리는데 있다. 국악에 대응하여 양악이라는 말을 지어내어 쓰기도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되기 보다는, '음악'이 있고 '국악'이 있는 식이다. 그러니가 인류 보편의 '음악'이 큰 그릇으로 있고, 그 안에, 혹은 그 경계선에 걸친 채로 '국악'이라는 그릇이 따로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국악은 음악이기는 한데 보편의 음악, 그 그릇에 담겨 있기 보다는 뭔가 특별하고 각별한 것이 되어 보인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하지만 그 특별하고 각별한 것이 보편의 틀에 함께 있지 않고, '우리 것'이라는 과도한 이념 틀에 있음으로 하여 오히려 '국악'은 시대에 뒤떨어진 인상을 깊게 주었던 것이다. 낡은 것, 오래된 것, 옛 것, 시대에 뒤떨어진 것...... 하지만 '우리 것이니 우리 아니면 누구 보존하고 보호하랴' 하는 그런 것, 그런 상투적인 용어와 이미지 때문에 국악은 그 본래의 예술적 가치와 미적인 충동이 '거세'된 채, 단지 보존해야 할 그 무엇이 되고 말았다. &lt;BR&gt;
&lt;BR&gt;
물론 국악의 범주에 속하는 다양한 갈래의 음악을 조금만 정성을 들여 듣다 보면 누구라도 그 음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가슴 깊숙한 골짜기까지 스며드는 가락과 장단과 율격의 도저히 잊어버릴 수가 없게 되는데, 다만 그렇게 되기까지 '국악, 우리 것, 보존해야 할 것'이라는 낡은 틀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10593809.jpg&quot; width=&quot;220&quot; height=&quot;221&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황병기 아방가르드의 회심작 &amp;lt;미궁&amp;gt;&lt;/p&gt;&lt;/div&gt;'국악', 낡은 것 혹은 우리 것이라는 엉성한 틀은 그것의 보존과 재활을 위하여 '현대화'라는 슬로건을 외치기도 하고 서구의 양식과 쓱쓱 비벼서 '퓨전'이라는 실험도 모색하는데, 바로 그 '국악'이 오늘 이 당대의 음악이며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예술적 자존과 믿음이 있었다면 이런 '현대화' 또는 '퓨전'이 그토록 대단한 것처럼 과대포장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현대화 혹은 퓨전 중에는 귀 담아 들을 만한 의욕적인 실험이 없지 않지만, 대체로는 오래 전승되어 온 것의 길이와 정조의 부담감을 없애기 위해 짤막한 길이에 경쾌한 리듬을 타도록 만든다. 끊일 듯 이어지면서 가슴 속의 골짜기로 웅웅 불어대던 한이 소리가 아니라 그저 오선지의 단조(minor)를 '청승맞게' 연주하는 과도한 감정 노출이 대부분이다. 여기에 서구의 바이얼린이나 색소폰이 '적당한' 지점에서 치고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면 '퓨전 국악'이니 '동서양의 만남'이니 하는 말이 곧장 덧붙여지는 식이다. &lt;BR&gt;
&lt;BR&gt;
이 기이한 풍토병은 '국악'을 보존해야 할 것, 그러나 오래된 것, 그러므로 '퓨전'을 통해서라도 현대화해야 하는 것이라는, 단선율 때문이다. 요즘에는 여기에 덧붙여 '세계화', '문화 콘텐츠', '문화 상품' 이런 말까지 덧붙여진다. 이런 말들이 어떤 지독하고 끈기 있는 과정의 끝에 얻어지는 부수적인 결과일 수는 있어도 당장 맨 앞에 그 목표부터 제시하고 시작한다면 이는 심각한 자중지란이 되고 마는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95611409.jpg&quot; width=&quot;210&quot; height=&quot;21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황병기 음악의 백미 4집 &amp;lt;춘설&amp;gt;&lt;/p&gt;&lt;/div&gt;음악과는 조금 거리가 먼 분야의 얘기지만, 얼마 전에는 mp3, 핸드폰 같은 디지털 상품이나 화장품 용기 디자인으로 큰 명성을 얻은 사람과 패션 디자인으로 큰 이름을 얻은 사람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한국적인 것을 세계적인 것으로' 라는 말을 하면서 이제는 태극 문양 같은 전통의 이미지를 세계화하는 디자인을 하겠다는 것을 본 일이 있다. 그래서 나는 그 두 사람을 믿지 않기로 하였다. 진부하고 낡은 스테레오타입 아닌가.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또 한가지 기억. 몇 해 전에, 어느 다큐 제작하는 광경을 본 적이 있다. '국악인'의 한 삶을 다룬 것이었다. 제작진은, 방송에 필요한 화면을 위하여, 그 국악인에게 한복 차림으로 오솔길을 한참이나 걸어가는, 그런 장면을 요청하였고 몇 번 정도 촬영이 되었다. 원래 그는 평소에 한복을 입지도 않지만, 집 앞의 길 놔두고 뒷산 너머 가는 그 길을 거의 다니지도 않는다. '화면' 때문이었다. 그런 정도야 이해할 만한 일이라도 해도, 정작 방송을 보니 그 '연출 화면'이 위로 '국악 외길 인생, 우리 것을 한평생 지켜온, 예인의 길'..... 무슨 그런 소리가 깔렸다. 틀린 소리는 아니지만, 된장을 풀어도 너무 많이 풀어버린 소리가 되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49130613.jpg&quot; width=&quot;190&quot; height=&quot;298&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가야금 연주자 황병기 선생&lt;/p&gt;&lt;/div&gt;나는 지금 우리 전통의 문양을 활용하는 일에 대하여, 혹은 전통의 그 무엇을 변주하여 세계의 무대에 나서는 일에 대하여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에 대하여 이런 말을 쓰고 있는가 하면, 그 진부한 상투성, '스테레오타입'을 경계하고 또한 비판하는 것이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웬 아마추어 애호가의 허튼 소리냐? 이렇게 힐난하는 독자들의 공세를 피하기 위하여, 나는 잠시 황병기 선생의 특강 내용을 인용하고 싶다. 서울대 '관악초청강연'에서 황병기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야금 산조를 몸으로 익히고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새로운 모색을 거듭하면서 &amp;lt;침향무&amp;gt;, &amp;lt;비단길&amp;gt;, &amp;lt;미궁&amp;gt;, &amp;lt;밤의 소리&amp;gt; 같은 걸작을 빚어낸 대가는 이렇게 말한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저는 국악인이지만 사실 국악인 중에서 욕먹을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quot;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다.&quot; 그런 말을 저는 아주 싫어해요. &quot;우리 것은 좋은 것이야.&quot; 이런 말도 싫고요. 왜 그러냐면, 예술 하는 데서까지 무슨 애국심을 가지고 우리 것은 어떻고 한국 것이어야 되고 그러냐는 거죠.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것을 세계화시킨다고 하면서 그냥 세계화시킨다고 하지 않고 상품화시킨다고 그러잖아요? 저는 그런 말 아주 듣기 싫어요. 세계화가 안 되어도 좋아요.&lt;/font&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79629305.jpg&quot; width=&quot;230&quot; height=&quot;212&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이생강 음악인생 60주년 기념음반 &amp;lt;죽향&amp;gt;&lt;/p&gt;&lt;/div&gt;오늘 3월 16일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 보유자인 이생강 선생이 1937년에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날이다. 악기를 좋아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찌감치 소금, 단소, 피리 등을 배우며 컸다. 
&lt;BR&gt;
&lt;BR&gt;
전주에서 대금 명인 한주환 선생 문하에 들어가 대금 산조를 사사했다. 그밖에 이수덕, 지영희, 전추산, 오진석 등으로부터 피리, 단소, 퉁소, 소금, 태평소, 대금 등을 배웠다. &lt;BR&gt;
&lt;BR&gt;
지나가는 길에 언급하자면,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하는 그 유명한 말, 즉 명창 박동진 선생이 했던 그 말은 사실 '광고 문구'였다. 물론 박동진 명창을 비롯하여 많은 국악인들이 그같은 생각을 했을 수는 있지만, 어쨌거나 그 말 자체는 '광고 문구'다. 오히려 박동진 선생은 말하자면 퓨전 국악을 외면하지 않았고, 그중에서도 이생강의 작업을 높이 평가한 적 있다. '광고 문구'가 너무 유명해지는 바람에, 국수주의적인 면모가 덧붙여진 감이 있다. &lt;BR&gt;
&lt;BR&gt;
아무튼 이생강은 1959년에 임춘앵 여성국극단의 반주를 맡았고 1960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1회 세계민속예술제에 참석하였다. 이 공연에서 갑자기 무대 공백이 생기는 바람에 선생 혼자서 긴 시간 동안 대금 독주를 하였고, 그것이 계기가 대금 독주 공연의 가능성을 보게 되었다. 1977년에 처음으로 대금산조 발표회를 가진 이래 수차례 개인 발표회를 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폐회식에서는 혼자서 대금을 불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93426776.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277&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피아니스트 임동창과 협연하고 있는 대금 명인 이생강 선생 (사진 이생강닷컴)&lt;/p&gt;&lt;/div&gt;
그의 대금 연주는 '국악'이나 '우리 것'이라는 틀을 잠시 벗고, 혹은 그런 말이나 이미지를 괄호( ) 안에 넣어 버리고, 한 시간 가량 집중해서 듣다 보면, 아하! 하고 무릎을 치고 되는, 가슴 저 깊은 골짜기까지 울컥울컥 거리는 미묘한 순간들을 만나게 된다. 이러니 저러니 말이 앞서기 전에, 오직 끊이지 않고 흐느적거리는 음율로 사람의 온갖 마음의 갈피들을 펼쳐보이고 또한 감추며 그 갈피들 사이의 정한을 쓰다듬어내는, 위대한 연주를 다 듣고 난 다음에야, '아참 이게 국악이라고 했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34405804.jpg&quot; width=&quot;300&quot; height=&quot;417&quot; alt=&quot;&quot; style=&quot;cursor: pointer&quot; onclick=&quot;open_img('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34405804.jpg')&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대금 예술의 극한을 이룩한 이생강 선생 발표회 포스터&lt;/p&gt;&lt;/div&gt;앞서 퓨전 얘기를 했지만, '퓨전 국악' 하면 그 맨 앞에 이생강이 있다. 그것도 조잡한 악기군의 배치가 아니라 대금이 선연하게 빛이 나는, 다른 문화권의 악기들 때문이 '이채롭게' 들리는 게 아니라, 대금 그 자체의 능란한 체위의 변화에 따라 들려오는 퓨전이 이생강으로부터 비롯되었다.
&lt;BR&gt;
&lt;BR&gt;
1998년의 앨범 &amp;lt;희망가&amp;gt;는 신관웅(피아노), 김희현(드럼) 등의 재즈맨과 함께 한 앨범인데 국악 연구 및 음반의 보존과 확산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국악기록보존연구소 노재명 소장은 '국악, 재즈, 트로트가 서로 조화를 이룬 빛나는 작품으로 20세기 후반 한국 음악의 한 장을 열었다”고 평한 바 있다. 더 많은 이야기는 아래의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lt;BR&gt;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leesaengkang.com/&quot; target=&quot;new&quot;&gt;http://www.leesaengkang.com/ &lt;/a&gt;&lt;/font&gt;&lt;/p&gt;&lt;BR&gt;
&lt;B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높고 깊은, 아득하고 깊은&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62483677.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대금 산조 | 이생강 | 이엔이미디어&lt;BR&gt;
&lt;BR&gt;
  이생강의 대금 소리에 대하여, 본문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기이한 소리를 '국악'이나 '우리 것'이라는 일종의 관습적인 '프레임'을 걷어버리고 들어보자. 어디 사찰 입구나 인사동에 있는 찻집의 배경 음악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게 된다. 느리게 시작하여 고조되고 빨라지고 깊어졌다가 다시 느려지는 시간은, 인간의 모든 감정을 다 끌어안고 흘러가는 황홀하고 경이로운 대금의 시간이 된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382100147X&amp;amp;ttbkey=ttbprague0909002&amp;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진정한 기품과 아미&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55059758.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춘설 | 황병기 | 씨앤엘뮤직&lt;BR&gt;
&lt;BR&gt;
  본문에서도 소개했지만, 황병기는 '양악'에 대응하는 '국악'이 아니라, 하나의 '음악'을 하였다. 그는 '국악'에 덧씌워진 낡은 이미지를 씻어내기 위한 다양한 활동과 교육을 하였고 무엇보다 창작에 몰두하였다. 근대의 문턱을 넘어선 &lt;침향무&gt; 같은 곡을 시작으로 70년대  문화 엘리트와 아방가르드들이 몰려 들었던 원서동 공간사랑에서의 '미궁'을 거쳐 이 4집에 이른 황병기. 5집 '달하노피곰'도 출반되었지만, 이 &lt;춘설&gt;을 한 정점으로 나는 생각하고 듣는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9102528568&amp;amp;ttbkey=ttbprague0909002&amp;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한 예술가의 음악 인생&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22081235.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오동 천년, 탄금 60년 | 황병기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lt;BR&gt;
&lt;BR&gt;
  아쉽다. 오늘 이생강 선생이 주인공이지만,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이 드물다. 대금 교본집이 있지만 그것을 교양 독서로 권하고 읽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황병기 선생의 자전 기록을 골랐다. 이 경기고-서울법대 출신의 가야금 명인이 어떻게 국악을 현대의 한 극점으로 끌어올리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강연록인 &lt;가야금 선율에 흐르는 자유와 창조&gt;(생각의나무)를 골라서 읽어도 상관없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25531704&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736774&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3월</category>
			<author>jys2003 (정윤수)</author>
			<pubDate>Sun, 15 Mar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3월 15일] 영원히 마르지 않는 이야기의 샘물 - 삼국지</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261105</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lt;font color=&quot;#0000ff&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87953693.jpg&quot; width=&quot;180&quot; height=&quot;26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박태원 판 &amp;lt;삼국지&amp;gt;&lt;/p&gt;&lt;/div&gt;“폐하 또한 올바른 길을 자주 의논하시어 스스로 그 길로 드시기를 꾀하소서. 아름다운 말은 살펴 받아들이시고 선제께서 남기신 가르치심을 마음 깊이 새겨 좇으시옵소서. 신은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이제 먼 길을 떠나거니와, 떠남에 즈음하여 표문(表文)을 올리려 하니 눈물이 솟아 더 말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lt;/font&gt;&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이 글은 “선제(先帝, 유비)께서는 창업의 뜻을 반도 이루시지 못하고 붕어하시고”로 시작하는 제갈공명의 유명한 &amp;lt;출사표&amp;gt;의 마지막 구절이다. &amp;lt;삼국지&amp;gt;에는 공명이 유선에게 &amp;lt;출사표&amp;gt;를 바치는 장면 못지 않게 우국충정과 명천지략이 불꽃 튀기는 장면이 곳곳에 나온다. &lt;BR&gt;
&lt;BR&gt;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의 ‘도원결의’, 유비가 공명을 세 번이나 찾아 나서는 ‘삼고초려’, 촉나라 공명의 지략과 오나라 손권의 병사가 어울려 위나라 조조 군사를 대패시키는 ‘적벽대전’, 공명이 남만의 맹획을 일곱 번 사로잡고 일곱 번 놓아주는 ‘칠종칠금’ 등이 대표적이며 그밖에도 관운장의 결기와 충의, 장판교 대전의 상산 조자룡, 공명에 필적할 만한 오나라 육손의 지략, 죽은 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희롱하는 일, 공명이 아끼던 부하 마속을 일벌백계로 베어버리는 ‘읍참마속’ 등은 동양 문화권에서는 윤리적 규범으로 통한다. &lt;BR&gt;
&lt;BR&gt;
오늘 3월 15일은, 221년에 유비가 한나라의 적통자임을 주장하며 스스로 촉한의 황제에 즉위한 날이다. 이를 계기 삼아 &amp;lt;삼국지&amp;gt;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아마도 국내 독서 환경으로는 나관중의 &amp;lt;삼국지연의&amp;gt;가 될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23851562.jpg&quot; width=&quot;160&quot; height=&quot;236&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박종화 판 &amp;lt;삼국지&amp;gt;&lt;/p&gt;&lt;/div&gt;나관중은 원나라 통치에 환멸을 느낀 '촉한정통론'의 지식인이었다. 그는 한족이야말로 천하의 주인이며 촉나라 유비가 그 대통을 이어야 한다는 명분론을 지지했다. 이 촉한정통론은 당의 유지기가 쓴 &amp;lt;사통&amp;gt;, 송의 구양수가 쓴 &amp;lt;정통론&amp;gt;, 소동파가 쓴 &amp;lt;정통변론&amp;gt;, 주희)의 &amp;lt;통감강목&amp;gt; 등을 거치면서 중화주의의 핵심이 된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나관중은 촉한정통론에 입각하여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없는 사실을 덧붙여 &amp;lt;삼국지연의&amp;gt;를 집필하였다. 유비의 인덕을 드높이고 공명의 지략을 신의 경지에 이르게 하고, 조조의 품성을 교활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나관중은 허구를 적절히 사용하였다. 적벽대전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공명의 지략에 따라 손권의 병사가 주축이 되어 조조의 군사를 대패시키는 적벽대전은 삼국지에 나오는 모든 전투 가운데 가장 길고 흥미진진한 대목이다. &lt;BR&gt;
&lt;BR&gt;
그런데 많은 부분이 나관중의 상상에 의해 꾸며진 것들이다. 나관중은 조조의 군사를 100만 이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에 비해 유비와 손권의 군사는 약 5만 내외. 5만의 군사로 100만 대군을 무찔렀다면 굉장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조조의 군사를 대략 25만 내외로 계산한다. 게다가 그 25만 중 원소와 유표에게 항복하거나 병에 걸린 병사를 빼면 정예랄 수 있는 병사는 얼마 되지 않는다. &lt;BR&gt;
&lt;BR&gt;
조조에게 화살을 얻어온 일, 동남풍을 비는 제사 등 제갈공명의 지략이 돋보이는 대목도 허구이다. 동남풍을 일으키고(적벽대전) 신장(神將, 귀신 가운데 무력을 맡은 장수신)을 부르고(맹획과의 칠종칠금) 구름을 부르는(사마중달과의 싸움) 등은 제갈공명이 자연의 이치를 살펴서 미리 바람이 불거나 가뭄이 들 것을 예상한 것인데 나관중은 이를 하늘의 뜻에 통탈한 것처럼 묘사하였다. 물론 뽕나무 800주에 만족하며 검소하게 지낸 제갈공명은 높이 평가받을 만한 인물이다. 그는 나라를 일으키고 천자를 돕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승상이 된 후에도 권력에는 초탈하였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88399069.jpg&quot; width=&quot;170&quot; height=&quot;251&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김구용 판 &amp;lt;삼국지&amp;gt;&lt;/p&gt;&lt;/div&gt;이같은 제갈공명 이미지에 대해 가장 독한 비판을 퍼부은 사람은 20세기 초엽의 중국 사상가 곽말약이다. 그는 공명을 ‘반동집단에 논리를 제공한 몽상가이며 입신양명을 위해 인재난에 허덕이는 촉을 택한 인물’이라고 혹평하였다. 또 유비와 그 집단을 현실감각이 결여된 전통주의자로 단정하고 수탈체제로 전락한 한을 계승하려는 반동적 집단이라고 말하였다. 오히려 조조를 새롭게 일어나는 혁명적 영웅이라고 부각시켰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곽말약의 이러한 표현은 아무래도 현대 사회주의 사상의 관점에서 삼국 시대를 살핀 것이기 때문에 무리한 대목도 있으나 그 관점은 유효한 측면이 있다. &lt;BR&gt;
&lt;BR&gt;
나관중은 과거의 삼국 시대가 아니라 자신이 살던 시기에 이민족 왕조인 원을 축출하기 위한 사상적 방책으로 촉한정통론을 택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한족의 정통성을 살리기 위해 유비를 극대화하고 그에 맞선 조조를 저평가하였다. 이는 나관중 개인의 회고적인 감상만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상은 명나라 초기의 전반적인 중화주의였으며 당시 어느 경극배우는 조조 역을 하다가 성난 관중에게 맞아 죽었다고도 한다. 나관중은 과거의 역사적인 소재를 당대의 시대의식에 따라 재해석하여 썼을 뿐이다. &lt;BR&gt;
&lt;BR&gt;
국내에 많은 판본들이 있다. 월탄 박종화, 정비석, 김구용, 김홍신, 이문열, 조성기, 황석영, 장정일 등의 소설가들이 썼고 고우영의 만화를 비롯하여 수많은 버전들이 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04809528.jpg&quot; width=&quot;170&quot; height=&quot;252&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이문열 판 &amp;lt;삼국지&amp;gt;&lt;/p&gt;&lt;/div&gt;내 개인의 독서 체험으로는 박종화, 김구용, 이문열, 황석영 등 네 개의 &amp;lt;삼국지&amp;gt;에서 박종화 판본이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 김구용은 그 의고의 문투와 시가 이문열의 장식성을 아래로 내친다. 그래서 조금은 둔중해 보이는 감도 있다. 이문열은 '평역'이라는 전제에 의한 때문인지 '개입'과 '해석'이 빈번하다. 황석영은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한 생생함이 있다. 그중 박종화 판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 것은 학문적인 고증이나 비평이 아니라 순전히 어릴 적 '독서' 체험이라는 뜻이다. 
&lt;BR&gt;
&lt;BR&gt;
어릴 적 박종화의 &amp;lt;삼국지&amp;gt;를 여러번 읽었다. 방학 때마다 강원도 정선군 함백에 있는 고모네 집에 형과 함께 기차 타고 내려갔다. 그때 &amp;lt;삼국지&amp;gt;를 들고 갔었다. 초등학교 6학 년 쯤 되었을 무렵인데, 세로 판형에 4단 편집에 되는 거무스름한 양장본이었다. 수많은 인물과 전투와 음모가 뒤엉켜 있어서 뭔지도 모른 채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들 그런 기억이 있을 것이다. 형, 누나, 언니, 조카 등과 함께 둘이 한 권의 책을 동시에 읽던 체험. 고학년의 속도를 저학년이 따라가지 못하여 '잠깐만...... 아직 넘기지 마. 잠깐만' 하면서 보폭을 맞춰 읽던 기억...... &lt;BR&gt;
&lt;BR&gt;
그때 강원도 정선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면서 그렇게 읽었던 책이 &amp;lt;삼국지&amp;gt;였다. 아니,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때 그것이 박종화 판본인지도 확실치 않다. 70년대 말이었으므로 이문열, 황석영, 장정일 본은 확실히 아니었고, 5권으로 된 것이었는데, 분명치 않다. &lt;BR&gt;
&lt;BR&gt;
아무튼, 이 박종화 판본에 대하여 문학평론가 진정석은 &quot;풍부한 낭만성과 대중성, 한학적 교양을 배경으로 한 유장한 고어투의 문체 등으로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위상을 확보, 번역문학의 새로운 수준을 보여주었다&quot;고 평한 적 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31969561.jpg&quot; width=&quot;180&quot; height=&quot;267&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황석영 판 &amp;lt;삼국지&amp;gt;&lt;/p&gt;&lt;/div&gt;&amp;lt;삼국지&amp;gt; 번역의 역사와 현황에 대해 깊이 연구한 사람은 인하대 한국학연구소의 윤진현 박사다. 그에 따르면 오늘의 '소설 문화'는 물론이고 조선시대에도 기대승, 허균, 김만중 등의 문적에 삼국지에 대한 언급이 많다고 한다. 사실 &amp;lt;삼국지&amp;gt;는 흥미로운 이야기일 뿐 성리학의 엄격한 틀에 속하는 전범은 아니었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윤진현 박사에 따르면, 국내 판본은 주로 모종강 본을 저본으로 한 정역류와 일본 요시카와 에이지 본을 바탕으로 하는 일본 재번역류, 그리고 국내 작가들이 임의로 번역한 번안류로 나뉠 수 있다. 요시카와 에이지 역본은 1939년 9월 20일부터 1943년 9월 14일까지 &amp;lt;경성일보&amp;gt;에 일본어로 연재된 바 있고 이후 김광주, 방기환, 이원섭 등이 판본으로 활용하였다. 정역류는 김구용, 황석영, 정원기, 정소문 등의 것이다. 이문열, 정비석, 김홍신 그리고 가장 최근의 기록이 되는 장정일은 번안류에 속할 수 있다. &lt;BR&gt;
&lt;BR&gt;
이 중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것은 아무래도 이문열의 민음사 판 &amp;lt;삼국지&amp;gt;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1988년 처음 출간된 이후 현재까지 1700만 부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비판이 있었다. 간행 초기부터 장안의 고수들이 숱한 오류를 지적하였고 그래서 2002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여기서도 오류가 발견되었다. 중국의 동포 작가 리동혁은 2002년 개정판의 오류를 점검하여 &amp;lt;삼국지가 울고 있네&amp;gt;(도서출판 금토)를 펴내기도 했다. 그래서 저자와 출판사는 2004년에 재개정판을 또 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77657596.jpg&quot; width=&quot;170&quot; height=&quot;251&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장정일 판 &amp;lt;삼국지&amp;gt;&lt;/p&gt;&lt;/div&gt;그런데 그 내용의 부실이나 오류와 무관하게 그리고 흡입력이 강한 이문열 특유의 의고체적 문투와 무관하게, 나는 출판사 측의 대대적인 광고 공세를 기억하고 또한 이를 지적하고 싶다. 이문열 삼국지는 한때 논술고사를 준비하는 필독서로 광고된 적 있다. 서울대생 운운하는 광고 문구를 앞세운 광고가 상당히 오랫동안 전개된 적 있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나는 그 진위 여부(서울대생 운운)를 떠나서, 이 나라를 대표적인 출판사와 작가에게 정말로 &amp;lt;삼국지&amp;gt;가 '논술고사 필독서'인지 물어보고 싶다. 이는 지난 십여 년의 논술 고사에서 삼국지의 어느 대목이 몇 번이나 기출 문제의 제시문으로 출제되었던가 하는 점을 떠나서라도, 과연 '논술 고사 필독서'로 &amp;lt;삼국지&amp;gt;를, 입시철에 몇 차례가 아니라) 그토록 몇 해에 걸쳐 지속적으로 광고를 할 만한 것인지, 되물어보기를 바란다. &lt;BR&gt;
&lt;BR&gt;
이것은 이문열이 '보수 작가'라서 딴지를 거는 것도 아니다. 상당히 귀하고 좋은 책을 많이 낸 대표적인 출판사의 편집자들, 그리고 어쨌거나 한국 문학계의 뚜렷한 자취를 남기고 있는 작가에게 질문을 해보는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12490356.jpg&quot; width=&quot;200&quot; height=&quot;26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고우영 판 만화 &amp;lt;삼국지&amp;gt;&lt;/p&gt;&lt;/div&gt;범위를 아주 좁혀서 말한다면, '논술고사 필독서'로는 이문열 자신의 '필론의 돼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금시조' 같은 소설이 &amp;lt;삼국지&amp;gt; 보다는 훨씬 더 복합적인 문제를 제공하지 않는가. 어느 방송사의 &amp;lt;불만제로&amp;gt; 같은 프로그램에서 다룰 만한, 그런 '과대포장 광고'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amp;lt;삼국지&amp;gt;를 세 번 읽으면 인생을 안다'는 식의 문투가 심한 과장이지만 소박한 면은 있는 것이다. 
&lt;BR&gt;
&lt;BR&gt;
이번에는 좀더 범위를 확장하여 말한다면, 이문열이나 황석영이나 그 아래 연배는 장정일이나 왜 &amp;lt;삼국지&amp;gt;를 꽤 오랜 시간을 들여 번역을 하는지 의아스럽다. 아무리 '이야기'라 하더라도 한문을 깊이 연마한 다음에 가능한 것이 번역일텐데, 그 작업을 제대로 해내자면 한문 공부와 역사 공부와 번역 공부가 전제로 되고 또한 대체로 10권 분량이므로 2년 안팎의 시간을 바쳐야 하는데, 진실로 한국 문학사에서 도저히 생략할 수 없는 뚜렷한 족적의 작가들이 왜 그런 작업을 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lt;BR&gt;
&lt;BR&gt;
농반진반의 어투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황석영은 어느 인터뷰에서 '노후대책'이었다고 했는데, 퇴직금 없는 자유직업 종사자이므로 생각해 볼만한 기획이지만, 4번 타자 황석영이 설마 그럴리야. 혹시 이문열이나 황석영이나 장정일이나 다들 대형 출판사와의 수십만 수백만의 판매부수를 고려하는 '기획 사업'에 동참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의문이다. &lt;BR&gt;
&lt;/font&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732213&quot;&gt;&lt;/embed&gt;&lt;/p&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3월</category>
			<author>jys2003 (정윤수)</author>
			<pubDate>Sat, 14 Mar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3월 14일] 인간적인 것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 - 마르크스</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260904</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39901423.jpg&quot; width=&quot;160&quot; height=&quot;188&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사상가 칼 마르크스&lt;/p&gt;&lt;/div&gt;마르크스는 무슨 말을 했던가. 그는 많은 말을 하였고 글을 썼고 책을 출간하였으며 자신의 말에 합당한 실천을 하다가 1883년의 오늘, 3월 14일에 사망하였는데, 한 때 그의 둔중한 말이 유령처럼 떠돌았으나, 지금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마르크스의 말 중에 가장 오해를 받는 것은 '종교는 아편이다'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그의 책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종교를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면서 아편과 같이 백해무익한 것으로 저주한 것처럼 생각한다. 이 무지막지한 무지와 편견에 대하여, 가장 명백한 해명은 마르크스의 책 &amp;lt;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amp;gt;이 될 것이다. 이 책에서 마르크스는 썼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quot;종교적 고난은 현실적 고난의 표현인 동시에 현실적 고난에 대한 항의다.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들의 한숨이며, 심장 없는 세상의 심장이며,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quot; &lt;BR&gt;
&lt;/font&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51990324.jpg&quot; width=&quot;210&quot; height=&quot;312&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독일 쳄니츠에 있는 마르크스 기념상&lt;/p&gt;&lt;/div&gt;해석자 한 명의 도움을 받기로 하자. &amp;lt;마르크스 평전&amp;gt;의 프랜시스 윈은, 종교가 사악한 통치자들이 대중을 바보로 만들기 위해 투약하는 마약이라고, 마르크스가 말한 적이 결코 없다고 말한다. 
&lt;BR&gt;
&lt;BR&gt;
오히려 마르크스는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에게 종교가 드리워주는 거룩한 위안의 의미를 깊이 새기고 있었다. 현실은 참담하지만 내세에서만큼은 위안을 얻고 싶어 마음에 대하여 마르크스는 깊이 이해하였고 '국가가 그들의 눈물과 탄원을 들어주지 않는 상항에서 국가보다 더 큰 권위자인 신에게 호소하는 것'(프랜시스 윈)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이 현실의 개선이나 실천에 큰 도움을 주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lt;BR&gt;
&lt;BR&gt;
이것으로도 부족하다면 또 한명의 증언자가 있다. &amp;lt;제5도살장&amp;gt;을 쓴 소설가 커트 보네거트. 그는 블랙유머로 가득찬 에세이집 &amp;lt;나라 없는 사람&amp;gt;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독재자들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카를 마르크스의 말을 들이댄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그 말을 했던 1844년 당시, 아편과 아편 추출물은 누구나 복용할 수 있는 유일한 진통제였다. 마르크스 자신도 아편을 복용한 적이 있다. 그는 아편을 먹고 통증이 일시적으로 가라앉자 대단히 고마워했다. 마르크스는 그저 종교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비탄에 빠진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지 그것을 비난하려던 게 아니었다.&lt;/font&gt; &lt;BR&gt;
&lt;BR&gt;
칼 하인리히 마르크스. 1818년 5월 5일에 태어났고 1883년의 오늘, 3월 14일에 사망했다. 근대에 이른 인류가 그 무렵까지 생각하였던 모든 지식에 통달하였던 사람이고 해석이 아니라 실천을 외쳤던 사상가다. 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였고 베를린으로 옮겨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였으며 1841년에 자연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예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세기의 그의 사상과 이름은 20세기의 정치, 경제, 역사, 문화, 과학, 교육 등 전 분야의 접두어가 되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30116631.jpg&quot; width=&quot;240&quot; height=&quot;316&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베를린의 마르크스와 엥겔스 동상&lt;/p&gt;&lt;/div&gt;사상가이자 논쟁자였던 그를 직업적으로 분류하자면 '언론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가 '언론 활동'은 오늘날 우리가 직업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바와 달리 자신의 사상을 실천하고자 하는 공개적인 논장이었는데, 아무튼 그는 독일과 프랑스와 영국에서(그리고 미국의 신문에까지) 무수히 많은 신문에 편집인으로 관여하거나 논쟁적인 글을 썼다. 
&lt;BR&gt;
박사 학위를 마친 후 고향으로 도라와 진보적인 매체인 &amp;lt;라인신문&amp;gt;의 편집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이 신문이 1843년에 폐간되었을 때,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편집장직을 사임합니다'라는 의견 광고를 냈고 그 옆에 인류에게 지혜의 불을 밝혔던 프로메테우스가 독수리에게 매일같이 간을 쪼아먹히는 그림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해에 앞서 소개한 &amp;lt;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amp;gt;을 발표하였다. &lt;BR&gt;
&lt;BR&gt;
프로이센의 탄압을 피해 프랑스로 이주한 마르크스는 친구이자 동지이자 후원자였던 사상가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함께 많은 작업을 하였다. &amp;lt;헤겔 법철학비판 서문&amp;gt;을 비롯하여 &amp;lt;유태인 문제에 대하여&amp;gt;, &amp;lt;경제학철학 수고&amp;gt;, &amp;lt;소외론&amp;gt;, &amp;lt;독일이데올로기&amp;gt; 등이 그것이다. 이후 마르크스는 프랑스 정부의 박해를 피하여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와 엥겔스는 1847년에 국제적인 노동자조직인 ‘공산주의자동맹’ 제2차 대회의 의뢰로 &amp;lt;공산당선언&amp;gt;을 집필하게 되는데, 이 책은 1848년 2월, 런던에서 발간되었으며 곧 유럽 각지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lt;BR&gt;
&lt;BR&gt;
마르크스는 생의 나머지 시간을 런던에서 보냈다. 견디기 어려운 경제적인 궁핍을 약간의 원고료와 엥겔스의 후원으로 버텼다. 그의 모든 지적 작업은 대영박물관에서 이뤄졌다. 그곳에서 그는 &amp;lt;자본&amp;gt;을 썼다. 1860년에 1권이 출간되었고 나머지 원고는 엥겔스가 마르크스 사후에 정리하여 출간한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32932007.jpg&quot; width=&quot;220&quot; height=&quot;29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모스크바에 있는 마르크스 기념상&lt;/p&gt;&lt;/div&gt;마르크스를 덮어놓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가 &amp;lt;자본&amp;gt;을 쓰면서, 대영박물관이나 오락가락 하면서, 가족을 조금도 돌보는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아침 9시에서 저녁 7시까지 도서관에서 연구를 했다. 집에 와서도 줄담배를 피우면서 밤늦도록 공부하였다. 엥겔스, 리프크네히트, 프라일리그라트 등이 돈을 모아줬다. 그밖에 원고료와 친척에게 빌린 돈으로 연명했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지독한 가난 때문에 두 아들과 딸이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났다. 비난자들은 말한다. 이토록 가족이 고통을 겪었음에도 마르크스는 오직 자본주의를 타도할 목적으로 &amp;lt;자본&amp;gt;을 쓰기만 했다는 것이다. &lt;BR&gt;
&lt;BR&gt;
이런 악담에 대해서는 영국의 우파 학자인(그러나 매우 깊은 도움을 주는 학자인) 이사야 벌린의 증언이 필요하다. 이사야 벌린은 영국 출생으로 옥스퍼드대학 교수이자 미국학술원 명예회원이고 왕립오페라하우스 단장을 지냈으며 영국학술원 원장을 지낸 사람이다. 이렇게 '신원'이 확실한 이사야 벌린은, 28살 때 쓴 &amp;lt;칼 마르크스&amp;gt;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마르크스는 천성적으로 말이 없는 사람이었으며 그의 과묵함은 자기 연민 하에 살아옸던 어떤 사람보다 더 했다.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도 그가 그토록 자주 처했었던 처절한 상황을 짙은 아이러니로 자신의 불행을 풍자하였는데, 이것은 평범한 독자라면 느끼지도 못하고 간과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lt;/font&gt; &lt;BR&gt;
&lt;BR&gt;
1856년, 마르크스는 지극정성으로 사랑하고 아꼈던 아들 에드가가 6살로 죽었을 때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모든 종류의 불행으로 고통받아 왔으나, 바로 지금에야 진정한 불행이 무엇인지 알았다네. 내가 최근에 겪었던 모든 고통 중에서도 당신이 보여준 생각과 우정 그리고 아직도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합리적인 일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나를 지탱하게 해주었다네'라고 썼다. 마르크스의 피 역시 36.5도로 따스했던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11222946.jpg&quot; width=&quot;160&quot; height=&quot;25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마르크스 &amp;lt;자본&amp;gt; 표지&lt;/p&gt;&lt;/div&gt;이사야 벌린의 기록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1883년의 오늘 3월 14일에 자신의 서재에 있는 팔걸이 의자에 앉아서 잠에 들었다가 숨졌다. 그 마지막 순간은 비교적 평온하였으나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지독한 고통의 시간들이었다. 1881년에 아내 제니가 암 투병 끝에 사망한 뒤로 마르크스는 급속히 기력이 약해졌다. 
&lt;BR&gt;
&lt;BR&gt;
주치의의 권유로 알제리로 잠시 요양을 떠났지만 오히려 늑막염에 낯선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고 병든 채로 유럽으로 돌아왔다. 얼마 후에는 프랑스령 리비에라 해안으로 요양을 떠났다가 다시 파리로 돌아와 장녀 제니와 함께 런던으로 갔다. 얼마 후 장녀마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마르크스는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문턱을 넘어서버린 것이다. &lt;BR&gt;
&lt;BR&gt;
그는, 아내가 잠들어 있는 런던의 하이게이트 공동 묘지에 묻혔다. 조문객을 별로 없었다.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각국의 노동자 대표 몇 명이 전부였다. 엥겔스가 조사를 썼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quot;오늘날 가장 증오 받았을 뿐만 아니라 중상모략을 당했던 그 사람이......그러나 시베리아의 광산에서 캘리포니아의 해안에 이르기까지 사랑과 존경을 받던 그 사람이, 유럽 전역과 미 대륙의 수백만 혁명적 노동자 동지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이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이름과 저작들은 역사 속에서 영원할 것입니다.&quot;&lt;/font&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32583568.jpg&quot; width=&quot;200&quot; height=&quot;30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런던 하이게이트의 마르크스 묘지&lt;/p&gt;&lt;/div&gt;맨앞에, 마르크스는 무슨 말을 했던가, 하고 썼다. 그렇게 시작했다. 그는 많은 말들을 하였다. 경구도 많다. 내가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는 것은 &amp;lt;정치경제학 비판 서문&amp;gt;에 쓴 &quot;문제는, 문제 해결의 열쇠를 안고 등장한다&quot;는 말이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이 말은 그가 &amp;lt;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amp;gt;에서 &quot;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만,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환경에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넘겨받아 직접 맞닥뜨리게 되는 환경에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quot; 하는 문장과 호응을 이룬다. &lt;BR&gt;
&lt;BR&gt;
조금은 가볍게 정리하자면, 프랜시스 윈의 책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세 명의 딸과 함께 빅토리아조 시대의 응접실 게임인 ‘고백 놀이’를 즐겨했다고 한다.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미덕은?', '당신이 가장 혐오하는 악덕은?',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은?',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같은 질문에 대하여 단답을 하는 놀이다. &lt;BR&gt;
&lt;BR&gt;
마르크스는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각각 '단순성', '노예근성', '책에 몰입하기', '빨강' 등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딸들의 질문에 대하여 마르크스는 아래와 같이 대답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경구는? &lt;BR&gt;
Nihil humani a me alienum puto (인간적인 것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&lt;BR&gt;
&lt;BR&gt;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좌우명은? &lt;BR&gt;
De omnibus dubitandum (모든 것은 의심해보아야 한다)&lt;/font&gt; &lt;/font&gt;&lt;/p&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인간의 얼굴을 한 마르크스&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62329288.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마르크스 평전 | 프랜시스 윈 지음 | 정영목 옮김 | 푸른숲&lt;BR&gt;
&lt;BR&gt;
  영국 &lt;가디언&gt;의 칼럼니스트인 저자는 '인간' 마르크스에 주목한다. 물론 사상과 실천이 결합된 '인간' 마르크스이다. 오래 전에 출간된 이사야 벌린의 책이 주로 사상의 변모를 다뤘다면, 그리고 자크 아탈리의 책이 풍부한 자료를 흥미롭게 재구성하고 있다면, 프랜시스 윈은 진지하고도 흥미로운 인물 평전의 한 예를 보여준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1843217&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마르크스의 용어와 개념들&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36355071.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How to Read 마르크스 | 피터 오스본 외 지음 | 고병권, 조원광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lt;BR&gt;
&lt;BR&gt;
  이 'How to Read......' 시리즈는 큰 족적을 남긴 사상가를 이해하고 그의 전모에 한걸음 더 다가가기 위해 '용어와 개념' 중심으로 접근한 시리즈다.  다윈, 니체,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 라캉 등의 사상에 대한 초보적인 걸음걸이가 될 수 있다. 피터 오스본은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 개념인 상품, 소외, 노동, 축적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그의 사상 전모를 살펴나간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01065894&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마르크스주의자의 경제 이야기&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62925420.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새로운 사회를 위한 경제이야기 | 김수행 지음 | 한울&lt;BR&gt;
&lt;BR&gt;
  정색을 하고 책을 고르자면, 마르크스의 수많은 '원전'을 일일이 옮겨 적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용기가 없다. 좀 더 천천히,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천천히 다가갈 수밖에 없는 정황이다. 그래서 김수행 교수의 대중적인 경제 이야기 책을 골랐다. 오늘의 경제 위기에 대하여 &lt;자본&gt;의 완역자이자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김수행 교수의 사뭇 친절하고 '쉬운' 이야기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46050802&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727159&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3월</category>
			<author>jys2003 (정윤수)</author>
			<pubDate>Fri, 13 Mar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3월 13일] 세계의 혼란과 신 없는 시대의 기도 - 키에슬로프스키</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260609</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82195320.jpg&quot; width=&quot;190&quot; height=&quot;269&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키에슬로프스키 영화 &amp;lt;데칼로그&amp;gt;&lt;/p&gt;&lt;/div&gt;구약 성서의 ‘십계’를 영화로 만든 작품으로는, 세실 B. 드밀 감독의 1956년 &amp;lt;십계&amp;gt;(The Ten Commandments)가 유명하지만, 오늘은 그 영화 얘기가 아니다. 다른 ‘십계’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로 ‘Dekalog’라고 하는데, 바로 이 단어로 크쥐스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 10편의 연작 드라마를 만들었으므로 오늘은 &amp;lt;데칼로그&amp;gt;라고 부르겠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amp;lt;데칼로그&amp;gt;, 10편의 이야기로 크쥐스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작품이다. 그는 1941년 바르샤바에서 태어났고 직업연극학교에서 거쳐 우즈영화학교에서 다큐멘터리를 전공하였다. 절제된 대사와 세련된 화면 그리고 가히 독립된 존재로 움직여나가는 음악과 음향의 절묘한 구성으로, 한번 보기만 하면 평생 잊을 수 없는 독특한 ‘아우라’의 작품을 남겼다. &lt;BR&gt;
&lt;BR&gt;
1990년에 그는 걸작 영화 &amp;lt;베로니카의 이중생활&amp;gt;을 발표하였고 곧 줄리엣 비노쉬, 이렌느 야곱, 줄리 델피 등이 각각 주연을 맡은 &amp;lt;세가지 색 - 블루, 화이트, 레드&amp;gt;로 자유, 평등, 박애의 현재적 의미를 추구하였다. 이 세 작품은, 순도 높은 작품성은 물론이려니와, 당시 유럽 통합이 가속화되던 흐름과 맞물리면서 끝없는 평가와 해석과 찬미의 대상이 되었고 그 바람에 프랑스 세자르상(블루), 베를린영화제 은곰 감독상(화이트), 프랑스 세자르상 수상 및 아카데미 최우수감독상 노미네이트(레드) 등의 기록을 남겼다. &lt;BR&gt;
&lt;BR&gt;
나는, 그의 걸작 중에서 단 하나를 꼽으라면 우선 &amp;lt;베로니카의 이중생활&amp;gt;을 고려할 것이다. 1968년, 폴란드 바르샤바의 베로니카, 프랑스 파리의 베로니크. 두 여자가 동시에 태어난다. 1968년이라는 시간이 중요하다. 이 두 여자의 엇길린 삶을 통해 혼돈의 현실 속에서 개인적 삶의 가치를 찾아내려는 감독의 윤리학이 순도 높게 담겨 있다. 물론 당시 동네 비디오 가게 주인들은 때로 이 작품을 성인물 코너에 비치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55700231.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0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amp;lt;베로니카의 이중생활&amp;gt;에서 서로 다른 베로니카가 민주화 시위가 벌어지는 크라코프에서 우연히 만나는 장면&lt;/p&gt;&lt;/div&gt;
&amp;lt;베로니카의 이중생활&amp;gt;에 비하여 &amp;lt;세가지 색 - 블루, 화이트, 레드&amp;gt; 연작은 조금은 지루한 동어반복의 느낌마저 준다. 주연을 맡는 이렌느 야곱은, 감독이 전혀 다른 엔딩 컷을 포함한 무려 15개 버전의 서로 다른 편집본을 완성했다고 한다. 영화 윤리학자다운 면모다. &lt;BR&gt;
&lt;BR&gt;
아래 영상은, 이 영화 속에서 바르샤바의 베로니카가 콘서트 중에 쓰러지는 장면이다. 음악과 영상을 높은 차원에서 결합시키고자 했던 감독의 의지가 엿보이는 장면으로, 음악은 그의 거의 모든 영화에 작곡으로 참여한 지그비뉴 프라이스너 작품이다.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25&quot; height=&quot;344&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www.youtube.com/v/e0PENbPmT7Y&amp;amp;hl=ko&amp;amp;fs=1&quot;&gt;&lt;/embed&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72402200.jpg&quot; width=&quot;210&quot; height=&quot;224&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크르지스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lt;/p&gt;&lt;/div&gt;아무튼, 신 없는 시대에도 과연 기도는 의미가 있는가 하는 일련의 작품을 남긴 키에슬로프스키는 &amp;lt;레드&amp;gt;를 마지막으로 하여 은퇴 선언을 하였다. ‘거장’, ‘시네아스트’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을 감독이기는 하였어도 이제 갓 쉰을 넘긴 나이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갑작스런 은퇴 선언은 ‘더 이상 필름으로 할 얘기가 없다’는 또 하나의 선언이 아닌가 하는 해석도 낳았다.
&lt;BR&gt;
&lt;BR&gt;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폴란드 바르샤바의 한 병원에서 심장병 수술을 받다가 1993년의 오늘, 3월 13일에 사망하였다. 당시 그는 ‘천국, 지옥, 연옥’을 테마로 한 3부작을 기획 중이었다. 그의 구상은 &amp;lt;롤라 런&amp;gt;의 톰 티크베어가 &amp;lt;천국&amp;gt;(2002년)을, &amp;lt;노맨스 랜드&amp;gt;의 보스니아 감독 나디스 타노비치가 &amp;lt;지옥&amp;gt;(2006년)을 찍는 것으로 이어졌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친구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크쥐슈토프 피시비츠가 고인이 남긴 주제를 유럽의 젊은 감독들로 하여금 잇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3부가 되는 ‘연옥’ 편은 아직 마무리 되지 않았다. &lt;BR&gt;
&lt;BR&gt;
자, 다시 &amp;lt;데칼로그&amp;gt;로 돌아오면, 키에슬로프스키는 구약 성서의 십계명을 현대의 관점에서 다시 성찰한다. 특히 지그비뉴 프라이스너의 음악은 이 영화의 순도를 높혀준다. 아래 영상은 &amp;lt;데칼로그&amp;gt; 연작의 제 5편의 음악이다.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25&quot; height=&quot;344&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www.youtube.com/v/TiUFY0cnAFo&amp;amp;hl=ko&amp;amp;fs=1&quot;&gt;&lt;/embed&gt;&lt;BR&gt;
&lt;BR&gt;
&amp;lt;데칼로그&amp;gt;를 통하여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계율의 가르침, 그 드높은 금기의 도덕률에 대하여, 어쩔 수 없이 위반하게 되는 이야기를 조금씩 보여준다. 계율에는 어긋나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인간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제시되는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70638628.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50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폴란드 바르샤바 포바츠키 묘지에 있는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묘비&lt;/p&gt;&lt;/div&gt;
예컨대, 네 번째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율에 관한 이야기. 감독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연극과 학생 앙카. 그녀는, 아버지가 몰래 숨겨놓은 어머니의 편지를 발견한다. 어머니는 오래 전에 죽었다. 그 편지 속에서 앙카는 아버지가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출장에서 돌아온 아버지와 앙카는 충돌한다. 아버지를 공경할 수 없는 상황, 앙카는 갈등하는 것이다. 두 사람은 밤늦도록 대화를 한다. 다음 날 아침 아버지는 딸을 두고 떠나려고 한다. 그때 앙카는 고백한다. 실은 그 편지가 어머니의 필체를 흉내내어 자신이 위조한 것이라고...... &lt;BR&gt;
&lt;BR&gt;
또 한편, 십계명의 여섯 번째 계율은 ‘간음하지 말라’는 것이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이 계율을 완전하게 위반하는 간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체국 말단 직원 토멕. 그는 오래 전부터 맞은 편의 여인을 몰래 훔쳐봐왔다. 화가인 막다는 이 젊은 사내의 시선을 결국 느끼게 된다. 토멕은 훔쳐보기를 잠시 멈추고 그녀에게 자신을 드러낸다. 하지만 막다는 냉소적으로 반응할 뿐. 토멕은 자살을 기도한다. 뒤늦게야 막다는 자신을 훔쳐본 토멕을 통하여 닫혀있던 마음의 문이 열리고 사랑과 신뢰에 대한 힘을 되찾았음을 알게 된다. &lt;BR&gt;
&lt;BR&gt;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소개한다. 여덟 번째 계율 ‘네 이웃에 대해 거짓 증언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역시 감독은 ‘거짓 증언’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여준다. 바르샤바 대학의 윤리학과 교수 조피아. 예순이 넘었다. 2차 대전을 치른 나이다. 더욱이 폴란드 아닌가. 2차 대전 당시 무슨 일인가 겪었음이 틀림없다. &lt;BR&gt;
&lt;BR&gt;
그녀의 강의실에 미국에서 온 젊은 여인 엘즈베이타가 청강을 한다. 문답으로 진행되는 강의 중에 그녀가 질문을 한다. 윤리적 딜레마에 관한 화두. 윤리학과 교수 조피아는 서둘러 수업을 끝낸다. 교수의 집에서 만난 두 사람. 40년 전의 이야기를 서로 털어놓는다. 당시 6살의 유대인 소녀 엘즈베이타는 숨을 곳을 찾으려 하였으나 조피아는 ‘거짓 증언’으로 그 어린 아이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왜 조피아는 당시 거짓 증언을 하였을까.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35290924.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0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대표작 &amp;lt;베로니카의 이중생활&amp;gt;의 한 장면. &lt;/p&gt;&lt;/div&gt;
이 연작 작품을 철학과 윤리의 깊은 잣대로 꼼꼼히 살핀 철학자 김용규는, 특히 ‘거짓 증언 하지 말라’는 대목을 설명하면서, ‘단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진리에 어긋나는 증언을 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여러모로 생각할 것이 많은 영화 감독, 크쥐스토프 키에슬로프스키가 1993년의 오늘, 3월 13일에 타계했다. &lt;/font&gt;&lt;/p&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연작 영화 10편에 겨우 13,200원&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14421923.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데칼로그 세트 (6disc) | 크르쥐스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 엘라이트 &lt;BR&gt;
&lt;BR&gt;
  1988년 폴란드 국영 방송국이 의뢰하여 제작된 &lt;데칼로그&gt;.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구약성서의 의 십계명에 기초하여 폴란드 바르샤바 주택단지 입주자들의 삶을 회색 톤으로 조명하였다. 낡은 주택단지 입주자들은 10편 중에 하나씩을 주역으로 맡는다. 다른 작품에서는 조연이나 엑스트라가 된다. 그리고, 매 작품의 이야기와 전혀 상관없이, 걷기도 힘든 노파가 쓰레기를 들고 겨우 한걸음씩 걸어 휴지통에 버리는 장면이 매번 나온다. ‘뭔가’를 거듭 환기시키는 것이다. 또한 이야기 전체와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어느 30대 남자가 매 작품마다 등장하고 카메라는 그의 얼굴을 자주 클로즈업 한다. 어떤 사람은 ‘예수’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아무튼, 이 연작 중에서 두 편은 &lt;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gt;, &lt;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gt;이라는 제목으로 극장용으로 상영되었는데, 그 앞의 작품이 1988년에 칸느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이 10편이 겨우 13,200원이라고 한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9177012801&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영화, 윤리, 철학&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02006509.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데칼로그 | 김용규 지음 | 바다출판사&lt;BR&gt;
&lt;BR&gt;
  저자는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소문난 영화광이다. 영화, 윤리, 철학을 동시에 말할 수 있는 이력을 가진 셈이다. 독일 유학 당시, 교부철학을 공부하던 중에 &lt;데칼로그&gt;를 보게 되었고, 그때부터 메모하고 정리해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 키에슬로프스키가 고마워할 만한 해석이 많이 들어있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5611420&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영화 공부, 철학 공부&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64634443.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영화관 옆 철학카페 | 김용규 지음 | 이론과실천&lt;BR&gt;
&lt;BR&gt;
  ‘영화로 철학하기’, 이런 식의 기획이 들어간 책들이 많은데, 그만큼 영화는 무엇인가를 배우고 또한 익힐 수 있는 ‘열린’ 장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서 김용규는 행복, 희망, 시간, 사랑, 죽음, 성 같은 인류 보편의 고뇌를 다룬다. 그것을 위하여 영화 &lt;중앙역&gt;, &lt;잠입자&gt;, &lt;인생은 아름다워&gt;, &lt;박하사탕&gt;, &lt;솔라리스&gt;, &lt;내 어머니의 모든 것&gt;, &lt;매그놀리아&gt;, &lt;제7의 봉인&gt;, &lt;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gt; 등을 살핀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과거 영화 ‘읽기’를 하던 시대에 출간되었더라면, 필독의 공부하는 책으로 꼽혔을 것이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1370032&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719901&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3월</category>
			<author>jys2003 (정윤수)</author>
			<pubDate>Thu, 12 Mar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3월 12일] 진안군 작은 마을의 소중한 실험 - 백운면</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260450</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오늘, 이 블로그에 대하여, 이를테면 전북대 강준만 교수라면 마뜩찮아 할 것으로 짐작한다. '지방은 식민지다', 이것이 근래 강준만 교수가 뜨겁게 제창하고 있는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는데, 이 화두는 서울과 지방의 기형적인 정치적, 행정적, 문화적 불구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현재 지방의 거의 모든 물산과 인재와 자원은 서울을 떠받치는데 쓰이고 있다. 그런데 그 구조의 본질에 대하여 서울은 무관심하고 지방은 어떻게든 서울로 진입하려는 열망 때문에 애써 모른체 한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10846992.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구름을 이고 있는 전북 진안군 마이산 모습&lt;/p&gt;&lt;/div&gt;
오늘 이 블로그처럼, 지방의 어느 소읍이나 작은 마을을 '둘러 보는' 정도의 글은 이러한 '식민성'을 더욱 부채질할 수도 있다. 예컨대 '오래된 미래'라고 부를 수 있는, 인도나 티벳이나 라틴의 마을에 대하여 마치 '인류 문명의 시원'이니 '피로에 지친 영혼의 안식처' 하는 말들이 심각한 오리엔탈리즘의 폐악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지방에 대한 '애상적인' 이미지는 국내판 오리엔탈리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lt;BR&gt;
&lt;BR&gt;
그럼에도 이 산하의 작은 마을과 삶에 대하여 무관심하기 보다는 좀더 겸손한 걸음으로 찬찬히 살펴보는 것은 아예 회피할 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철마다 특산물 축제들이 요란스럽고 지차체마다 자연관광을 넘어 문화 관광, 역사 관광, 인물 관광의 테마를 내세우고 있지만, 그것들이 울긋불긋한 화장의 차원을 아직은 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조용한 걸음으로 산하의 소읍을 둘러보는 것은, 원치도 않게 지방에 대한 '문화 식민지성' 강화로 작용할 수는 있어도, 아예 처음부터 포기할 일은 아닐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59497095.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진안군 백운마을로 다가가면, 자연스레 창문을 열게 된다.&lt;/p&gt;&lt;/div&gt;
전북 진안의 작은 마을, 백운면 원촌마을을 생각해 본다. 다가갈수록 기이하면서도 아늑한 이중적인 느낌을 주는 마이산, 그 산의 남쪽으로 15분 쯤 달리는 백운면 원촌 마을에 닿는다. &lt;BR&gt;
&lt;BR&gt;
백운면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말은 흰 구름도 쉬어 간다는 소슬하고 한적한 역사를 지닌 이름이다. 마을 위쪽으로 높은 산에서 발원한 데미샘의 물이 이어지는 섬진강 물길이 흐르고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산길이 만나며 30번 국도가 지난다. 예로부터 이 일대는 물산이 풍부하여 장터도 크게 열렸으나 조용한 마을이 된 지 오래다. 여름철 휴가 때나 국토종단하는 도보 행렬이 지나갈 때를 빼놓고는 조용한 마을이다. &lt;BR&gt;
&lt;BR&gt;
그런데 만약 당신이 이 작은 마을에 들어선다면, 정말 운전을 조심해야 한다. 지방의 작은 마을이 어디나 그렇듯이 길은 구불구불하고 가변 신호등이 많다. 그것만으로도 주의를 요하지만, 무엇보다 이 마을의 작은 가게들, 그 간판들이 너무나 정갈하고 소박하여, 진실한 뜻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어서, 자칫 한 눈을 팔 수도 있기 때문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99829466.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진안군 백운면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간판들&lt;/p&gt;&lt;/div&gt;
마을의 간판은, 굳이 비유하자면 '오래된 미래' 같은 느낌을 준다. 서로가 밀치고 제치고 따라붙고 하는, 이 경쟁 사회의 축약도와 같은 도심지의 간판은, 이 마을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저마다 울긋불긋하게 치장하여 그 요란한 화장이 오히려 거북한 역효과만 자아내는 도심지의 삐까번쩍한 간판은 이 말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lt;BR&gt;
&lt;BR&gt;
전주대 도시환경미술학과 이영욱 교수가 디자인그룹 ‘산 디자인’과 ‘티팟’ 등의 협력으로 이룬, 작지만 아름다운 성과다. 이 전문가들과 전주대학교, 그리고 백운면 마을조사단이 협력하였고 무엇보다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동의하였다. 큰 글씨에 번쩍거리는 조명이 간판의 모든 것인 줄 아는 시대에 작은 크기에 소박한 디자인으로 마무리하는 과정이었다. &lt;BR&gt;
&lt;BR&gt;
물론 동네의 간판이 바뀌었다 해서 그 말의 어려운 사정이 하루 아침에 바뀔 리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작지만 큰 사건으로 볼 수는 있다. 관이 적극 지원하고 전문가들이 협력하며, 무엇보다 마을 주민들이 지지하고 참여하여 작은 것 하나씩 고쳐나갈 때, 또 무엇보다 주민들의 삶의 내면으로부터 그런 일들이 진행되어 마을과 인근의 부락과 자연들이 어우러질 때, 퇴락하여 무기력해지는 기운을 조금을 덜 수 있는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27618987.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간판의 변화는 작지만 의미 있는 '사건'이다.&lt;/p&gt;&lt;/div&gt;
2001년부터 진안군청은 ‘마을만들기 팀’을 조직하여 몇 년째 다각도의 실험과 사업을 벌여 왔다. 진안군은 임야 비율 80%의 전형적인 산간고원형 농촌지역. 2004년 행자부의 낙후도 평가에서 전국 234개 자치단체 중 231위를 한 낙후한 마을이다. 1966년 10만 명을 넘었던 인구는 2005년 현재 2만 4000여 명. 이런 정황에서 '마을만들기 팀'이 가동된 것이다. &lt;BR&gt;
&lt;BR&gt;
우선 행정의 시작과 끝을 모조리 관에서 결정하여 상명하달하던 방식을 깨려고 노력하였다. 주민이 마을회의를 통해 마을 발전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도록 하였고 이를 단계나 중요도에 따라 우선사업 중심으로 갈래를 잡아 추진하되 그 과정에 주민이 참여하도록 한 것이다. 물론 '개발'이라는 것(어떤 개발이냐 하는) 자체를 다시 문제 삼을 수는 있지만, 어쨌거나 주민의 삶에서 일이 시작되도록 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80766848.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백운면의 농기구 수리점의 입간판&lt;/p&gt;&lt;/div&gt;
임수진 전 군수는 농촌지역개발 전문가인 유정규, 구자인 등 인재를 초빙하여 '으뜸마을'을 구상하고 추진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일용잡급직 박사’로 일했던 유정규 박사에 이어 서울대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구자인 박사가 연고도 없는 진안군에 내려와 다양한 ‘활력 사업을 추진했다. 백운면의 소박하면서도 정갈한 간판은 이 과정의 일환이다. &lt;BR&gt;
&lt;BR&gt;
그야말로 주마간산으로, 잠시 살펴본 것에 지나지 않는 백운면 원촌마을 구경이 진안군의 이러한 행정 실험을 평가하거나 적어도 그 실험의 의의를 짐작할 만한 일은 되지 못한다. 행정 실험이란 전시 효과로 금세 드러날 일이 결코 아니고 오랜 시간의 추진과 평가가 필요하다. 더욱이 행정 방식의 개선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개선을 통하여 지방을 어떤 삶으로 바꿔나갈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철학도 평가되어야 한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54822189.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백운면의 작은 가게 간판이 정갈하게 바뀌었다.&lt;/p&gt;&lt;/div&gt;
그래서, 위에 소개한 모습은 그야말로 주마간산일 수밖에 없고 더욱이 '간판'의 변화에만 주목한 것이므로 '지방의 식민지성'이라는 중요한 화두에 어울리지 않는 얘기일 수도 있는데, 그러나 우리 산하, 그 깊은 골과 너른 강의 삶들을 좀더 차분하게 바라보는 작은 거울이 되었으면 싶다. 작은 마을이 살아야 이 산하가 살고 국토가 살고 우리의 허황된 삶도 위로받는다. 국토개발이니 대동맥이니 하면서 오로지 시속 100km 이상의 고속도로와 왕복 4차선의 국도만을 추앙하여 왔으나 이제 그런 속도로는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더 심각해 질 뿐이다. &lt;BR&gt;
&lt;/font&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715516&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3월</category>
			<author>jys2003 (정윤수)</author>
			<pubDate>Thu, 12 Mar 2009 06:21:17 GMT</pubDate>
		</item>
		<item>
			<title>[3월 11일] 문제는 작업복이 아니라 넥타이다 - 복장 규정</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260057</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영화 &amp;lt;코드명 J&amp;gt;의 감독으로 유명한 로버트 롱고는, 1953년 뉴욕 브룩클린 출신으로 서른이 되기 전에 뉴욕 포스트모던 화단의 기수가 된 화가였다. 그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 혹은 여자가 어떤 구속이나 속박을 견디지 못하고 몸부림 치는 연속 그림이다. 예컨대 아래와 같은 그림으로 유명하다. &lt;br /&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78118077.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267&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현대 사회의 비정한 단면을 그린 로버트 롱고의 '무제' 시리즈 &lt;/p&gt;&lt;/div&gt;
그런가 하면, 정장의 남자들이 서로 치고 받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아무튼 로버트 롱고는 아무런 배경도 없이 몸싸움을 하거나 몸부림을 치는 도시인을 흑백의 단면에 담아냄으로써 이 살벌한 경쟁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줬다.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이자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 신안1리 이장이기도 한 강수돌은 ‘팔꿈치 사회’라는 말로, 이 경쟁 사회의 어두운 본질을 갈파한 적 있다. 지난 2008년 10월, &amp;lt;세계일보&amp;gt; 인터뷰에서 강수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66853677.jpg&quot; width=&quot;300&quot; height=&quot;187&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로버트 롱고의 '무제' 가운데 한 편 (1981년)&lt;/p&gt;&lt;/div&gt;“‘팔꿈치 사회’라는 독일 말이 있는데, 이는 우리 사회처럼 팔꿈치로 다른 사람을 밀쳐내야 내 존재가 드러나는 경쟁과 분열의 사회를 가리키지요. 모순에 대해 구성원이 문제 제기조차 안 하고 ‘경쟁 이데올로기’를 굳게 믿는 것은 잘못인데, 이를 극복하는 게 중요합니다. 
&lt;BR&gt;
&lt;BR&gt;
‘탈 경쟁’이 자아내는 모종의 두려움을 정면으로 꿰뚫으면서 넘어가고, 그다음에는 ‘연대’의 실천을 통해 그 두려움의 축소를 경험할 수 있어요.” &lt;/font&gt;&lt;BR&gt;
&lt;BR&gt;
말인즉슨, 그러하지만 이 ‘팔꿈치 사회’의 강력한 힘은 쉽게 수그러들지는 않을 것이다. 앞서 로버트 롱고 얘기를 했지만, 살벌한 경쟁 사회일 뿐만 아니라 상명하복의 위계 속에서 인간이 한낱 부속물로 전락하고 마는 현대의 질병을 일찍이 신학철은 &amp;lt;중산층 연작 - 따봉&amp;gt;에서 짙고 짙은 블랙 유머로 슬프게 그려낸 바 있다. &lt;BR&gt;
&lt;BR&gt;
한 직장인이 물구나무를 섰다. 그가 항상 반듯하게 매고 다녔을 넥타이는, 한순간이나마 바닥으로 늘어져 있다. 그것을 보고 상사는 엄지 손가락을 치켜든다. 따봉! 아래 그림이 그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34766852.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42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1980년 초반, 신학철이 그린 &amp;lt;중산층 연작 - 따봉&amp;gt;은 현대 조직 사회를 비정한 블랙 유머로 담아냈다.&lt;/p&gt;&lt;/div&gt;
현대 직장인의 필수품인 넥타이는 고대 로마의 군인이 사용한 포칼(focal:울 목도리)이 시초라고 한다. 좀더 직접적인 기원은 크로아티아 기마병(크로아트)이 목에 감았던 수건이라고 한다. 1660년 터키전투에서 승리한 크로아티아 병사들이 파리에 개선하면서 밝은 빛의 수건을 목에 감았는데, 화려한 것을 선호했던 루이 14세가 이를 상류층의 패션으로 만들었다는 설이다. 19세기 들어서서는 영국 시민 계급의 상징이 되었고 그 이후로는 현대 도시의 일상용품이 되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14940568.jpg&quot; width=&quot;210&quot; height=&quot;311&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최근 사장이 된 넥타이 신화 &amp;lt;시마 과장&amp;gt;&lt;/p&gt;&lt;/div&gt;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목에다 맨다는 넥타이. ‘넥타이 부대’라는 말도 있지만, 이 넥타이는 중산층 신화라는 이름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기 위한 엄정한 드레스 코드이면서도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인에게는 일과 후에 신속히 벗어버리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lt;BR&gt;
&lt;BR&gt;
지난 2003년, 맨체스터 법원은 현대 복식사와 문화사에 반드시 기록되어야 할 의미 있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남자 직원에게만 넥타이를 매도록 한 복장규정은 성차별이라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lt;BR&gt;
&lt;BR&gt;
맨체스터주 스톡포트시 공무원인 매튜 톰슨이 여직원에게는 티셔츠를 허용하면서 남자는 반드시 넥타이를 매도록 한 주 정부의 복장지침이 성차별이라며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이에 법원이 &quot;성을 기초로 한 낡은 전통&quot;이라며 원고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당시 주정부 복장 규정은 넥타이 차림을 하지 않으면 10% 감봉에 심할 경우 해고까지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lt;BR&gt;
&lt;BR&gt;
이 판결이 나자 당시 영국 직장연금부 대변인은 &quot;계속 직장인다운 옷차림을 요구하겠다&quot;며 항소하겠다고 밝힌 적 있고 이에 톰슨을 지지하는 공공 상업서비스(PSC) 노조는 고용주 측에서 법원 판결에 동의하지 않으면 39건의 유사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65135896.jpg&quot; width=&quot;170&quot; height=&quot;298&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스코틀랜드 정치인 로우지 케인&lt;/p&gt;&lt;/div&gt;우리 사회에서도 ‘복장 규정’ 및 이에 대한 도전이 더러 있어왔다. 유시민 전 의원이 넥타이를 매지 않고 간편화 차림으로 의원 선서를 하려 했던 일이 기억할 만한 일이 된다. 그의 도발은 실패했으나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정도의 의미는 있었다. 
&lt;BR&gt;
&lt;BR&gt;
사실 이 나라의 제헌의회 시절 사진에 보듯이,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비롯해 몇몇 의원이 한복 두루마기 차림을 하였다. 박병배 전 의원은 1966년 미국 존슨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한복 두루마기에 장죽을 물고 등원하기도 했다. 물론 유 전 의원의 ‘복장 도발’은 전통이 몸에 배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권위주의 정치에 대한 도전이라는 의미가 더 컸지만 말이다. &lt;BR&gt;
&lt;BR&gt;
비슷한 시기인 2003년 5월, 영국 스코틀랜드 자치의회의 초선의원이 로우지 케인도 파격적인 옷차림으로 의원선서를 강행하여 동료 의원들이 퇴장하는 소동이 벌어진 적 있다. 청바지에 펑크 스타일 상의를 입은 로우지 케인은 입헌군주제를 반대하는 공화주의자였다. 그녀는 오른손바닥에 ‘나는 국민 앞에 선서한다’고 미리 써놓고 선서를 했는데, 그러니까 그녀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군주(현재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되어 있는 수백 년의 전통을 거절했던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87826511.jpg&quot; width=&quot;210&quot; height=&quot;392&quot; alt=&quot;&quot; style=&quot;cursor: pointer&quot; onclick=&quot;open_img('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87826511.jpg')&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작업복 입은 장태평 장관 (사진 권우성)&lt;/p&gt;&lt;/div&gt;장태평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작업복 차림으로 일을 보기 시작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명박 대통령이 뉴질랜드 방문 때 장태평 장관에게 &quot;왜 외교부 장관과 똑같이 넥타이에 양복을 입고 다니느냐, 각료라 생각하지 말고 농촌 개혁 운동가라 생각하고 일하라&quot;고 언급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어느 신문에서는 ‘농반진반’이라고 했지만, 대통령의 말을 농으로 받아넘길 장관은 없을 것이다.
&lt;BR&gt;
&lt;BR&gt;
아무튼 장태평 장관은 양복 정장 대신 작업복을 입겠다고 밝혔고 실제로 그런 차림으로 일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넥타이만큼은 풀지 않았다. 아니, 쉽게 풀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굳이 이명박 정부의 각료라서가 아니라, 어쩌면 넥타이는 현대라는 거대한 조직 사회의 단단한 상징이라서, 좀처럼 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lt;BR&gt;
&lt;BR&gt;
그러니까 문제는 핵심은 단단하게 매여져 있는 넥타이에 있는 것이다.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는 넥타이 위에 작업복을 받쳐 입은 기이한 차림의 장관 모습은, 비단 이 경직된 정부의 비틀린 양상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살벌한 경쟁 사회, 곧 ‘팔꿈치 사회’의 씁쓸한 단면이기도 한 것이다. &lt;/font&gt;&lt;/p&gt;&lt;B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정글 속의 기도&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66667105.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사무원 | 김기택 지음 | 창비&lt;BR&gt;
&lt;BR&gt;
  최근에 김기택 시인은, 서둘러 구하여 읽을 만한 시집 &lt;껌&gt;을 출간했다. 이전 시집에서 보여준 비정한 관찰에 온기가 조금은 더해졌다. 그렇기는 해도 냉정하고 더러 그로테스크하다. 그것은 그가 바라본 이 냉혹한 도시와 속도와 생명이 그런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이 시집 &lt;사무원&gt;은, 매일같이 출근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내면에 대한 섬세한 풍경화이자 이 세속 도시에 대한 크로키이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21859&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전혀 다른 세계사&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73956108.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풍속의 역사 | 에두아르트 푹스 지음 | 이기웅 옮김 | 까치&lt;BR&gt;
&lt;BR&gt;
  1870년 1월에 태어난 푹스는 고교를 중퇴한 후 인쇄소 일을 하다가 사회주의노동당에 가입하였으며 몇 차례 검거와 투옥을 경험한 뒤, 1914년에 카를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 프란츠 메링 등이 창단한 스파르타쿠스단에 참여하였고 이를 발판으로 하여 1918년에 창립된 독일공산당의 창립멤버로 활약하였다. 그러면서 수많은 역사 자료를 거침없이 섭렵하고 이를 풍속의 관점에서 망라하여 이 책을 썼다. 그래서 발터 벤야민은 푹스에 대하여 ‘처음부터 학자가 될 운명은 아니었다. 그리고 만년에 박식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 한번도 학자연해 본 적이 없다’고 썼다. 아마도 그랬기 때문에, 역사를 연애, 결혼, 성이라는 풍속의 관점에서 통찰하였는지도 모른다. &lt;BR&gt;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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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경쟁과 위기의 본질&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406024237.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살림의 경제학 | 강수돌 지음 | 인물과사상사&lt;BR&gt;
&lt;BR&gt;
  본문에서 ‘넥타이’를 언급하였고, 또 시중에는 넥타이, 복장, 의상 등에 대한 상식과 교양의 책이 많이 있지만, 하려고 했던 얘기가 그런 정보는 아니었으므로 마지막으로 강수돌 교수의 책을 골랐다. 저자는 묻는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미친 듯이 일하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인격과 건강, 공동체, 생태계가 모두 파괴되어버리는데, 경제성장이 대체 무슨 의미인가?’ 참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그 어려운 대답을 이 책의 곳곳에서 강수돌 스스로 자문하며 자답해 놓았다. 요즘의 위기 국면에서, 갓길로 빠져나와, 살펴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lt;BR&gt;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9061069&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705815&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3월</category>
			<author>jys2003 (정윤수)</author>
			<pubDate>Tue, 10 Mar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3월 10일] 티벳 합병 50주년? 티벳 봉기 50주년! - 티벳</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259776</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요즘은 케이블 TV에서도 그 ‘매혹적’인 말의 유희를 듣기가 어려워진 송재익 축구 전문 캐스터가 2006 월드컵 지역 예선을 중계하면서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홈 팀은 리히텐슈타인이었고 원정 팀은 기억나지 않는다. 리히텐슈타인은 알프스 산맥 기슭에 위치한 소국으로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위치해있다. 스위스 화폐를 사용하고 관세 업무도 스위스에 대행하고 있는, 행정적으로는 스위스의 한 주처럼 보이는 곳이다. 하지만 1990년에 UN(국제연합)에 가입한 주권국이며 FIFA(국제축구연맹)에도 가입되어 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14174280.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168&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소국 리히텐슈타인의 수도 파두츠에 있는 레인파크 경기장 모습&lt;/p&gt;&lt;/div&gt;
그래서 모든 가입국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자동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지역 예선을 리히텐슈타인도 가진 것이다. 전체 인구가 약 3만 명인 리히텐슈타인의 수도 파두츠의 홈구장 레인파크(Rheinpark). 6,127석 규모의 작은 경기장이지만, 발 디딜 틈도 없이 만원사례로 꽉 들어차자 송재익 캐스터가 말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전 인구의 5분의 1이 이 경기장에 다 몰려들었어요.” &lt;/font&gt;&lt;BR&gt;
&lt;BR&gt;
우리 인구에 기계적으로 대입하면 9백만 명 가량이 홈구장에 몰려든 셈인데, 사실은 리히텐슈타인의 거주자 가운데 3분의 1은 외국인이라고 하니, 대략 2만 명 안팎으로 잡으면, 파두츠 유일의 ‘국제’ 경기장인 레인파크가 만석이 되면 전 인구의 3분의 1이 경기장으로 몰려 든 셈이다. 그 경기장에서 유럽의 강호 잉글랜드, 포르투갈, 스페인 등이 원정 경기를 했었고, 토고는 독일 월드컵을 앞둔 최종 평가전을 치르기도 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38873970.jpg&quot; width=&quot;480&quot; height=&quot;312&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지구 온난화로 영토에 서서히 물에 잠기고 있는 남태평양의 소국 투발루&lt;/p&gt;&lt;/div&gt;
리히텐슈타인처럼 작은 나라들이 이 큰 지구에는 대단히 많다. 현재 UN에 가입되어 있는 것을 전제로 하여 살필 때 인구 921명의 바티칸 시국이 가장 작은 나라이고 이 지구의 이른바 선진강대국들이라고 하는 북반구에서 일으킨 지구 온난화라는 치명적인 재앙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고 있는 남태평양의 투발루는 인구가 11,992명이다. 앞서 언급한 리히텐슈타인 말고도 유럽 안에는 모나코(1.95 km², 32,000명), 산마리노(61.2 km², 25,000명), 안도라 (468 km², 68,000명) 같은 소국이 있고 마셜 제도 (181 km², 61,963명), 몰디브(298 km², 350,000명), 팔라우(458 km², 20,842명) 같은 섬 나라들이 있다. &lt;BR&gt;
&lt;BR&gt;
이보다 더 작은 나라도 있다. 이른바 초소형 국민체(Micronation)라고 한다. 영토가 있기는 한데, 그것을 영토라고 불러야 될 지 의문이 든다. 그 나라만의 국기와 화폐와 행정 서식이 존재하지만 그 ‘작은’ 나라 안에서만 통용될 뿐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66227035.jpg&quot; width=&quot;220&quot; height=&quot;30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영국 웨일스의 헌책방 마을 헤이온와이&lt;/p&gt;&lt;/div&gt;일부는 서류로만 존재하거나 인터넷 같은 사이버 공간에 존재하는데, 이 경우는 오늘의 얘기에서는 제외하도록 하겠다. 예컨대 리처드 부스라는 사나이가 군주로 있는 나라가 있다. 영국 안에 있다. 어려서부터 헌책방을 드나들며 살았고 지금은 아예 헌책방의 도시, 그 작은 왕국의 ‘군주’를 자처하며 살고 있다. 1962년 옥스퍼드 대학을 마쳤는데, ‘연구는 케임브리지가 하고 통치는 옥스퍼드가 한다’는 그쪽의 상례와 달리 리처드 부스는 갓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lt;BR&gt;
&lt;BR&gt;
그는 웨일스의 작은 시골 헤이온와이로 가서 헌책방을 차렸다. 너무나 작은 마을이라 책 읽을 사람이 거의 없는 그런 시골이었다. 하지만 그는 전 세계의 영어권 나라를 샅샅이 돌아다니면서 고서와 헌책을 모아 헤이온와이로 옮겨놓았다. 영어로 지적인 작업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원하는 책을 얻지 못했을 때 헤이온와이로 가야 했다. 마을은 헌책방으로 인해 유명해졌다. 세계 최대의 헌책방 서점이자 헌책방 마을이 되었다. &lt;BR&gt;
&lt;BR&gt;
그는 1977년 4월1일 만우절에 ‘헤이 독립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런 정도면 진지한 악동의 유쾌한 장난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오세아니아 대륙의 한 구석에 헛리버(Hutt River)라는 왕국이 있다. 실제로 있다. 인구는 약 50명, 국왕도 있고 왕비도 있고 화폐와 우표도 있다. 그런데 면적은 2271만 평. 도시국가 규모는 되는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18585258.jpg&quot; width=&quot;260&quot; height=&quot;167&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영국 해상권 바깥의 섬나라 시랜드 공국&lt;/p&gt;&lt;/div&gt;시랜드 공국도 있다. 스스로 공작 작위에 오른 사나이가 다스리는 군주국이다. 1967년, 영국 육군 소령 출신이자 해적 방송 운영자였던 패디 로이 베이츠(로이 1세)가 독립 선언을 하면서 통치하였다. 영국 해상권 바깥의 공해에 위치한 섬나라다. 
&lt;BR&gt;
&lt;BR&gt;
섬의 면적은 166평. 서울의 초대형 아파트 두 개를 합한 크기지만, 축구 국가대표팀도 있다. 2006년 6월 23일, 섬(배)의 발전기에서 화재가 일어나 그곳에 상주하던 ‘유일한’ 병사가 영국 공군에 의해 간신히 구조되었다고 한다. 지난 2007년에 이 공국 영토 전체가 매물로 나온 적이 있다고 한다. 유사시에 영국은 이 섬을 작전용으로 쓰고 있다. &lt;BR&gt;
&lt;BR&gt;
아틀란티움 제국도 있다. ‘제국’이라고 하지만 인구는 2명이고 영토는 서민 아파트 크기인 18평이다. 황제가 있고 그 사촌 동생이 법무장관이다. 그렇게 두 명이다. 위치는? 호주 시드니에 있는 어느 아파트. 황제는 자신을 조지 2세로 부른다. &lt;BR&gt;
&lt;BR&gt;
몰로시아 공화국도 있다. 미국 네바다주에 있다. 1999년에 케빈 파얼이라는 사람이 세운 국가다. 인구는 총 4명. 대통령 파얼과 영부인, 그리고 집과 뒷마당, 정원을 지키는 두 아들이 있다. 다른 초소형 국민체와 마찬가지로 몰로시아 공화국 역시 국가, 국기, 화폐, 여권, 세관까지 다 갖추고 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57900472.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2&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미국 네바다주의 몰로시아 공화국의 파얼 대통령과 그 아들로 된 군대. 고무 보트는 '해군'이다. &lt;/p&gt;&lt;/div&gt;
몰리시아 공화국은 미국 영토 안에 있다. 그래서 그들은 미국에 ‘국제 원조’ 차원에서 일정한 비용을 낸다. 네바다주에서는 그것을 ‘세금’이라고 부른다. 1972년에 호주의 인공섬에 ‘건국’된 미네르바 공화국도 있다. &lt;BR&gt;
&lt;BR&gt;
자, 여기까지는 그 국가의 설립자들의 사뭇 진지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한번 뿐인 생애를 좀더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게’ 살아보려는 독특한 사람들의 일이라고 여길 수 있다. 이제부터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피로 얼룩진 근현대사의 유탄을 맞은, 쓰라린 역사의 작은 나라들이 있다. &lt;BR&gt;
&lt;BR&gt;
먼저 세보르가 공국이 있다. 이탈리아 북부 리구이나주에 위치해 있으며 면적은 14K㎡. 인구 370명에 루이지노라는 자국 화폐를 쓴다. 그런데 거주하는 외국인이 더 많다. 2500명 가량인데, 그 대부분은 이탈리아인이다. 이탈리아 정부는 세보르가 공국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국가로는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21426248.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0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이탈리아 북부의 세보르가 공국 전경&lt;/p&gt;&lt;/div&gt;
소말리아 북부에 있는 소말릴랜드라는 나라도 있다. 1991년에 독립하였고 자국 화폐를 사용하고 있으나 국제적으로 승인되지는 못하였다. 지중해 키프러스 섬에는 북키프러스터키공화국이 있다. 1983년에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역시 미승인 국가이고 터키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위성국이라는 설명도 있다. 트란스티스트리아, 다게스탄, 모르도바 처럼 러시아와 동유럽 사이의 소국들로 역시 자치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역시 인정을 받지는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상 언급한 나라들이 단순한 선언에서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독립을 추구할 경우 주변의 강대국들은 이를 좌시하지 않게 되는데, 그 가장 비극적인 형태가 바로 체첸 공화국이다. &lt;BR&gt;
&lt;BR&gt;
그리고 티벳이 있다. 중국과 인도 사이, 히말라야 산맥과 티벳 고원에 둘러싸여 있는 지역으로 평균 고도 약 4,900m, '세계의 지붕'으로 불린다. 현재 중국 시짱(西藏) 자치구로 되어 있다. &lt;BR&gt;
&lt;BR&gt;
역사의 기록은 티벳이 오늘날처럼 중국 내의 ‘자치구’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국가였음을 말해준다. 692년 당나라 장수 왕효걸의 군대가 서역까지 치고 들어왔으나 티벳 군사에 패해 돌아간 기록이 있다. 이 무렵 티벳 사람들은 아랍이나 동부 투르크와 대등한 위치의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747년, 고구려 출신으로 당나라 군대를 이끌게 된 고선지 장군의 원정으로 티벳 사람들은 중앙아시아 일대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다. 그러다가 고선지 장군이 인도의 아바스 왕조의 군대에 밀리게 됨으로써 다시 지배권을 되찾기도 하였다. 20만의 티벳 군대가 당나라 수도인 장안을 잠시 장악한 적도 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81785645.jpg&quot; width=&quot;452&quot; height=&quot;306&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티벳의 수도 라싸의 포탈라 궁 모습&lt;/p&gt;&lt;/div&gt;
이러한 침략과 대립의 완충으로 821년 경에 티벳과 중국은 평화협정을 맺었으며 이후 9세기 중엽까지 티벳은 중앙아시아의 영향력 있는 왕국이 되었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면서, 특히 청나라 건륭제에 이르러 중국은 영토 대확장 정책을 펼쳤고 그 일환으로 티벳이 다시 중국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lt;BR&gt;
&lt;BR&gt;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하자 티벳은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1913년에 몽골과 상호승인조약을 체결한 후 두 나라의 연합으로 신해혁명 이후 건립된 중화민국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위기에 처한 중국을 호시탐탐 노리는 영국, 러시아 같은 강대국들은 티벳과 몽골에게 큰 힘이 되어주지 못하였다. 티벳의 수도 라사(拉薩)에서는 이미 청나라 군대가 물러간 상태였으나 중국 국민당 정부는 티벳에 대한 지배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lt;BR&gt;
&lt;BR&gt;
1940년, 달라이 라마 14세의 즉위식에 참석한 중국국민당 사절단은 의식을 마치고도 귀국하지 않은 채로 긴장 상태를 조성하였다. 게다가 중국의 새로운 정치 세력이 된 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면서, 1950년에 2만 명에 달하는 인민해방군을 통하여 티베트 전 지역을 장악하였다. 수많은 티벳 사람들이 인도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티벳을 장악한 중국의 무력 통치와 내정 간섭이 시작되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33638517.jpg&quot; width=&quot;210&quot; height=&quot;31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티벳 지도자 달라이 라마&lt;/p&gt;&lt;/div&gt;오늘 3월 10일은, 중국의 이러한 지배에 저항하여 티벳 사람들이 1959년에 ‘봉기’를 일으킨 날이다. 그러니까 티벳 봉기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lt;BR&gt;
&lt;BR&gt;
1959년, 티벳 서쪽 잠무카슈미르에서 중국군인들이 현지인의 저항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는 소식으로 시작된 티벳 사람들의 저항은 중국 군대가 제 14대 달라이 라마를 체포하려하자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달라이 라마는 “붉은 낫과 망치 그리고 별이 티벳의 정신과 산림을 파괴하고 있다”며 봉기를 이끌었다. &lt;BR&gt;
&lt;BR&gt;
그 끝은 비참했다. 중국 정부는 120만여 명의 가담자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고 100만여 명이 망명을 했다. 봉기의 구심점이 된 6천 여개의 사원들이 파괴되거나 폐쇄되었다. 달라이 라마는 라싸를 떠나 인도 북부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세웠다. 문화혁명 당시 중국 정부는 3,700개나 되던 티벳 사찰 중에 13개만 남기도 모조리 파괴시켰다. &lt;BR&gt;
&lt;BR&gt;
지금 티벳이라는 지명으로 전해져 오는 외신은 뜨겁고 격렬하다. 양제츠 중국 외교부장은 지난 7일 베이징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quot;티벳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라마는 종교인이 아니라 정치인&quot;이라고 못박았다. 양 부장은 &quot;독일ㆍ프랑스 등 티벳 문제를 우려하는 나라들에게 '당신들도 영토의 4분의 1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달가와하겠느냐'고 반문하고 싶다&quot;며 중국의 티벳 정책은 종교 탄압이 아니라 중국 영토를 뺏으려는 행위에 대한 정당한 자기방어&quot;라고 주장했다. &lt;BR&gt;
&lt;BR&gt;
영국 록밴드 오아시스는 12년 전 뉴욕에서 가진 ‘프리 티벳’ 공연 때문에 임박해 있던 중국 공연이 무산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티벳과 인접한 쓰촨성 아바에서 한 승려가 티베트의 자유를 요구하며 분신자살했다. 중국 정부는 차세대 지도자로 주목 받는 시진핑 국가부주석이 이끄는 사회불안대책팀을 가동했다고 외신은 전한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99916887.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76&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2008년 3월, 인도 뭄바이에서 시위를 벌이는 티벳 승려들&lt;/p&gt;&lt;/div&gt;
티벳 사람들에게 3월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계절이 될 듯하다. 오늘 3월 10일은 티벳 봉기 50주년이자 달라이 라마가 망명의 삶을 산 지 50년이 되는 것이며 오는 14일은, 작년에 벌어졌던 대대적인 봉기의 1주년이 되는 날이고, 또한 28일은 티벳이 중국에 합병된지 50주년이 된다. 이 날은 중국에서는 티벳농노해방기념일이라고 부른다.&lt;/font&gt; &lt;B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그들에겐 미래, 우리에겐 희망&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75133443.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히말라야 | 미국히말라야재단 엮음 | 김영범 옮김| 도서출판 풀로엮은집&lt;BR&gt;
&lt;BR&gt;
  이 책은 미국히말라야재단이 편집하고 내셔널지오그래픽이 발간한 결정판으로 히말라야의 역사와 문화, 자연 생태와 기후 그리고 무엇보다 그 깊은 골짜기와 능선에서 수천 년 동안 삶을 유지해온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주마간산에 불과한 여행 스케치나 그들 삶에 한 발도 들여놓지 않은 채 공허히 감탄사만 연발하는 책들과는 비교 할 수 없는 책이다. 티벳과 히말라야의 바깥에서 낮은 자세로 순례하며 찾아들어가 이윽고 티벳과 히말라야에 깃들게 된 사람들과 오랜 세월을 그 산맥과 땅과 물처럼 살아온 사람들이 직접 육성으로 티벳과 히말라야를 이야기한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의 빼어난 사진과 달라이 라마, 지미 카터, 에드먼드 힐러리 같은 사람들의 격조 있는 추천사도 음미할 만하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326502x&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자연 속의 한 인간으로&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403272441.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차마고도 | KBS 차마고도 제작팀| 예담&lt;BR&gt;
&lt;BR&gt;
  세계에서 가장 높고, 가장 오래되고, 가장 아름다운 길 차마고도 5,000km. 아마도 이 아름답고 거룩한 길을 다룬 KBS 다큐멘터리 &lt;차마고도&gt;를 잊어버린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국의 차(茶)와 티벳의 말이 오가던 길, 차마고도. 실크로드보다 200년 앞선, 오래된 문명과 문화의 교역로, 차마고도. 중국의 윈난과 쓰촨을 거쳐 티벳 고원을 지나 히말라야를 넘어 네팔과 인도로 이어지는 최장 5,000km, 차마고도. 이 책이, 내레이션을 절제했던 그 영상을 압도할 수는 없지만, 차마고도, 그 거룩한 길 위의 삶을 언제든지 살필 수 있게 해준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9132608&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뉴에이지 티벳은 이제 그만&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26827721.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티벳 전사 | 쿤가 삼텐 데와창 지음 | 홍성녕 옮김 | 그물코&lt;BR&gt;
 &lt;BR&gt;
 티벳, 라다크, 라싸, 히말라야...... 현세를 벗어난 무욕의 영성, 그 무엇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외부의 시선’일 뿐이다. 티벳, 그곳의 현실을 제대로 증언하는 책이 귀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책은 50년 전, 중국의 탄압을 피해 티벳의 무장 게릴라 조직을 이끌며 달라이 라마를 인도로 탈출시켰던 전사의 이야기다. 승려이자 무역업자였던 게릴라 지도자 쿤가 삼텐이 그 사람이다. 서구적 시선에 의한 ‘나른한 뉴에이지’ 티벳이 아니라 게릴라 운동을 벌이는 티벳 사람들의 강인한 생활력 문화의 힘을 느낄 수 있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090164&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699199&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3월</category>
			<author>jys2003 (정윤수)</author>
			<pubDate>Mon, 09 Mar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3월 9일] 줄리엣, 맑고 푸른 이름 - 줄리엣 비노쉬</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259483</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408196987.jpg&quot; width=&quot;270&quot; height=&quot;236&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영화배우 줄리엣 비노쉬&lt;/p&gt;&lt;/div&gt;소피 마르소와 그녀의 팬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지난 2월 중순에 그녀가 방한하였을 때, 그 소식은 내게 특별한 느낌을 주지 않았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현기증 나는 이야기를 즐겨 다룬 안드레이 줄랍스키 감독의 &amp;lt;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amp;gt;에서 보았던, 역시 현기증 나는 연기가 떠오르기는 했지만, &amp;lt;라붐&amp;gt;이나 그밖의 영화들의 기억은 그리 강렬하지 못했다. ‘문화 친선 대사’의 방한처럼 보였다.&lt;BR&gt;
&lt;BR&gt;
그런데 이번 경우는 다른다. 오는 18일에 줄리엣 비노쉬가 방한한다. 그것도 45살의 몸으로 직접 큰 무대에 올라 춤을 추기 위해서 온다. &lt;BR&gt;
&lt;BR&gt;
안나, 테레사, 비안느…상처를 안으로 삭히는 맑고 단단한 그 이름. 줄리엣 줄리엣, 하고 말할 때마다 영롱하게, 그러면서 동시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희미한 눈동자. 푸른 빛? 그 깊은 속으로 빠져들면 끝없이 이어지는 미로. 그리고 한 줌의 기억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89221923.jpg&quot; width=&quot;460&quot; height=&quot;30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줄리엣 비노쉬가 주연한 영화 &amp;lt;세가지 색 - 블루&amp;gt;의 한 장면&lt;/p&gt;&lt;/div&gt;
언젠가 &amp;lt;한겨레신문&amp;gt;에서 &amp;lt;스크린 속 연인&amp;gt; 같은 제목으로 청탁하였을 때, 나는 1964년의 오늘 3월 9일에 태어난 줄리엣 비노쉬를 생각하면서 위와 같이 글을 썼다. 그녀의 이름, 곧 줄리엣에 대해서도(약간의 말 장난이지만) 각별한 표현을 하였다. &lt;BR&gt;
&lt;BR&gt;
줄리엣? 보이저 2호가 발견한 천왕성의 위성이며 앙드레 지드의 정결한 참회록인 소설 『좁은 문』의 주인공이며 셰익스피어에 의하여 애틋한 사랑의 영원한 표상이 된 이름이지만 내게는 오직 영화 &amp;lt;나쁜 피&amp;gt;의 주인공 안나, 스크린을 가득 채웠던 맑고 푸른 그 배우의 이름 줄리엣. &lt;BR&gt;
&lt;BR&gt;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 &amp;lt;세가지 색 - 블루&amp;gt;의 인상적인 장면을 편집한 영상을 아래에 소개하거니와, 아래 영상을 통하여 지난 90년대에 줄리엣 비노쉬라는 이름으로 된 영화들을 많이 본 독자라면 나의 조금 호들갑스러운 표현을 너그러이 양해하리라 믿는다.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25&quot; height=&quot;344&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www.youtube.com/v/WD4m6gAHL5c&amp;amp;hl=ko&amp;amp;fs=1&quot;&gt;&lt;/embed&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42287465.jpg&quot; width=&quot;300&quot; height=&quot;22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아크람 칸(오른쪽)과 공연하는 비노쉬(사진 LG아트센터)&lt;/p&gt;&lt;/div&gt;줄리엣 비노쉬는 1964년의 오늘 3월 9일에 태어난 까닭으로, 오늘의 이 블로그에 자연스럽게 해당하는 인물이지만, 그녀가 은빛 스크린이 아니라 생생한 무대 위에 올라 직접 실연을 펼친다는 최근의 소식은 더욱 반가운 얘기다. 영국의 혁신적인 안무가 아크람 칸과 함께 내한 공연을 갖는다. 
&lt;BR&gt;
&lt;BR&gt;
아크람 칸은 현대무용과 인도의 전통 무용(카탁)을 몸으로 익힌 안무가로 이 두 춤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서구와 동양의 사유 방식으로 몸으로 표현해내는 충격의 안무로 큰 관심을 끌고 있는 인물이다. &lt;BR&gt;
&lt;BR&gt;
1974년 영국 런던에서, 방글라데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크람 칸은 일찌감치 연극을 배워 14세 때부터 프로 무대에 섰고 스무 살이 되던 1994년부터 현대 무용과 발레를 익혔다. 피나 바우쉬, 로이드 뉴슨,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 같은 혁신의 안무가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lt;BR&gt;
&lt;BR&gt;
아크람 칸은 2002년에 자신의 이름을 건 ‘아크람 칸 컴퍼니’를 설립하고, 21세기의 많은 연극과 영상과 설치와 음악이 춤을 끌어안았듯이 아크람 칸도 춤 속에 연극, 영상, 설치, 음악, 문학의 최고 전문가들과 진지하고 적극적인 크로스오버 작업을 하였다. 지난 2006년에는 니진스키 상에 빛나는 전설적인 발레리나 실비 길렘과 함께 내한하여 &amp;lt;신성한 괴물들&amp;gt;을 선보인 바 있다. &lt;BR&gt;
&lt;BR&gt;
그가, 줄리엣 비노쉬와 함께 &amp;lt;‘in-i&amp;gt;(내 안에)라는 작품으로 곧 내한공연을 갖는다. 2008년 9월, 영국 내셔널 씨어터에서 이 작품을 초연한 두 사람은 그로부터 1년 동안의 월드 투어를 기획하였고 오는 3월 19일부터 21일까지 LG아트센터 무대에 오른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00563199.jpg&quot; width=&quot;450&quot; height=&quot;36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영화 &amp;lt;나쁜 피&amp;gt;에 출연할 당시 22살의 줄리엣 비노쉬&lt;/p&gt;&lt;/div&gt;
줄리엣 비노쉬는 1964년의 오늘 3월 9일에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각가이자 연극연출가였고 어머니는 영화배우였다. 영화 이외의 일을 하기가 쉽지 않은 유전자이다. 파리국립연극원을 졸업한 뒤, 1985년에 장 뤽 고다르의 화제작 &lt;hail&gt;와 앙드레 테시네 감독의 &amp;lt;랑데뷰&amp;gt;에 출연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무엇보다 레오 카락스 감독의 &amp;lt;나쁜 피&amp;gt;와 &amp;lt;퐁네프의 연인들&amp;gt;로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lt;BR&gt;
&lt;BR&gt;
이밖에도 그녀는 &amp;lt;프라하의 봄&amp;gt;, &amp;lt;데미지&amp;gt;, &amp;lt;세가지 색 - 블루&amp;gt;, &amp;lt;잉글리시 페이션트&amp;gt;, &amp;lt;초컬릿&amp;gt;, &amp;lt;히든&amp;gt;, &amp;lt;메리&amp;gt;, &amp;lt;무단 침입&amp;gt;, &amp;lt;빨간 풍선&amp;gt; 등의 작품에 출연하였다. 필립 카우프먼, 안소니 밍겔라, 미하엘 하네케, 아벨 페라라, 후 샤오시엔, 크르지스토프 키엡슬롭스키 등의 거장들이 그녀의 연기를 원했다. 최근에 올리비에 아싸야스 감독의 &amp;lt;여름의 시간들&amp;gt;에도 출연하였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44552314.jpg&quot; width=&quot;180&quot; height=&quot;228&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영화 &amp;lt;나쁜 피&amp;gt; 포스터&lt;/p&gt;&lt;/div&gt;내 마음 속의 줄리엣 비노쉬는 &amp;lt;나쁜 피&amp;gt;의 안나, 그녀다. 이상기후의 폭염과 사랑 없는 섹스에 따른 괴질이 짓누르는 근미래의 도시를 무대로 한 레오 까락스 감독의 영화다. 동국대학교 영화과 학생들이, 90년대 초반에 불었던 거의 문화 운동에 버금갈 만한 영화 열기에 따라, 교내 지하 감상실에 마련했던 작은 영화제에서 나는 그것을 보았다. 
&lt;BR&gt;
&lt;BR&gt;
비좁은 감상실의 후덥지근한 공기와 꽤 여러차례 복사한 듯한 낡은 필름이었지만, 오히려 그러한 요소가 이 뜨거운 영화를 더욱 실감나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맨 앞에 앉아서, 세상의 모든 것이 녹아내릴 듯한 영화 속으로 스며들었다. 레오 까락스가 영화 내내 클로즈업 했던 22살의 줄리엣 비노쉬는, 스크린과 허름한 객석 사이의 모든 공기를 빨아들였다. 그 이후의 수많은 영화를 통하여 줄리엣 비노쉬는 내게 강한 ‘데미지’를 주었고 동시에 ‘초컬릿’ 만큼이나 치명적인 매혹을 남겨 주었다. &lt;/font&gt;&lt;/p&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영화에 대한 열정과 열병&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07657572.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내 인생의 영화 | 공지영 외 지음 | 씨네21&lt;BR&gt;
&lt;BR&gt;
  ‘내 인생의 영화’, 조금은 진부한 꼭지 이름이지만 이 제목으로 &lt;씨네21&gt;에 1년 넘게 연재된 글을 묶은 이 책은 우리 동시대의 감각적인 인사들이 저 자신의 마음 속에 낙인처럼 찍힌 영화들을 매혹적으로 회상하고 있어 이채롭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50여 명의 필자들에게 영화는 어쩌면 빵 보다 귀한 양식이었고 극장은 모텔 보다 짜릿한 연애의 공간이었다. 강헌, 공지영, 김기덕, 김지운, 노희경, 박찬욱, 배수아, 손석희, 이충걸, 추상미, 한강, 함정임 등 빼어난 감각의 소유자들이 자기들의 내밀한 기억을 더듬는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5665904&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비노쉬의 흔적은 없지만&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34270270.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필름 속을 걷다 | 이동진 지음 | 예담&lt;BR&gt;
&lt;BR&gt;
  줄리엣 비노쉬에 관한 단행본이 국내에 출간된 것은 없다. 프랑스 영화를 개괄하거나 그 최신의 흐름을 일별할 수 있는 책은 있지만, 밋밋하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줄리엣 비노쉬에 관한 글은 없지만, 이동진의 이 시네마 로드를 골랐다. 90년대 이후의 영화 마니아들에게 깊은 공감을 남긴 영화의 현장을 직접 순례하면서 영화 속의 인물과 이야기와 공간들을 이동진 특유의 시적인 감각으로 어루만진다. &lt;비포 선셋&gt;의 파리, &lt;러브 액츄얼리&gt;의 런던, &lt;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gt;의 쿠바, &lt;글루미 선데이&gt;의 부다페스트, &lt;베니스에서 죽다&gt;의 베니스...... 시샘 나고 부러운 행로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9132640&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배우에 대한 모든 것&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09629331.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영화배우 501 | 스티븐 제이 슈나이더 지음 | 정지인 옮김 | 마로니에북스&lt;BR&gt;
&lt;BR&gt;
  &lt;죽기 전에......1001&gt; 시리즈가 있다. 클래식, 팝, 영화, 미술, 풍경, 문학 등에 관하여 무려 1001가지를 엄선하고 촌평한 책인데, 그 제목의 선정성과 달리 한두 문장에 핵심을 찔러 버리는 깊이 있는 안내서다. 그 시리즈 중 &lt;죽기 전에 봐야할 영화 1001&gt;을 엮은 편집진이 영화 역사의 스타를 쓴, 그 불멸의 인물 열전이다. 단순한 인물 정보가 아니라, 개별 영화 배우에 대한 영화적, 미학적, 문화적 평가가 상당히 설득력 있다. &lt;BR&gt;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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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682921&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3월</category>
			<author>jys2003 (정윤수)</author>
			<pubDate>Sun, 08 Mar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3월 8일] 겨울과 봄 사이, 동백꽃과 벚꽃 사이 - 줄포면</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259334</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겨울과 봄 사이, 아직 황사가 몰아치기 전, 요즘 같은 불황에 여행이니 관광이니 하는 소리를 꺼내기가 두렵지만, 그래도 한나절 헛된 바람이라도 쐬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간절기에 고창과 부안, 그 일대를 한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겨울과 봄 사이, 고창과 부안 사이, 그곳은 동백꽃과 벚꽃 사이의 길이다.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기라도 하면, 조금은 시들해지는 곳이다. 간절기의 땅, 고창과 부안 사이를 오늘 3월 8일에 잠시 생각해본다. &lt;BR&gt;
&lt;BR&gt;
오늘날 이 한반도는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숱한 고속도로와 그에 준하는 왕복 4차선의 맹렬한 속도로 인하여 그 사이의 작은 읍과 면이 지리부도 속의 오래된 낱말로 유폐되어 버리는 지경이 되었다. 호남고속도로가 가로지르는 정읍시 태인면, 대진고속도로가 쭉 뻗어내리는 산청군 단성면, 중앙고속도로가 관통하는 예천군 감천면, 경부·중부고속도로에 더하여 청원-상주 고속도로까지 위세를 더한 청원군 문의면 등은 어느덧 시간이 정지된 듯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간절기의 여정으로는 오히려 이러한 소읍이 애틋하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06784634.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고창군 선운면 선운리 서정주 생가&lt;/p&gt;&lt;/div&gt;
언젠가, 이 블로그에서 소개한 바 있지만, 우선 이 일대의 목적지로는 선운산의 선운사와 서정주 생가 마을을 떠올릴 만하다. 고창에서 선운산의 양편으로 끼고 도는 국도를 따라서 20분쯤 서해를 지향하여 달리면 질마재 고개를 넘어 서정주의 생가 마을에 이르게 된다. &lt;BR&gt;
&lt;BR&gt;
그의 시집에 쓰여 이제는 신화가 된 '질마재'는 ‘질마처럼 생긴 고개’라는 뜻이다. ‘질마’는 ‘길마’의 사투리인데 ‘길마’는 짐을 싣거나 수레를 끌기 위해 소나 말의 등에 얹는 안장을 가리킨다. 그 고개를 넘으면, 그 옛날 바닷물이 차고 넘치면 마을이 온통 진창이 되곤 했던 마을이 나타난다. 서정주는 아래와 같이 기록한 적 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바닷물이 넘쳐서 개울을 타고 올라와서 삼대울타리 틈으로 새어 옥수수밭 속을 지나서 마당에 흥건히 고이는 날이 우리 외할머니네 집에는 있었습니다. &lt;BR&gt;
&lt;BR&gt;
이런 날 나는 망둥이 새우 새끼를 거기서 찾노라고 이빨 속까지 너무나 기쁜 종달새 새끼 소리가 다 되어 앞발로 낄낄거리며 쫓아다녔습니다만 항시 나만 보면 옛날이야기만 무진장 하시던 외할머니는, 이때에는 웬일인지 한마디도 말을 않고 벌써 많이 늙은 얼굴이 엷은 노을빛처럼 불그레해져 바다 쪽만 멍하니 넘어다보고 서 있었습니다.&lt;/font&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47186648.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전북 고창의 동리 신재효 생가&lt;/p&gt;&lt;/div&gt;
서정주 생가마을에서 빠져나오면 고창이다. 고창은 조선 말기에 온 재산을 털어 판소리의 사설을 정리하고 또한 각 고을의 명창을 불러 평생을 가객들과 더불어 한 예술 장르의 극한을 모조리 거두고 섭렵했던 동리 신재효 선생의 생가가 있다. 잠시 그곳을 완상한 후 부안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다가 흥덕면 사포리로 잠시 빠져보자. &lt;BR&gt;
&lt;BR&gt;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 판소리 명인 만정 김소희의 생가가 있다. 김소희는 열세 살 때 당대 명창 이화중선의 소리를 듣고 소리꾼이 되기로 결심하여 전남 구례 출신의 동편제 대가 송만갑 문하에서 심청가와 흥보가를 전수하였고, 전북 익산 출신의 정정렬에게 춘향가와 수궁가를 배워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는 판소리 적통의 계보를 잇는 명창이 되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12894859.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고창군 흥덕면 사포리 만정 김소희 생가&lt;/p&gt;&lt;/div&gt;
만정의 생가인 사포리에 가면(물론 그 옛날의 ‘생가’가 아니고 기억과 고증을 토대로 ‘새로 지은’ 집이다. 인근의 서정주 생가, 전봉준 생가가 다 그렇게 지어졌다), 겨울과 봄 사이를 날아다니는 새떼들을 만날 수 있다. 오래된 마을, 멀리서 들려오는 국도 확장 중장비 소리 그리고 이따금 허공으로 가느다란 줄을 그으며 날아가는 새떼는, 서정주의 시 '춘향유문'을 떠올리게 한다. 이 구석진 마을에서 태어나, 제 몸 속에서 자라는 소리의 힘 때문에 하루 낮밤으로 태생의 소리를 하다가 대처로 나가 큰 소리꾼이 된, 막막한 서해를 바라보고 있었을 만정 김소희의 어린 시절이 떠올려지는 곳이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lt;BR&gt;
춘향의 사랑보단 오히려 더 먼 &lt;BR&gt;
딴 나라는 아마 아닐 것입니다. &lt;BR&gt;
천 길 땅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lt;BR&gt;
도솔천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더라도 &lt;BR&gt;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에요? &lt;BR&gt;
더구나 그 구름이 소나기가 되어 퍼부을 때 &lt;BR&gt;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거예요.&lt;/font&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01708640.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전북 부안군 줄포면의 모습&lt;/p&gt;&lt;/div&gt;
사포리에서 접어들었던 지방도로를 빠져나와 고창 - 부안 사이 국도로 접어들어 좀더 위로 올라가면 부안군 줄포면이 나온다. 한자로는 茁浦라고 쓴다. 茁은 자전에 ‘풀이 돋아나는 모양, 싹이 트는 모양, 동물이 자라는 모양, 풀 이름’ 등으로 나와 있다. 고졸(古拙)한 마을 이름이다. 한때는 그 이름처럼 은성한 때가 있었다. 원래 건선면이었는데 1875년 항만이 구축되면서 원래 이름인 줄래포를 바탕으로 줄포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목포나 군산보다 일찍 개항한 줄포는 조기의 3대 어장 가운데 하나인 칠산어장이 있어 20세기 중엽까지 큰 항만으로 발전하였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88896322.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부안군 줄포면의 한 모습&lt;/p&gt;&lt;/div&gt;
목포, 군산과 더불어 큰 항만이었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이 많았다. 중국에서 건너온 상인도 있었다. 부안군 내에 유일하게 은행(조선식산은행 줄포지점)이 있었고, 군청은 부안에 있었으나 치안을 총괄하는 경찰서는 줄포에 있었다. 시인 서정주와 한국 바둑을 반석 위에 세운 조남철 9단이 줄포초등학교(당시에는 줄포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지금 줄포는 항구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한다. 토사가 축적되어 더 이상 항구가 못 되는 것이다. 1958년에 어업조항과 부두노조가 곰소항으로 옮겨갔으며 90년대에 완전히 폐항되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18319630.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전북 부안군 줄포면의 모습&lt;/p&gt;&lt;/div&gt;
누구라도 이곳에 오면 시인이 된다. 인근의 내소사, 개암사, 선운사가 그윽하고 격포, 변산, 채석강에 모항, 곰소항이 즐비하고 반계 유형원 유적지에 곳곳의 동학 표지석과 아랫마을 사포리의 만정 김소희 생가와 미당시문학관 등이 있어 고개를 좌우로 조금만 돌리면 ‘문화관광 명소’들이지만, 담배 한 모금 피울 요량으로, 아니면 칭얼대는 애들에게 음료수라도 사줄 요량으로 줄포면으로 들어서면 누구라도 시인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80576101.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줄포면 버스정류장의 모습 &lt;/p&gt;&lt;/div&gt;
시간이 자꾸만 뒤로 흘러가지만 누구라도 제 삶의 하루하루를 정성껏 살아가는 마을, 세월의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결코 누추한 곳이 아닌 마을, 방문자의 마음 속에 옛 시절의 어떤 편린들을 거듭 떠올리게 하는 마을, 줄포. 이곳에 와서 진짜 시인 김명인은 술 한 잔 마시고, 시 한 수 썼다. 겨울과 봄 사이, 동백꽃과 벚꽃 사이, 고창과 부안 사이, 줄포, 이 작은 마을은 참으로 기억해 둘 만한 마음의 정거장이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낡은 유행가 좇아가느라 나 거기 주저앉았다 &lt;BR&gt;
희망이 숨차느냐고 놀고 먹은 지 벌써 이태째, &lt;BR&gt;
포장 친 간이주점에서 보면 바다는 &lt;BR&gt;
넘을 고개도 없는데 보리 고랑 가득 펴고 있다 &lt;BR&gt;
&lt;BR&gt;
남녘엔 봄 지나가고, 몇 년 만의 외출이냐고 &lt;BR&gt;
한 가족이 아직은 시릴 모래톱에 맨발을 적신다 &lt;BR&gt;
짧은 봄날에는 채 못 피우는 꽃봉오리도 많다 &lt;BR&gt;
시절이 저 여자에게 유독 가혹했을 것이다 &lt;BR&gt;
&lt;BR&gt;
접시에 담겨서도 꼼지락거리는 &lt;BR&gt;
잘린 낙지발 중년이 입 안에서 쩍쩍거릴 때 &lt;BR&gt;
목포에서는 한창 잘나갔지요, 거름을 파고들었던 &lt;BR&gt;
홍어찜이 이제야 콧속을 탁 쏜다 &lt;BR&gt;
&lt;BR&gt;
여기도 예전의 줄포 아니라요, 어느새 경계 넘어버린 &lt;BR&gt;
세월에도 변하지 않는 것 입맛이라고 &lt;BR&gt;
저 여자, 버릇처럼 손장단으로 이길 수도 없을 붉은 &lt;BR&gt;
봄꽃 피워 문다. &lt;BR&gt;
&lt;/font&gt;&lt;/font&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679211&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3월</category>
			<author>jys2003 (정윤수)</author>
			<pubDate>Sun, 08 Mar 2009 04:02:29 GMT</pubDate>
		</item>
		<item>
			<title>[3월 7일] 타자기에 얽힌 작은 추억 - 공병우</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259037</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08456431.jpg&quot; width=&quot;250&quot; height=&quot;186&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명품 타자기 올리베티사의 레테라 22&lt;/p&gt;&lt;/div&gt;시인 황지우가 오래 전에 쓴 산문이 생각난다. 문구점에 가서 필기구를 살 때마다, 시인은 ‘잘 써지나’ 하고 써본다는 것이다. 잘 써지나...... 그래서 잘 써지면 사고 잘 써지지 않으면 사지 않았다는데, 아마도 그런 습관들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제 이름을 써보기도 하고 가나다라를 써보기도 하고, 한 줄 그어 보기도 할 것이다. 그게 다 ‘잘 써지나’ 하는, 그런 마음일 것이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수첩이나 만년필, 메모장에 볼펜 같은 걸 제대로 써본 일이 없는 나로서는 더러 어떤 사람들이 필기구와 제지류에 몰입하는 것을 보면 신기하게 여겨진다. 그런 사람들은, 굳이 몽블랑이나 그 무슨 명품이 아니더라도, 선호하는 필기구가 따로 있기 마련이고(내 아는 사람은 로트링 펜만 쓴다) 이게 제지류로 넘어가면 또 복잡해지는 것이다. &lt;BR&gt;
&lt;BR&gt;
내가 쓴 글씨이면서도 정작 내 자신도 읽어내지 못할 때가 있는, 악필에 속필에 온갖 나쁜 버릇을 다 갖고 있는 나로서는 그런 경우에 해당되지 않지만, 그래도 한 가지 ‘필기구’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키보드이다. 우리가 늘상 쓰고 있는 컴퓨터 입력용 키보드 말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28524528.jpg&quot; width=&quot;240&quot; height=&quot;212&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amp;lt;세계를 뒤흔든 10일&amp;gt;의 존 리드&lt;/p&gt;&lt;/div&gt;말하자면 나는 이런 식이다. 전자 제품 매장 같은 곳에 가서, 진열된 컴퓨터를 일별할 때마다 나는 키보드를 쳐서 입력을 해본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한글'이나 메모장 같은 프로그램을 열어서 ‘우리가 사랑할 날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꼭 말로 해야만 직성이 풀리겠니, 이 또라이야’ 같은 말도 안되는 말을 즉흥적으로 쳐보는 것이다. 그 입력이 부드럽고, 키보드 터치감이 뛰어나면, 갑자기 그 컴퓨터 전체가 다 훌륭해 보이는 것이다. &lt;BR&gt;
&lt;BR&gt;
이를테면 나는 컴퓨터 앞에 소개되어 있는 아래와 같은 사양 소개가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모른다. Windows® XP Home Edition, 셀러론L 430(1.8GHz), 인텔 코어2쿼드 지원보드, DDR2 512M (PC2-5300), MDT 200Gb S-ATA 7200rpm 8M, 인텔 GMA X3100 그래픽, ODD CD-ROM 블랙 (S-ATA), 10/100M 내장 랜카드...... 이런 사양의 용어 자체를 아예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것의 기능과 성능과 효능에 대하여 판별할 만한 지식(거의 상식)이 없어서, 키보드를 한번 쳐보는 것이다. 서로 분리되는, 나뉘어진 부품임에도, 키보드 소리가 촤르르, 경쾌하게 들리면 그 컴퓨터 성능까지 뛰어나 보이는 것이다. &lt;BR&gt;
&lt;BR&gt;
대형 매장에 가면 키보드만 따로 진열되어 있다. 전자상가에 가면 그 숫자는 더 많아진다. 그것을 일일이 다 쳐보는 것이다. 대강의 기준은 이렇다. 우선 부드럽게 터치되어야 한다. 요즘의 최신형 핸드폰처럼 슬쩍 손만 스쳐도 입력이 되는 그런 키보드를 찾는 것이다. 키보드 중에는 ‘친다’는 느낌 보다 ‘누른다’는 느낌이 강한 게 있다. 그런 것을 피하는 것이다. ‘스친다’는 느낌이 나는 키보드는 아직 없지만 그래도 가볍게 톡톡 ‘친다’는 느낌이 나는 것을 고르는 것이다. 다음으로, 같은 맥락이지만, 쳤을 때 부드럽게 흘러가는, 촤르르르르 하는 소리가 들려야 한다. 정말로 촤르르르르 하는 소리가 나는 키보드가 있다. 그것을 찾는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90832303.jpg&quot; width=&quot;200&quot; height=&quot;254&quot; alt=&quot;&quot; style=&quot;cursor: pointer&quot; onclick=&quot;open_img('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90832303.jpg')&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타이핑한 원고를 검토하는 헤밍웨이&lt;/p&gt;&lt;/div&gt;대단히 주관적인, 거의 청각에 의존하는, 기준이지만 이를 만족시켜주는 키보드를 나는 몇 해 전에 발견했다. 그래서 냉큼 하나를 사서는 그날 밤새도록 그 키보드로, 마치 몸에 맞는 키보드가 없어서 쓰지 않았다는 듯 며칠이나 밀려 있던 원고 240매를 하룻 밤에 다 써서 보내버렸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다음 날, 나는 다시 그 매장으로 가서는 같은 종류의 키보드를 네 개나 더 샀다. 그보다 더 많이 살 수도 있지만 재고가 네 개밖에 없었다. 그리 비싼 것도 아니다. 1만 몇 천 원 하는 평범한 것이지만 내 손에 딱 맞고 내 귀에 착 달라붙는 소리를 내준다. 그렇게 모두 다섯 개를 사서, 집과 작업실에 각각 세팅(!)을 하였고 남은 세 개는 여벌 삼아 집의 벽장에 모셔 놓고 있다. 지금 이 글도 그 키보드로 쓰고 있는데, 여벌까지 장만해 두었으니 앞으로 10년 정도는 키보드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을 것만 같다. &lt;BR&gt;
&lt;BR&gt;
가보로 물려줄 만한 몽블랑 같은 소리를 한 셈이 되었는데, 약간의 사연이 없지 않다. 그 얘기를 마저 쓰고 싶다. &lt;BR&gt;
&lt;BR&gt;
나는, 내 스스로 쓴 내 글씨도 못 알아보는, 악필에 속필이었던 까닭에 일찌감치 기계로 글을 쓰는 것을 익히고자 하였다. 내 또래의 글 쓰는 사람들이 대체로 경험한 바와 같이, 나 역시 기계로 글씨를 쓰는 진화의 역사를 내 몸으로 다 체험해 보았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74581998.jpg&quot; width=&quot;230&quot; height=&quot;174&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크로바 610 타자기 (사진 진민용)&lt;/p&gt;&lt;/div&gt;그 시작은 타자학원에서 두들겨 댔던 크로바 타자기였다. 80년대의 부도심권에는 타자학원들이 있었다. 영등포, 청량리, 연신내 같은 곳의 건물들 2,3층에 타자 학원들이 있었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경리 직원이 되려는 젊은 여자들과 행정병이 되어 볼까 하는 젊은 남자들이 수강을 많이 했다. 내 아는 사람이 그런 이유로 수강 신청을 했는데, 그만 입대 영장이 예정보다 일찍 나왔다. 3개월 코스인데 한 달도 배우지 못하고 입대하면서, 그 수강증을 내게 줬다. 나는 타자 학원에 가서 열심히 키를 눌러댔다. &lt;BR&gt;
&lt;BR&gt;
내 평생 처음으로 그토록 뭔가에 몰입했던 것은 달리 없었을 것이다. 두달 남짓 배우고 나니 마침내 손가락의 관절이 부드럽게 풀린 고수가 되었다. 자판기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독수리족이나 손가락 겨우 뻗어가면서 더듬거리는 친우들은 마치 거장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나 되는 것처럼 열 손가락을 능란하게 움직이고 때로는 어깨나 손목을 들썩거리기도 하며 타자기를 '연주'하는 나를 동경하며 쳐다보곤 했다. &lt;BR&gt;
&lt;BR&gt;
그랬는데, 전동 타자기 시대가 ‘간절기’처럼 열렸다. 전동 타자기는, 무엇보다 소음이 적었고 손가락과 팔과 어깨의 부담을 많이 덜어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간절기 용품이었다. 곧 ‘혁명적’인 기기가 출현했기 때문이다. 컴퓨터? 아니다. 바로 대우 전자의 ‘르모 2’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56606063.jpg&quot; width=&quot;250&quot; height=&quot;25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획기적인 성능과 폰트를 보여줬던 르모 2&lt;/p&gt;&lt;/div&gt;대우의 워드프로세서 ‘르모’는 1986년 9월에 처음 출시되었고, 그 첫 작품도 꽤 호평을 받았지만, ‘르모 2’의 인기는 낮의 세계에서나 밤의 세계에서나 열렬하였다. 낮의 직장 업무는 물론이고 야음을 틈 타 활동하는 제 세력들이나 올빼미 백수들에게 ‘르모 2’는 '암약' 활동에 더없이 훌륭한 동반자가 되었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일반 타자기는 물론이고 전동 타자기도 일정한 소음을 막을 길이 없다. 신고 정신이 투철한 이웃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입력을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르모 2’는 부드러웠다. 조용했다. 서체 변형을 줄 수도 있었다. 특별히 강조하고자 하는 대목은 더욱 크게, 굵게, 사선으로, 반투명으로 입력할 수 있다. 게다가 ‘저장’까지 가능했다. 혁신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는, 우리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286 AT 아래아 한글 시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lt;BR&gt;
&lt;BR&gt;
그 어느 한 때의 일이다. ‘르모 2’도 아니고 전동 타자기도 아니고, 황학동 도깨비 시장에서나 볼 수 있는, 낡은 타자기를 신주단지 모시듯이 할 때 일이다. 1986년에서 1988년 사이, 나는 어느 형과 함께 자취를 했다. &lt;BR&gt;
&lt;BR&gt;
그 형은, 친구를 만나러 자취방에 갔다가 그만 친구가 없어서 오늘 저녁은 어디서 먹고 또 어디서 자나 하고 걱정하고 있던 나를 보고는, 자기 방으로 불러서 마치 오래 전에 헤어진 동네 아우를 대하듯이 먹고 재워주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깊은 인연이 된, 그런 형이다. 그 날 이후로, 서로 알고 지내던 그 형과 내 친구 사이보다, 나와 그 형 사이가 더 가까워졌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72448602.jpg&quot; width=&quot;240&quot; height=&quot;24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타자기로 집필중인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lt;/p&gt;&lt;/div&gt;한 3년 가량 함께 살았다. 반지하에서 옥탑방까지, 청춘의 한 때를 같이 보냈다. 몇 개월 쯤은 잠시 떨어져서 지내기도 했다. 그때 그 형은 취직 시험 공부 때문에 하숙집에 들어갔다. 나는 더러 그 하숙집에 가서 밥을 먹었다. 시간 맞춰 먹는 하숙집인데, 그 형은 ‘야, 오랜 만이다. 들어와. 같이 먹자’ 그런 너스레를 했다. 며칠 전에도 왔었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핀잔을 주곤 했다. ‘학생은, 학생이 따로 하숙 치나?’. 나는 말없이, 재빨리 밥을 먹고 나왔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그리고 또 1년 쯤을 옥탑방에서 같이 살았다. 그 형이 석유 계통의 대기업에 취직 해서 몇 달 다니다가 과감히 때려치우고 교육방송(ebs) 프로듀서로 전직을 하여 열심히 다큐를 찍으러 다니던 때였다. 그때도 나는 뭔가를 쓰기는 써야겠다고 타자기를 들고 다녔다. 낮에는 자고 밤에는 타자기를 두들겨 댔다. 전동 타자기도 아니고 ‘르모 2’도 아닌, 고물 타자기를 밤새 쳤던 것이다. 내 귀에는 교향악이지만, 고단한 하루를 보낸 다큐멘터리 프로듀서에게는 귀를 틀어막고 싶은 소음이었을 것이다. &lt;BR&gt;
&lt;BR&gt;
아침에 늦게 일어나면, 소반 위에 쪽지 하나가 있곤 했다. 때로는 5천 원짜리 한 장도 있었다. ‘뭘 쓰긴 하더라도, 밥은 먹고 써라.’ 그런 쪽지였다. 그날 밤, 또 무슨 소용도 없는 것을 쓴다고 타자기를 두들겨 대면, 그 형은 모른 체 하면서 애써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잤다. 그때 그 형은 술을 많이 마셨다. 그때는 세상에 대해 분개할 게 너무 많았고 또 분개하지 않으면 잠을 못 이룰 나이였다. 게다가 다큐멘터리 연출이 고된 업무였고 그 형이 후배 동료들과 술 마시는 것을 좋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혹시 밤마다 두들겨 대는 내 타자기 소리를 이겨내기 위해 일부러 술을 마셨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이제야 해보게 된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52152127.jpg&quot; width=&quot;290&quot; height=&quot;16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드라마&amp;lt;신의 저울&amp;gt;한 장면(연출 홍창욱, 사진 sbs화면)&lt;/p&gt;&lt;/div&gt;그 형은 지금 sbs에서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다. 영화 마니아들이 열렬히 호응을 해줬던 ebs 영화 교양 프로그램 &amp;lt;시네마 천국&amp;gt;의 런칭 프로듀서였고 sbs로 이직해서는 드라마를 찍었다. 최근작으로는 하희라 주연의 &amp;lt;강남엄마 따라잡기&amp;gt;(일부에서는 아직도 강남엄마 때려잡기로 알고 있다는)와 탄탄한 구성으로 호평을 받았던 &amp;lt;신의 저울&amp;gt;을 연출하였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성인 남자 두 사람이 제대로 발을 뻗고 자기도 어려운 비좁은 반지하나 옥탑방이었다. 그 좁은 방에 나는 꽤 많은 책과 오디오를 꼭 우겨넣었다. 베토벤이나 바그너를 언제나 들었다. 게다가 밤낮으로 낡은 타자기를 두들겨댔다. 월세며 부식비는 그 형이 다 충당했는데 말이다. 그런 배후인물의 든든한 지원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여태 나는 시시껄렁한 잡문을 끄적거리고 있으니, 자책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머리 속에서 터져나오는 생각을 혹시라도 손이 느리게 따라가면 안된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타자기를 두들겨 댔으나 정작 머릿속에서는 요긴한 그 무엇이 나온 적은 없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67405181.jpg&quot; width=&quot;200&quot; height=&quot;272&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한글 운동의 아버지 공병우 선생&lt;/p&gt;&lt;/div&gt;오늘 3월 7일은, 안과의사이자 한글 사랑의 대부이자 한글 기계화의 선구자인 공병우 선생이 지난 1995년에 타계한 날이다. 1907년 1월 24일(음력 12월 30일)에 평안북도 벽동에서 태어난 공병우 선생은 1926년에 조선 의사 검정 시험 합격하였고 1936년에는 일본 나고야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38년에 한국인 최초로 안과 전문 의원을 개원하였다. 종로구 서린동의 그 유명한 ‘공안과’가 바로 공병우 선생의 ‘아지트’였다. 
&lt;BR&gt;
&lt;BR&gt;
1938년, 눈병 치료를 받으러 온 한글학자 이극로 선생과 만난 이후로, 공병우 선생은 공 안과를 기반으로 하여 평생을 한글 사랑 및 기계화 운동에 헌신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49년에 개발한, 초성 중성 종성을 나뉘어 입력하는 세벌식 타자기다. 1968년에 기계식 한영 겸용 타자기 발명하였고 1971년에는 기계식 한글 점자 타자기 개발하였다.&lt;BR&gt;
&lt;BR&gt;
하지만 그의 세벌식 타자기는 ‘표준’이 되지 못하였다. 정부는 1969년에 네벌식 자판을 표준으로 삼았고 여기서 개량된 두벌식이 1982년에 표준으로 정해지다시피 하여, 가장 빠르고 편리하게 한글을 입력하는 방식으로 알려진 공병우식 세벌식 방법은 널리 쓰여지지 못했다. 공병우 선생은 세벌식자판과 조합형코드가 표준으로 자리잡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하였으며 이에 비하여 과학적으로 한글을 모두 표현하지 못하는 완성형 코드를 비판하였다. 게다가 초성 중성 종성이 뚜렷하고 폰트 디자인의 가능성이 높은 한글의 조형 원리를 무시하고 네모난 박스 안에 글자를 우겨넣는 획일화에도 반대하였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52966354.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171&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공병우 식 세벌식 입력 방식의 자판 모습&lt;/p&gt;&lt;/div&gt;
공병우 선생의 세벌식은 ‘빠른 입력’을 특징으로 한다. 대신 모양이 조금 ‘울퉁불퉁’해 보인다. 1969년에 정부는 표준을 정하면서 한글이 네모칸에 정렬되는 네벌식을 채택하였다. 글자 입력이 느리고 복잡해도 단정해보인다는 이유가 앞섰다. 이것이 개량되어 1982년에 두벌식 자판이 컴퓨터의 표준으로 채택되었고, 타자기도 이에 따라 1985년에 두벌식이 표준이 되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50139127.jpg&quot; width=&quot;190&quot; height=&quot;116&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공병우식 세벌식 타자기&lt;/p&gt;&lt;/div&gt;공병우 선생의 세벌식은 글쇠수가 두벌식 보다 많지만 속도, 정확성, 과학성 그리고 ‘울퉁불퉁’ 한 모양이 실은 초성 중성 종성의 다양한 조형미(안상수체나 샘물체처럼)를 갖춘 것으로 뒤늦게 공인이 되었지만 이미 표준이 두벌식이 압도적인 대세가 된 다음이었다.
&lt;BR&gt;
&lt;BR&gt;
그래서 한글 프로그래머 1세대들은 고집스럽게 세벌식을 사용한다. 공병우 선생의 뜻과 그 과학성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지금도 누구나 원하면 세벌식을 사용할 수 있도록 ‘윈도우’와 ‘한글’ 프로그램에 지원이 되고 있다. ‘윈도우’의 한글입력기 속성에서 세벌식으로 정하여 쓸 수 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24998215.jpg&quot; width=&quot;250&quot; height=&quot;364&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2007년에 열린 탄생100주년 기념식(사진 연합)&lt;/p&gt;&lt;/div&gt;공병우 선생은 ‘한글문화원’을 통하여 젊은 세대와 지속적으로 교감을 나누고 아낌없는 지원을 하였다. 박흥호, 강태진, 이찬진 같은 젊은 세대들이 이러한 교류를 발판으로 하여 ‘한글과컴퓨터’를 창업하고 ‘아래아 한글’을 개발하여 오늘의 역사에 이른 것은 두루 아는 바와 같다.
&lt;BR&gt;
&lt;BR&gt;
공병우 선생은 남은 생애 마저 빈 손으로 마무리하였다. 유언에 남기기를, 사망하면 장기는 전부 기증하고 시체는 의대 해부학 실험에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화장이나 수장을 하되 여의치 않을 때는 매장을 하되 늘 입던 옷 그대로 저렴한 널에 넣고 그밖의 어떤 장식이나 허례를 금하도록 하였다. 죽은 후 한달이 지나서야 친척과 지인들에게 알리도록 하되 만약 매장하였을 경우 누구에게도 묘지 위치를 알리지 말라고 당부 하였다.&lt;BR&gt;
&lt;BR&gt;
여러모로 그 뜻을 기리고 생각해야 할 것이 많은, 3월 7일의 인물이다. 아래 사이트를 방문하기를 바란다. &lt;BR&gt;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moonhwawon.ye.ro/main.html&quot; target=&quot;new&quot;&gt;http://www.moonhwawon.ye.ro/main.html &lt;/a&gt;&lt;/font&gt;&lt;/p&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어린이에게 권하는 책&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56040995.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한글 기계화의 아버지, 공병우 | 송현 지음 | 작은씨앗&lt;BR&gt;
&lt;BR&gt;
  본문에 적은 것만으로도 귀감이 되는 인물이지만, 공병우 선생이 남긴 유훈은 더 많고 크고 넓다. 맹아학교를 만들었는가 하면 미국 체류 후에는 시각 장애인을 위하여 흰 지팡이를 대거 구입하여 들어오기고 하였고 앰뷸런스를 구해 전국으로 순회하며 무료 진료를 하였다. 시간 낭비를 걱정하며 5분 안에 이발을 마친 공병우 선생은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세벌식 자판의 장점을 알리기 위해 하이텔 PC 통신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lt;나는 내식대로 살아왔다&gt;는 책이 있으나 절판이다. 아쉽다. 기억을 하였다가 헌책방에서 구하기를 권해본다. 이 책은 선생의 한글 사랑 유훈을 잇는 일에 참여해온 송현이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기록하였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78767X&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어느 아날로그 작가의 기록&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32425506.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타자기를 치켜세움 | 폴 오스터 지음 |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lt;BR&gt;
&lt;BR&gt;
  이 책은, 폴 오스터 마니아라면 아마 구해 읽었을 것이다. 일반 교양 독자라면? 글쎄,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다. 폴 오스터의 길에 동반한 화가 샘 메서의 그림은 보기에 따라서는 작위가 강하고, 본문이 좀더 충일하고 길고 섬세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럼에도 한 작가가 기록한 타자기 이야기는, 단순한 타자기 이상이다. 함께 살던 개의 죽음에 대해 기록한 글이 그랬던 것처럼, 폴 오스터에게 타자기는 한낱 고물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05398&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디자인은, 디자인만이 아니다 &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81492672.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20세기 디자인 | 피터 필 지음 | 박혜수 옮김 | 아트앤북스&lt;BR&gt;
&lt;BR&gt;
  20세기 산업 디자인의 백미를 간추린 책인데, 이 책 말고도 총정리 차원의 책들이 없지 않지만 지나치게 두껍고 비싼 전문서를 일반 교양 독서로 구입하여 읽기는 무리가 따를 것이다. 적절한 분량, 깔끔한 레이-아웃, 정확하게 맥락을 짚어주는 설명. 이런 요소를 충족시키고 있는 책이다. 디자인이 겉 모양의 디자인이 아니라 내용과 형식, 가치와 시선, 사유의 한 실천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705096&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673243&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3월</category>
			<author>jys2003 (정윤수)</author>
			<pubDate>Fri, 06 Mar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3월 6일] 환상이라구, 라틴에서는 거대한 현실일 뿐이오 - 마르케스</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258746</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93518518.jpg&quot; width=&quot;240&quot; height=&quot;192&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amp;lt;백년동안의 고독&amp;gt;을 쓴 소설가 마르케스&lt;/p&gt;&lt;/div&gt;중남미 문학에 대하여 ‘환상’이라는 말이 붙어다닌다. ‘환상적 리얼리즘’이나 ‘마술적 리얼리즘’ 같은 표현인데, ‘환상’이라는 단어는 그 특성을 강조하여 꾸미는 것이고 실은 ‘리얼리즘’에 방점이 찍히기는 하는데, 그럼에도 정작 중남미 작가들은 자신들의 작업을 ‘환상’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 한다.
&lt;BR&gt;
&lt;BR&gt;
왜냐구? 그들이 그들의 작품 속에 쓴 장면이나 표현이나 형식이나 묘사가 적어도 그들 곧 ‘중남미’ 사람들에게는 결코 ‘환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구인이 보기에 ‘환상’일 뿐이지 그들에게는 덧붙일 것도 뺄 것도 없이 생생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오늘의 주인공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환상과 예술적 창조 -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 지역의 경우’(현중문 옮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참고로 아래에 여러차례 인용하게 되는 글은 ‘라틴아메리카문학 21’(&lt;a href=&quot;http://www.latin21.com/&quot; target=&quot;new&quot;&gt;http://www.latin21.com/&lt;/a&gt;)에서 옮겨온 것이다. 이 사이트는 읽을 거리가 풍성한 곳이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스페인 한림원 사전에 의하면, 환상이란 “이미지를 통해 무언가를 재생하는 정신의 능력”이다. 이보다 더 빈약하고 모호한 정의를 생각해 내기도 어려울 것이다. 두 번째 뜻을 보면, 환상은 “허구, 단편이나 소설, 고상한 사상 또는 기발한 사상”이다. 이는 첫 번째 정의가 야기한 혼란을 더욱 가중시킬 뿐이다. &lt;BR&gt;
&lt;BR&gt;
(중략) &lt;BR&gt;
&lt;BR&gt;
무엇보다도, 위압적인 한림원의 괴상한 풀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환상과 상상의 차이점을 파악하려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시 한번 사전을 들춰보았다. 그러나 나는 이 사전의 정의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그 정의가 뒤바뀌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환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lt;/font&gt; &lt;BR&gt;
&lt;BR&gt;
마르케스는 ‘환상’이라는 단어 자체가 매우 부적절하게(부정적인 늬앙스로) 쓰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단지 그들(서구인)의 눈으로 보기에 ‘환상은 현실 세계와 관계가 없는 것’일 뿐 중남미 사람들에게는 생생한 현실이라고 거듭 주장한다. 아무래도 마르케스의 말을 더 들어봐야 하겠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50374601.jpg&quot; width=&quot;220&quot; height=&quot;211&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라틴문화의 수호가 마르케스&lt;/p&gt;&lt;/div&gt;나는 한림원 사전의 정의와는 정반대로, 상상이란 예술가들이 그들이 처한 현실에서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특별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상상은 내가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예술적 창조이다. 이제부터 라틴아메리카의 예술적 창조에서 상상을 얘기하겠다. 그리고 환상이라는 말은 되지 못한 집단이 사용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lt;/font&gt; 
&lt;BR&gt;
&lt;BR&gt;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1928년의 오늘 3월 6일 콜롬비아 아라카타카에서 태어났다. 세상의 모든 진지한 예술가들이 그렇듯이 고향 아라카타카는 마르케스 문학의 진앙지다. 지난 2007년 5월 30일에 마르케스는 고향을 25년만에 방문했었다. 그는 콜롬비아 정부가 &amp;lt;백년동안의 고독&amp;gt; 애독자들을 유치하려고 투입한 열차를 타고 귀향했다. 정치적 상황이 복잡하고 예민해서 마르케스는 오래 전에 멕시코시티로 망명 아닌 망명의 삶을 살고 있다. 그는 1950년대에 신출내기 기자 생활을 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고향 아라카타카로 가는 기차 여행을 하다가 대표작 &amp;lt;백년동안의 고독&amp;gt;을 구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lt;BR&gt;
&lt;BR&gt;
마르케스는 수도 보고타에 있는 콜롬비아국립대학과 카르타헤나대학에서 법학과 저널리즘을 공부했으며 1948년에 기자로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1950년대에 보고타의 일간지 &amp;lt;엘 에스펙타도르&amp;gt;의 로마와 파리 주재 특파원으로 일했고 1960년대부터 멕시코시티에 거주하면서 시나리오 집필과 출판업도 했다. 7,80년대의 중남미 정치 상황에서 좌파적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에 고국인 콜롬비아와 미국에서 여러 차례 여행 제한을 받기도 했다. &lt;BR&gt;
&lt;BR&gt;
마르케스는 1954년에 일간지 &amp;lt;엘 에스펙타도르&amp;gt;의 특파원 자격으로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게 되는데 이는 중남미 지식인 예술가의 전형적인 행로였다. 이렇게 유럽으로 건너간 수많은 예술가들이 비참한 생활 속에서도 삶과 예술 양면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냈듯이 마르케스 또한 극단적인 고통을 견뎌내야만 했다. 고국 콜롬비아의 독재 정권에 의해 신문사가 폐간되자 마르케스는 졸지에 실업자가 되어 파리의 지하철역에서 노숙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 무렵에 소설 &amp;lt;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았다&amp;gt;를 구상하였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21438189.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1981년 3월 26일, 망명을 떠난 마르케스가 멕시코시티 공항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lt;/p&gt;&lt;/div&gt;
1957년에 콜롬비아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에 두 개의 사건으로 인하여 작가로서의 전환점을 갖게 된다. 그 하나는 13살 때부터 연정을 품어 청혼을 했던 메르세데스와 결혼하여 심리적 안정을 찾은 것이며 다른 하나는 쿠바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일이었다. 이때부터 마르케스는 좌파의 신념으로 중남미 역사와 현실을 성찰하게 되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amp;lt;백년 동안의 고독&amp;gt;이 바로 그 결실이다. &lt;BR&gt;
&lt;BR&gt;
&amp;lt;백년 동안의 고독&amp;gt;은 전 세계 20여개 언어로 번역되어 2000만 부 이상이 팔린 현대의 고전이다. 작품의 무대인 가상의 마을 마콘도는 그의 고향인 소도시 아라카타카와 흡사하다. 이 때문에 해마다 2천여 명의 관광객이 몰려와서 아라카타카 시장은 시민들에게 시의 이름을 마콘도로 개명하자고 호소하기도 했다. &lt;BR&gt;
&lt;BR&gt;
마르케스가 그의 고향 아라카타가로부터 상상하여 빚어낸 가상의 도시 마콘도는 소설 &amp;lt;백년 동안의 고독&amp;gt;의 무대이자 중남미 사람들의 역사와 신화와 현실이 응축된 상징의 공간이다. 마르케스는 자신의 고향에 대해 &quot;나는 어린 시절을 멋지게 보냈다. 외할아버지의 커다란 집은 환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상상력이 풍부했고 마을 사람들은 미신을 믿었다. 마을 구석마다 죽은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넘쳐 났고 저녁 6시가 넘으면 집 바깥으로 나가기가 두려웠다. 그야말로 공포로 가득찬 멋진 세계였다.&quot;고 말한 적 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97691995.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20년만에 고향 아라카타카를 방문한 마르케스 부부&lt;/p&gt;&lt;/div&gt;
바로 이러한 마을(세계)을 배경으로 마르케스는 중남미의 역사를 신화적 상상으로 재현해냈다. 이 작품에는 중남미의 민속 설화 뿐만 아니라 인류사의 신화, 서사시, 연금술, 성배신화, 어부 왕 전설 등이 어우러져 있다. 마르케스는 거대한 우주의 모든 생명들(인간과 그밖의 모든 것)이 빚어내는 고통스러우면서 아름다운 합창을 소설 속에 버무려 중남미의 현실을 높은 차원에서 조망해낸 것이다. 현실과 상상, 자연과 초자연, 삶과 죽음, 생물과 무생물, 인간과 자연계가 복합적으로 얽힌 그의 작품을 두고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lt;BR&gt;
&lt;BR&gt;
하지만 마르케스는 자신의 이 신화적 상상이 결코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맨 위에서 소개한 글에서 마르케스는 중남미의 역사와 자연과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기만 하면 자신을 포함한 많은 중남미 작가들의 작업이 결코 ‘환상’이란 말로 재단될 수 없다고 강변한다. 다시 마르케스의 말을 들어보자.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광대한 규모의 중남미 현실(자연 현상) 때문에 문학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단어의 부족이다. 중남미인이 강을 이야기할 때, 유럽 독자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긴 강은 2,790km의 다뉴브 강 정도이다. 자세히 묘사하지 않으면 유럽 독자로선 5,500km에 달하는 아마존 강의 실상을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lt;/font&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44282712.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401&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쿠바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왼쪽)로 대화하는 마르케스.&lt;/p&gt;&lt;/div&gt;
나는 이 대목에서 중남미 정치와 역사의 전문가인 이성형의 강의가 생각났다. 지난 해에 나는 성공회대학교 인문학습원(원장 신영복 석좌교수)이 주관하는 ‘인문공부’에 기획의 일부를 맡아 참여하면서 중남미 역사와 문화 강사로 이성형을 초빙한 적 있다. 이성형은 거두절미 하고, 우선 지리학적으로 중남미를 새롭게 봐야 한다면서 이 지역에 관한 지리 정보로 강의를 시작했다. &lt;BR&gt;
&lt;BR&gt;
핵심은 이것이다. 우리가 ‘세계지도’하면 늘 떠올리게 되는 메르카토르 도법에 의한 지도는 남반구 특히 중남미의 자연지형에 대해 왜곡된 이미지를 남겨 놓게 된다는 것이다. 항해의 필요성에 따라 직선을 다소 과도하게 사용한 이 도법의 특징 때문에 적도에서 고위도지방으로 갈수록 거리와 면적의 왜곡이 심해져서 위도 60°에서의 거리는 2배, 80°에서는 5.8배, 89°에서는 57.3배로 확대되어, 방위가 실제와 다르게 나타나는 결점이 있다. 이 도법에는 유럽과 남미, 혹은 유럽과 중미 일대가 엇비슷하게 보이지만 실제의 거리와 면적과 공간은 비교가 안될 정도라는 것이다. &lt;BR&gt;
&lt;BR&gt;
요컨대 이성형은 중남미 지역이 광대무변한 곳이며 온갖 삼라만상이 다 혼융된 곳인데, 그래서 그들의 자연 인식이나 문화는 서구의 지형 인식이나 시선으로는 다 포착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마르케스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번 더 들어보자.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중남미 현실의 규모에 맞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 왜 필요한지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20세기초 아마존강 상류를 탐험한 네덜란드인 그라프는 5분 안에 계란이 익을 만큼 펄펄 끓는 물이 흐르는 시내를 보았으며, 소나기가 폭포처럼 쏟아지기 때문에 큰 소리로 얘기해도 잘 안 들리는 지역을 통과한 적이 있다고 했다. 나는 콜롬비아 카리브 해안에서 귀에 벌레가 들어간 소 앞에서 주문을 외우며 기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기도를 하는 동안 죽은 벌레들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 사람은 동물이 있는 장소와 생김새만 가르쳐주면 멀리서도 똑같은 치료를 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lt;BR&gt;
&lt;BR&gt;
(중략) &lt;BR&gt;
&lt;BR&gt;
멕시코의 경우만 해도 믿을 수 없는 현실을 표현하려면 책을 여러 권 써야만 할 것이다. 내가 이곳에 체류한 지도 20년 가까이 되지만, 지금도 꿈틀거리는 강낭콩을 쳐다보며 몇 시간이고 보낼 수 있다. 합리주의자들은 콩 안에 애벌레가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지만 내가 보기에 그 설명은 너무 빈약했다. 여기서 경이로운 사실은 애벌레 때문에 강낭콩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강낭콩이 움직이고 싶어 애벌레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lt;/font&gt; &lt;BR&gt;
&lt;BR&gt;
반복적으로 인용한 대목을 다시 한번 살피건대, 마르케스가 ‘환상’이라는 말에 대해 거부감을 표현하면서 중남미에 대해 겸허하면서도 성실한 인식을 거듭 요청하고 있는 것은 단지 ‘풍경’을 중남미 사람들의 시선으로 봐달라는 얘기가 아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48096157.jpg&quot; width=&quot;250&quot; height=&quot;278&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콜럼비아 라디오에서 익살을 부리는 마르케스&lt;/p&gt;&lt;/div&gt;그들의 자연과 역사와 문화를 ‘서구의 시선’으로 보고자 할 때는 ‘환상’, ‘경이’, ‘낯섦’, ‘두려움’, ‘찬탄’, ‘낭만’ 같은 명쾌하지 못한 감정 이입밖에 형성되지 못하는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은 이럴 때 사용하는 개념이다. 바깥의 시선(역사적으로 우월했던 입장)으로 중남미를 바라보면서 차마 ‘야만적이고 미개하다’고는 말을 못하겠고 ‘신비롭고 낭만적이고 주술적’이라는 미묘한 단어나 툭 던져버리는, 그런 시선의 폭력을 마르케스는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lt;BR&gt;
&lt;BR&gt;
이는 중남미 역사와 다를 바 없는 근현대사를 살아온 우리로서는 무척이나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인식이다. 게다가 최근 들어 온갖 여행서들이 출몰하면서 ‘중남미’ 일대를 대단히 낭만적이고 애상적인 말들로 반죽을 하는 책이 많은데, 주의해야 한다. 빌라 로보스, 아스토르 피아졸라,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 같은 음악들을 ‘근사한’ 배경음악으로 써먹는 일도 실은 경계해야 할 일 중의 하나이다. &lt;BR&gt;
&lt;/font&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이야기의 힘&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07296638.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백년의 고독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 조구호 옮김 | 민음사&lt;BR&gt;
&lt;BR&gt;
  마르케스의 생애와 그의 말을 본문에 적었으므로 그의 대표작이 되는 이 작품에 대해서는 &lt;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gt;을 쓴 밀란 쿤데라의 말을 옮겨 적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lt;BR&gt;
  “소설의 종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서구 작가들, 특히 프랑스 인들의 지엽적인 걱정일 뿐이다. 동구나 중남미 작가들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떻게 서재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lt;백년 동안의 고독&gt;을 꽂아 놓은 채 소설의 죽음에 대해 중얼거 수 있다는 말인가?”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0343&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마르케스 자서전&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60822009.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 민음사&lt;BR&gt;
&lt;BR&gt;
  마르케스는 1999년에 림프관 암 진단을 받았다. 집중 치료 끝에 완쾌하였는데, 그 일을 계기로 자서전을 쓰기로 작정한다. 이 책이 그것이다. 본문에서 소개한 글에서 마르케스는 말했다. “중남미와 카리브 지역 작가들은, 한 손을 가슴에 얹고, 현실이 우리보다 더 나은 작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운명은, 어쩌면 우리의 영광은, 겸허한 마음으로 현실을 모방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아온 자의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이력서다. 보르헤스, 갈레아노, 마르케스는 물론 비교적 젊은 세대인 아이엘 도르프만이나 루이스 세풀베다가 그렇듯이, 중남미 작가들은 고통을 이야기할 때에도 호나우딩요처럼 글과 문장을 드리블한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25750&amp;amp;ttbkey=ttbprague0909002&amp;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중남미 예술기행을 떠나는 젊은 발걸음&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60169282.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우리들 꿈꾸는 아메리카 | 장혜영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&lt;BR&gt;
&lt;BR&gt;
  나라 밖의 어느 곳으로 갈 때, 온갖 여행잡서를 챙기면서 정작 그 지역에 관한 역사와 정치와 문화에 관한 기본 서적은 읽지도 않는 해괴한 풍토가 여전히 지배적이다. 나이든 어른들이 오래 전에 동남아 쪽으로 곰 발바닥 먹으러 나가듯이 젊은 여행자들도 미술관 찍고 박물관 찍고 쇼핑몰 찍고 식당 찍고, 그리고 돌아온다. 내면의 여행은 찾아보기 힘들다. &lt;BR&gt;
  그래서 고른 귀한 책이다. 최북단 멕시코에서 최남단 파타고니아까지 이 젊은 여행자는, 아니 3년 동안 멕시코에서 공부하고 6년 여에 걸쳐 수 십 차례나 중남미 전역을 연구하고 순례한 저자는 이 책에서 직접 발로 답사했던 중남미의 역사와 정치와 문화를 들려준다. 그렇게 오랫동안 현지에서 공부하고 답사하였음에도 올해 다시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남미로 떠날 계획을 갖고 있는 저자다. 멕시코, 페루, 쿠바, 콜럼비아, 베네수엘라, 도미니카, 브라질, 파라과이, 칠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지도 위에 압핀을 꽉 찍어놓고 싶은 곳들이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2170086&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666937&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3월</category>
			<author>jys2003 (정윤수)</author>
			<pubDate>Thu, 05 Mar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3월 5일] 우승이란 어제 내린 눈일 뿐이다 - 리누스 미헬스</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258487</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94222190.jpg&quot; width=&quot;260&quot; height=&quot;16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축구 감독 리누스 미헬스&lt;/p&gt;&lt;/div&gt;에디슨이 아니었더라도 그 무렵에 누군가가 전구는 발명했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에디슨이라는 이름을 따로 기억한다. 닐 암스트롱이 아니었더라도 그 무렵에 누군가는 달나라에 첫 발을 디뎠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닐 암스트롱을 우선 기억한다. 리누스 미헬스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리누스 미헬스. 1928년 2월 9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고 2005년의 오늘 3월 5일에 벨기에 알스트에서 심장수술을 받은 후 사망했다. 아약스 암스테르담에서 선수와 감독으로 일을 했고 fc바르셀로나와 네덜란드 대표팀을 이끌었다. 요한 크루이프, 루트 굴리트, 반 바스텐, 거스 히딩크, 딕 아드보카트 같은 이름들이 언제나 리누스 미헬스 이름 다음에 거론된다. &lt;BR&gt;
&lt;BR&gt;
독보적인 업적과 권위적인 스타일 때문에 ‘제너럴’(장군)&quot;이란 별칭이 붙은 이 감독의 이름 뒤에는 반드시 ‘토탈 사커’라는 용어도 따라붙는다. 오늘날 우리가 동네 축구에서도 쉽게 사용하는 많은 개념들이 그의 이름 다음에 따라나온다. ‘전원 공격 전원 수비’, ‘압박’, ‘공간’, ‘오버래핑’ 등.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50097211.jpg&quot; width=&quot;210&quot; height=&quot;239&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토탈사커의 창시자 미헬스 감독&lt;/p&gt;&lt;/div&gt;맨 앞의 비유처럼, 사실 그 무렵(70년대를 전후로 하는)에 세계 축구는 서서히 미드필드 대혈전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가 아니었더라도 누군가는 중원을 장악하여 상대의 배후 공간을 침략하는 상상을 실천에 옮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개념을 단지 상상이 아니라 세밀한 원리로 빚어내고 이를 요한 크루이프 같은 뛰어난 선수로 하여금 실전에서 과감히 성취한 감독이 바로 리누스 미헬스다. 
&lt;BR&gt;
&lt;BR&gt;
2차 대전의 참화를 서서히 극복한 이후 유럽 축구는 개별 국가의 특성에 맞는 저마다의 스타일을 추구하였다. 그럼에도 전반적으로는 ‘포지션’의 개념을 완강했던 상태였다. 잉글랜드의 ‘킥 앤 러시’, 이탈리아의 ‘카테나치오’, 독일의 지역 개념 그리고 언제나 그들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추구했던 브라질의 능란한 포지션 개념이 지배적이었다.&lt;BR&gt;
&lt;BR&gt;
리누스 미헬스는 이 ‘포지션’ 개념을 뒤흔들었다. 1974년 서독 월드컵 당시 36년 만에 월드컵에 나선 네덜란드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등 강호들을 6경기 14득점 1실점으로 압도하며 결승까지 올랐다. 상대 팀들은(심지어 우승을 차지한 서독마저도) 네덜란드의 유기적인 플레이에 넋을 놓았다. 수비수와 공격수의 간격은 15m 안팎이었다. 한 선수가 공격이나 수비 때문에 자리를 비우게 되면 동료들이 재빨리 그 자리를 채웠다. 11명이 아니라 15명 쯤 뛰는 팀처럼 보였다. 우승은 서독이 했지만 국제축구연맹(FIFA)이 선정한 MVP는 요한 크루이프였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98101365.jpg&quot; width=&quot;437&quot; height=&quot;297&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미헬스 감독의 지도 아래 그라운드에서 토탈 사커를 완성한 요한 크루이프&lt;/p&gt;&lt;/div&gt;
토탈 사커의 핵심은 ‘체력’도 아니고 ‘압박’도 아니고 ‘오버래핑’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개념은 ‘공간’이다. 미헬스 감독에게 ‘공간’이란 바람이 80%쯤 채워져 있는 풍선 같은 것이다. 한 쪽을 누르면 반대쪽이 부풀어 오르는, 유기적인 상상력의 공간이다. 미헬스의 선수들은 공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움직였다. &lt;BR&gt;
&lt;BR&gt;
예전 같으면 수비수가 전방으로 길게 공을 내차고 나서는 그 자리를 지키고 서있었다. 자기가 맡은 구역을 가급적 벗어나지 않는 것이 정석이었다. 하지만 미헬스에게 그런 공간이나 개념은 무의미하고 비효율적인 것이었다. 공을 걷어낸 수비수는 동료들과 함께 미드필드로 밀고 올라가야 한다. 공격을 배후 지원할 뿐만 아니라 자기 진영의 텅 빈 공간은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지만 ‘오프사이드’라는 룰이 지켜준다. ‘패스 앤 무브’로 끊임없이 의미 있는 공간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토탈 사커의 핵심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93072460.jpg&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362&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리누스 미헬스 감독과 함께 하고 있는 거스 히딩크 감독 (오른쪽)&lt;/p&gt;&lt;/div&gt;
미헬스 감독은 말한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00ff&quot;&gt;“선수들이 유기체처럼 움직이며 상대 진영으로 전진한 후, 공을 빼앗긴 이후에도 제 자리를 찾아서 후퇴하기 보다는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적극적으로 볼을 빼앗아기 위해 압박 수비를 한다. 즉 수비할 때에도 ‘공격’을 염두하면서 수비하는 것이다. 후퇴하여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전진하고 압박해야 경기를 공격적으로 전개할 수 있다.”&lt;/font&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05520506.jpg&quot; width=&quot;260&quot; height=&quot;18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미헬스를 추모하는 아약스 팬들 (사진 아약스닷컴)&lt;/p&gt;&lt;/div&gt;미헬스 감독은 1946년에 아약스 암스테르담의 선수로 축구 인생을 시작했다. 1958년까지 공격수로 뛰었으며 1947년과 1957년에 팀이 리그 우승하는데 기여를 했다. 다섯 차례 대표팀에 뽑히기도 했다.
&lt;BR&gt;
&lt;BR&gt;
그는 1965년부터 아약스 암스테르담을 맡아 네차례 리그 우승을 비롯한 많은 성취를 이룬 후 1971년에 스페인의 FC 바르셀로나로 건너가서 1974년의 리그 우승을 이뤄낸다. 물론 그해의 월드컵에서 대표팀을 맡아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였음은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다. &lt;BR&gt;
&lt;BR&gt;
이 대회 이후 미헬스는 아약스 암스테르담, FC 바르셀로나, 미국 로스앤젤레스 아즈텍스, 독일 FC 쾰른과 바이어 레버쿠젠 등을 이끌었다. ‘갈색 폭격기’ 차범근 선수가 이때 미헬스 감독의 조련을 받았다. 이렇게 각국의 프로팀을 맡는 사이에 네덜란드 대표팀을 두 차례나 더 맡았으며 1992년 덴마크와의 경기에서 패한 후 지도자 생활을 은퇴하였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76940423.jpg&quot; width=&quot;140&quot; height=&quot;199&quot; alt=&quot;&quot;/&gt;&lt;/div&gt;국제축구연맹(FIFA)는 지난 1999년에 ‘20세기 최고 축구 감독’으로 리누스 미헬스를 선정한 바 있다. 지난 2007년, 영국의 ‘더 타임스’가 전세계 축구 지도자, 비평가, 원로 그리고 노련한 도박사들의 평가를 종합하여 선정한 ‘세계 감독 랭킹 톱 50’에서 리누스 미헬스의 이름은 맨 위에 기록되었다. &lt;BR&gt;
&lt;BR&gt;
반드시 미헬스 혼자서 모든 것을 이룩한 것은 아니지만, 미헬스 때문에 우리가 즐기고 있는 축구가 오늘날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그에 의하여 축구장은 더욱 넓어졌고 더욱 빨라졌으며 전후반 90분은 마치 아이스하키처럼 한 줌도 버릴 게 없는 시간으로 꽉 채워졌다. &lt;/font&gt;&lt;/p&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토탈 사커의 또 다른 요소!&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70661844.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네덜란드 | 주경철 지음 | 산처럼&lt;BR&gt;
&lt;BR&gt;
  토탈 사커가 왜 독일,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이 아니라 네덜란드에서 창조되었을까. 해수면 보다 낮은, 저지대에서 시련의 역사를 살아낸 네덜란드 사람들의 진취적이며 자유분방한 기질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한가지에 능한 것으로는 살아남기 어려웠다. 다재다능해야 했고 (항구를 거점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다른 문화와 역사와 인종에 개방적이어어야 했다. 그것이 ‘전원 수비, 전원 공격’의 한 요소가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금기’가 없는 곳이다. 그곳에서 ‘공간’이 창조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유럽 전체가 아니라 네덜란드로 여행가려고 한다면 이 책으로 충분하다. 서양사학자 주경철 교수는 역사와 문화로 네덜란드를 안내한다. 그밖의 지리, 교통, 숙박, 식당 등은? 현지에 가서 네덜란드 사람에게 물어보면 된다. 아마 그들은, 누군가 원한다면, 마리화나를 싸게 얻을 수 있는 곳도 소개해 줄 것이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062063&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네덜란드 사람들의 내면 풍경&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75693540.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일상 예찬 | 츠베탕 토도로프 지음 | 이은진 옮김 | 뿌리와이파리&lt;BR&gt;
&lt;BR&gt;
  지배적인 종교 미술과 귀족들의 사치스런 미술 애호가 지배적이었던 17세기 바로크. 그런데 네덜란드만은 예외였다. 그들은 신화와 전설과 성서의 ‘위대하고 거룩한’ 이야기 대신 우유를 따르는 여인, 거리 청소를 하는 사람들, 아이 머리에서 이를 잡는 여인, 허름한 선술집에서 한 잔 술에 취해 있는 사내, 뜨개질을 하는 모습 등을 그렸다. 베르나르 베르메르의 그림을 말해주듯이, 근대 초기의 네덜란드 화가들(그리고 그 나라 사람들)은 일상의 잔잔한 풍경을 사랑하였다. 구조주의 문학이론가 츠베탕 토도로프는 이 나라 사람들의 ‘일상 예찬’의 역사성을 찬찬히 살피고 있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024161&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색다른 체험과 여행&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46174292.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불공평하고 불완전한 네덜란드 디자인 여행 | 최성민, 최슬기 지음 | 안그라픽스&lt;BR&gt;
&lt;BR&gt;
  월간 &lt;디자인&gt; 3월호의 특집은 ‘네덜란드 그래픽 디자인’이다. 이 책도 ‘디자인’이라고 제목에 쓰여있지만, 주로 그래픽 디자인을 중심으로 네덜란드를 보고 있다. 디자인 얘기이면서 네덜란드 이야기이고, 동시에 새로운 스타일과 꿈을 찾아나서는 젊은 디자이너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본문에서는 거장 리누스 미헬스를 다뤘지만, 미헬스에 관해서 네덜란드 축구에 관하여 출간된 단행본은 아쉽게도 한 권도 없다. 그래서 골랐다. 십여 년 전에, 네덜란드 소설가 레온 드 빈터의 &lt;호프만의 허기&gt;가 출간된 적 있는데, 참고할 만하다. &lt;BR&gt;
&lt;BR&gt;
아참, 이 작가 얘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지만, 네덜란드 역시 ‘천국’인 것만은 아니다. 이슬람의 강경한 원리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활동을 해온 비평가 아얀 히르시 알리 사건이 그것이다. 그녀는 네덜란드 정부의 보호와 지원 아래 네덜란드를 거점으로 활동하였으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공공연히 암살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는 수 없이 아얀 히르시 알리는 미국 워싱턴으로 이주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미국의 경호업체에게 그녀의 신변보호를 맡겼다. 그러다가 그 재정 지원을 중단하게 되자, 소설가 레온 드 빈터는 ‘재정 지원 중단은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라며 네덜란드 정부를 비판한 바 있다. 현재 네덜란드에는 아얀 히르시 알리처럼 정부의 지원과 보호를 받는 이슬람 출신 활동가와 학자가 6명 정도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0593837&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659986&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3월</category>
			<author>jys2003 (정윤수)</author>
			<pubDate>Wed, 04 Mar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3월 4일] 낭만 감정으로 소비하기엔 너무 중요한 음악가 - 비발디</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257945</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81983744.jpg&quot; width=&quot;220&quot; height=&quot;268&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lt;/p&gt;&lt;/div&gt;‘찌그러진 진주’라는 뜻의 바로크란 단어는 포르투칼어 ‘바로코’(Barocco)에서 유래한 것이다. 1600년 경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미술과 건축 분야의 이채롭고 장식적인 양식을, 약간은 경멸하는 투로 부르기 위해 쓰였다. 그러다가 19세기 중엽에 이 용어에 대한 재해석, 나아가 이 시대 예술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이제는 17세기 초에서 18세기 중반까지의 지배적인 유럽문화 양식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으며 요즘의 언어 풍습에서는 이 단어로 된 가구 브랜드가 있을 정도로 ‘완성되고 조화로운 품격’을 떠올리게 한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바로크 시대는 오랜만에 유럽이 비교적 풍요롭고 안정된, 나아가 각 지역의 경제적인 부흥을 일어나기 시작한 때였다. 신구교의 종교적 갈등은 차츰 완화되었으며 중세적인 관념의 잔재들도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 18세기 영국의 경우, 헨델은 조지 왕가와 더불어 60여 년에 달하는 평화기를 공유할 수 있었다. 이 무렵 서서히 성장하기 시작한 상업자본 및 그 계급적 대리자들인 시민들은 미술을 수집하고 가정음악회를 여는 일을 군사를 모아 전쟁을 일으키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있는 것으로 여겼다. 네덜란드가 그런 사회였다. 렘브란트의 그림은 시민과 시장이라는 기반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lt;BR&gt;
&lt;BR&gt;
이 시점에 등장한 음악가들은 대도시의 화려하고 리드미컬한 변화에 걸맞게 기존의 음악 양식을 일거에 바꿈으로써 진정으로 서양음악사의 첫 출발을 가능케 하였다. 보다 큰 규모의 연주회장이 자주 열리게 되자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들은 이들의 예술적 욕구를 만족시켜주기 위해 다채로운 음색과 좀더 강렬한 음량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오케스트라의 원형이랄 수 있는 합주단이 그런 이유로 조직되었으며 이들이 사용하는 악기도 기술적으로 훨씬 정교하게 개발되었다. 세계적 명기로 꼽히는 아마티, 스트라디바리, 과르네리 등 명가의 전통이 이 무렵 시작되었다. 음악가들은 오케스트라와 현악 독주자가 서로의 기량을 최대한 드러낼 수 있는 곡들을 만들 수 있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13527150.jpg&quot; width=&quot;250&quot; height=&quot;36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비발디의 작품 번호 4번 악보&lt;/p&gt;&lt;/div&gt;바로크 시대의 이탈리아 음악하면 우리는 대뜸 ‘붉은 머리의 사제’ 비발디를 떠올리게 된다. 1678년의 오늘 3월 4일,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비발디는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곧 산마르코 성당 관현악단에 들어가 바이올린 주자가 되었다. 1703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고 1703년 9월에 베네치아 자선기관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Ospedale della Pieta) 부속 음악학교 교사로 채용되었다. 오스페달레는 고아나 버려진 여자아이들을 보호하는 기관이었다. 
&lt;BR&gt;
&lt;BR&gt;
이곳의 학생들을 위해 비발디는 예지에 찬 곡들을 썼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장차 자기 음악의 뼈대가 될 다양한 음악형식과 기악편성의 효과를 실험했다. 첫 작품집으로 12곡의 트리오 소나타를, 그리고 두 번째 작품집으로 바이올린 소나타를 출간한 이후 비발디로 곧장 자신의 주력 분야가 되는 합주 협주곡의 세계로 들어갔다. 1710년 경 이후부터 이탈리아에서는 천재적인 작곡 실력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악마적인 바이얼린 독주로 이름난 붉은 머리의 사제 비발디라는 이름이 하나의 문화적 패러다임으로 통했다. &lt;BR&gt;
&lt;BR&gt;
그의 명성은 베네치아의 경계를 넘어 유럽 일대로 퍼져 나갔다. 그의 음악이 널리 알려질 수 있게 된 것은 근대의 여명을 열게 된 중요한 문명사적 전환, 즉 인쇄술의 발달과 깊은 관련이 있다. 북부 유럽을 중심으로 발달하게 된 인쇄술 소식을 들은 비발디도 전통적인 이탈리아 인쇄방식을 버리고 1711년에 암스테르담의 에티엔 로제르에게 악보 출판을 맡겼다. 로제르의 동판 인쇄 방식은 비발디의 악보를 보다 선명하게 그리고 빠른 시일 내에 훨씬 많은 양을 찍어 유럽 일대에 보급시켜 주었다. &lt;BR&gt;
&lt;BR&gt;
로제르의 인쇄술 도움을 받은 작품집이 바로 유명한 &amp;lt;조화의 영감&amp;gt;(L'estro armonico)이다. 다양한 현악 독주를 바탕으로 한 12곡의 합주협주곡은 협주곡 양식을 일거에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게 되었으며 그 현란한 리듬과 찬연한 색채감은 비발디 음악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꼽히게 되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262472373.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26&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비발디의 합주곡이 흘렀던 곽지균 감독의 영화 &amp;lt;겨울 나그네&amp;gt;&lt;/p&gt;&lt;/div&gt;
영화 팬이라면, 곽지균 감독의 영화 &amp;lt;겨울 나그네&amp;gt;를 떠올리면 된다. 안성기, 강석우, 이미숙이 주연을 맡았던 이 영화의 첫 장면. 아늑한 가을의 대학 캠퍼스. 이미숙이 사뿐사뿐 걸어오다가 자전거를 탄 강석우와 부딪히게 된다. 안고 있던 책과 노트가 떨어지고, 수첩 하나가 남게 된다. 이 아주 ‘고전적인 시퀀스’에 흐르는 음악이 바로 &amp;lt;조화의 영감&amp;gt; Op.3 No.6 RV.356의 1악장이다. 영화에서는 바이얼리니트 김남윤이 연주를 했었는데, 아래 링크하는 연주는 이작 펄만의 것이다.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25&quot; height=&quot;344&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www.youtube.com/v/eTPiZup0QmM&amp;amp;hl=ko&amp;amp;fs=1&quot;&gt;&lt;/embed&gt;&lt;BR&gt;
&lt;BR&gt;
1718년에 비발디는 장기 여행을 시작한다. 유럽의 여러 도시를 떠도는 여행은 근대 초기 시민 사회의 유행이었고 관습이었다. 최초의 장기여행은 1718년부터 1720년 사이에 만토바에 머무른 것으로, 이 도시는 합스부르크가의 저명한 음악애호가 다름슈타트공의 지배하에 있었다. 비발디는 여기서 교회 합창장이 됐는데, 이 직함은 그가 이곳을 떠난 후에도 계속 따라다녔다. 그 다음 여행은 1723년부터 1725년에 걸쳐 로마에 체류한 것으로, 여기서 비발디는 여러 번의 축제 시즌을 보냈다. 그는 교황 앞에서 두 번 연주했으며 바티칸의 고문으로 예술 후원자로도 유명한 피에트로 오토보니 추기경의 후원을 받았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314139090.jpg&quot; width=&quot;300&quot; height=&quot;294&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amp;lt;사계&amp;gt;를 혁신적으로 해석하고 연주한 유로파 갈란테 앨범&lt;/p&gt;&lt;/div&gt;비발디의 명성은 이제 국제적인 것이 되었다. 위세등등한 교황청의 지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로제르의 출판술에 힘입어 그의 새로운 악보는 만들어지자마자 무섭게 유럽 일대에 퍼져 하나의 음악적 기준이 되었다. 특히 1725년 완성하여 보헤미아의 귀족 모르친 백작에게 헌정한 작품 8 &amp;lt;화성과 인벤션의 시도&amp;gt;(Il cimento dell armonia e dell' inventione)는 그의 이름을 한층 더 높히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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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12곡으로 된 이 작품의 1곡에서 제 4곡까지를 오늘날 바이올린 협주곡 &amp;lt;사계&amp;gt;라고 부른다. 인류사의 고전이다. 그동안 이 곡의 연주에 있어 지나치게 낭만적인 해석이 압도를 하여왔으나(그 유명한 이 무지치 합주단) 지난 90년대 이후 야심찬 해석과 획기적인 연주가 많이 등장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파비오 비욘디가 이끄는 유로파 갈란테. 그들의 연주로 &amp;lt;사계&amp;gt; 중에서 가장 격렬한 ‘여름’ 3악장을 아래의 영상으로 들어본다. 오늘날 우리가 정서적 인테리어로 ‘소비’하고 있는 이 음악을 파비오 비욘디는 한 시대의 감성의 축을 뒤흔드는 격렬한 곡으로 해석한다.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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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디의 만년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뜨겁게 분출되는 예술적 에너지를 쏟아내기 위해 비발디는 안간힘을 썼지만 예술가를 독자적인 개인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궁정이나 교회의 고용인으로 여기는 당시의 환경 때문에 비발디는 종속적 관계를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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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디는 자기에게 주어진 바로크 후기에서 고전파 초기 양식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시기를 선명하게 음악사적인 관점에서 인지한 것은 아니지만 1세기 전의 코렐리가 완성시켜 놓은 바로크 음악의 가능성을 자신의 천부적인 예지로 바흐와 헨델에게 넘겨주는데 훌륭히 성공하였다. 비발디 음악의 특색으로 간주되고 있는 간결한 주제에 담아낸 화려한 색채감과 명쾌한 형식 사이를 후비고 다니는 독주 악기의 현란함이 없었다면 후대의 작곡가들은 소나타와 협주곡 양식을 정립시키기 위해 꽤나 고생을 했어야 했다.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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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66550293.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444&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amp;lt;사계&amp;gt;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다. 기돈 크레머는 비발디와 &amp;lt;사계&amp;gt;와 피아졸라의 &amp;lt;사계&amp;gt;를 혼융하여 연주했다. &lt;/p&gt;&lt;/div&gt;
그렇게 마지막을 장식한 비발디는 1740년에 빈으로 떠난다. 파벌과 경쟁으로 얼룩진 이탈리아에 환멸을 느낀, 아니 좀더 사실에 가깝게 말하자면 음악적 분투뿐만 아니라 귀족과 교회, 그리고 많은 음악가들과 오랜 정치적 긴장관계를 가지는 바람에 지쳐버린 비발디는 오스트리아의 새로운 군주에게 자신의 의탁하기 위해 빈으로 마차를 몰았다.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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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47392092.jpg&quot; width=&quot;250&quot; height=&quot;25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안드레아스 숄이 부른 비발디 &amp;lt;슬픔의 성모&amp;gt;&lt;/p&gt;&lt;/div&gt;그러나 여행 도중에 비발디는 자신의 여생을 걸었던 칼 6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래도 내친 걸음에 1741년 초엽에 간신히 빈에 도착하였으나 아무도 비발디를 맞이해 주지 않았다. 그 이후의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1741년 7월 28일, 마구상 발러의 미망인 집에서 장염을 앓다 죽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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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디의 시신은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뷔르거슈피탈 공동묘지에 쓸쓸히 묻혔다. 그래도 이 위대한 음악가를 기리는 간절한 마음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다섯명의 성슈테판 성당 소년성가대원들이 그의 장례식에서 레퀴엠을 불러주었다는 사실이다. 이 마지막 에피소드가 음악사적으로 기록에 남을 만한 까닭은 다섯명의 성가대원 중에, 장차 바로크 관현악의 완성자가 될 요제프 하이든이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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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영상은 그의 또다른 대표작인 &amp;lt;슬픔에 빠진 성모&amp;gt;(Stabat mater)의 1곡을 안드레아스 숄이 부르는 것이다. 비발디는 우리가 봄철에 커피 홀짝 거리며 &amp;lt;사계&amp;gt; 중 1악장의 앞머리만 살짝 듣고 잊어버리기에는 너무나 중요하고 무거운 음악가였다.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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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혁신의 비발디, 비발디의 혁신&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52703286.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사계 | 비발디 작곡 | 파비오 비욘디 지휘, 유로파 갈란테 연주 | opus111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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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널리 알려진 대중적인 곡이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과 실험의 기록들이 있다. 전자 바이얼린을 사용하여 경쾌한 댄스 음악으로 만든 것도 있다. 이 무지치로 대표되는 낭만적 해석이 오랫동안 이 곡의 표준영정처럼 되어 왔다. 부정할 수 없는 안온한 힘이 있다. 그런데 일련의 원전 악기 연주자들이 과연 비발디가 그렇게 나긋나긋했던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혁신의 비발디를 연주했다. 디아파종 황금상 등을 수상한 ‘혁신’의 연주다.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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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6705691204&amp;amp;ttbkey=ttbprague0909002&amp;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사계 + 사계&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24112860.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Eight Seasons | 비발디, 피아졸라 작곡 | 기돈 크레머 지휘 및 연주, 크레메라타 발티카 합주 | NONESUCH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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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발디의 &lt;사계&gt;, 그 사이 사이에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lt;사계&gt;가 스며든다. ‘사계 + 사계’가 되어 ‘Eight Seasons’가 되었다. 데뷔 때부터 이미 완성된 연주자로 평가를 받은 기돈 크레머는 상업적 마케팅으로서의 글로벌이 아니라 문화적 연대로서 글로벌한 작업을 해왔다. 발틱 연안의 라트비아 출신인 그는 ‘크레메라타 발티카’ 합주단을 조직하여 이탈리아와 아르헨티나 작곡가의 음악을 하나의 음반에서 버무려낸다.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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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모두가 거장이고 명반인 것은 아니다&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left;margin-right:10px;width:150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096805074.jpg' class='box_img' width='150px' /&gt;&lt;/div&gt;클래식, 그 은밀한 삶과 치욕스런 죽음 | 노먼 레브레히트 지음 | 장호연 옮김 | 마티&lt;BR&gt;
&lt;BR&gt;
  클래식은 완전히 사양 산업이 되고 있다. LP와 CD라는 저장 장치의 판매로 연명해 왔지만 아무도 그것을 사지 않는 시대가 되고 있다. MP3와 유투브 영상은 ‘돈’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공연 마케팅에 치중하지만 그저그런 시들한 레퍼토리의 연속이다. 이는 외상이기도 하고 내상이기도 하다. 클래식은 그동안 너무 ‘클래식’ 했다. 반짝 등장하여 몇 년만 지나면 ‘거장’ 같은 소리를 듣는다. 적어도 국내 음악 환경에서 ‘거장’이란 예고를 나와 외국 유학 가서 디플롬 수료하고 귀국 연주회 하는 사람을 뜻할 지경이 되었다. 세계적인 음악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의 이 책은 그토록 사랑했던 클래식과 그 문화에 바치는 송가다. 모두가 거장이 되고 모두가 전설이 되고 모두가 명반이 되었던 그 ‘황금 시대’의 이면을 다시 살피면서, 바로 그와 같은 ‘자뻑’의 거품이 치명상이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lt;BR&gt;
&lt;BR&gt;
&lt;a href=&quot;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053258&amp;ttbkey=ttbprague0909002&amp;COPYPaper=1&quot; target=_new&gt;☞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lt;/a&gt;  /&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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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653598&quot;&gt;&lt;/embed&gt;&lt;BR&gt;
&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3월</category>
			<author>jys2003 (정윤수)</author>
			<pubDate>Tue, 03 Mar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3월 3일] 아빠 어디 가? 고속도로 간단다 역주행하러 - 오에 겐자부로</title>
			<link>http://blog.ohmynews.com/booking/257922</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6752/1183360209.jpg&quot; width=&quot;190&quot; height=&quot;28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소설가 오에 겐자부로&lt;/p&gt;&lt;/div&gt;가족의 고통을 소재로 하여 글을 쓴다는 것은 그 당사자의 고통 만큼은 아니어도 매우 힘에 겨운 일이 된다. 무엇보다 육친의 고통을 ‘글감’으로 삼았다는 얘기를 듣지 않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쓰게 된다. 남 얘기 하듯이 건성으로 할 수 없는 ‘소재’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영화 &amp;lt;서편제&amp;gt;에서는 딸의 눈에 치명상을 입혀서라도 소리 하나를 얻으려는 가객이 등장하고 동서양의 여러 작품들에서 육신이나 영혼을 저당 잡혀서 큰 성취를 얻고자 하는 얘기가 많이 나오지만, 그것은 대체로 구전이나 작위일 가능성이 크다. &lt;BR&gt;
&lt;BR&gt;
더욱이 장애 같은 선천적인 고통이 ‘소재’라고 한다면, 우선 윤리 문제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것이 하나의 글감이 되고 책으로 나왔을 때는 작가 자신이 가슴 아픈 사연 속을 헤매다가 간신히 빠져나온 것이기 쉽다. 그것부터 쓰지 않으면 다른 그 어떤 것도 쓰지 못하는, 절실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