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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nnel>
		<title>김삼웅의 장준하 평전</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link>
		<description>&lt;대한매일신보(서울신문)&gt;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4년여동안 독립기념관장에 재직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 제주 4.3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국회 추천),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친일파 인명사전 편찬부원장 등을 맡아 바른 역사 찾기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Sat, 22 Nov 2008 05:24:12 GMT</pubDate>
		<item>
			<title>[52회] 거듭되는 반전 또 반전</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30131</link>
			<description>역사는 가끔 반전(反轉) 또는 역전의 기회를 갖는다. &lt;BR&gt;
패배를 모르던 전쟁의 영웅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서 동장군에 밀려 후퇴함으로써 프랑스사를 반전시켰다. 전쟁광 히틀러는 초기의 승세에도 불구하고, 1945년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이 항복하고 1945년 빈에서 철수하면서 유럽사를 역전시켰다. &lt;BR&gt;
&lt;BR&gt;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광신(狂神) 히로히토와 도조 히데끼가 주도한 전쟁, 발발 초기에 승승장구하던 일군은 1944년 11월 미군의 일본 본토공습,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 투하, 8월 8일 소련의 대일선전포고, 9일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면서 세계사를 반전시켰다.&lt;BR&gt;
&lt;BR&gt;
1945년 8월 10일 하오, 한 통의 전통이 OSS본부에 전달되었다. 대원들의 출발을 중지하라는 내용이다.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무조건 수락하겠다는 요청이라는 전문이다. ‘포츠담선언’은 1945년 7월 26일 독일 베를린 교외에 있는 포츠담에서 미ㆍ영ㆍ중ㆍ소 4개국 수뇌회담의 결과,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권고하고 전후 대일 처리방침으로 일본영토의 한정, 일군 무장해제, 전범처벌, 군수산업금지 등을 규정한 내용을 담았다. 특히 이 선언은 카이로 선언에서 결정한 한국의 독립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lt;BR&gt;
&lt;BR&gt;
이와 같은 정세의 변화를 까맣게 모르고 있던 대원들에게는 국내진공의 출발 직전에 내려진 출동중지의 명령은 ‘실망과 환희’를 동시에 느끼게 했다. 일제의 항복은 마음속으로는 억만 번의 바람이었으나 그것이 실현되리라고는 쉽게 기대하기 어려웠던 터였다. 그런 일제가 마침내 항복한다는 것이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일본제국주의가 손을 든다는 사실은 생각하기조차 벅찬 기다림의 끝이었다. 1940년에 들어서부터 내가 당한, 우리가 당한, 아니 나의 조국이 당한 ‘대동아전쟁’의 희생물로서의 시련은 이제 끝이 나게 되는 것일까?&lt;BR&gt;
기쁨에 뒤이어 실망이, 실망에 뒤따라 기쁨이, 서로 뒤바뀌며 벅찬 가슴을 드나들었다. 조국이 광복을 얻게 되었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큰 기쁨이다. 그러나 이미 각오된 결심으로 조국광복의 기수가 되겠다는 기회의 상실은 안타깝도록 가슴 아픈 억울함이기도 했다.&lt;BR&gt;
&lt;BR&gt;
연합군의 서해안 상륙작전이 며칠만 더 앞선 계획이었더라도 우리는 조국에 뛰어내려 통쾌하고 장렬한 남아의 혼을 그들에게 보일 것이었거늘, 애석한 노릇이었다. 이것도 절대자의 의사일까? 나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서안의 하늘을 우러렀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8)&lt;/span&gt;&lt;BR&gt;
&lt;BR&gt;
장준하의 기술대로 며칠 전에만 출발하여 광복군이 국내에 진공했더라면, 설혹 그들은 광복 제단에 희생이 되었겠지만, 우리 독립운동사에는 또 하나의 큰 획을 그었을 것이다. &lt;BR&gt;
&lt;BR&gt;
‘실망과 환희’에 들떠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8월 13일 장준하는 이범석 장군의 부름을 받았다. 이미 거기에는 이해평ㆍ노능서ㆍ김준엽 등이 앉아 있었다. 이장군의 발언은 다시한번 이들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또 한번의 ‘반전’이었다.&lt;BR&gt;
&lt;BR&gt;
미군이 한국에 진주하기 전에 먼저 들어가서 연합군 포로 인수와 미군 진주를 위한 기초조사, 일군에 징병된 한국 병사들 인수, 일군의 무장해제, 국민자위군 조직 등의 임무를 띤 ‘정진군’으로 들어가라는 지침이었다. &lt;BR&gt;
&lt;BR&gt;
다음날 국내 정진군에 끼이게 된 장준하는 다시 한번 격정에 쌓이게 되었다. 이번 임무가 슬픈 것인지, 기쁜 것인지 구별이 안 되는 흥분이었다. 하지만 곧 빼앗긴 조국땅에 주인으로서 가장 먼저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 앞에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lt;BR&gt;
&lt;BR&gt;
국내 정진군은 무기와 탄약, 휴대식품을 지급받고 미군 비행기에 탑승하여 한국으로 향했다. 이범석 장군을 대장으로 하여 장준하ㆍ김준엽ㆍ노능서ㆍ이계현ㆍ이해평 등 5명의 한국군과 미국측 22명, 모두 28명이 탑승한 비행기는 8월 14일 새벽 4시에 서안비행장을 이륙했다.&lt;BR&gt;
&lt;BR&gt;
비행기가 6시간 40분을 날아 황해 상공에 진입했을 때 곤명 본부에서 회항명령이 내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14일 아침 일본 동경만에 진입하던 미국 항공모함이 일본 특공대의 습격을 받았는데 국내진공에 위험성이 크니 진입을 포기하라는 통신연락이었다.&lt;BR&gt;
&lt;BR&gt;
또 한 차례 겪은 반전이었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곤명으로 돌아와서 15일 일왕의 항복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현지 신문은 소련군이 한반도를 항해 속속 남하하고 있다는 우울한 보도였다. &lt;BR&gt;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lt;BR&gt;
8) 앞의 글, 242쪽. &lt;/span&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091011&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7장] OSS대원에서 환국하기까지</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Fri, 21 Nov 2008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51회] 국내진공 정진대에 선발, 신변정리</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30128</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cc9900&quot;&gt;나는 나의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일용품을 챙기고 일기장을 모두 꺼냈다. 나의 일기는 일군을 탈출하던 1944년 7월 7일부터 이날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써 온 일곱 권의 노트였다. 이것을 써 놓은 다행스러움이 나를 떨리게 했다. 실히 소포 하나는 될 분량이었다.&lt;BR&gt;
&lt;BR&gt;
다음으로 내가 만든 &amp;lt;등불&amp;gt; 다섯 권과 &amp;lt;제단&amp;gt;의 제1호와 채 제본이 끝나지 않은 2호였다. 이것은 나의 모든 정성이, 나의 나라사랑이 깃들여 만들어진 잡지였다. 아내와 부모와 민족과 이웃과 친구와 동포와 송두리째 조국을 빼앗긴 나로서는 나의 애정을 기울인 단 하나의 대상 그것이 &amp;lt;등불&amp;gt;이요, &amp;lt;제단&amp;gt;이었다. &lt;BR&gt;
&lt;BR&gt;
나의 보람의 기록이여, 내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죽은 뒤 나의 애정을 보여 줄 유일한 증거였다. 내 사랑 다 쏟을 곳 없어, 깨알처럼 붓으로 쓰고 매만지고 하여, 마음 쓸 곳 찾아 만들어 낸 일곱 권의 잡지, 그것은 나의 영원한 기념물이요 나의 망명생활 속에 그린 방향물이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5)&lt;/span&gt;&lt;BR&gt;
&lt;BR&gt;
장준하는 망명지에서 피땀 흘리며 제작한 잡지와 일기장을 소포로 만들어 아내에게 보내고자 김준엽 동지를 찾아갔다. 마침 그가 자리에 없어서 갓 결혼한 부인에게 맡기면서 “불원간에 국내로 떠나게 될 터인데 내가 죽은 것이 확인된 뒤에 이 주소로 부쳐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김준엽은 그 무렵 이범석 장군의 비서인 민영주와 결혼하여 신접살림을 꾸리고 있었다. 민영주는 김구 주석의 비서실장 민필호의 딸로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아리따운 규수였다.&lt;BR&gt;
&lt;BR&gt;
이와 같은 장준하의 비장한 행동에 대해 역사학자 조동걸은 한 연구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여기에서 장준하의 신념의 인간성과 지도자적인 인격을 선명하게 찾아볼 수 있게 된다. 장준하는 자기 생애를 ‘제단’에 바칠 고집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머리를 깎고 숙연한 태도로 출동 단념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7권의 일기와 5권의 &amp;lt;등불&amp;gt;과 2권의 &amp;lt;제단&amp;gt;을 묶어 고향의 아내에게 보내게 하고 나머지 사물은 불태워 없애 버렸다. 이 신념의 고집을 누가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장준하는 자기가 출동을 단념하면 전체의 작전도 망가지고 무엇보다 전 대원이 동요하여 OSS작전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여기에서 그의 책임감에 찬 지도자의 인격을 감동스럽게 확인할 수 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6)&lt;/span&gt;&lt;BR&gt;
&lt;BR&gt;
장준하는 일기장과 손수 만든 잡지를 소포로 묶어 아내에게 보내도록 하는 등 신변을 정리하면서 아내와 부모형제를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유물처럼, 유언장처럼 자신의 혼이 깃든 ‘작품’을 고향으로 보내도록 한 것이다. 이 장준하의 ‘유품’은 해방 뒤 김준엽이 귀국할 때 소중하게 가져와서 본인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그런데 6.25전쟁 중에 분실되었다. &amp;lt;제단&amp;gt;은 미주의 독립운동단체에도 우송을 했기 때문에 혹시 남아있어서 찾게 된다면 우리 독립운동사의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lt;BR&gt;
&lt;BR&gt;
8월 7일 김구 주석과 이청천 광복군총사령관이 약속대로 두곡을 찾아 훈련대원들을 격려하러 왔다. 장준하는 “사랑하는 조국의 아들이 죽으러 가는 훈련을 받으며, 죽음을 선택해 가는 마당에 찾아오신 김구 선생의 그 모습은, 핑그르 눈물이 도는 격려였다.” 라고 회고했다. 다음날 에는 미군 다노반(Gen, Donavan) 소장이 서전트 소령과 함께 병영을 찾아와 출전준비상태를 점검하고, 김구 주석과 이청전 사령관, 이범석 장군 셋이서 장시간 구체적인 전략을 논의했다. &lt;BR&gt;
&lt;BR&gt;
다음날 대원들에게 특별 대기령이 내려졌다. 이제 출발시간이 된 것이다. 살기 위하여 죽을 곳으로 가는 출발이다. 통신장비, 무기와 식량, 일본국민복과 일본인신분증, 약간의 금괴, 일본제 신발에 이르기까지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췄다. 입대한 이래 이렇게 호사스런 군장을 갖추기는 처음이었다. 미군 비행기로 한국 어느 산악지대에 투하할지, 잠수함으로 어느 해안에 상륙할지 구체적인 방법은 알 수 없지만, 출발은 초 읽기에 들어갔다. 서해안을 통해 입경하게 될 것으로 추정할 뿐이었다. &lt;BR&gt;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lt;BR&gt;
5) 앞의 책, 234쪽. &lt;BR&gt;
6) 조동걸, '장준하의 독립운동', &amp;lt;광복50년과 장준하&amp;gt;, 529쪽.&lt;BR&gt;
7) &lt;!--StartFragment--&gt;앞의 책, 239쪽. &lt;/span&gt;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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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7장] OSS대원에서 환국하기까지</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Thu, 20 Nov 2008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50회] 새 잡지 &lt;제단&gt; 창간</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30124</link>
			<description>장준하는 고된 훈련기간에 틈을 내어 토교에서 제작했던 잡지 &amp;lt;등불&amp;gt;을 잇는 새로운 잡지 &amp;lt;제단&amp;gt;을 준비했다. 조국에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결심으로 잡지 이름을 &amp;lt;제단&amp;gt;으로 지었다. 이범석 장군의 후의로 잡지사 사무실도 따로 마련하였다. 그 때는 김준엽이 이장군의 전속부관으로 차출되어 잡지발행은 장준하 혼자서 맡게 되었다.&lt;BR&gt;
&lt;BR&gt;
장준하는 OSS특수훈련을 받으면서, 언제 국내진공작전에 투입될지도 모르는 처지에서 ‘유언집을 엮는’ 기분으로 새 잡지를 준비했다. 장준하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amp;lt;제단&amp;gt;은 나의 둘 쨋번으로 만든 잡지의 제호로 중경에서 떠나 서안 광복군 제 2지대에 있을 때에 만든 잡지다. 우리는 그곳에서 장차 연합군의 한국상륙작전을 앞두고 국내에 미리 잠입하여 사전조직과 공작의 중대한 임무를 띄고 당시 중국전사령부의 웨드마이어장군 막하에서 미군 특수부대와 함께 훈련을 받고 있었다. &lt;BR&gt;
임무가 임무인 만큼 우리는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오직 조국독립을 위해서 산 제물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훈련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뭔가 한 가지 후세에 흔적 같은 것이라도 남기고 싶은 생각으로 시작된 것이 곧 그 잡지로 제호도 되도록 실감을 내기 위하여 &amp;lt;제단&amp;gt;이라 하였다. &lt;BR&gt;
&lt;BR&gt;
그러니까 이 &amp;lt;제단&amp;gt;은 먼저 했던 &amp;lt;등불&amp;gt;보다 더 비장한 결의로 시작된 것이었으며 그 발간 조건들도 &amp;lt;등불&amp;gt;보다 좋았다. 즉 종이도 미군한테 얻어 쓰는 모조지를 썼기 때문에 그 지질이 아주 좋았고 등사도 이번에는 아주 전문적인 필경인이 담당해서 했다. &lt;BR&gt;
&lt;BR&gt;
편집내용도 물론 전보다는 달랐다. 실제로 죽으로 간다는 생각으로 그 유언집과 같은 것이니만큼 그 내용들이 진짜 피로 쓴 듯 실감이 있었다. 정말 우리는 유언으로써 하듯, 그 제단을 통하여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모든 선배들의 단결과 행동통일을 강력히 촉구 호소했다.&lt;BR&gt;
&lt;BR&gt;
초판에 삼백 부를 찍어 이번에는 배포처도 전의 &amp;lt;등불&amp;gt;보다 더 확대하여 멀리 미주에 있는 우리 독립운동의 제 기관에까지 보냈다. 물론 각층으로부터 찬사가 자자했고 김구ㆍ김규식 두 선생께서는 친히 격려사까지 보내주셔서 그것을 &amp;lt;제단&amp;gt; 2호에 게재했다. 그러나 &amp;lt;제단&amp;gt;은 겨우 2호의 단행으로 그만두게 되었으니 그 해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우리의 임무가 끝났으므로였다. 우리의 임무가 끝남과 동시에 물론 &amp;lt;제단&amp;gt;의 임무도 끝난 것이었다.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4)&lt;/span&gt;&lt;/font&gt;&lt;BR&gt;
&lt;BR&gt;
여러 날 동안 훈련이 강화되면서 장준하는 국내공작대에 지원했다. &lt;BR&gt;
잠수함이나 낙하산으로 한국에 투입되어 첩보활동 - 정보송신, 유격대조직, 군사시설 파괴공작을 수행하고, 이것이 성공할 경우 국민군을 조직하여 미군상륙과 때를 같이하여 후방교란을 지휘하는 책임이었다. 여기에 지원하여 승낙을 받은 것이다.&lt;BR&gt;
&lt;BR&gt;
함께 가는 대원은 무전송신에 능숙한 노능서, 권총의 명사수 이계현, 완력이 센 김성환이었다. 4명의 결사대가 구성되고, 장준하가 책임자로 선정되었다. &lt;BR&gt;
결사대는 일차로 서울에 침투하여 ‘사업’을 벌이기로 했다. 모든 훈련과 준비를 마치고 국내잠입의 최종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순간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lt;BR&gt;
&lt;BR&gt;
장준하의 인품과 능력을 아낀 이범석 장군이 국내진입 결사대의 명단에서 그를 빼고자 한 것이다. 일제 패망이 얼마남지 않았는데, 유능한 인재를 잃어서는 안 되겠다는 나름대로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이 소식을 김준엽을 통해 전해들은 장준하는 크게 실망했다. 그리고 다음날 머리를 깎아 결연한 의지를 다짐하면서 ‘유품’을 정리했다. 당시 정황으로는 국내에, 그것도 서울에 게릴라로 잠입한다는 것은 십중팔구는 죽음을 의미했다.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lt;BR&gt;
4) 장준하, '나와 잡지' 上, &amp;lt;사상계&amp;gt;, 1964년 4월호.&lt;/span&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080753&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7장] OSS대원에서 환국하기까지</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Wed, 19 Nov 2008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49회] 서안에서 OSS훈련받아</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30122</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cc9900&quot; size=&quot;2&quot;&gt;&lt;strong&gt;인천이 발아래로 깔리고 우리는 김포의 활주로를 돌고 있었다.&lt;BR&gt;
정각 4시.&lt;BR&gt;
우리는 김포비행장이라는 벌판 위에서 한줄기 활주로를 놓고&lt;BR&gt;
선회를 마친 뒤, 아랫배가 허전해오는 착륙을 기도했다. 이윽고&lt;BR&gt;
비행기가 활주로에 들어섰다. 알 수 없는 심회가 꼿꼿이 굳어졌다.&lt;BR&gt;
이제 조국에 돌아왔다. 곧 땅을 밟고 그리운 동포의 그 표정을 보리라.&lt;BR&gt;
아, 그리운 사람들아, 내 동포여.&lt;BR&gt;
&lt;BR&gt;
- 장준하, &amp;lt;돌베개&amp;gt;에서.&lt;/strong&gt;&lt;/font&gt;&lt;BR&gt;
&lt;BR&gt;
임시정부에 체류한지 3개월이 지난 4월 29일 장준하 등 30명은 서안으로 떠나기로 했다. 50여 명의 동지 가운데 임정 경위대에 10여 명이 들어가고 나머지 동지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임시정부에 잔류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장준하는 이때 함께한 동지가 30여 명이라고 줄곧 쓰고 있는데 김구 주석은 송별사에서 19명이라 하여 헷갈린다. ‘30여 명’이 맞은 것 같다.&lt;BR&gt;
&lt;BR&gt;
서안에는 미국전략정보기관(O.S.S, Office of Strategic Ceruice)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국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은 미국합동참모본부 소속의 책임장교 서전트(CNED B, Sargent)와 만나 광복군이 OSS와 연계하여 대일전에 참여하기로 합의했다. 안휘성 부양에서 활동하는 제 3지대장 김학규도 그곳에 있는 OSS통신장교를 통해 곤명(昆明)의 OSS와 합작을 추진하고 있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중국에서 활동하던 OSS는 전략상 한반도가 일본군의 중국대륙 침략의 주요 거점이자 일본대륙의 수송로 역할을 하고 있는 점, 비밀첩보원을 일본에 침투시키는 기지로서 한반도가 중요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OSS는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중시하여, 이 지역의 첩보활동에 한국인을 이용하려 하였다. 이것은 곧바로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려는 임시정부의 의도와 맞아떨어졌다. 1944년 말에서 1945년 초 사이에 OSS는 한국인을 대일전쟁에 활용하려는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였다.&lt;BR&gt;
&lt;BR&gt;
한국광복군과 OSS의 합의로 ‘독수리작전’이란 암호명의 특수부대가 창설되었다. 이 작전은 1945년 4월에 김구 주석의 최종 재가를 받았고, 이범석이 책임자로 선정되었다. 5월부터 서안과 안휘성의 입황(立煌)에서 제 2지대와 제3 지대 대원들이 3개월 과정의 훈련을 마치고 ‘정진대(挺進隊)’가 국내에 진공한다는 전략이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lt;/span&gt;&lt;BR&gt;
&lt;BR&gt;
장준하는 OSS에 지원하여 서안으로 가기로 하면서 가명을 지었다. 가명 짓기는 이범석이 정보누설을 막기 위해 대원들에게 지시한 것이다. 장준하는 김준엽과 상의하여 김신철(金信鐵)로 짓고 김준엽은 김신일(金信一)로 개명했다. 믿음이 없는 사회에서 서로 믿고 살자는 뜻에서 돌림자를 믿을 신(信)자로 정한 것이다. 의형제와 같은 마음의 결속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본명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lt;BR&gt;
&lt;BR&gt;
임정을 떠나는 날, 대원들은 처음 이곳에 올 때와 같이 바로 그 자리에 정렬하여 섰고, 김구 주석을 비롯하여 임정 요인들이 도열하여 사지로 떠나는 젊은이들과 석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이날 김구 주석의 작별인사는 떠나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들을 다시 한번 눈물 바다로 만들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오늘 4월 29일은 내가 23년 전에 윤봉길 군을 죽을 곳에 보내던 날이오. 또 지금이 바로 그 시각이요. 여러분도 다 알 것이오. 상해 홍구(虹口)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백천대장(白川大將) 등을 죽이려던 그날의 의사 봉길 군이 나와 시계를 바꿔 차고 떠나던 날이요. 내가 가졌던 허름한 시계를 대신 차고, 내게는 이 회중시계를 주고 떠나가던 윤군의 모습을 생각하며, 바로 같은 날인 오늘, 앞으로 윤의사와 꼭 같은 임무를 담당할 여러분을 또 떠나보내는 내 심중이 괴롭기 한이 없구료. &lt;BR&gt;
&lt;BR&gt;
“선생님 제 시계와 바꿔찹시다. 제가 가진 것은 선생님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어차피 저는 시계가 없어질 것이지만, 제 일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시계가 아주 없어서는 안 되겠지요….” 하던 윤의사의 눈망울이 이제 여러분의 눈동자로 빛나고 있기 때문이오. …그러나 그 때보다 나는 더욱 마음 든든하오. 한 사람이 아니라 19명의 윤의사와 같은 동지를 떠나보내니 조국광복을 위하여 더 큰 일을 성취할 것으로 믿기 때문이오…. 여러분들의 젊음이 부럽소, 반드시 여러분의 훈련이 끝나기 전에 한번 서안에 가 볼 생각이오….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2)&lt;/span&gt;&lt;/font&gt;&lt;BR&gt;
&lt;BR&gt;
장준하 일행을 태운 미 군용기는 3시간을 날라 서안 비행장에 도착하여 트럭으로 광복군 제 2지대가 있는 두곡(杜曲)의 병영에 도착했다. 이 곳은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와 두목(杜牧)이 살았던 곳이다. 병영은 오래된 절간을 개조한 건물이었다. 180여 명의 선참 광복군 동지들이 밖으로 뛰어나와 열렬히 맞아주었다. &lt;BR&gt;
&lt;BR&gt;
대원들에게 미제군복과 군화, 모포 등이 지급되었다. 미군모에는 태극기의 휘장이 붙어있었다. 지난 14개월 동안 일본군복 - 중국군복 - 한국광복군복에 이어 이제 미군복을 입게된 것이다. 이날 밤 장준하는 피곤하면서도 오래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야곱의 돌베개가 이제 미군용 침대로 변한 것은 의미 있는 한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내게 잠을 곧 허락해 주지 않는 것도 어떤 절대자의 의사이냐? 나의 생각이 깊어질수록 밤은 밝아왔다. 뜬 눈으로 서안의 첫날을 밝힌 아침에, 맨 첫 햇살이 병영 안에 스며들 때 나는 서안의 태양을 두 팔 안에 안고 있었다. &lt;BR&gt;
&lt;BR&gt;
“조국의 4월 그믐을 이 순간에 똑같이 밝힌 이 태양아! 너 끓는 아시아의 태양에서 나는 젊음을 배운다!”&lt;BR&gt;
5월의 태양 아래 우리는 ‘오에스에스(OSS)’ 대원이 되기 위한 훈련에 들어갔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3)&lt;/span&gt;&lt;BR&gt;
&lt;BR&gt;
OSS는 두곡의 종남산 깊숙이 자리 잡은 종남사 옆에 예비 훈련장을 마련하고 있었다. 미군 소령 사전트를 책임자로 하여 영관ㆍ하사관 20여 명이 훈련을 맡았다. OSS 대원이 되기 위해서는 3개월 간의 특수훈련을 받아야 했다. 장준하 일행은 다음날부터 기초훈련에 들어갔다. 도강술ㆍ게릴라전법ㆍ낙하연습ㆍ특수은폐 및 엄폐법 등 특수활동에 필요한 강도 높은 훈련이 실시되었다. &lt;BR&gt;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lt;BR&gt;
1) 한시준, 'OSS와 한국독립운동', &amp;lt;한국독립운동사전&amp;gt;5, 598~599쪽, 독립기념관, 2004.&lt;BR&gt;
2) 김준엽, 앞의 책, 492쪽.&lt;BR&gt;
3) 장준하, 앞의 책, 225쪽.&lt;/span&gt;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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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7장] OSS대원에서 환국하기까지</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Tue, 18 Nov 2008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48회] 광복군 제 2지대에 편입되다</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28969</link>
			<description>김준엽의 견해는 장준하의 생각과 많이 달랐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임정의 내분을 우리 힘으로 해소시키려고 했던 것은 과대망상이었고, 민주주의를 목표로 하는 만큼 독립노선이나 정견은 서로 다를 수 있는 일이다. 독립당이나 민족혁명당, 무정부주의동맹, 민족해방동맹 등의 각 당파가 임시정부라는 울타리 안에 모여 독립운동을 함께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lt;BR&gt;
&lt;BR&gt;
독립운동자 전체가 모여 있는 대표기관이 바로 임시정부이고, 연로한 지도자들은 계속 지금과 같이 임정을 고수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며, 우리 젊은이들은 전선에 나가 왜적과의 혈전을 전개하여 승리를 거두기만 하면 된다고 확신하였다.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20)&lt;/span&gt;&lt;/font&gt;&lt;BR&gt;
&lt;BR&gt;
신익희 내무부장이 산하에 경위대를 창설한다는 명분 아래 사적으로 청년들을 빼내가면서 분란이 일어났다. 장준하와 편집진은 &amp;lt;등불&amp;gt; 호외에 신 내무부장을 비롯한 파벌을 일삼는 정당 대표들을 규탄하는 내용을 제작하였다.&lt;BR&gt;
&lt;BR&gt;
‘무서운 젊은이들’은 언제까지 임정에 눌러앉아 있을 수는 없다고 결의하고 이를 지도부에 건의하여 허락을 받았다. 중경에서 서북방으로 30리쯤 떨어진 교외의 토교(土橋)로 옮기기로 했다. 임정에 도착한지 20일 만의 일이다. 토교로 옮긴 이들은 한교(韓僑) 기독교청년회관에 들게 되었다. 비교적 깨끗한 건물이었다. 여기서 중경 임시정부 요인들을 초빙하여 혁명운동사 등 강의를 듣고, 장준하와 몇 동지들은 중경방송국의 초청을 받아 방송도 했다.&lt;BR&gt;
&lt;BR&gt;
3월 20일경 장준하는 김구 주석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중경에서 세계기독교선교회 총무 데커 박사가 종전 뒤에 ‘한국기독교재건’ 문제를 논의하고자 하는데, 자신은 고국을 떠난지 30여 년이 되고 국내사정을 모르는지라, 그래서 신학교 출신 장준하를 추천하니, 중경으로 와서 데커 씨를 만나보라는 내용이었다. &lt;BR&gt;
&lt;BR&gt;
중경으로 나오니 김규식 박사가 통역을 맡도록 이미 주선이 되어 있었고, 데커와 만날 때는 수 명의 외국인과 &amp;lt;타임&amp;gt;지의 기자도 동석하였다. 데커는 5월에 인도에서 열리는 ‘세계기독교연차대회’에 제출할 한국보고서를 준비해 줄 것을 요청했다. 장준하는 며칠 동안 이 보고서를 쓰고 김규식 박사가 번역하여 제출했다.&lt;BR&gt;
&lt;BR&gt;
&amp;lt;등불&amp;gt; 호외를 제작한 날, 대원 20여 명은 몽둥이를 들고 신익희 내무부장과 정당대표들을 규탄하고자 중경의 임정청사로 달려갔다. 그러나 소식을 들은 이들은 이미 피해버리고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이범석 장군이 토교를 찾아오고, 장준하는 광복군참모장 겸 제 2지대장을 맡고 있던 이범석 장군을 만났다. &lt;BR&gt;
&lt;BR&gt;
당시 광복군 제2지대는 서안에서 미군과 합작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위한 훈련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범석 장군의 국내진공계획은 장준하와 동지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었다. 임시정부는 이미 이 계획을 수립하고 미군 당국과 은밀하게 추진하면서 이범석에게 책임을 맡기고 있었다. &lt;BR&gt;
&lt;BR&gt;
이범석은 젊은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청산리 전투의 영웅이며, 중국의 유명한 마점산(馬占山) 장군의 참모로서 북만주에서 왜적을 무찌른, 말을 잘 타고 사격술이 절묘하다는 이야기를 임천에서부터 들었던 터였다. 이런 이범석 장군이 토교로 찾아와서 국내진공작전준비 상황을 설명하고,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단단한 각오가 되어 있는 동지들만 자원토록”요구했다. &lt;BR&gt;
&lt;BR&gt;
장준하와 김준엽은 가장 먼저 여기에 지원했다. 그리고 90일 간의 중경과 교토의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서안(西安)의 광복군 제2지대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lt;BR&gt;
20) 김준엽, 앞의 책, 490쪽.&lt;/span&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069918&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6장] 파촉령 넘어 중경 임시정부 도착</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Mon, 17 Nov 2008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47회] &lt;등불&gt; 속간하고 한국기독교실태보고서 작성</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28968</link>
			<description>지루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눌러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장준하는 임천에서 제 2호까지 발행했던 &amp;lt;등불&amp;gt;을 속간하기로 했다. 다행이 김구 주석에게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혼쾌이 허락하고 등사기까지 한 대 마련해 주었다. &lt;BR&gt;
&lt;BR&gt;
독립운동의 행동통일, 그리고 그의 이론화, 이렇게 2대 목표를 세워가지고 &amp;lt;등불&amp;gt;의 속간을 우선 백범 선생께 품의했다. 다행히 백범 선생은 즉석에서 이를 승낙하시고 잘 해보라는 격려의 말씀과 함께 며칠 후에는 등사판까지 하나 사 주셨다. 우리의 식은 가슴들은 다소나마 온기를 얻을 수가 있었고 그 중에도 나의 기쁨은 이제까지 손으로 써서 만들었던 잡지가 일약 등사로 하게 된 점이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나와 김준엽 동지는 곧 편집계획을 세워 불철주야로 원고를 쓰고 수집하여 불과 수삼 일 사이에 꽤 두꺼운 부피의 &amp;lt;등불&amp;gt; 제3호를 내놓았다. 내용은 우리 젊은이들이 중심이 되어 선배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글이 대부분이었고 몇 분 선배들의 글도 받아 실었다. 그 밖에 물론 교양물, 문예물 등도 적당히 안배하여 종합잡지로서의 체제를 잃지 않았으며 150부를 간행하여 임정과 광복군 산하의 제 기관 그리고 중경에 있는 우리 교포들에게 배포하였다. &lt;BR&gt;
&lt;BR&gt;
처음 2부로 시작된 우리 잡지가 일약 150부로 발전된 것도 대견한 일이었지만 그보다 의외로 그 잡지를 읽은 분들의 반향도 커서 백범 선생을 비롯한 우리의 취지에 동조하는 제 선배들의 찬사와 그 밖의 다른 분들의 비난 빈축이 동시에 비등하여 나의 잡지에 대한 의욕을 더욱 돋구어 주었다. &lt;BR&gt;
&lt;BR&gt;
그래 우리는 이곳에 있는 3개월 동안 3, 4, 5호의 3집을 계속해서 내고 8절지 1면 짜리 호외까지 한번 내었다. 그 호외를 내게 된 것은 그때 한창 어중이떠중이 정당들이 난입하여 지도자들이 각기 1인 1당으로 독립운동의 일관성 등을 잃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또 하나의 정당이 그 창당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땐스파티를 연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맹성을 촉구하기 위한 것으로 일종의 경고문과 비슷한 것이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9)&lt;/span&gt;&lt;BR&gt;
&lt;BR&gt;
장준하의 잡지에 대한 집념은 대단했다. 이를 통해 임시정부의 행동통일과 이론화를 모색하고, 정신무장과 교양 그리고 독립운동 진영 내부의 문제점을 제기하여 새로운 연대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lt;BR&gt;
장준하는 중경을 떠나 서안의 광복군 제 2지대에 있을 때 또 새로운 잡지 &amp;lt;제단(祭壇)&amp;gt;을 발행했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쓰겠다.&lt;BR&gt;
&lt;BR&gt;
장준하의 연이의 ‘폭탄발언’은 젊은 혈기와 의기, 일군을 탈출하여 천신만고 끝에 임시정부를 찾아온 자부심, 특히 장준하의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올곧은 성품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터였다. 임시정부의 상황은 여러 부문에서 젊은 애국자들에게 실망을 보여준 것도 사실이었다. 이들은 임시정부 요인들을 애국의 화신으로 이미지화하고 있었다. 조국해방을 위하여 발분망식,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lt;BR&gt;
&lt;BR&gt;
당시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요인들은 대부분 길게는 40여 년, 짧게는 20여 년 이상을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애국자들이었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출범한 이래 또는 그 이후에 참여한 요인들이 걸어온 길은 하나같이 힘겨운 노정(路程)이었다. 임시정부만 해도 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에 쫓기면서 진강 - 광주 - 유주 - 기강에 이어 중경에 이르러서야 어느 정도 ‘안정된’ 자리를 잡게 되었다. &lt;BR&gt;
&lt;BR&gt;
1937년 중ㆍ일전쟁이 일어나면서부터는 중국정부를 따라 불가피한 피난성 이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중에도 1941년 12월 일제의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정부를 설득하여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일본과 나치독일에 선전포고도 서슴지 않았다. 의열단장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하여 좌파세력, 아나키즘 인사들까지 통합하여 연합정부를 구성했다.&lt;BR&gt;
&lt;BR&gt;
김구 주석은 1943년 12월 1일 카이로선언에 참석하는 장개석을 만나 조선의 독립을 간곡하게 요구하여 이를 관철하고 국제열강의 임시정부 승인을 위해 외교노력을 기울였다. 하나같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제의 억압이 강화되면서 국내의 독립기금은 끊어진지 이미 오래이고,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lt;BR&gt;
&lt;BR&gt;
요인들은 하루 두 끼의 식사와 중국 청복 한 벌씩으로 버티었다. 이념과 노선이 다른 요인들이 한 지붕에 모이다보니 파벌이 생기고 핵분열을 일으켰다. 이런 외형적인 모습이 열혈 청년들에게는 무기력하고 파쟁이나 일삼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임시정부 27년사’는 결코 폄훼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lt;BR&gt;
19) 장준하, '나와잡지' 上, &amp;lt;사상계&amp;gt;, 1963년 4월호, 285쪽.&lt;/span&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064549&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6장] 파촉령 넘어 중경 임시정부 도착</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Sun, 16 Nov 2008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46회] “임정 청사에 폭탄 던지고 싶다”</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28967</link>
			<description>각 정당과 단체에서 경쟁적으로 신참 광복군들을 초청하여 환영회를 베풀겠다고 하고, 정부 각원들의 교양강좌를 듣게 되면 자당의 선전이거나 다른 정파에 대한 비난이 적지 않았다. &lt;BR&gt;
&lt;BR&gt;
이같은 임정의 파쟁과 분열상을 지켜보면서 차츰 실망의 싹이 터올랐다. 정파 인사들 중에는 청년들의 개별 포섭공작을 하는 등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정당의 초청환영회에는 일체 나가지 않기로 결정을 보았다. 당시 중경에는 350여 명의 한인이 살고 있었다. 임시정부 내무부 주관으로 매월 1회씩 교포들을 모아 정세를 보고하고 단합대회를 열었다.&lt;BR&gt;
&lt;BR&gt;
장준하 일행은 임시정부에 도착한 지 2주일쯤 되어 여기에서 초청을 받았다. 전 국무위원과 100여 명의 교포가 참석하여 국내소식을 듣는 자리였다. 장준하가 대표로 국내실정을 보고하기로 했다. 장준하는 일제의 폭정에 시달리는 조국의 실상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장준하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임시정부의 문제점을 국무위원과 교포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고발하기로 작정했다. 국내정세의 보고로 분위기가 숙연 ㆍ 처연해지자, 임시정부 내부의 문제점을 거론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요즘 우리는 이곳을 하루빨리 떠나자고 말하고 있다. 나도 떠나고 싶다. 오히려 오지 않고 여러분을 계속 존경할 수 있었다면 더 행복했을지 모를 일이다. 가능하다면 이곳을 떠나 다시 일군에 들어가고 싶다. 일군에 가면 항공대에 들어가 중경폭격을 자원, 이 임정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다.&lt;BR&gt;
&lt;BR&gt;
선생님들은 왜놈들에게 받은 설움을 다 잊으셨는가, 그 설욕의 뜻이 살아 있다면 어떻게 임정이 이렇게 분열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이곳을 찾아온 것은 조국을 위한 죽음의 길을 선택하러 온 것이지, 결코 여러분의 이용물이 되고자 이를 악물고 헤매여 온 것은 아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7)&lt;/span&gt;&lt;BR&gt;
&lt;BR&gt;
가히 폭탄선언이었다. 새파란 청년이 백전노장들 앞에서 다시 일군에 들어가 임정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다고 한 발언은, 감히 누구라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말이었다. 회의장은 순식간에 혼돈에 빠져들었다. 교포들이 웅성거렸다. 잔치는 파장이 되고, 이 발언으로 긴급 국무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얼마 뒤 신익희 내무부장이 장준하를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lt;BR&gt;
&lt;BR&gt;
장준하는 국무회의실로 불려갔다. 그것은 기다리던 참이었다. 김구 주석이 장준하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장준하는 흥분하지 않고 그동안 보고 느낀 점을 찬찬히 설명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10여 일 동안 우리들 눈에 비친 임정은 결코 우리가 사모하던 임정과 다른 것임을 알게되었다. 잘못 본 것이라면 용서를 바란다. 처음 탈출해서 긴 행군을 하면서 임정은 모두 일치단결된 힘으로 잃은 나라 찾는 데만 목숨바쳐 일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는 환상이 아니었나 회의를 품게 되었다. 저희가 잘못 본 것인가? &lt;BR&gt;
&lt;BR&gt;
광복의 날이 와서 귀국하게 되면 그 때도 임정의 타성이 옮아갈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임정이 왜 필요한가? 진정 나라사랑의 일념이라면 있어서는 안될 것이 있는 이 실정은 무엇인가? 그래도 임정을 목숨처럼 사랑하는 뜻에서 한 발언에 벌을 주면 달게 받겠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8)&lt;/span&gt;&lt;BR&gt;
&lt;BR&gt;
다시 한번 폭탄선언이었다. 이후 임정에서는 장준하 등 학병출신들을 ‘무서운 젊은이들’ 로 통하게 되어 함부로 대하거나 만만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임정의 분열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lt;BR&gt;
17) 앞의 책, 208~209쪽. &lt;BR&gt;
18) 앞의 책, 210~211쪽. &lt;/span&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063556&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6장] 파촉령 넘어 중경 임시정부 도착</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Sat, 15 Nov 2008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45회] 임정 요인들의 파벌싸움에 실망</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28966</link>
			<description>이날 저녁 환영회가 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렸다. 이에 앞서 대원들은 인근 목욕탕으로 안내되어 여러 달 동안의 묵은 때를 씻고 광복군의 새 군복이 지급되어 새옷으로 갈아입었다. 이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된 것이다. &lt;BR&gt;
&lt;BR&gt;
이날 저녁의 환영만찬은 청사 건물의 식당에 마련되었다. 김구 주석을 비롯하여 임시정부 각료와 직원 그리고 광복군총사령부 간부들까지 한 자리에 모였다. 중국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고 있는 임시정부의 처지로서는 궁색하기 그지없는 살림이었다. 따라서 이날 만찬에도 간단한 안주와 배갈 술 몇 병이 전부였다. 하지만 장준하는 이 세상의 그 어떤 파티 음식보다 더 풍요로운 잔치상으로 인식하였다.&lt;BR&gt;
&lt;BR&gt;
신익희 내무부장의 환영사에 이어 김구 주석의 격려사가 있었다. 주석의 격려사는 낮에 있었던 짧은 환영사에 비해 톤이 높고 격렬했다. 다음은 요지.&lt;BR&gt;
&lt;BR&gt;
일제의 폭정으로 모두 일본인이 된 줄로 염려했는데 그것이 나의 기우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용감하게 탈출하여 이곳까지 찾아와 주어 고맙다. 숭엄한 조국의 혼이 살아있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나. 지금 일인들은 한국 사람이 일본인이 되고자 원할 뿐 아니라, 한국사람이 한국말조차 모른다고 선전하지만, 한국의 혼은 결코 죽지 않는 다는 것을 여러분이 보여주었다. 외국인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떳떳할 수 있는가 생각하니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이 밤중에 여러분을 이끌고 중경 거리를 시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lt;BR&gt;
&lt;BR&gt;
탈출학병을 대표해 장준하가 답사에 나섰다. 다음은 요지.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저희들은 왜놈 통치 아래서 태어났고 교육을 받고 자라 우리나라 국기조차 본 일이 없었다. 어려서 일장기를 보았지만 무심하였고, 철이 들면서 저것은 일본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나라 기가 있을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고, 그때부터 모든 것은 의혹의 대상이 되었고 저희를 괴롭혔다. &lt;BR&gt;
&lt;BR&gt;
우리나라의 국기를 보고 싶었다. 일군에 끌려나오게 되고 고국에 남긴 가족이 폭정에 시달릴 생각을 할 때마다 우리들 자신을 다시 생각해 왔다. 누구를 위해 이 고생을 하며 왜 왜놈상관에게 경례를 붙여야 하는지, 분노가 용암으로 화산구를 찾기 시작했다. 오늘 오후 임정 청사에 높이 휘날리는 태극기를 바라보고 울음을 삼켜가며 눌렀던 감격, 그것 때문에 6천리를 걸어왔다. &lt;BR&gt;
&lt;BR&gt;
그 태극기에 아무리 경례를 하여도 손이 내려지지를 않고 영원히 계속하고 싶었다. 그것이 그토록 고귀한 것인가를 지금도 생각한다. 아까 총사령관께서 사열을 받으실 때, 아! 우리도 우리의 상관 앞에 참다운 사열을 받는구나, 꿈만 같았다. 주석 선생님 앞에 설 때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진정한 조국의 이미지와 우리 지휘관과 우리가 몸바칠 곳을 찾았다는 기쁨에 몸을 떨었다. &lt;BR&gt;
&lt;BR&gt;
이제, 저희들은 아무 여한이 없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라면 그리고 선배들의 노고에 다소나마 보답이 된다면 무엇이든, 어디든 가리지 않고, 하라는 대로 할 각오이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5)&lt;/span&gt;&lt;BR&gt;
&lt;BR&gt;
장준하의 격정적인 답사가 이어지면서 김주석과 각료들이 소리 없이 울고 있다가 마침내 주석의 ‘흑!’ 하고 지금까지 참았던 울음의 폭발을 계기로 장내는 울음바다로 변해버렸다. 장준하도 이 울음의 물결에 답사의 끝을 맺지 못한 채 그냥 자리에 앉고 말았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고 눈물바다는 처절한 통곡이 되어 마치 초상집처럼 흘러 넘쳤다. &lt;BR&gt;
&lt;BR&gt;
음식이 들어왔지만 누구 한 사람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김주석이, 너무 지쳤을 테니 다들 돌아가 쉬자면서 먼저 일어서고, 모두들 따라서 각자의 처소로 돌아갔다. 임시정부의 첫날이 이렇게 저물었다. &lt;BR&gt;
&lt;BR&gt;
이튿날부터 임시정부 청사에서 생활이 시작되었다. 꿈만 같았다. 죽지 않고 살아서 여기까지 온 것이 꿈만 같았다. 날이 밝자 누군가 종을 쳤다. 아침 식사 시간을 알리는 타종이었다. 여기저기서 임정 요인들이 걸어 나왔다. 중경시내에 가족이 있는 사람은 예외지만 50여 명의 요인과 직원들이 청사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이제 식구가 100여 명으로 늘어났다.&lt;BR&gt;
&lt;BR&gt;
중경시내 연화지(蓮花池)에 자리한 이 청사는 장준하 일행이 도착하기 4개월 전에 월세로 얻은 것이다. 중국정부의 지원으로 그나마 청사다운 청사를 갖게 되었다. 요인들은 청사의 흙방에 침대 하나씩을 놓고 지내고 있었다. &lt;BR&gt;
&lt;BR&gt;
이날 오후 광복군총사령부에서 초청 환영회가 열렸다. 청사에서 꽤 떨어진 곳에 광복군사령부가 있었고, 준비된 음식도 어제와는 달리 비교적 여유있게 마련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환영만찬장은 금새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분위기가 감격과 감동에 휩싸이면서 말할 수 없는 설움이 북받쳐 올라 선후배 동지들은 만나는 순간부터 서로 껴안고 통곡하였다. &lt;BR&gt;
&lt;BR&gt;
며칠이 지나면서 임시정부의 속사정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임정은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혁명당, 한국무정부주의자연맹, 한국청년당, 천도교, 무소속까지 7개 정파의 연립정부적 성격으로 구성되었다. &lt;font color=&quot;#cc9900&quot;&gt;“셋집을 얻어 정부청사를 쓰고 있는 형편에 그 파는 의자보다도 많았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6)&lt;/span&gt;라는 장준하의 지적이 아니라도, 당시 임정의 구조는 ‘정파연립’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다. &lt;BR&gt;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lt;BR&gt;
15) 앞의 책, 200~201쪽. &lt;BR&gt;
16) 앞의 책, 207쪽. &lt;/span&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058125&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6장] 파촉령 넘어 중경 임시정부 도착</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Fri, 14 Nov 2008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44회] 꿈에 그리던 임시정부</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28963</link>
			<description>1945년 1월 31일 하오, 학병을 탈출하여 7개월의 천신만고 끝에 중경에 도착하여 임시정부 청사 앞에 도열한 장준하와 동지 50여 명은 누구의 지휘구령도 없이 2열 횡대로 열을 맞춰섰다. 일본 군대에서 배웠던 제식훈련이 꿈에 그리던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바뀌는 순간에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lt;BR&gt;
&lt;BR&gt;
임시정부 27년의 역사에서 이번처럼 엘리트 청년 50여 명이 한꺼번에 청사에 찾아 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경사도 보통 경사가 아니었다. 6천리 험한 길을 뚫고 여기까지 온 애국 청년들이나, 산전수전ㆍ풍찬노숙을 해가면서 임시정부를 지키고 일제와 힘겹게 싸워온 노독립운동가들이나 감격과 감동이 다르지 않았다. 이청천 광복군 사령관이 이들이 도열해 있는 청사의 마당으로 내려왔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마침 임정청사의 2층 한 방문이 열리고 누런 군복에 역시 누런 색깔의 외투차림으로 50여 세가 되어 보이는 위엄이 풍기는 한 분을 뫼신 진 교관과 그 뒤로는 중국 군복들을 입고 5~6명의 장정들이 따라 나오고 있다.&lt;BR&gt;
우리는 부동자세를 취하며, 우리의 지도자를 만나본다는 하나의 강렬한 집념 속에 숨을 죽였다. &lt;BR&gt;
뒤따르는 몇 명의 군인들을 대동하고 우리 앞에 위엄 있게 걸어오는 분이 바로 이청천 장군이었다. &lt;BR&gt;
임천의 중앙군관학교 분교에서 이미 들어온 바로 그 인물이다. 광복군 총사령관의 모습이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9)&lt;/span&gt;&lt;BR&gt;
&lt;BR&gt;
한국 청년들에게, 더욱이 민족의식이 살아 있는 청년들에게 김구나 이청천은 민족의 영웅으로 비쳐졌다. 장준하도 일본유학 시절이나 학병, 임천 군관학교 때에 익히 들어온 이름이었다. 마음 깊이 흠모하면서 6천리 장정을 거쳐 여기까지 온 것도 이분들을 믿고 따르려는 일념이었다. &lt;BR&gt;
&lt;BR&gt;
이 사령관은 일군을 탈출하여 임정을 찾아온 청년들을 격려하면서 “앞으로 나와 함께 이곳에 여러분들이 있을 것이니까, 차차 많은 얘기를 하게 될 것이고, 오늘은 피로한 여러분에게 긴 얘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곧 우리 정부의 주석이신 김구 선생께서 나오실 것입니다.”고 짧은 인사말을 했다. &lt;BR&gt;
&lt;BR&gt;
이 사령관이 말을 맺자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이 좌우에 각료들을 대동하고 청년들 앞으로 다가왔다.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엷은 미소를 담은 선생의 인상은, 검은 안경 속에 정중한 성격을 풍기는 아주 인자한 인상이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0)&lt;/span&gt;라고 장준하는 첫 인상을 적었다. &lt;BR&gt;
&lt;BR&gt;
김구 주석은 좌우에 선 분들을 청년들에게 소개하였다. 김규식ㆍ이시영ㆍ조소앙ㆍ최동오ㆍ신익희ㆍ엄항섭ㆍ차리석ㆍ조완구ㆍ황학수ㆍ유림ㆍ유동열 선생을 비롯하여 임시정부 요인들이었다. 하나같이 조국독립을 위하여 수십 년씩 싸워온 백전노장들이다.&lt;BR&gt;
&lt;BR&gt;
근엄한 모습이, 잠시의 침묵을 썰물처럼 걷어내고,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두루 살피고 있었다. 김구 선생의 말씀은 의외로 간단하였다. 우리들의 노고에 대한 치하였다. 쩌렁쩌렁 심금을 울리는 훈시라면 가슴이 좀 후련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들 가슴을 좀 갈기갈기 찢어놓던가 또는 파헤쳐 놓는 격려사라면 또 모른다. 김구 선생에 대한, 아니 민족의 지도자에 대한 기대는, 인색하게 충족되었다.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1)&lt;/span&gt;&lt;BR&gt;
&lt;BR&gt;
장준하는 김구 주석과 임정 요인들을 처음 대면하고 다소 실망했던 것 같다. 여러 차례 사투를 벌이며 여기까지 찾아온 열혈청년들에게 임시정부 청사의 초라한 모습이나, 사자후를 기대했던 주석의 말씀, 그리고 도열한 임정 국무위원들의 초췌한 모습에서 실망했을 지 모른다. 하지만 장준하는 “젊은 청년의 기대와, 해외 망명생활 30년의 풍상을 겪은 지도자의 여유는 일치할 수 없는 것이었다.”라고 자서전에 남겼다. 김준엽은 이날 김구에 대한 인상을 좀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그간 소식을 듣고 기다리던 여러 동지들이 이와 같이 씩씩한 모습으로 당도했으니 무한히 반갑소이다. 더구나 국내로부터 갓 나온 여러분을 눈앞에 대하고 보니 마치 내가 직접 고국 산천에 돌아온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북받쳐오르는 감회를 억누르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많은 말이 소용없습니다. 우선 좀 쉬도록 하고, 오늘 저녁 정부에서 동지들에게 베푸는 환영회에서 또 만납시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2)&lt;/span&gt;&lt;BR&gt;
&lt;BR&gt;
또 다른 증언이 있다. 장준하와 평양 제 42부대를 탈출하여 임시정부까지 함께해 온 윤경빈의 증언이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제가 중경에 도착한 것이 1944년 12월 말경입니다. 그 때 학병 출신 동지 33인이 도착하여 임정 청사 앞에 가서 정렬하였지요. 임정 요인이 모두 정문에 나오셔서 저희들을 환영해 주었고, 특히 저희가 거기서 감명 깊게 본 것은 김구 선생이 환영사를 하다 마시고 도중에 울음이 앞서 환영사가 끊겨버린 것이었어요. 너무 감격이 앞서서였죠. &lt;BR&gt;
&lt;BR&gt;
김구 선생께서 “내가 일평생 독립운동을 하는데 독립운동사상 이렇게 많은 우수분자, 즉 엘리트가 한꺼번에 우리 독립운동 진영을 찾아준 것이 처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감격스럽고, 또 하나는 이미 국내 젊은이들이 일본놈들의 교육을 계속 받아왔기 때문에 민족혼이 사라지지 않았나 걱정했으나 오늘 이렇게 여러분이 온 것을 보니 안도할 수 있다.”는 요지의 환영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도중에 말씀하시다 그만 결론을 못내리고 그치고 마셨는데….&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3)&lt;/span&gt;&lt;BR&gt;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lt;BR&gt;
9) 앞의 책, 193쪽. &lt;BR&gt;
10) 앞의 글, 195쪽.&lt;BR&gt;
11) 앞의 책, 95쪽. &lt;BR&gt;
12) 김준엽, &amp;lt;장정2&amp;gt;, 378쪽, 나남, 1993. &lt;BR&gt;
13) 이현희, &amp;lt;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amp;gt;, 238~239쪽,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lt;/span&gt;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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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6장] 파촉령 넘어 중경 임시정부 도착</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Thu, 13 Nov 2008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43회] 아아, 저기 중경이 보인다</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28960</link>
			<description>파동에서 중경까지는 일주일이 넘는 뱃길이었다. &lt;BR&gt;
중경서 파동으로 내려올 때는 3일이 걸리는데 올라갈 때는 곱절 이상이 걸린다고 했다. 양자강의 거센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승선한 지 8일째 되는 날 오후 3시경, 배는 중경을 바라 볼 수 있는 지점에 이르렀다.&lt;BR&gt;
&lt;BR&gt;
“아아, 중경이 보인다.”&lt;BR&gt;
동지들은 서로 얼싸안고 감격을 안에서 새기느라고 흑흑 느껴대었다. 꼭 횡단 출발 7개월 만에 우리의 목적지가 지금 조금씩 뚜렷하게 우리들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lt;BR&gt;
나는 마음 속으로 애국가를 불렀다. 입 밖으로 새어나왔던 모양이다. 누군가 우리 동지 한 사람이 나직이 입속으로 따라 불렀다. &lt;BR&gt;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lt;BR&gt;
&lt;BR&gt;
신념이란 우리 인간이 가질 수 있고 구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생명력이란 것을, 나는 체험을 통해 확신했다. 나의 신념은 앞으로 계속 날 지배하고, 또 내가 속해 있는 단체를 지배할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내가 사랑하는 ‘내 나라’도 나의 신념을 필요로 할 것이다.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7)&lt;/span&gt;&lt;BR&gt;
&lt;BR&gt;
“혹시 저것이….”&lt;BR&gt;
하는 반문 끝에 내 눈에 들어와 움직이는 것은 휘날리는 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피가 뛰었다. 혈관이 좁아졌다. &lt;BR&gt;
우리는 걸음을 재촉해서 다가갔다.&lt;BR&gt;
그러나 그것은 5층 건물이 아니고 층암 위에 차례로 지어 올라온 단층건물이 겉모양으로는 웅장한 5층 건물로 보인 것 뿐이었다.&lt;BR&gt;
&lt;BR&gt;
그렇다. 그것은 태극기였다. &lt;BR&gt;
나의 온몸은 마비되는 듯이 굳어졌는데, 몇몇 동지들은 태극기를 향해서 엄숙히 거수경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임정 건물위에 휘날리는 태극기가 나에게는 점점 확대되어 보였다. 휘날리는 기폭마다 나의 뜨거운 숨결이 휩싸여 안겼다. 그리고 태극기의 기폭은 임정 청사가 아닌 조국의 강토를 뒤덮고 있었다.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8)&lt;/span&gt;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&lt;BR&gt;
주석 &lt;BR&gt;
7) 앞의 책, 189쪽.&lt;BR&gt;
8) 앞의 책, 191쪽. &lt;/span&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bloggernews.media.daum.net/static/recombox1.swf?nid=2047693&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6장] 파촉령 넘어 중경 임시정부 도착</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Wed, 12 Nov 2008 23:00:00 GMT</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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