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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nnel>
		<title>김삼웅의 후광(後廣) 김대중 평전</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link>
		<description>&lt;대한매일신보(서울신문)&gt;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4년여동안 독립기념관장에 재직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 제주 4.3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국회 추천),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친일파 인명사전 편찬부원장 등을 맡아 바른 역사 찾기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Wed, 04 Nov 2009 00:30:56 GMT</pubDate>
		<item>
			<title>[126회] “협력이냐 죽음이냐” 저승사자 이학봉</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302095</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광주에서 피의 살육전이 전개되는 것을 알 리 없는 김대중은 연일 혹독한 취조와 옆방에서 고문당하는 동지들의 절규를 들으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나는 내가 연행된 다음 날부터 광주에서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lt;BR&gt;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 온 뒤로는 매일같이 잠을 못자고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들었다. 몇 번이나 대답을 거부하기도 하고, 무엇을 들어도 침묵으로 싸웠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할 수 없이 대답하면 똑같은 것을 묻고, 또 그것을 반복했다. 대답할 때마다 인간이기에 조금씩 다른 표현이 나올 수 있는 데도 이번에는 그것을 추궁했다. 질문하는 상대는 바뀌었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나 혼자 뿐이기 때문에 이것은 고문보다 더 괴로운 것이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0)&lt;/span&gt;&lt;BR&gt;
&lt;BR&gt;
김대중의 증언은 이어진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내가 광주사건을 알게 된 것은 사건발생 42일 후인 6월 28일이었다. &lt;BR&gt;
물론 그 사이 취조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날 일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나에게 합동수사본부의 실력자였던 남자가 왔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lt;BR&gt;
&lt;BR&gt;
“당신이 우리에게 협력해 준다면, 대통령직 이외의 어떤 직책이라도 제공하겠다. 만약 협조하지 않겠다면 우리는 당신을 살려 둘 수 없다. 재판은 어디까지나 형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lt;BR&gt;
&lt;BR&gt;
나는 여기서 죽고 싶지 않다. 게다가 이미 50일 가까이 끌려와 내내 취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의식도 희미해져 있었다. 당연히 몸도 마음도 완전히 녹초가 된 상태였다. 뭐라 대답해야 좋을 지 몰라 가만히 있자 그는 “갑작스런 얘기라 결정할 수 없는 것 같으니 사흘 후에 다시 오겠다”고 했다. 그는 2월에 중앙청 앞 ‘안가’에서 만난 남자였다. (이학봉 - 저자) 그의 태도는 정중했지만 태도는 단호했다. &lt;BR&gt;
&lt;BR&gt;
그가 돌아간 후 직원이 신문을 갖고 왔다. &lt;BR&gt;
그 신문을 읽고 비로소 광주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았다. 시민들이 민주화와 나의 석방을 요구하며 일어선 일, 열흘 간의 항쟁 결과 계엄군이 광주시를 제압한 일, 희생된 시민 중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의식이 멀어졌다. 기절을 했던 것이다. 50일 간의 가혹한 취조로 고혈압에 시달렸는데 사상자 수를 알고 갑자기 혈압이 올라간 것이다. 나는 그날 의사의 치료를 받았다. &lt;BR&gt;
&lt;BR&gt;
그날 밤, 나는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죽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 생각했다. &lt;BR&gt;
“오스트리아 같은 곳에 가서 조용히 가족과 살까?”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온 한 사람으로서 나를 열렬히 지지해 준 젊은 학생들을 배신할 수는 없었다. &lt;BR&gt;
&lt;BR&gt;
광주에서 죽은 사람들, 김대중 석방을 외치며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협력할 수는 없었다. 나를 그토록 신뢰하고 존경하는 가족들의 자긍심을 배신할 수 없었다. &lt;BR&gt;
&lt;BR&gt;
“역시 죽어야 한다. 여기서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라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죽을 결심이 선 것이다. &lt;BR&gt;
&lt;BR&gt;
사흘 후에 그가 왔다. 나는 협력할 수 없으며, 죽음이 곧 삶이라는 마음을 굳혔다는 얘기를 했다. 그는 무척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설득하려 했지만, 내 결심이 확고해서 들으려 하지 않자 또 오겠다며 나가 버렸다. &lt;BR&gt;
&lt;BR&gt;
그리고 이틀 후 그가 왔다. 나는 이미 각오를 했기 때문에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나는 그의 회유를 단호히 거절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1)&lt;/span&gt;&lt;BR&gt;
&lt;BR&gt;
삶과 죽음이 선택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서면 사람들은 대부분 사는 길을 택한다. &lt;BR&gt;
하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마천은 사약이냐 남근 제거냐의 갈림길에서 “비사자난야(非死者難也) 처사지난(處事者難)” 즉 “죽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죽음에 처하는 것이 보다 어렵다.”라고 &amp;lt;사기&amp;gt;에서 썼다. &lt;BR&gt;
&lt;BR&gt;
전봉준은 일본군에게 붙잡혔을 때 협력하면 일본에 망명시켜 뒷날을 도모토록 해주겠다고 회유하는 것을 뿌리쳤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일제가 ‘오해’에서 일을 저질렀다고 변명하면 형을 면해주겠다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래서 이들은 형장에 섰고, 그 대신 영원한 생을 얻었다. &lt;BR&gt;
&lt;BR&gt;
전봉준과 안중근을 좋아하고 존경했던 김대중도 사는 길 대신 죽음을 택했다. &lt;BR&gt;
도쿄 납치의 토막살해와 수장의 위기에서 이미 죽었던 몸, 이제껏 살아있었던 것은 삶의 ‘여벌’이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lt;BR&gt;
&lt;BR&gt;
전두환의 심복 이학봉이 말한대로 ‘형식에 불과’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lt;BR&gt;
이 해 7월 3일, 계엄사령부는 “광주사태와 관련, 연행된 사람 가운데 1,825명을 훈방하고, 죄질이 무거운 375명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조사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lt;BR&gt;
&lt;BR&gt;
그리고 7월 4일에는 “김대중을 비롯한 37명을 우선 내란음모ㆍ반공법ㆍ외환관리법ㆍ계엄포고령 위반 등 혐의로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 구속송치할 방침이다. 김대중과 추종분자 일당은 국민연합을 주축으로 하고 복학생을 행동대원으로 내세워 학생선동 -&amp;gt; 대중규합 -&amp;gt; 민중봉기 -&amp;gt; 정부 전복 -&amp;gt;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권 수립 등을 목표로 비합법적 투쟁을 추구, 마침내 내란선동과 음모에까지 이르게 됐다”고 발표했다. &lt;BR&gt;
&lt;BR&gt;
이같은 내용은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김대중은 ‘내란수괴’로 이미지화되었다. &lt;BR&gt;
TV에서는 엉터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저녁 황금시간대에 방영했다. 김대중은 영락없이 내란을 기도한 ‘수괴’가 되고, ‘북한공산집단의 앞잡이 한민통’을 조직한 공산주의자로 포장되었다. &lt;BR&gt;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lt;BR&gt;
10) &amp;lt;김대중자서전(2)&amp;gt;, 122~123쪽.&lt;BR&gt;
11) 앞의 책, 130~131쪽.&lt;/span&gt;&lt;BR&gt;
&lt;/font&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4662177&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17장] 고난의 세월, 군사재판 사형선고</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Tue, 03 Nov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125회] ‘광주’배후로 뒤집어 씌워</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302088</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그래서 동원한 것이 고문으로 사건조작이었다. &lt;BR&gt;
동교동 측근들에게는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혹독한 고문을 자행하고, 옆방에서 김대중이 이를 듣도록 했다.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6월 15일, 수사관들은 김씨(김상현 - 필자)와 정씨(정동년 - 필자)의 진술서를 김대중씨 앞에 내놓았다. 그리고 김씨(김대중 - 필자)의 옷을 벗기고 군복으로 갈아입혔다. 지하실로 연행된 뒤 한 달 가까이 당해보지 못한 수모가 시작됐다.&lt;BR&gt;
&lt;BR&gt;
다른 사람들처럼 매질은 당하지 않았지만 욕설과 폭언으로 김씨의 ‘기(氣)’를 꺾으려 했다. 전 장군은 바로 위층 안전국장실에서 TV모니터를 통해 이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lt;BR&gt;
&lt;BR&gt;
“당신이 부인하면 다른 사람들이 더 고통을 받는다”는 얘기를 들으며 김씨도 더 이상 버티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9)&lt;/span&gt;&lt;BR&gt;
&lt;BR&gt;
신군부가 김대중을 체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5월 18일 첫날에는 광주의 학생들이, 다음날부터는 시민들이 합세하는 봉기가 시작되었다. &lt;BR&gt;
&lt;BR&gt;
가로수의 신록이 여느 해처럼 싱그러운 1980년 5월 18일 아침, 전남대생들은 교내로 들어가려다 총을 든 군인들에 의해 제지를 당하자 투석으로 맞섰다. 신군부는 공수부대의 핵심인 7공수여단의 33대대와 35대대를 광주에 파견하고 그 중 33대대의 주력이 전남대를 장악했다. &lt;BR&gt;
&lt;BR&gt;
당시 어느 외국 언론이 표현한대로 ‘20세기의 마지막 비극’인 광주의 학살과 민중항쟁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이 확대되고 계엄포고 제10호로 휴교령이 내려졌다. 전남대생들은 만일의 휴교조치에 대비하여 학교 앞에 모이기로 한 사전 합의로 휴교령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나오다가 계엄군과 대치하게 된 것이다.&lt;BR&gt;
&lt;BR&gt;
학교 앞에서 계엄군에 쫓긴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연좌시위를 벌였고, 경찰이 최루탄과 경찰봉으로 해산시키려 하자 다시 투석전으로 맞섰다. 신군부는 경찰력으로 진압이 실패되자 오후 3시경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착검한 M16에 방망이로 무장한 공수대원들은 남녀학생들을 가리지 않고 붙잡아 마구 난타했다. 격분한 학생들이 보도블럭을 깨서 집어던졌다. &lt;BR&gt;
&lt;BR&gt;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공수대원들은 학생들을 군화발로 짓밟거나, 반항하는 경우 M16에 꽂은 대검으로 등과 허벅지를 사정없이 찔러 그었다. 피 흘리는 학생들은 굴비처럼 엮어져 군 트럭에 실려갔으며, 통금이 밤 9시로 단축되자 귀가하는 학생ㆍ청년들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패서 연행하고 만류하는 시민들까지 개머리판으로 마구 때렸다. &lt;BR&gt;
&lt;BR&gt;
다음날인 19일 시민들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lt;BR&gt;
금남로 일대에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공수대원들은 난폭하게 시민들을 해산시키려 들었다. 공수대원들의 잔인성을 목격한 군중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마침내 총궐기에 나섰다. &lt;BR&gt;
&lt;BR&gt;
계엄군은 시민ㆍ학생들을 닥치는대로 폭행하고 저항하는 사람은 칼로 옆구리를 찌르거나 등을 X자로 그어대는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가톨릭센터ㆍ공용터미널 등 광주시내 곳곳에서 시민들을 살상했다. 공수대원들의 무차별 만행에 시민들은 자신들을 방어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택시 운전사들이 차를 몰아 도청광장으로 돌진하다가 무참히 살해되는 등 계엄군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lt;BR&gt;
&lt;BR&gt;
시민들은 인근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 예비군용 총기ㆍ실탄ㆍ수류탄을 빼앗아 무장하여 계엄군과 대치했다. 시민군에 쫓겨 계엄군이 외각으로 퇴각하면서 마구 쏘아댄 총격으로 많은 시민들이 살상되었다. &lt;BR&gt;
&lt;BR&gt;
학생들은 시내 치안을 담당하면서 도청을 임시본부로 삼아 시민 궐기대회를 열었다. &lt;BR&gt;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 “구속자 석방”등의 구호를 외치며 질서있게 대회를 마쳤다. 수습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수습위원들은 더 이상의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계엄군의 시내진입을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무기수거에 나섰다. &lt;BR&gt;
&lt;BR&gt;
이같은 시민들의 수습노력에도 불구하고 계엄군은 5월 27일 새벽 2시 섬광탄을 쏘면서 다시 시가지를 장악하면서 무수한 희생자를 냈다. 피를 부르며 시가지를 장악한 계엄군은 마치 적진을 탈환한 것 같은 승리감에 차 있었다고 일본의 &amp;lt;아사히신문&amp;gt;은 전했다. &lt;BR&gt;
&lt;BR&gt;
많은 총기가 시민들의 손에 쥐어졌는데도 항쟁기간 동안 은행ㆍ백화점ㆍ금은방 등의 강도사건이 전혀 없었다. 학생들은 치안대를 조직하여 은행과 농협 쌀창고를 지켰다. 총상으로 인한 환자가 급증하여 피가 부족하게 되자 헌혈하는 시민의 수가 무수히 늘어섰다. 여성들은 시위대는 물론 계엄군에게도 음식과 약품을 제공했다.&lt;BR&gt;
&lt;BR&gt;
공수부대의 만행과 정부당국의 시민항쟁을 매도하는 언행에 다시 격분한 시민들은 20일 시내버스와 택시운전사들의 차량시위, 시청 접수, 광주문화방송국 방화, 21일 계엄군의 발포에 대항한 자체무장 등 적극적인 자구책을 강구함으로써 시위는 삽시간에 시가전으로 변했다. 21일 오후 6시경 도청을 접수한 시민군은 치안과 방위를 담당할 조직을 편성하는 한편, ‘투사회보’를 발행, 선전활동을 하고 매일 시민궐기대회를 열어 시민의 뜻을 모아 행동에 옮겼다. &lt;BR&gt;
&lt;BR&gt;
시민군 사이에 △ 사후보복 금지 △ 사망자 보상 등의 ‘수습대책위’와 △ 현정부 퇴진 △ 계엄령 해제 △ 학살원흉 처단 △ 구국과도정부 수립 등 결사항쟁 세력의 의견대립으로 항쟁지도부간에 균열이 생긴 가운데, 전두환 신군부 강경세력의 조기진압 방침으로 계엄군은 27일 새벽 2시 극비리에 작전을 개시하여 1시간 40여 분 만에 도청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도청을 사수하던 결사대원 다수가 희생되었다. &lt;BR&gt;
&lt;BR&gt;
신군부는 광주시민을 무참히 학살하면서 5월 20일 이미 소집 공고된 임시국회를 무산시키기 위해 수도군단 30사단 101연대 병력으로 국회의사당을 봉쇄하고, 헌법에 규정된 국회통보 절차조차 밟지 않은 채 사실상 국회를 해산시켜버린 국헌문란을 자행했다. &lt;BR&gt;
&lt;BR&gt;
실질적인 물리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정치 사회 일반에 대한 모든 권력을 보유하고자 국가보위비상대책위를 설치하고 전두환이 상임위원장에 취임했다. 국보위는 초법적인 권력기관으로 등장, 정권을 탈취해 5공정권 수립에 받침대 노릇을 했다. &lt;BR&gt;
&lt;BR&gt;
&amp;lt;조선일보&amp;gt; 등 보수 언론들은 ‘광주폭도’라고 쓰면서 광주의 민주항쟁을 매도했다.&lt;BR&gt;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lt;BR&gt;
9) 앞의 책, 188쪽.&lt;/span&gt;&lt;BR&gt;
&lt;/font&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4651070&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17장] 고난의 세월, 군사재판 사형선고</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Mon, 02 Nov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124회]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갇혀 조사받아</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302079</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신군부는 5월 초순부터 이른바 ‘충정작전’의 구실로 충정부대의 서울투입을 5월 17일 이전에 완료했다. 서울과 광주에는 공수부대의 핵심부대가 파견되었다.&lt;BR&gt;
&lt;BR&gt;
치밀하게 짜여진 작전계획에 따라 신군부는 5월 18일 0시를 기해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하고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표하여 △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및 옥내외집회ㆍ시위의 금지 △ 언론ㆍ출판ㆍ보도 및 방송의 사전검열 △ 각 대학의 휴교령 △ 직장이탈 및 태업ㆍ파업금지 등의 조치를 취함으로써 정치인의 손발을 묶고 국민의 저항에 쐐기를 박았다. &lt;BR&gt;
&lt;BR&gt;
18일부터 김대중을 시작으로 김상현ㆍ김종필ㆍ이후락 등 26명의 정치인들을 학원ㆍ노사분규 선동과,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로 합동수사본부에 연행하고, 며칠 뒤 김영삼을 가택에 연금시키는 등 정치적 일대 탄압을 자행했다. &lt;BR&gt;
&lt;BR&gt;
전두환의 5.17쿠데타는 주로 김대중을 겨냥했다. &lt;BR&gt;
김종필 등 구정치인들을 합수부에 연행하고, 김영삼을 가택연금시켰지만, 김대중과 비서ㆍ측근들을 ‘일망타진’하여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감금했다. 동교동은 시쳇말로 ‘싹쓸이’되었다.&lt;BR&gt;
&lt;BR&gt;
신군부는 김대중의 체포와 거의 동시에 장남 홍일, 동생 대현 등 가족과 친인척을 비롯하여 문익환ㆍ예춘호ㆍ김녹영ㆍ김상현ㆍ이용희ㆍ이문영ㆍ장을병ㆍ송건호ㆍ리영희ㆍ한승헌ㆍ고은ㆍ김종완ㆍ김윤식ㆍ김승훈ㆍ함세웅ㆍ한화갑ㆍ김옥두 등을 구속하여 중정 지하실에 감금시켰다. 흔히 ‘김대중계열’로 알려진 재야인사들과 정치와는 무관한 종교ㆍ학계ㆍ언론계 인사 26명을 일거에 구속수감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조금 후 수사관 2명이 다시 오더니 서랍에 있던 10만원 권 수표 27개와 약간의 외화(6,000여 달러)도 내놓으라 했다. 그들이 떠난 후 집안을 돌아보니 집사 등 몇 사람이 한 방에 갇혀 있었다. 가정부는 안방구석에 꿇어 엎드려 있었다. 새벽 4시쯤 막내가 잠이 안 온다고 안방으로 건너왔다. 우리 모자는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기도했다. &lt;BR&gt;
&lt;BR&gt;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엄청난 고난을 거듭 주시는 겁니까?” &lt;BR&gt;
&lt;BR&gt;
막내와 두 손을 부여잡고 한없이 울었다. 그렇게 거의 밤을 새웠다. 아침이 밝자 몇몇 분들이 찾아왔다. 신문기자들도 왔다. 그 중 한 기자는 상도동을 들러 왔노라고 했다. 그런데 그곳은 평온하다고 했다. 그는 김영삼 총재가 들른다고 했는데 만나지 않는게 좋겠다고 당부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왔을 때 고마운 마음으로 맞았다. 그는 돌아간 후 20일부터 가택연금이 되었다.&lt;BR&gt;
&lt;BR&gt;
남편이 체포되어 떠난 이후 큰아들과 시동생이 바로 잡혀갔다. &lt;BR&gt;
그 뿐만 아니라 한화갑ㆍ김옥두를 비롯해 경호실장 박성철 장군과 경호원들이 모두 잡혀갔다. 그날 저녁 이화여대에 갔던 권노갑 특보와 이협 비서는 도망다니다가 후에 잡혔다. 둘째 아들은 마침 집에 없었다. 들어오면 자진출두시키라고 했지만 나는 아침에 귀가한 그를 &amp;lt;아사히신문&amp;gt; 특파원 차에 태워 피신시켰다. 며칠만 소나기를 피하면 되겠지 했는데 홍업이는 3개월간 숨어다니다가 2개월 동안 중앙정보부에 감금당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6)&lt;/span&gt;&lt;BR&gt;
&lt;BR&gt;
중정 지하실에 끌려온 김대중은 팬츠만 남기고 발가벗긴 채 등 뒤로 돌린 두 손에 수갑이 채워졌다. 수사관들은 야전침대 각목을 휘두르면서 혹독한 조사를 시작했다. 수사 총책에는 이학봉 대령을 필두로 김근수 중정 안전국장, 검찰에서 파견나온 이종남, 정경식 검사 등이 동원되어 수사를 지휘했다. &lt;BR&gt;
&lt;BR&gt;
같은 시각 전두환은 지하실 바로 위층에 있는 안전국장실에서 이학봉ㆍ김근수 등 수사 간부들을 대동하고 앉아 수사 요원들이 팬츠만 입은 채 발가벗긴 김대중의 수사광경을 폐쇄회로 TV카메라를 통해 지켜보았다. 아마도 야생 호랑이를 붙잡아다 희롱하는 심사였을 것이다. 이제 청와대 행로에는 거칠 것이 없게 되었다고 쾌재를 부르며 고급양주를 마셨을지도 모른다. 히틀러의 수하들은 유태인들을 고문하면서 바그너의 음악을 들었다고 한다.&lt;BR&gt;
&lt;BR&gt;
지하실 옆방에서는 연신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lt;BR&gt;
‘동교동 사람들’이 고문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지르는 비명이었다. 김대중을 압박하기 위해 바로 옆방을 이들의 고문장소로 택했을 터였다. 일제강점기에 경찰ㆍ헌병이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수법이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동교동은 초토화가 되었다. &lt;BR&gt;
아들ㆍ동생ㆍ동지ㆍ측근ㆍ비서ㆍ경호원들까지 체포되어 중정 지하실에 감금하고 혹독한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했다. &lt;BR&gt;
&lt;BR&gt;
“김대중은 빨갱이다” &lt;BR&gt;
“김대중의 지시로 이북에 몇 번 갔다왔는가” &lt;BR&gt;
“밤에 이북방송을 듣고 김대중에게 어떻게 보고했는가” &lt;BR&gt;
“재야와 학생들에게 자금을 얼마나 주었는가” &lt;BR&gt;
&lt;BR&gt;
수사관들은 막무가내로 묻고 고문했다. &lt;BR&gt;
&lt;BR&gt;
“버티면 버틸수록 고문은 심해졌다. 각목을 입속에 쑤셔넣고 집게로 혓바닥을 잡아 당겼다. 몽둥이로 머리를 맞아 핏줄기가 솟았으나 걸레질이 고작이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7)&lt;/span&gt;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전두환의 목적은 김대중이 학생과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사회혼란을 부추기고 북한으로부터 불순자금을 받아왔다는 것으로 내란음모사건을 엮으려 들었다. 그래서 측근들을 혹독하게 고문하고 ‘자백’을 받으려 했다. &lt;BR&gt;
그런 중에 수사관들에게 한가지 ‘호재’가 생겼다. &lt;BR&gt;
38세의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이 얼마 전에 동교동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방명록에서 찾아내고, 5월 18일부터 김대중 석방,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며 벌어진 ‘광주사태’(광주민주화운동)와 김대중을 연계시키기로 한 것이다. &lt;BR&gt;
&lt;BR&gt;
정동년이 동교동을 방문한 것은 사실이지만, 마침 김대중이 부재중이어서 만나지 못하고, 방명록에만 이름을 남겼다고 말했지만, 수사관들의 고문은 계속되었다. 살인적 고문으로 정동년이 견디다 못해 자살을 시도했다. &lt;BR&gt;
&lt;BR&gt;
김상현을 고문 끝에 받아낸 ‘자백’을 중간에 끼워넣어 정동년이 김대중에게서 자금을 받아 폭동을 주도한 것으로 조작했다. &lt;BR&gt;
&lt;BR&gt;
“그러나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김씨가 지하실로 연행된 뒤에 벌어진 광주사태를 시간을 거슬로 김씨의 배후조정에 의해 일어난 사건으로 만들고, 또 나라 안팎에서 이해시킨다는 것은 중정의 ‘특수기술’로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8)&lt;/span&gt;&lt;BR&gt;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lt;BR&gt;
6) 이희호, 앞의 책, 201~202쪽.&lt;BR&gt;
7) 이도성, 앞의 책, 184쪽.&lt;BR&gt;
8) 이도성, 앞의 책, 185쪽.&lt;/span&gt;&lt;BR&gt;
&lt;/font&gt;&lt;BR&gt;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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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17장] 고난의 세월, 군사재판 사형선고</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Sun, 01 Nov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123회] 무장군인들 동교동 침입 김대중에 총겨눠</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302074</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화창한 서울의 봄, 그러나 투명하지 않은 ‘안개정국’속에서 신군부는 D데이를 토요일인 5월 17일로 잡았다.&lt;BR&gt;
&lt;BR&gt;
16일은 5.16쿠데타의 날과 겹치고, 주말을 넘기면 국회에서 계엄령해제 결의가 이루어질지 모른다. 신민당과 공화당은 계엄해제에 뜻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되면 자신들은 무장해제를 당하기 때문에 조급해졌다. 그래서 17일로 낙점되었다. &lt;BR&gt;
&lt;BR&gt;
신군부는 중동을 방문 중인 최 대통령을 서둘러 귀국시키고, 17일 밤 11시에 청와대에서 긴급 대책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18일 0시를 기해 제주도를 포함시킨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를 감행했다. 10.26사태로 이미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어 있는 상태였지만, 제주도를 포함시키는 전국확대조치였다. 이로써 12.12사태에 이은 본격적인 군사쿠데타가 시작되었다. &lt;BR&gt;
&lt;BR&gt;
5.17쿠데타는 살육과 암흑으로 들어가는 신호탄이었다. &lt;BR&gt;
5.16쿠데타로부터 19년, 10.26 박정희 암살로부터 6개월 20일, 날수로 치면 200여 일 만의 일이다. &lt;BR&gt;
&lt;BR&gt;
한국민주주의의 희망의 대명사이던 ‘서울의 봄’은 1968년 체코 두브체크 정부를 짓밟은 소련의 탱크부대처럼, 전두환 신군부는 가녀린 민주화의 싹을 사정없이 짓밟고 말았다. 김대중과 동교동은 연금이 해제된 지 130일 만에 다시 사활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김대중은 다시 길고 어두운 죽음의 터널로 빠져들었다. 늑대를 피하다가 승냥이를 만난 격이 되었다. &lt;BR&gt;
&lt;BR&gt;
‘서울의 봄’정국에서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lt;BR&gt;
김대중은 ‘안개정국’속에서 음모의 낌새를 느끼면서 신민당과 재야, 학생들에게 자중을 요청했었다. 5월 16일 이후에는 다행히 신군부에 구실을 줘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이루어지면서 학생들도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권력의 꿀맛에 길들여진 정치군인들은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12.12사태를 일으키면서, 어쩌면 박정희가 암살당할 때부터 권력을 탈취할 야심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5월 17일 토요일 저녁,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기자가 다급하게 전화를 했다. &lt;BR&gt;
계엄사가 이화여대에서 대책회의 중이던 전국대학생 회장들을 덮쳐 학생들이 개머리판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끌려갔다는 것이었다. &lt;BR&gt;
&lt;BR&gt;
역시 이름을 밝히자 않은 채 한 정보부 요원이 전화로 알려주었다. 그는 “천지가 개벽되었다. 김대중 선생님이 위험하다.”라고 말했다. 또 한 사람은 김대중 지지자임을 밝히고 “모두 끝장났다. 신변을 조심하라”라고 말한 뒤 일방적으로 끊었다. 곧 비서가 집 밖을 살피고 돌아왔다. 근처의 보안등이 꺼져 있고 검은 세단 8대가 포진하고 있었다. 남편은 5월에 들어서부터 부쩍 신변의 위협을 느껴왔다. 몇몇 지인이 미국대사관으로 피신하라는 권고를 해오던 터였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lt;/span&gt;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주한 미대사관에서는 신군부의 김대중 체포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다. &lt;BR&gt;
“연행 몇 시간 전부터 이미 세간에는 김대중이 학생시위를 선동한 혐의로 체포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글라이스틴은 대통령비서실장 최광수에게 정국불안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인들을 체포하는 것은 ‘신중하지 않은 조치’이며 특히 김대중을 체포하는 것은 ‘볏단에 불을 들고 뛰어가는 것’과 같다고 경고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2)&lt;/span&gt;&lt;BR&gt;
&lt;BR&gt;
우려하던 사태가 닥쳐왔다. &lt;BR&gt;
신군부는 자신들의 집권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한 김대중의 집을 덮쳤다. 17일 밤 10시 쯤 일단의 무장군인들은 (수도경비사령부 소속군인)동교동 김대중의 대문을 부수고 들어와 김대중의 가슴에 장총을 겨누고, 비서들을 폭행했다. 집을 샅샅히 뒤져 닥치는대로 자료와 물품을 실어갔다. 여기서 체포영장이나 압수수색영장을 얘기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일 터이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내가 연행된 것은 그날 밤이었다. 17일 밤 10시쯤 문을 열라며 장총 개머리판으로 쾅쾅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경호원들이 문을 열려고 하지 않아, 내가 열기 위해 일어서는 찰나였다. 그 때 대문을 부수고 군인 몇 명이 들어왔다. 잠시 우리 경호원들과 실랑이가 있었다. 나는 경호원들에게 그만두라고 했다. &lt;BR&gt;
&lt;BR&gt;
군인들은 응접실 의자에서 일어나려던 내 가슴에 총구를 겨눴다. 무슨일이냐고 하자, 그들은 한 마디로 “가자”고 했다. 나는 “가자고 하면 가겠지만 총을 치우라”고 하면서 옷을 갈아입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만약 나와 내 경호원들이 본격적으로 저항을 하면 총살해도 좋다는 명령이 있었다고 한다. 나는 어쨌던 옷을 갈아입고 그 군인들 뒤를 따라갔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3)&lt;/span&gt;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5월 17일 밤, 우리집에 왔던 한 무리의 수도경비사령부 군인 중 서울구치소로 파견나가 정치범들을 감시했던 한 명이 비서들에게 들려준 말이다. &lt;BR&gt;
&lt;BR&gt;
“5월 17일 저녁 수경사에서 간첩을 잡으러 간다고 우리를 동원했습니다. 착검한 채 동교동쪽으로 갔는데 가보니 김대중선생 댁이더군요 그때 우리부대 지휘자로부터 반항하면 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4)&lt;/span&gt;&lt;BR&gt;
&lt;BR&gt;
서울의 봄에 일진광풍을 일으킨 신군부의 쿠데타는 가장 먼저 김대중의 집을 포위하고 집주인의 가슴팍에 대검 꽂힌 장총을 겨누면서 살벌하게 전개되었다. 체포된 김대중은 그 길로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갔다. 다음은 한 언론인의 기록이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10시 40분 경, 골목어귀 가로등이 꺼지고 초인종이 울렸다. 대문을 열자마자 M16소총을 든 검은 그림자들이 쏟아져 들어오며 닥치는 대로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lt;BR&gt;
&lt;BR&gt;
“이 새끼들 까불면 모두 죽여버려” &lt;BR&gt;
&lt;BR&gt;
지휘자가 고함쳤다. &lt;BR&gt;
거실에 있다가 뛰어나온 김옥두, 이협, 유훈근 등 비서들의 턱밑에도 M16 총검이 겨누어졌다. 비서들은 모두 마당에 꿇어앉혀졌다. 개머리판에 머리를 맞은 정승희는 정신을 잃은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lt;BR&gt;
&lt;BR&gt;
안전국 요원들이 구둣발로 거실에 들어섰다. 그들은 잠자코 의자에 앉아 있던 김대중씨의 양팔을 꼈다. &lt;BR&gt;
&lt;BR&gt;
“내발로 갈테니까 가만히들 있게” &lt;BR&gt;
&lt;BR&gt;
김씨는 잡힌 팔을 뿌리쳤다. 앞서서 대문을 나서는 김씨의 등 뒤를 총검이 에워쌌다. &lt;BR&gt;
이 때가 11시 10분경.&lt;BR&gt;
&lt;BR&gt;
김씨를 태운 승용차가 남산 지하실을 향하면서부터 겪기 어려운 수모가 시작됐다. 김씨는 차안에서 내내 무릎사이까지 머리를 숙여야 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5)&lt;/span&gt;&lt;BR&gt;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lt;BR&gt;
1) 이희호, 앞의 책, 200~201쪽.&lt;BR&gt;
2) 돈 오버도퍼, 앞의 책, 201쪽. &lt;BR&gt;
3) &amp;lt;김대중자서전(2)&amp;gt;, 118~119쪽.&lt;BR&gt;
4) 이희호, 앞의 책, 209쪽, 재인용.&lt;BR&gt;
5) 이도성, 앞의 책, 180~181쪽.&lt;/span&gt;&lt;/font&gt;&lt;BR&gt;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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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17장] 고난의 세월, 군사재판 사형선고</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Sat, 31 Oct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122회] 군부에 빌미주는 과격시위 반대</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301937</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5월 14일 오후 2시경, 동교동을 찾는 재야 지도자들이 있었다. &lt;BR&gt;
문익환ㆍ이문영ㆍ예춘호ㆍ이해동 등 반유신ㆍ반신군부 투쟁을 리드해 온 지도자들이었다. 김대중과는 평소 동지적 관계를 유지해 왔던 분들이다. 이들은 강경한 내용의 시국선언 문안을 만들어 김대중의 서명을 요청하였다. 이미 윤보선 등 지도급 인사들의 서명이 된 문건이었다. &lt;BR&gt;
&lt;BR&gt;
군인들의 무장거부, 노동자 파업, 상인 철시, 서울시민은 검은 리본을 달고 장충단 공원, 지방에서는 도청으로 집결 등을 촉구하는 문안이었다. 이들은 연일 시위대가 서울을 비롯 전국 주요 도시를 휩쓰는 ‘혁명전야’와 같은 상황에서, 재야 지도자들이 강경한 노선으로 앞장서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lt;BR&gt;
&lt;BR&gt;
김대중은 이들이 가져온 문안내용을 단호히 반대하면서 “계엄령 해제와 전두환ㆍ신현확 퇴진”으로 제한할 것을 설득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섣불리 강경한 주장을 내놨다가 기회만 노리는 신군부측에 빌미를 주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lt;BR&gt;
&lt;BR&gt;
이때 김대중의 결정은 호구(虎口)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위기 일발의 순간이었다. 5ㆍ17 뒤에 신군부가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조작했을 때 이 성명서가 원안대로 발표되었다면, 꼼짝없이 내란선동, 국기문란의 혐의를 뒤집어 쓰게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재판 과정에서 김대중을 조사하던 수사관이 혼잣말처럼 “당신이 이 성명서에 서명을 했어야 일이 수월했을 터인데….” 하며 안타까워 했었다고 한다.&lt;BR&gt;
&lt;BR&gt;
여기에서도 김대중의 비폭력 온건주의 노선이 드러난다. &lt;BR&gt;
그는 독재권력과 싸우면서 결정적인 순간이 되어도 변칙이나 물리력을 동원하기보다 법리와 제도에 따른 절차를 중요시했다. 민주주의 원리를 신봉한 것이다. 이것이 자신을 지키는 길이 되었고, 민주적 질서와 가치를 도착화하는 데 기여하게 되었다.&lt;BR&gt;
&lt;BR&gt;
전두환은 5월 13일 느닷없이 ‘북한카드’를 꺼내들었다. &lt;BR&gt;
그는 주한미군사령관 위컴에게 “학생시위의 배후에는 평양이 있으며 북한의 대남공격이 임박했다”고 주장했다. 위컴은 전두환이 북한의 남침 의혹을 강조한 것은 청와대 입성을 위한 구실처럼 보인다고 국무성에 보고했다. &lt;BR&gt;
&lt;BR&gt;
미국은 북한군의 대남 공격조짐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같은 사실을 공개했지만 한국 언론에는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전두환 신군부측은 학생ㆍ노동자들의 시위사태를 적절히 유도ㆍ이용하면서 호심탐탐 덮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lt;BR&gt;
&lt;BR&gt;
전두환의 실세 등장 시점과 김대중의 복권 시기가 거의 일치하면서 ‘충돌’은 이미 예상되고 있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박 대통령 암살사건 이후 그가 가택연금에서 풀려나 다시 정치권 전면으로 급부상하자 박 대통령 측근들은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lt;BR&gt;
&lt;BR&gt;
당시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는 남한에서 만일 자유롭고 공정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될 경우 김대중이 승리할 가능성은 높아졌다. 그가 박정희 정권 하에서 겪었던 온갖 고초에 대한 국민적 존경심과 인기, 그리고 군부통치에 대한 국민들의 강한 저항감 등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볼 때 그것은 결코 무리한 추측이 아니었다. &lt;BR&gt;
&lt;BR&gt;
전두환 등장과 김대중의 급부상이 시기적으로 일치하면서 글라이스턴은 3월 중순부터 장차 양자의 충돌이 불가피함을 예견했고, 이러한 갈등이 궁극적으로 해결돼야 하지만 “언제, 어떤 방식으로 해결될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보고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1)&lt;/span&gt;&lt;BR&gt;
&lt;BR&gt;
김대중은 5월 16일, 김영삼과 긴급 회동을 갖고 정부에 계엄령 해제, 정치범 석방, 정치일정 연내 완결 등 시국수습책 6개항을 촉구했다. 공화당도 계엄령 해제에 대해 공조를 약속했다. &lt;BR&gt;
&lt;BR&gt;
이날 서울의 거리는 폭풍 전야처럼 고요했다. &lt;BR&gt;
&lt;BR&gt;
국민적 관심을 모았던 이화대학에서 열린 전국대학생회장단도 신군부에 빌미를 줘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더 이상 시위를 중단하고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의했다. 서울 시내는 평온을 되찾았다. 5월의 햇볕은 따사로웠고 신록은 찬란했다.&lt;BR&gt;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lt;BR&gt;
11) 돈 오버도퍼, 앞의 책, 200~201쪽. &lt;/span&gt;&lt;BR&gt;
&lt;/font&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4626418&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16장] 9년만의 복권 ‘안개정국’</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Fri, 30 Oct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121회] 각계의 뜨거운 민주화 열기 분출</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301936</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4월로 접어들어 학생운동권은 병영집체훈련의 폐지를 새로운 쟁점으로 내걸었으나, 정부의 강경한 이념적 공세와 비판적 여론으로 난관에 봉착하자 병영집체훈련에 응소하는 한편, 4월 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임하는 등 유신잔당과 신군부세력의 체제개편 음모가 노골화하자 학생들은 학원민주화투쟁에서 사회민주화투쟁으로 전환했다.&lt;BR&gt;
&lt;BR&gt;
5월 2일에는 1만여 명의 학생이 참가한 서울대 ‘민주화 대총회’를 시발로 각 대학이 ‘민주화대행진’에 돌입, △ 유신세력 퇴진 △ 계엄철폐 △ 2원집정부제 반대 △ 정부주도 개헌반대 등의 정치적인 이슈를 내걸고 가두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학생들의 가두시위는 5월 15일 전국 대학생의 계엄해제 요구시위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lt;BR&gt;
&lt;BR&gt;
합동수사본부장이자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직까지 겸하게 된 것은 과도기 권력이 1인에게 집중되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김대중은 1인이 막강한 두 개의 정보기관장을 겸임한 것은 민주주의 앞날에 크게 우려된다는 뜻을 언론을 통해 발표했지만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공화당과 신민당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021949639.jpg&quot; width=&quot;486&quot; height=&quot;348&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80년 1월 동교동 자택을 방문한 윤보선 전 대통령, 함석헌 선생과 함께.&lt;/p&gt;&lt;/div&gt;
신민당 김영삼 총재는 “도도히 흐르는 민주화의 물결을 아무도 막을 수 없다”고 사태의 심각성을 무시한 채 정국의 진행 상태를 낙관하고 있었다. 화창한 봄날의 무대 뒷켠에서는 전두환 중심의 정치군인들이 치밀하게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정치지형도를 그리면서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미국의 정보능력과 관측력은 예리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미 대사관측은 “전두환이 대통령 자리를 넘보고 있음을 확인하고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반발의 표시로 미 정부는 최고 군관계자들의 연례회의인 한ㆍ미 안보회의(SCM)를 ‘무기한 연기’하고 남한 군장교들에게 그 이유를 통보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9)&lt;/span&gt;&lt;BR&gt;
&lt;BR&gt;
그런데도 신민당은 차기 집권이라는 일장춘몽에 빠져들고, 학생ㆍ노동자들의 가두시위는 날이 갈수록 격렬해졌다. 김대중은 위기감을 느꼈다. 그래서 학생들의 자재를 요청했다. 과격한 시위가 민주화를 거부하는 세력에게 빌미를 줄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나는 학생들에게 몇 차례씩 자제를 요청했다. &lt;BR&gt;
“만약 여기서 소동이 일어나면 민주주의를 저해하려는 세력에게 절호의 기회를 주게 된다. 국민들이 걱정하고 있다”고 설득했다. &lt;BR&gt;
&lt;BR&gt;
그때 국민들은 “5월 20일까지 계엄령이 해제되지 않는다면, 국회는 즉시 해산결의를 실시해야 한다”는 여야 합의경과를 보고 난 뒤에 시위를 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학생들 가운데는 자제하지 못하고 문제를 확대시켜 폭력으로 일을 해결하려는 세력이 있었고, 그 세력이 결국 주도권을 잡았다. 13일 저녁 늦게, 서울 고려대 학생회관에서 전국 33개 대학의 대표 35명이 모였다. &lt;BR&gt;
&lt;BR&gt;
14일부터 전국 대학의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반정부 시위를 하기로 결정했다. &lt;BR&gt;
학원내에서는 몰라도 어쨌든 가두시위는 계엄령 위반행위로 처벌대상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강행하려고 한 것이다. 이는 탄압의 빌미를 노리고 있던 신군부측이 원하던 바였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0)&lt;/span&gt;&lt;BR&gt;
&lt;BR&gt;
김대중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봄, 5월은 학생ㆍ노동자ㆍ재야ㆍ야당이 서로 ‘선명성’을 경쟁이나 하듯이 가파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마치 1960년 4월혁명 뒤의 ‘자유화의 물결’처럼, 1980년 5월도, 그와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김대중은 5월 13일 신민당 입당 의사가 없음을 밝히고, 시국성명을 통해 학생들의 폭력시위의 자제를 거듭 호소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336170258.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67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80년 5월 10일 동교동 자택을 찾아온 글라이스턴 당시 주한 미국대사와 함께 민주화 일정에 관해 의견을 나눈 김대중 선생.(뒤에는 조세형 전 민주당 최고위원의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그는 그날부터 꼭 7일뒤 무장군인들에 의해 연행되어 육군교도소와 청주교도소를 전전하며 사형수와 무기수, 20년 징역형을 받은 죄수로서 2년 7개월의 영어의 생활을 계속했다. 그후 82년 12월 서울대학병원에서 미국으로 공수된 그는 2년여의 망명생활끝에 85년 2월 8일 실로 4년 7개월만에야 정든 집에 비로소 돌아온다.&lt;/p&gt;&lt;/div&gt;
14일에는 글라이스턴 주한 미대사가 동교동으로 찾아와 “긴박한 이 상황을 멈추려면 당신의 역할이 중요하다. 사태수습에 적극 나서달라.”고 요청했다.&lt;BR&gt;
&lt;BR&gt;
김대중은 즉각 기자회견을 통해 자제를 거듭 촉구했지만 보도된 기사는 신문 귀퉁이에 작게 취급되었다. &amp;lt;동아일보&amp;gt; 기자가 찾아와서, 자제를 바라는 내용의 인터뷰를 했지만 계엄사 검열에서 전면 삭제되었다.&lt;BR&gt;
&lt;BR&gt;
5월 13일 밤, 서울의 광화문 일대에서 6개 대학 2,500여 명의 학생들이 ‘계엄철폐’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감행하고, 서울시내 27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이날 밤 회의를 소집, 14일부터 일제히 가두시위에 돌입할 것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14일 서울시내 21개 대학 5만여 명의 학생들은 빗속에서 밤늦게까지 서울의 종로, 광화문, 시청 앞 등 도심지에서 가두시위를 벌였으며, 지방 10개 도시의 11개 대학도 가두시위에 돌입했다.&lt;BR&gt;
&lt;BR&gt;
전국적인 격렬한 시위는 15일에도 이어져 이날 저녁 서울역 광장에는 학생 10만, 시민 5만 명이 집결, 계엄철폐와 유신잔당 퇴진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전경대원 1명이 사망하고 경찰과 학생 다수가 부상당했다. 학생 600여 명이 연행되고 대형가스차 1대가 전소되고 차량 7대가 파손되었다.&lt;BR&gt;
&lt;BR&gt;
노동운동도 격렬하게 전개되어 신규노조 결성, 어용노조 민주화, 임금인상, 근로조건 개선 등을 주장하며 투쟁에 나섰다. &lt;BR&gt;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lt;BR&gt;
9) 돈 오버도퍼 지음, 앞의 책, 197~198쪽.&lt;BR&gt;
10) &amp;lt;김대중 자서전(2)&amp;gt;, 115쪽.&lt;/span&gt;&lt;/font&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4614635&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16장] 9년만의 복권 ‘안개정국’</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Thu, 29 Oct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120회] 9년만의 복권, 광명 찾아</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301935</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231897267.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20&quot; alt=&quot;&quot; style=&quot;cursor: pointer&quot; onclick=&quot;open_img('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231897267.jpg')&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7년만에 복권된 김대중 선생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1980년 3월 1일)&lt;/p&gt;&lt;/div&gt;
김대중은 반유신 투쟁에 기여도가 많은 재야 민주인사들과 신민당이 통합, 범야 단일세력을 형성하여 대통령후보를 선출하자는 주장이었고, 김영삼은 신민당의 기득권을 배경으로 단독 출마를 고수하면서 양김은 분열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lt;BR&gt;
&lt;BR&gt;
김대중과 재야 인사들의 복권으로 ‘동교동 감옥’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경찰과 중정 요원들이 철수하고 그들이 거처하던 아지트도 철거되었다. 마침내 동교동에도 봄은 왔다. 9년만의 일이었다. 당연히 주인들도 바빠졌다. 다음은 동교동 ‘안주인’이 겪은 소회의 일단이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그는 실로 오랜만에 이름 석 자 ‘김대중’을 찾았다. 모습을 드러낸 김대중으로 인해 나도 덩달아 언론과 인터뷰하는 등 조명을 받았다. ‘동교동 감옥’이 활짝 열리고 경찰이 철수한 자리에 곧바로 하루 수백 명의 방문객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강연요청 또한 물밀듯이 쇄도했다. YWCA, 동국대, 한신대 등에서 그는 대중강연을 했다. 9년만의 광명이었다. 망명ㆍ납치ㆍ감옥ㆍ연금의 세월이 그렇게 흘러간 것이었다.&lt;BR&gt;
&lt;BR&gt;
돌아보면 무덤 속 같이 어둡고 긴 터널이었다. 다시 광장으로 나선 그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활발했다. 도대체 김대중은 어떤 사람인지, 박대통령이 왜 병적으로 그를 싫어하고 두려워했는지, 그는 정말 위험인물인지 궁금했을 것이다. 9년이라면 초등학생이 대학생이 되고도 남는 긴 세월이 아니던가. 금지 낙인이 찍힌 위험인물 김대중은 특히 젊은이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그는 강연ㆍ인터뷰 등 기회가 올때마다 학생들에게 호소했다.&lt;BR&gt;
&lt;BR&gt;
군부에 ‘빌미’를 줄 행동을 자제하자고 늘 설득했다. 안개 정국 안에서 여기저기 많은 광장이 생겨나 그야말로 백가쟁명이었다. 그러나 정작 권력의 심층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7)&lt;/span&gt;&lt;BR&gt;
&lt;BR&gt;
정국에 짙은 안개가 끼이면서 대학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lt;BR&gt;
반유신 투쟁의 최전선에서 싸웠던 학생들은 박정희가 죽고도 곧바로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유신세력과 정치군인들이 준동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다시 전렬을 정비하고 시위에 나섰다. &lt;BR&gt;
&lt;BR&gt;
그동안 억압받고 저임금에 시달려 온 노동자들도 거리로 뛰쳐나왔다. &lt;BR&gt;
박정희의 폭압에 맞섰다가 투옥되었던 재야인사들도 신군부의 정치적 움직임을 비판하고 나왔다. 김대중은 복권과 함께 활발하게 움직였다. 여기저기서 강연 요청을 해오고 재야인사들의 모임에 초청되었다.&lt;BR&gt;
&lt;BR&gt;
3월 26일, YWCA 수요강좌에 초청받아 &amp;lt;민족혼&amp;gt; 이란 제목의 강연을 하였다. &lt;BR&gt;
망명ㆍ납치ㆍ연금으로 얼룩진 간고의 세월 9년 만에 일반 국민을 상대로 한 최초의 연설이었다. 1시간 동안 진행된 이 강연은 그의 철학과 사상 그리고 시국에 대한 인식이 담긴 비중있는 내용이었다. 강연 말미에 간접 화법으로 대통령 출마 의사를 처음으로 밝혀 관심을 모았다. 몇 대목을 발췌한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나는 그동안 유신체제 7년 동안에, 혹은 망명생활에서, 혹은 납치를 당하면서, 혹은 3년의 감옥생활에서, 혹은 병중에서, 연금 생활에서, 공민권을 박탈당하면서 여러분과 함께 아픔을 같이하여 왔고, 여러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10ㆍ26사태 이후 오늘 이 사람이 독재자의 칼날에 죽지 않고 살아서 “병신이 되었다”, “식물인간이 되었다”, “머리가 돌았다”하던 그 김대중이가 건강한 모습으로 여러분의 힘에 의해서 공민권을 부활해서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 앞에 나오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lt;BR&gt;
&lt;BR&gt;
여러분!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민주주의는 한국 민족에게는 적합지 않다고 그럽니다. 과연 민주주의가 우리 민족에게 적합지 않는가? 우리 민주주의가 이 땅에서 뿌리박을 수 없는가? 양자강의 유자가 북방으로 가면 탱자가 되듯이 민주주의는 여기에 자리 잡을 수 없는가? 나는 여러분에게 우리의 역사에 나타나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민족이고, 우리 민족의 내부에서 서구민주주의는 예수그리스도의 자유의지 - 예수가 예루살렘의 십자가에 못 박히려 올라가면서…(환호로 잠시 연설 중단).&lt;BR&gt;
&lt;BR&gt;
여러분! 나는 국민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을 정치인으로서의 최대의 기본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지금 신문에 대통령후보 운운하지만, 무엇이 되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대통령은 둘째, 셋째입니다. 나는 무엇이 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국민과 내 양심에 충실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국민과 하느님이 주신 내 양심에 충실하다가 기회가 있어서 대통령을 맡게 되면 봉사할 것입니다. &lt;BR&gt;
&lt;BR&gt;
열 사람 국민 중에 열 사람이 다 반대하면, 집권자는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이 사회가 어떻게 되어 가느냐?”, “정부가 무엇을 하느냐?”, “정부가 어떤 계획을 갖고 어떠한 정책을 가지고 어떠한 음모를 가지고 우리에게 임하느냐?” - 이것을 항상 감시하고, 옳지 않을 때는 과감하게 반항하고 싸우고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여러분에게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는 것을 되풀이 강조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lt;BR&gt;
&lt;BR&gt;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김대중이가 여당이 되면 정치보복을 할 것이다”, “ 왜 제가 워낙 당했기 때문에 정치 보복을 하지 않고 가만 두겠느냐?” - 일리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 나는 기독교 신도입니다. 내 믿음을 기초로 해서 내가 결심했습니다. … 우리 민족의 이조 이래 내려온 보복, 이것을 만일 김대중이가 용서한다면, 이것은 김대중의 대에서 정치보복을 끊는 단호한 계기가 되지 않겠느냐 하고 생각했습니다. &lt;/font&gt;&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8)&lt;/span&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082281451.jpg&quot; width=&quot;421&quot; height=&quot;252&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80년 서울의 봄. 80년 4월 6일 한신대 초청 시국강연회장에서 청중의 환호에 답하는 김대중 선생. 환영인파에 둘러싸여 그의 승용차가 우뚝 멈춰 서 있다. 80년 봄 사면. 복권후 김대중 선생은 전국의 대학과 사회단체들로부터 부름을 받아 시국강연을 통해 혼돈 정국의 방향을 명쾌하게 제시하고 정부에 조속한 민주화 청사진 제시를 촉구했다.&lt;/p&gt;&lt;/div&gt;
4월 11일에는 가톨릭농민회 초청으로 대전 가톨릭문화회관에서 전국 농민대표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다. 이어 4월 16일 서울 수유리 한국신학대학 초청으로 &amp;lt;도덕정치를 실현하자&amp;gt;는 주제의 강연, 4월 18일 동국대학에서 &amp;lt;4ㆍ19와 민주통일&amp;gt;, 4월 25일 관훈클럽 초청으로 &amp;lt;80년대의 좌표 - 자유ㆍ정의ㆍ통일의 구현을 위하여&amp;gt; 강연, 4월 28일 충무공 탄생 기념일을 맞아 현충사 방문, 4월 29일 윤봉길의사 의거 48주년을 맞아 충렬사와 윤의사 생가 방문 등 바쁜 일정을 소화하였다. &lt;BR&gt;
&lt;BR&gt;
1980년 3월 신학기부터 각 대학에서 학생회와 평교수회가 부활되고, 2ㆍ29 복권조치에 의해 긴급조치로 해직 또는 제적되었던 교수와 학생들이 학원으로 돌아옴에 따라 학원가에서는 ‘학원민주화’를 외치는 토론회ㆍ농성ㆍ교내시위가 일기 시작했다. &lt;BR&gt;
&lt;BR&gt;
3월 27일의 조선대학교의 교내시위를 시발로 학생시위가 서울과 지방의 각 대학으로 번져나갔다. &lt;BR&gt;
구호도 △ 학원 내 언론자유 △ 어용교수 퇴진 △ 재단운영 개선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lt;BR&gt;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lt;BR&gt;
7) 이희호, 앞의 책, 195~196쪽.&lt;BR&gt;
8) 김진배, 앞의 책, 296~299쪽, 발췌.&lt;/span&gt;&lt;BR&gt;
&lt;/font&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4603510&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16장] 9년만의 복권 ‘안개정국’</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Wed, 28 Oct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119회] 전두환 독주에 제동걸었지만 동조 없어</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301933</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김대중은 이 점을 주목하고 우려했다. &lt;BR&gt;
계엄령 체제에서 전두환 장군의 무소불위한 권력행사를 제동하지 않으면 국가적으로 큰 재앙이 미칠 것으로 내다봤다. 하여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김종필 공화당 총재에게 조속히 계엄령을 해제하여 전두환의 활동영역을 축소시켜야 할 것이라고 제기하였지만, 두 사람은 이에 대해 별로 귀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lt;BR&gt;
&lt;BR&gt;
자신은 아직 공민권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여서 직접 표면에 나설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아직 ‘김대중’이라는 이름 석자도 언론에서 쓰지 못하고, ‘재야 인사’라는 추상명사로 불릴만큼, 그는 ‘서울의 봄’공간에서 여전히 아웃사이더였다. &lt;BR&gt;
&lt;BR&gt;
1월 말 어느 날 전두환의 측근이 은밀히 김대중의 측근 이용희 의원을 통해 전두환이 만나고 싶다는 전갈을 해왔다. 김대중은 생각 끝에 이용희 의원과 함께 그들이 지정한 장소로 갔다. 보안사 서울분실로 쓰는 ‘안가’인 내자호텔이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1월 말에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전두환 장군이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중앙청 앞에 있는 합동수사본부 ‘안가’에 갔다. 그런데 전 장군은 나오지 않고, 그 아랫사람 두 명이 나왔다. 그리고 나에게 자기들에게 협력한다는 서약을 하면 복권시켜 주겠다고 했다. 그들이 꺼낸 ‘서약서’에는 △ 시국 안정에 협력한다 △ 사회불안을 일으키는 소란행위를 하지 않겠다 △ 6월 말까지 외국에 나가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이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5)&lt;/span&gt;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나는 “그런 일이라면 복권시켜주지 않아도 괜찮다. 당신들이 지금도 내 공민권을 제한하고 있는 것 자체가 부당한 일이기 때문에 부당한 일을 없애기 위해 내가 각서를 쓸 필요는 없다. 그런 각서를 쓸 정도면 복권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하고 나왔다. 그것으로 복권될 가능성은 없어졌다고 각오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3월 1일 복권하게 되었다. 역시 국민의 강한 여론과 국제적 압력이 신군부에 가해졌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6)&lt;/span&gt;&lt;BR&gt;
&lt;BR&gt;
이날 김대중을 만난 전두환의 대리인은 보안사 대령 이학봉 대공처장과 권정달 인사처장이었다. 이들은 전두환의 최측근으로 5공 권력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lt;BR&gt;
&lt;BR&gt;
신군부 전두환 세력은 김대중과 ‘빅딜’을 하고자 시도했다. &lt;BR&gt;
협력해주면 복권시켜 주겠다는 노골적인 흥정이었다. 유신 때 박정희의 부통령제 제안을 거부했다가 토막살해ㆍ수장의 위기를 겪은 그로서는 또 한 차례 위기의 순간이 다가왔다. 신군부는 이미 국가권력의 핵심을 장악한 실세였다. 이들은 요구를 거절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날 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거부했고, 그리고 얼마 뒤에 복권이 되었다.&lt;BR&gt;
&lt;BR&gt;
김대중은 윤보선ㆍ김영삼ㆍ양일동과 함께 1월 30일, 4자 회동을 갖고 계엄해제, 사면복권,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한 달이 지난 2월 29일, 최규하 대통령은 김대중을 비롯하여 윤보선ㆍ문익환ㆍ함석헌ㆍ정일형ㆍ지학순ㆍ김찬국ㆍ리영희ㆍ백낙청 등 687명(정치인 22명, 종교인 42명, 학생 373명, 교직자 24명, 언론인 9명, 기타 217명)에 대한 복권조치를 취했다.&lt;BR&gt;
&lt;BR&gt;
김대중의 복권은 유신-망명-납치-연금의 역경 끝에, 9년만의 일이다. &lt;BR&gt;
그는 비로소 ‘본업’으로 돌아왔다. 그는 정치인이고 본업이 정치였다. 40대 후반에서 50대 중반까지 그야말로 정치인의 황금기를 손과 발, 그리고 입이 묶인 상태가 되었다가 이제야 광명을 되찾은 것이다. &lt;BR&gt;
&lt;BR&gt;
김대중은 3월 1일 복권을 계기로 &amp;lt;7년 만에 국민 여러분을 대하면서&amp;gt;라는 제목의 성명을 통해 자신은 대통령 당선보다는 민주제도 확립에 우선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최 대통령과 면담 용의가 있다고 발표했다. &lt;BR&gt;
&lt;BR&gt;
이날 열린 3ㆍ1운동 61주년 기념 국민연합 주최의 연설에서는 현안 5가지를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lt;BR&gt;
(1) 유신독재 아래서 박해받고 억압받았던 인사들을 즉각 석방ㆍ복권ㆍ복직시켜라. &lt;BR&gt;
(2) 조속한 시일 내에 계엄령을 해제하여 언론검열을 비롯하여 일체의 사회활동을 정상화하고 긴장을 완화하라. &lt;BR&gt;
(3) 개헌 및 정치일정을 앞당겨 조속한 시일 내에 새 정부를 수립하라. &lt;BR&gt;
(4) 남북대화는 정권의 차원을 넘는 일이기에 이의 정책수립과 시행에 국민의 폭넓은 참여를 허용하고 개방된 입장을 취하라. &lt;BR&gt;
(5) 노동자 농민의 생존권을 보장하며 이들의 정치적 경제적 참여를 제약하는 일체의 법적 제약을 철폐하라. (6) 학원의 민주화와 자율화를 기하라.&lt;BR&gt;
&lt;BR&gt;
복권이 되면서 김대중은 활동 영역을 차츰 넓혀나갔다. &lt;BR&gt;
3월 6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회담을 갖고 공동발표문을 통해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 노력할 것과, 신민당과 협의 연락 기구 설치를 제의했다. 그러나 신민당은 다음날 이를 거절했다. 최규하 대통령과의 면담을 공개적으로 요청했지만 이것도 성사되지 않았다.&lt;BR&gt;
&lt;BR&gt;
1980년 ‘서울의 봄’은 변덕스러운 봄 날씨의 변화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lt;BR&gt;
김영삼은 2월 12일, 신민당 충남도지부 결성대회에서 대통령후보 출마를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최초의 공개적인 출마선언 발언이었다. 이에 대해 김대중은 3월 1일의 회견에서 “신민당에 들어가 경쟁을 벌일 경우 민주화를 바라지 않는 세력들에게 어부지리를 줄 것”이라면서 신민당 입당문제를 신중하게 유보하고 있었다. &lt;BR&gt;
&lt;BR&gt;
2월 중순이 되어도 신민ㆍ재야의 통합이 접점을 찾지 못하면서 양김은 각기 독자행보에 나섰다. &lt;BR&gt;
공화당 총재에 선출된 김종필도 대통령후보를 선언하여 정국은 이른바 ‘3김시대’의 각축이 전개되었다.&lt;BR&gt;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lt;BR&gt;
5) 이도성, 앞의 책, 124~125쪽. &lt;BR&gt;
6) &amp;lt;김대중 자서전(2)&amp;gt;, 112쪽.&lt;/span&gt;&lt;BR&gt;
&lt;/font&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4592249&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16장] 9년만의 복권 ‘안개정국’</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Tue, 27 Oct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118회] 전두환 12ㆍ12조치로 군권ㆍ정보기관 장악</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301932</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김대중이 박정희 암살 소식을 듣고 우려했던 것도 이같은 정치군인들의 속성과 실태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군부’로 통칭되는 박정희 권력의 사생아들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김재규의 10.26거사 때 궁정동에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을 벌이면서 그를 연행했다. &lt;BR&gt;
&lt;BR&gt;
권력 과도기에 계엄사령관을 하급 군인들이 체포한 것은 자칫 국가안위가 걸린 위험천만한 사태이고, 군의 체계상으로는 엄연한 하극상이었다. 전두환은 박정희가 5ㆍ16쿠데타 뒤에 설치한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1년 간 박정희의 민원비서관으로 근무하면서 박 대통령과 인연을 맺고, 그의 측근으로 활동해왔다.&lt;BR&gt;
&lt;BR&gt;
군내부의 하극상인 12ㆍ12사태와 관련 글라이스턴 주한 미대사는 워싱턴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남한은 사실상 군사 쿠데타가 벌어진 상황이다. 유약한 문민정부가 명목상으로 존재하지만 실질 권력은 없으며, 모든 정황으로 보아 한국군의 핵심조직들은 전두환 소장이 이끄는 ‘신군부’집단의 치밀한 계획하에 완전히 장악했다. &lt;BR&gt;
&lt;BR&gt;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12월 12일 밤의 사태는 나쁜 소식이다. &lt;BR&gt;
지난 18년 간에 걸친 박정희의 권위주의적이고 강력한 통치 아래 놀라울 만큼 단합된 모습을 보여주었던 남한의 군부가 이제 부하 장교에 의해 상관이 군권을 박탈당하는 하극상을 경험하게 됐다. 이 사건은 치유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군사반란의 선례를 세웠다. 이 과정에서 쿠데타 세력은 한ㆍ미 연합사령부에 대한 책무를 완전히 무시했다.&lt;BR&gt;
&lt;BR&gt;
그들은 이번 사태가 미국에 가할 충격을 아예 무시했거나, 미국도 별 수 없을 것이라고 계산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북한의 대응에 대한 진지한 고려도 없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지도 모르는 모험을 감행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4)&lt;/span&gt;&lt;BR&gt;
&lt;BR&gt;
미국에서는 이렇게 12ㆍ12사태를 ‘사실상 군사쿠데타’로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는데, 한국의 정계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김영삼의 신민당 지도부가 그랬고, 재야 지도부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12ㆍ12사태의 실상과 실체를 잘 몰랐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lt;BR&gt;
&lt;BR&gt;
최규하 과도체제에서 명실상부하게 권력의 ‘실세’로 등장한 전두환 중심의 ‘하나회’출신들은 보안사 정보처 내에 언론조종반을 설치하고 “단결된 군부의 기반을 주축으로 지속적인 국력신장을 위한 안정세력을 구축함에 있다”라는 명분을 내걸면서 이른바 ‘K-공작계획’을 추진했다. 이 계획은 바로 정권을 탈취하려는 치밀한 음모로서, 5ㆍ17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한 정권탈취 문건이다.&lt;BR&gt;
&lt;BR&gt;
12ㆍ12의 핵심인 전두환은 박 대통령 암살사건을 수사한다는 명분으로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을 군통수권자의 허락없이 체포하여 하극상의 반란을 주도하고, 또 다른 핵심인 노태우는 전방부대를 군통수권자의 재가없이 수도로 빼돌려 하극상에 동원하는 반란행동을 주도했다.&lt;BR&gt;
&lt;BR&gt;
12ㆍ12 사태를 주도한 세력은 승승장구하여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이희성 중장을 임명한 데 이어 수도경비사령관에 노태우, 특전사령관에 정호용 소장을 임명하였다. 이밖에도 유병현ㆍ황영시ㆍ김복동ㆍ유학성ㆍ박준병 등 이들의 측근세력이 군 요직을 모두 차지했다. &lt;BR&gt;
&lt;BR&gt;
12ㆍ12 하극상을 통해 완벽하게 군권을 탈취한 신군부측은 13일 새벽부터 국방부ㆍ육군본부ㆍ수경사 등 군 중추부를 차례로 장악하고, 각 방송국ㆍ신문사ㆍ통신사를 그들의 통제 하에 두었다.&lt;BR&gt;
&lt;BR&gt;
이들은 정승화를 비롯, 그의 추종세력인 3군사령관 이건영,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등을 1980년 1월 20일자로 모두 예편시키고 정승화에게는 징역 10년형을 선고했다.&lt;BR&gt;
&lt;BR&gt;
이런 정치적인 상황에 선 최 대통령은 12월 21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10대 대통령 취임식의 취임사를 통해 “앞으로 1년 정도면 국민의 대다수가 찬성할 수 있는 내용이 담긴 헌법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과도정부의 기간을 늦춰잡았다. 최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은 ‘3김’을 비롯, 정당과 재야인사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lt;BR&gt;
&lt;BR&gt;
신민당도 과도정부의 정치일정에 심히 반발하고 나섰다. &lt;BR&gt;
과도정부는 정부주도의 개헌안을 마련한다는 방침을 세워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최규하 정부는 국회의 개헌특위에 협조하지 않고 별도로 2원집정부제 개헌안을 마련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어서 ‘안개정국’의 요인이 되었다.&lt;BR&gt;
&lt;BR&gt;
한국현대사에서 파란으로 점철된 1979년이 저물고 피의 살육과 격동으로 얼룩진 1980년이 되었다. &lt;BR&gt;
김대중에게 1980년은 토막살해의 위기에 이어 또 한 차례 생애에서 가장 힘든 시기가 되었다. 1월 6일은 56세가 되는 생일, 어느덧 50대 후반에 접어들었다. 이날 생일을 축하하러 동교동 자택을 찾은 재야의 지도급 인사들과 진정한 민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대체세력의 형성이 시급한 과제라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계엄해제, 정치범 복권문제, 재야와 최규하 대통령과의 협의를 위한 대책을 논의하였다.&lt;BR&gt;
&lt;BR&gt;
연말 연초가 되면서 언론에서는 점차 ‘안개정국’이란 표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lt;BR&gt;
12ㆍ12사태 이후 최규하 정부가 정치일정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고, 정부의 별도 개헌안 마련 움직임, 그리고 무엇보다 12ㆍ12세력의 정치관여가 여기저기에서 두드러지면서 정국은 점차 혼미상태로 빠져들어 갔다. &lt;BR&gt;
&lt;BR&gt;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군ㆍ경찰ㆍ중정 등 국가의 모든 수사기관을 장악한 합동수사본부장으로 활동하면서 그의 전횡이 극심하게 나타났다. &lt;BR&gt;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lt;BR&gt;
4) 돈 오버도퍼 지음, 앞의 책, 189~190쪽.&lt;/span&gt;&lt;BR&gt;
&lt;/font&gt;&lt;BR&gt;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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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16장] 9년만의 복권 ‘안개정국’</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Mon, 26 Oct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117회] 장막 뒤에서 권력탈취 음모 진행</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301930</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amp;lt;워싱턴포스트&amp;gt;에서 25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동북아시아 문제를 다뤄 온 한국문제 전문가 돈 오버도퍼는 &amp;lt;두 개의 한국&amp;gt;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1980년 필자와의 대담에서 일부 고위 군관련 인사들은 김대중의 과거에 북한의 사주를 받았거나 현재까지도 받고 있는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 중 대다수는 김대중을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김대중과 여러 차례에 걸쳐 인터뷰를 해온 필자로서는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주장을 믿지 않았다. 김대중은 대단한 야심가인 동시에 남한의 현재와 미래를 누구보다도 혁신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정치인이었다. 80년대 말 CIA 전문요원 출신인 제임스 릴리 미 대사는 각종 기밀보고서와 경찰 파일을 포함한 김대중의 과거 행적을 면밀히 조사한 뒤 그가 공산당에 가담했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2)&lt;/span&gt;&lt;BR&gt;
&lt;BR&gt;
10ㆍ26사태 이후 김영삼의 신민당 지도부는 최규하 정부 과도기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마치 차기정권을 담보하는 듯이 행동하였다. 정승화의 망언이 나타나도 여전히 시국을 낙관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lt;BR&gt;
&lt;BR&gt;
김대중이 정승화의 망언에 신민당에서 별다른 대응을 취하지 않고 있을 때 무소속의 이용희 의원과 주한 미국대사 W. 글라이이스턴이 ‘방어’에 나섰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이 때 나에게 두 명의 은인이 나타났다. 한 명은 무소속 이용희 의원이었다. 그는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는 막역한 사이였다. 이 의원은 즉시 국회에서 국방장관 노재현씨에게 “나는 김대중씨와 수 십년 정치적 행동을 같이 해 왔다. 그 분만큼 진정한 반공주의자도 없다. 그가 용공이라면 나도 용공이다. 무슨 근거로 그를 용공이라고 하는가?”라고 따졌다. 결국 국방장관은 당치도 않는 발언을 한 참모총장을 대신해서 국회에서 사과했다. &lt;BR&gt;
&lt;BR&gt;
또 한 사람,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당시 주한 미국대사 W.글라이스턴씨였다. 그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말을 듣자마자, 대변인을 통해 기자단에게 발표했다. “미대사관의 김대중씨에 대한 의견은 전혀 다르다. 우리는 김대중씨를 신뢰할 수 있는 민주주의자이며, 공산주의 반대론자라고 생각한다. 만약 군당국이 그러한 왜곡된 견해를 공표한다면 미국의 견해를 공표하겠다”라고 확고한 태도를 보였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3)&lt;/span&gt;&lt;BR&gt;
&lt;BR&gt;
정승화의 발언은 다목적이었다. 그는 최규하 과도체제를 정상체제로 바꾸어 유지하거나,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군부 정권을 기도하려는 망상을 갖고 있었다. ‘3김비토’발언도 이같은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계엄사령관에 취임하면서 곧바로 수도권지역 군부 주요지휘관을 자파세력으로 개편하였다. 전두환 등이 이에 불만을 품고 12ㆍ12하극상에 나서게 된 직접 동기가 되었다. &lt;BR&gt;
&lt;BR&gt;
12월 8일 최규하 대통령의 취임을 계기로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고 김대중의 가택연금도 풀리게 되었다. 긴급조치 해제는 4년 6개월 만이고 가택연금 해제는 226일 만의 일이다. 김대중은 이날 &amp;lt;조속한 민주정부 수립의 합의 위에 국민적 화해와 단결을 성취하고자&amp;gt;라는 제목의 회견문을 발표하였다. &lt;BR&gt;
&lt;BR&gt;
김대중은 이 성명에서 “긴급조치가 해제되고 상당수의 민주인사들이 석방된 것은 만시지탄은 있지만 환영한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의 복권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기타 죄명으로 옥중에 있는 인사들의 석방조치가 병행되지 않는 데 대해서 유감된 심정을 금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서 “10·26사태 이후 우리 국민은 자제와 협력으로 민주시민으로서의 위대한 자질을 국내외에 과시했다. 우려했던 안보도 미국의 신속하고 적절한 조치와 국민과 국군의 일체협력으로 자신있게 위기를 극복해 왔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lt;BR&gt;
&lt;BR&gt;
유신세력이 정권연장을 위해 통일주체국민회의(통대)에서 대통령 선거를 서두르자 이를 막기 위해 윤보선ㆍ함석헌ㆍ양순직ㆍ박종태ㆍ김병걸 등 재야 인사들은 1979년 11월 24일 이른바 YWCA 위장결혼식을 가장하여 통대의 대통령선출 저지, 유신철폐,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10ㆍ26사태 계엄하에서 시도된 최초의 집단시위였다. &lt;BR&gt;
&lt;BR&gt;
그런데 이 사건은 계엄당국이 사전에 정보를 알고도 막지 않은, 일종의 유인책이 되었다. 이른바 ‘사회혼란’을 부추겨 자기들의 야심을 추진하려는 전략이었다. 김대중은 이 집회에 대해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대통령 보궐선거를 저지하고 최규하 대행을 퇴진시키면 무정부상태가 온다고 우려한 것이다.&lt;BR&gt;
&lt;BR&gt;
전두환을 우두머리로 하는 청와대 경호실, 보안사, 수경사, 특전단 등 수도권 핵심지역에서 박정희의 비호 아래 세력을 키워 온, 육사 11기 ‘하나회’출신의 정치군인들은 권력공백기를 틈타 재빨리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체포하고 군권을 장악했다. 12ㆍ12 사태였다.&lt;BR&gt;
&lt;BR&gt;
5·16쿠데타 이후 권력의 양지에서 기생하면서 온갖 정치공작과 술수를 익혀온 이들은 공백기 권력의 핵심을 제거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lt;BR&gt;
&lt;BR&gt;
국가에 위기가 닥치면 참군인은 전선으로 달려가지만 정치군인은 후방으로 도망친다는 말 그대로였다. ‘하나회’정치군인들은 주군(主君)이 사라진 권력의 공간에서 국가안보나 전선의 위기보다 권력쟁탈에 혈안이 되어 군사력을 동원했다. 5ㆍ16 때와 똑같았다.&lt;BR&gt;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lt;BR&gt;
2) 돈 오버도퍼 지음, 이종길 역, &amp;lt;두 개의 한국&amp;gt;, 212~213쪽, 길산, 2002.&lt;BR&gt;
3) &amp;lt;김대중 자서전(2)&amp;gt;, 102~103쪽.&lt;/span&gt;&lt;/font&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4569763&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16장] 9년만의 복권 ‘안개정국’</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Sun, 25 Oct 2009 23:00:00 GMT</pubDate>
		</item>
	</chan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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