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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nnel>
		<title>김삼웅의 후광(後廣) 김대중 평전</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link>
		<description>&lt;대한매일신보(서울신문)&gt;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4년여동안 독립기념관장에 재직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 제주 4.3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국회 추천),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친일파 인명사전 편찬부원장 등을 맡아 바른 역사 찾기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Fri, 20 Nov 2009 23:28:57 GMT</pubDate>
		<item>
			<title>[143회] 정부 각서 악용, 거액 수수 날조</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307819</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gt;&lt;font size=&quot;2&quot;&gt;전두환 정권은 이 각서도 악용했다. &lt;BR&gt;
청주교도소에서 서울대병원으로 이감되는 1982년 12월 16일, 이진희 문공부장관이 기자회견을 열어 김대중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신병치료를 위해 방미토록 허용해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했다고 공개했다. 철저하게 김대중에게 흠집을 내서 정치무대에서 매장하려는 수법이었다. &lt;BR&gt;
&lt;BR&gt;
김대중은 전두환 정권이 약속을 어기고 각서를 공표한 때문에 자신도 이제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였다. 오히려 홀가분한 생각도 들었다.&lt;BR&gt;
&lt;BR&gt;
뿐만이 아니었다. 노신영 안기부장은 박형규ㆍ김관석ㆍ이해동 목사 등 김대중과 가까운 종교지도자들에게 “김대중씨에게 15만 달러를 주었다”고 언급, 그의 도덕성에 상처를 입혔다.&lt;BR&gt;
&lt;BR&gt;
&lt;/font&gt;&lt;font size=&quot;2&quot;&gt;&lt;font color=&quot;#cc9900&quot;&gt;미국에서 고관절 수술을 받으려면 돈이 많이 들것이기에 나는 여러모로 걱정이 많았다. 제부가 은행에 다니는 여동생에게 특별하게 부탁해 변통한 돈을 그들에게 환전을 부탁했던 것이다. &lt;BR&gt;
&lt;BR&gt;
두 차례나 집안을 샅샅이 뒤져 현금과 약간의 외화까지 압수해 간 사람들이 누구인가. &lt;BR&gt;
그날 이후 남편은 안기부 지하실,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청주교도소 특별 감방에 갇혀 목숨 하나도 보전하기 힘들었으며 국내외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연명해 온 우리였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9)&lt;/span&gt;&lt;BR&gt;
&lt;BR&gt;
김대중의 ‘자필탄원서’와 15만 달러 수수설은 이후 그의 반대세력에게 좋은 ‘먹이감’이 되었다. 부당한 재판으로 사형과 무기 징역형을 선고 받고 생명이 경각에 달렸을 때는 변론 한마디 하지 못한 정당ㆍ언론인ㆍ지식인들이, 이 ‘자필탄원서’를 ‘김대중 죽이기’의 자료로 활용한 것이다. 전두환 정권은 마지못해 그를 석방하여 해외로 추방하면서도 ‘생명 구걸’과 ‘검은 돈’의 족쇄를 채우고자 했다.&lt;BR&gt;
&lt;BR&gt;
김대중은 1982년 12월 16일 서울대병원 12층 1병동 21호실로 이감되었다. &lt;BR&gt;
2년여 동안의 청주교도소 수형생활을 마감하고 서울대병원 이감이었다. 3ㆍ1 구국선언 사건과 관련하여 서울대병원에 수감되었던 때와는 병실이 크게 달랐다. 이송된 병실은 정부 고관 등이 이용하는 귀빈용 병실이었다.&lt;BR&gt;
&lt;BR&gt;
정부는 이희호에게 남편의 직계가족 전부가 12월 23일 미국으로 출발하라고 통보했다. &lt;BR&gt;
23일 19시발 대한항공기에 탑승하라는 전달이었다. 그러나 장남 홍일은 끝까지 출국을 거부하면서 동교동에 남겠다고 하여, 김대중 부부는 차남 홍업, 3남 홍걸과 함께 병원 엠브란스를 이용하여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lt;BR&gt;
국내에 남은 자식과 비서들, 동지들에게 변변한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하게 하고 반강제적으로 태웠다.&lt;BR&gt;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기약 없는 출국이었다. 당국에서는 당초 대한항공기라 말하여 비행기표도 구입했는데, 막상 탑승한 비행기는 노스웨스트기였다. 비행기 기종까지 속여가면서 추방한 것이다.&lt;BR&gt;
&lt;BR&gt;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의 ‘추방작전’을 군사작전식으로 치밀하게 전개했다. 대한항공에 탑승하는 것처럼 위장하고는 노스웨스트기로 바꿔 태우고, 안전기획부 요원들이 탑승하여 기내에서 일반인들과 접촉을 차단시켰다. 가족들은 여권과 항공권을 기내에서야 받을 수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직전 청주교도소 부소장이 올라와 김대중의 형집행정지 통고서를 전달했다.&lt;BR&gt;
&lt;BR&gt;
대한항공으로 출국하는 줄 알고 미리 탑승했던 외신기자들은 철저하게 ‘물’먹었다. &lt;BR&gt;
김대중 가족은 23일 낮 시애틀에 도착했다가 워싱턴행 노스웨스트 항공기로 갈아탔다. 그 사이 김대중과 가족은 한국 안기부 요원들에 의해 기내 특별석에 갇혀 있었다. &lt;BR&gt;
김대중은 출국을 앞두고 &amp;lt;이제 가면&amp;gt;이란 시 한 수를 지었다.&lt;BR&gt;
&lt;BR&gt;
&lt;BR&gt;
&lt;font face=&quot;gungsuh&quot; color=&quot;#cc9900&quot; size=&quot;3&quot;&gt;&lt;strong&gt;이제 가면&lt;BR&gt;
&lt;BR&gt;
잘있거라 내강산아 사랑하는 겨레여&lt;BR&gt;
몸은 비록 가지만은 마음은 두고간다&lt;BR&gt;
이국땅 낯설어도 그대 위해 살리라&lt;BR&gt;
&lt;BR&gt;
이제가면 언제올까 기약없는 길이지만&lt;BR&gt;
반드시 돌아오리 새벽처럼 돌아오리&lt;BR&gt;
돌아와 종을치리 자유종을 치리라&lt;BR&gt;
&lt;BR&gt;
잘있거라 내강산아 사랑하는 겨레여&lt;BR&gt;
믿음으로 굳게뭉쳐 민주회복 이룩하자&lt;BR&gt;
사랑으로 굳게뭉쳐 조국통일 이룩하자.&lt;/strong&gt;&lt;/font&gt; &lt;/font&gt;&lt;font size=&quot;2&quot;&gt;&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0)&lt;BR&gt;
&lt;/span&gt;&lt;BR&gt;
&lt;BR&gt;
&lt;/font&gt;&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lt;font size=&quot;2&quot;&gt;주석&lt;BR&gt;
9) 앞의 책, 243쪽.&lt;BR&gt;
10) &amp;lt;김대중 옥중서신(1)&amp;gt;, 511쪽, 시대의 창, 2009&lt;/font&gt;&lt;/span&gt;&lt;/font&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4849238&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19장] 제2차 망명 채미 775일</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Fri, 20 Nov 2009 23:19:00 GMT</pubDate>
		</item>
		<item>
			<title>[142회] 전두환측 ‘친필 각서’ 요구</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307176</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큰 물고기를 어항에 가둬 둘 수는 없다. 요즘은 수족관이 생겨서 어느 정도의 물고기를 가두어 사육할 수 있지만, 그러나 큰 고래나 거대한 상어는 불가능하다. 국제사회에서 대표적인 양심수로 떠오른 김대중은 ‘잡어’가 아닌 거대한 한 마리 고래였다.&lt;BR&gt;
&lt;BR&gt;
전두환 정권은 언제까지나 김대중을 감옥에 수감시킬 수는 없었다. &lt;BR&gt;
무엇보다 국제여론이 만만치 않았다. 예상과는 달리 미국 레이건 정부의 압력이 그치지 않았고, 유럽 여러 나라의 정상과 의회, 그리고 국제인권단체에서 끊임없이 석방을 요구하였다. 국내에서는 학생ㆍ지식인들 사이에서 점차 반미ㆍ반체제의 저항운동이 강화되면서 대외적인 유화 제스처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전 대통령을 만나고 나서 희망을 갖고 면회 때 남편의 머리부터 살펴보았다. &lt;BR&gt;
석방할 즈음엔 머리를 기르게 한다는 데 빡빡 깎아 놓아 석방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lt;BR&gt;
&lt;BR&gt;
고대하던 3ㆍ1절 특별사면에서 20년으로 감형되었다. &lt;BR&gt;
무기나 20년이나 감옥에서 정치생명이 끝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해서 한 자리 얻었던 것처럼 나도 엎드려 간청하여 매달렸더라면 더 감형이 되었을까? 그러나 남편이나 나나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죽으면 죽었지, 할 수 없는 굴종이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4)&lt;/span&gt;&lt;BR&gt;
&lt;BR&gt;
이희호는 청주교도소에서 면회할 때면 무엇보다 남편의 건강이 걱정되었다. 신앙심과 역사에 대한 믿음으로 잘 버티고는 있었지만, 고관절 통증이 심해져 다리가 붓고 이명증세에 시달리면서 심신이 망가지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김대중은 1981년 11월 2일 면회 온 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한 때의 절박했던 심경을 밝혔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이제 비로소 말하는 데 그동안 발광 직전까지 고통이 있었다. 내 평생 이같이 치욕스럽고 괴로워해 본 적이 없다. 조남기 목사(청담교회 목사 － 필자)와의 면회 때도 말했지만 “왜 하나님이 나를 살리셨나”하고 원망하는 생각까지 했다. 잠을 자다가도 숨이 탁 막히면 발광할 것 같았다. 일어나 가까스로 진정하고 극복하여 이젠 그 고비를 넘겼기 때문에 말을 한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5)&lt;/span&gt;&lt;BR&gt;
&lt;BR&gt;
이희호는 남편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lt;BR&gt;
전두환 정권으로서는 김대중이 옥사라도 하는 날이면 감당하기 어려운 사태가 우려되었다. 청주교도소 수인번호 ‘9’의 신상은 시시각각 정부 최고위층에 보고되고 있었다.&lt;BR&gt;
&lt;BR&gt;
1982년 12월 14일 안기부장 노신영의 연락으로 이희호는 프라자호텔 21층에서 그와 만났다. 안기부의 ‘안가’로 쓰는 방이었다. 노신영은 &lt;font color=&quot;#cc9900&quot;&gt;“내 재임 중에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 2~3년 미국에서 병 치료를 하도록 권해보라. 응답을 알려주면 대통령 각하에게 건의해 가족과 함께 떠나도록 하겠다. 단, 개인의 생각이니 비밀로 해달라.” &lt;/font&gt;&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6)&lt;/span&gt;는 주문이었다. &lt;BR&gt;
&lt;BR&gt;
그리고 안기부장의 조건은 ‘김대중의 친필각서’ 였다. &lt;BR&gt;
이희호는 안병무ㆍ예춘호ㆍ지학순(주교) 등과 만나 자문을 구했다. 한결같이 각서를 써 달라면 써 주고 건강을 위해서라도 미국으로 가시라는 뜻이었다.&lt;BR&gt;
&lt;BR&gt;
이희호는 청주로 내려가 남편을 설득했다. &lt;BR&gt;
그 때만은 간수나 입회인이 자리를 피해 주어서 처음으로 단 둘이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교도소에 도착하니 안기부 직원이 먼저 와 있었다. 즉시 특별면회가 이루어졌다. 조금 자라 있던 남편의 머리는 다시 짧게 깎여 있었다. 내가 미국에 가자고 권유하자 남편은 오전 내내, “미국에는 가고 싶지도 않고 갈 필요도 없으니 가지 않겠다. 같이 구속된 많은 사람이 아직 옥중에 있는데 어떻게 그곳에 갈 수 있느냐. 또 가족이 다 가서 2년 간을 그곳에서 살고 수술까지 하려면, 적어도 15만 불은 가져야 할 터인데 어떻게 그런 돈을 장만할 수 있느냐.”면서 완강히 거절했다. 나는 “우리와 친한 몇 분도 건강을 생각해서 미국에 가는 편이 좋겠다고 한다.”는 말을 전했으나, 남편은 자기와 관련된 구속자의 석방을 염려했다.&lt;BR&gt;
남편은 몇 번이고 미국에 가지 않겠다고 하므로, 나는 그대로 면회실을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lt;BR&gt;
&lt;BR&gt;
안기부 직원이 무슨 연락을 취하더니, 자기와 함께 다시 한번 만나보자고 했다. 오후 2시경 또 남편을 면회했다. 오후 4시가 넘도록 대답을 하지 않기에, 나는 미국에 가자는 것을 강력하게 권하면서 “우리가 미국으로 떠나야 같이 구속됐던 분들도 나오게 된다.”고 말을 전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7)&lt;/span&gt;&lt;BR&gt;
&lt;BR&gt;
김대중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자신이 떠남으로써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애먼 죄를 뒤집어쓰고 아직까지 옥고를 치루고 있는 동지들이 석방될 수 있다는 데에 마음이 움직였다. 건강문제도 더 이상 버티기에는 갈수록 고통이 심해졌다. 서울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을 때 진찰한 의사는 무릎관절 상태가 좋지 않아 이대로 병세가 진행되면 걷지 못할 만큼 악화될 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lt;BR&gt;
&lt;BR&gt;
정부 당국자가 김대중의 ‘친필각서’를 요구하고, 김대중이 각서 쓰기를 거듭 거부하자 “각하에게 건의하려면 문건이 필요합니다. ‘병치료에만 전념하고 정치활동 안 하겠다’는 한 장이면 됩니다. 내부용이니까 외부에 공개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lt;BR&gt;
안기부 국장의 다짐이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남편이 각서 쓰기를 거부하자 내가 대신 쓰는 안을 제안했다. &lt;BR&gt;
그는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될 때 탄원서로 그들에게 기만당한 경험이 있었다. 그들은 끝까지 남편의 자필 각서를 고집했다. 내가 더 간절하게 설득하자 남편은 마지못해 썼다. 미국에서는 치료만 하고 정치활동은 하지 않겠다는 ‘자필 탄원서’를 쓰고 3일 뒤 서울대병원으로 이감되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8)&lt;/span&gt;&lt;BR&gt;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lt;BR&gt;
4) 이희호, 앞의 책, 231쪽&lt;BR&gt;
5) 앞의 책, 240쪽.&lt;BR&gt;
6) 앞의 책, 239쪽.&lt;BR&gt;
7) 이희호, &amp;lt;어둠에서 빛을 향해&amp;gt;, 142~143쪽, 일월서각, 1987.&lt;BR&gt;
8) 이희호, &amp;lt;이희호자서전－동행&amp;gt;, 241쪽.&lt;/span&gt;&lt;BR&gt;
&lt;/font&gt;&lt;BR&gt;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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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19장] 제2차 망명 채미 775일</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Thu, 19 Nov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141회] 이희호, 전두환과 만나 담판</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307173</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김대중이 청주교도소에서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전두환 정권은 절대권력을 누리면서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권력을 위협했던 김대중은 장기수가 되어 옥중에 유폐되고, 김영삼은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가택 연금상태에 놓여 있었다. &lt;BR&gt;
&lt;BR&gt;
국회는 여당인 민정당이 제11대 총선에서 151석, 민한당 81석, 국민당 25석 등으로 구성되었지만,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통해 정치활동을 ‘허용’받은 정치인들로 구성되었다. &lt;BR&gt;
&lt;BR&gt;
비판과 견제기능을 상실한 국회와 정당은 5공체제의 둘러리 역할에 불과했다. 하여 민정당 제1중대, 민한당 제2중대, 국민당 제3중대라는 지탄이 따를만큼 국민의 신뢰를 잃고 있었다. &lt;BR&gt;
&lt;BR&gt;
1982년이 되면서 두 가지 ‘돌변사건’이 일어났다. &lt;BR&gt;
3월 18일 감행된 대학생들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2.12사태와 광주학살 그리고 전두환정권 수립과 관련 미국의 역할을 못마땅해 온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lt;BR&gt;
&lt;BR&gt;
경찰의 진입과정에서 미문화원 1층이 전소되었으며, 대학생과 경찰이 불에 타 숨지고, 여러 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우리 국민에게 “과연 미국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제기하게 되고, 80년대 반미의식의 확대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전통적인 학생운동이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정치체제의 변혁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lt;BR&gt;
&lt;BR&gt;
두 번째는 전두환의 인척으로 유신체제 이래 독재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사채시장의 ‘큰손’으로 군림해 온 장영자와 그의 남편 이철희가 저지른 거액의 어음사기사건이다. &lt;BR&gt;
&lt;BR&gt;
전두환의 처삼촌 이규광(광업진흥공사 사장)의 처제인 장영자와 육사 2기 출신으로 중앙정보부 차장과 유정회 의원을 지낸 이철희 부부는 권력의 후광을 앞세워 1981년 2월부터 1982년 4월까지 6,404억원에 달하는 거액의 어음사기 행각을 벌였다. 당시로는 단군 이래 최대의 부정축재 사건이었다. 이철희는 김대중납치사건 당시 중정 차장으로 핵심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5공 정권은 집권 2년만에 핵심부에서부터 부패하고 있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장관 11명이 무더기로 경질되었다. &lt;BR&gt;
&lt;BR&gt;
이 두 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그렇지 않아도 취약한 도덕적 기반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lt;BR&gt;
철권통치에 도전세력이 생기고, 권력 심장부가 썩으면서 ‘정의사회’라는 구호가 허구임을 속속 드러냈다.&lt;BR&gt;
김대중이 청주교도소로 이감된 이후 113차례에 걸쳐 청주를 오르내리고, 남편에게 매일 편지를 쓰느라 옥중의 남편 못지 않게 심신이 피로해진 이희호에게 1982년 2월 초 뜬금없이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른바 5공의 ‘스리 허(許)’의 한 사람인 허화평의 전화였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실세라는 ‘스리 허’ 중의 한 사람이라 나는 깜짝 놀랐다. 이틀 후 프라자호텔 21층에서 만나자고 했다. 허화평씨는 자그마한 체구로 이지적이며 냉철해 보였다. 웃음기라곤 전혀 없었다.&lt;BR&gt;
&lt;BR&gt;
“왜 해외에서 구명운동을 하십니까?”&lt;BR&gt;
“그 분들이 스스로 우리를 돕는 것이지요.”&lt;BR&gt;
“국내에서 구명운동을 하시지 않겠습니까?”&lt;BR&gt;
“⋯?”&lt;BR&gt;
“각하를 뵐 의향이 있습니까?”&lt;BR&gt;
&lt;BR&gt;
그들은 꼭 ‘각하’라고 했다.&lt;BR&gt;
&lt;BR&gt;
“만나 주신다면 뵙지요.”&lt;BR&gt;
“그럼 나중에 날짜와 시간을 알려드리겠습니다.”&lt;BR&gt;
&lt;BR&gt;
그리고 명함에 전화번호를 적어서 주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lt;/span&gt;&lt;BR&gt;
&lt;BR&gt;
이에 앞서 1981년 12월 10일, 청주교도소 담당관이 김대중에게 느닷없이 “미국으로 치료하러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이즈음 김대중은 이명증과 무릎관절염 증세를 치료하지 못해 고통을 겪으면서 이 상태가 계속되면 걸을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염려하던 참이었다.&lt;BR&gt;
&lt;BR&gt;
감옥에는 자신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여러 명 더 남아 있었다. 그리고 정치범도 다수 끌려와 수감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보다 자기가 먼저 나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출국을 거절하고 “한국에서 석방시켜 달라. 국내에서 치료받고 싶다.”고 말했다.&lt;BR&gt;
&lt;BR&gt;
김대중의 단호한 태도에 정부 당국에서는 부인을 통해 설득하도록, 이희호의 전두환 대통령 면담을 주선한 것이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나는 주변 인사들과 의논했다. 그들은 만나라고 했다. 얼마 후 전화가 왔다. &lt;BR&gt;
&lt;BR&gt;
“오늘이 ‘그날’입니다.”&lt;BR&gt;
&lt;BR&gt;
그리고 곧 공중전화로 걸어달라고 했다. 그들도 도청은 싫어했다.&lt;BR&gt;
&lt;BR&gt;
“6시에 박물관 서쪽 문으로 오시면 정비서가 모실 것입니다.” &lt;BR&gt;
(중략) &lt;BR&gt;
조금 기다리니 전 대통령이 들어오기에 사전 교육을 받은 대로 일어났다가 탁자를 마주하고 앉았다. 뭐랄까, 스스럼이 없었다. 이 얘기 저 얘기 끝이 없었다. 그리고 물었다.&lt;BR&gt;
&lt;BR&gt;
“이 여사, 고생이 많으시지요?”&lt;BR&gt;
“석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lt;BR&gt;
“그건 나 혼자서 결정을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있고 해서 석방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질 것입니다.”&lt;BR&gt;
&lt;BR&gt;
본론은 이 세 마디였다. 허화평씨는 ‘김대중씨’라고 불렀고 전 대통령은 ‘김대중 선생’이라고 호칭했던 것 같다. 부인과 딸이 성경을 읽고 있다고 했으며 그의 아들들과 가족 이야기도 섞어서 했다. 청와대를 나오면서 시계를 보니 8시가 훨씬 넘었다. 2시간 남짓한 만남이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2)&lt;/span&gt;&lt;BR&gt;
&lt;BR&gt;
역사를 10년 또는 20년 정도만 뒤에서 보면 역전과 반전의 드라마와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lt;BR&gt;
특히 한국처럼 변혁이 심한 나라의 정치사는 아무리 유능한 드라마작가의 상상력이라도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lt;BR&gt;
&lt;BR&gt;
2009년 8월 어느 날 전두환이 김대중 전대통령이 입원한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을 찾았다. &lt;BR&gt;
전 전대통령은 20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이희호 여사의 손을 잡고 “아이고,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라고 위로했다. 그는 “자꾸 나빠지는 것 같아 휴가 중에 올라왔다”며 “틀림없이 완쾌해서 영부인이 즐거운 마음으로 모시고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전 대통령은 “김 전대통령이 현직에 계실 때 10번 가까이 초대받는 등 전직 대통령들이 제일 행복했다”면서 “그런 전통이 다음부터 없어졌는데 이명박 대통령도 전직 대통령의 의견을 들었으면 한다”고 밝혔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3)&lt;/span&gt;&lt;BR&gt;
&lt;BR&gt;
장기수의 아내 이희호가 대통령 전두환의 초청을 받고 청와대에 들어갔다 나온 지 19년의 세월, 그 사이 김대중은 살아남아서 대통령이 되고, 전두환은 내란죄 등으로 구속된 것을 김대중이 대통령 당선 직후인 1997년 12월 20일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토록 했었다. &lt;BR&gt;
&lt;BR&gt;
그리고 다시 12년 뒤 전두환은 김대중이 입원 중인 병원을 찾아 이희호의 손을 잡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김대중은 서거할 때까지 쓴 일기에서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고 기록했다.&lt;BR&gt;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lt;BR&gt;
1) 이희호, 앞의 책, 229~230쪽.&lt;BR&gt;
2) 앞의 책, 230~231쪽.&lt;BR&gt;
3) &amp;lt;경향신문&amp;gt;, 2009년 8월 14일.&lt;/span&gt;&lt;BR&gt;
&lt;/font&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4835227&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19장] 제2차 망명 채미 775일</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Wed, 18 Nov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140회] 한민족의 장ㆍ단점 탐구</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303711</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김대중의 ‘옥중서신’중에서 가장 관심 깊게 살펴보아야 할 대목은 1981년 9월 30일 쓴 제14신 '우리 민족의 장점과 단점'이 아닐까 싶다. 과거 여러 사람이 한민족의 장단점을 연구해 왔다. 일제강점기 춘원 이광수는 한민족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는 '민족개조론'을 써서 ‘일선융화론’의 전제로 삼기도 했다.&lt;BR&gt;
&lt;BR&gt;
이 글에서 김대중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으로써 장점 5가지를 든다.&lt;BR&gt;
&lt;BR&gt;
첫째, 자주독립성.&lt;BR&gt;
신라 통일 이래 1910년 일제 병탄 때까지 1,300년 동안 일관해서 독립을 유지해 온 세계적으로 유례 드문 위대한 능력이다. 중국은 원ㆍ청 등의 수 백년 외세지배, 인도의 마우라 왕조와 굽타 왕조 이외의 수 백년의 이민족 지배, 이집트의 알렉산더 정복이래 2,000년 이상 외세지배, 영국에 대한 로마와 덴족과 노르만의 정복, 프랑스의 같은 운명, 독일과 이탈리아의 19세기 중엽 통일까지 외세지배를 받았다.&lt;BR&gt;
&lt;BR&gt;
이에 비해 한민족은 지리적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당나라ㆍ몽골ㆍ임진왜란ㆍ병자호란 등 침략에도 독립국가를 유지하고, 몽골족ㆍ만주족이 중국에 동화된 것에 비할 때 우리 조상들의 위대한 저력을 평가한다.&lt;BR&gt;
&lt;BR&gt;
둘째, 형식적 사대에도 주체성 유지.&lt;BR&gt;
한민족이 때로 비록 형식적으로는 사대를 했지만 특히 일반 민중은 자기 주체성을 유지해왔다. 중국문명의 영향 속에서도 문화 전반의 뚜렷한 자기특색을 유지하고, 의복ㆍ음식ㆍ언어ㆍ주거 등 특색을 간직했으며, 화교의 경제 침투와 지배를 완전히 봉쇄하였다.&lt;BR&gt;
&lt;BR&gt;
셋째, 조상들의 높은 교육열.&lt;BR&gt;
문명권으로는 중국문명에 속하는 데 교육수준이나 문화수준은 중국에 뒤지지 않았다. 이러한 전통이 70년대 아시아에서 중국문명권 국가들, 홍콩ㆍ대만ㆍ싱가포르와 같은 중진국의 대열에 서게 하는 저력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lt;BR&gt;
&lt;BR&gt;
넷째, 강력한 동화력.&lt;BR&gt;
평안도와 함경도의 상당 부분은 세종대왕 시대에야 완전히 (한민족에) 편입되고, 거기에는 여진족 등 이민족도 상당히 있었는데, 이를 흔적도 없이 동화시켰다. 근래까지 백정ㆍ무당ㆍ노비 등 천민이 전인구의 2~3할에 이르렀음에도 지금 한국사회는 계급 구분을 찾을 수 없도록 완전히 동화하였다.&lt;BR&gt;
&lt;BR&gt;
다섯째, 매우 지적이고 유능한 민족.&lt;BR&gt;
유교나 불교를 우리 입장에서 승화 발전시킨 원효나 율곡, 한글창제, 인쇄술 발명, 도자기의 우수성, 특히 최근 국내외에서 보이는 우수한 기질을 높이 평가한다.&lt;BR&gt;
&lt;BR&gt;
다음은 부끄러운 단점이다.&lt;BR&gt;
&lt;BR&gt;
첫째, 정치의 편협성과 관용성 부족.&lt;BR&gt;
조선왕조의 유교정치가 불교를 유린하고 구국의 신흥종교 동학을 짓밟았다. 근대화에 기여한 천주교 탄압으로 1만 명 교인 학살, 유교 안에서는 주자학 이외에는 사문난적으로 금압하고, 주자학끼리도 예송문제 따위로 사색당쟁으로 갈려 보복전을 전개했다.&lt;BR&gt;
&lt;BR&gt;
이러한 파당적 불관용은 민족 전체의 특성이라기보다 지배계급 내 양반들의 악습이었지만, 불행한 전통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해독을 끼쳐왔다.&lt;BR&gt;
&lt;BR&gt;
둘째, 진취성 부족.&lt;BR&gt;
고구려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반도 안 평양으로 천도, 신라 통일 후 대동강 이북 만주땅 동반 부를 포기하고 수도를 경주로 고정한 것, 이성계가 고려 말엽 북진정책을 겪고도 개성 이남에 수도를 정한 것, 삼면이 바다인데도 해양진출 외면하고 왜구에 시달려 온 일, 유형원ㆍ이익ㆍ홍대용ㆍ박제가ㆍ박지원ㆍ정약용 등 실학자들이 민중이 이해할 수 있는 국문(한글)으로 저술하지 않는 비진취성 등을 들었다.&lt;BR&gt;
&lt;BR&gt;
셋째, 지나친 형식주의.&lt;BR&gt;
지나치게 명분을 따져 실리를 등한히 하며 체면을 너무 차려 능력도 없이 허세를 부리며 낭비를 일삼는다. 형식주의는 관료주의 폐단과 창조성 억압으로 나타났다.&lt;BR&gt;
&lt;BR&gt;
넷째, 심각성 부족.&lt;BR&gt;
명랑하고 낙천적 특성을 갖고 있으나 철학적 전통이 빈약하여 불교ㆍ유교 등 종교가 현세적 복락만을 바라는 샤마니즘적 성향으로 흘렀다. 오늘의 기독교 신앙에서도 그런 경향과 폐단이 나타나고 있다.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4)&lt;BR&gt;
&lt;BR&gt;
&lt;BR&gt;
주석&lt;BR&gt;
14) &amp;lt;김대중 옥중서신(1)&amp;gt;, 250~256쪽, 정리 요약.&lt;/span&gt;&lt;/font&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4817087&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18장] 청주교도소 2년 반, 책읽고 ‘옥중서신’</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Tue, 17 Nov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139회] 감옥 화단에 꽃가꾸기 즐거움</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303710</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김대중이 2년여 동안 청주교도소에서 보낼 때 독서 외에 즐거움이 있었다면, 길이 약 1.2m, 폭 30Cm 정도의 꽃밭에 꽃을 가꾸는 일이었다. 수형자에게는 매일 점심식사 뒤 1시간 동안 운동시간이 주어지는데, 김대중은 이 시간 화단에서 꽃을 가꾸었다. &lt;BR&gt;
&lt;BR&gt;
화단에는 페추니아ㆍ국화ㆍ진달래ㆍ데이지꽃을 비롯하여 10여 가지 꽃을 심고 정성들여 가꾸었다. 그는 꽃을 좋아하여 동교동 자택에서도 틈만 나면 꽃을 가꾸어 이 방면에 일가견을 갖고 있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나는 꽃에게 말을 걸었다. 어떤 꽃이 잘 자라지 않을 땐 기분이 울적했다. 나는 어느날 그 꽃에게 이렇게 말을 걸었다. &lt;BR&gt;
&lt;BR&gt;
“실망스럽구나, 나는 진심으로 너를 돌봤는데 전혀 몰라주는구나.” &lt;BR&gt;
&lt;BR&gt;
그 후 이상하게도 그 꽃은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다. 가지치기를 할 때 나는 꽃에게 이렇게 말했다. &lt;BR&gt;
&lt;BR&gt;
“미안하구나, 가여운 것, 이건 너희들 꽃을 위한 것이니까 용서하거라.” &lt;BR&gt;
&lt;BR&gt;
그리고 내가 화단에서 일하는 동안 간수들은 점점 화단에 물주는 일을 돕기 시작했다.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모자를 쓰지 못하게 해서 나는 땀이 뒤범벅 된 채 일했다. 늘 그것은 나에게는 특별한 체험이었다. 화단을 가꾸면서 그 시간만큼은 슬픔과 걱정을 잊고 활홀경에 빠질 수 있었다.&lt;BR&gt;
&lt;BR&gt;
꽃들은 나의 진심에 화답해 주었다. 늦가을이 되어도 내가 가꾼 꽃은 다른 화단의 꽃보다 적어도 한달 이상 더 꽃을 피웠다. 우리나라 속담에 “어린이와 꽃은 정성을 들이면 들일수록 어여쁘게 된다”는 말이 있다. 나는 화단 가꾸기를 통해 그 속담이 진짜임을 일부나마 입증하게 되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2)&lt;/span&gt;&lt;BR&gt;
&lt;BR&gt;
지난 날 백만 군중 앞에서 노호하던 투사가 ‘머리깎인 삼손’처럼 수의를 입고 꽃을 가꾸는 모습은, 아무리 상상력이 탁월한 사람이라도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김대중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꽃을 좋아하고 꽃밭 가꾸기를 즐겨하는 지 알고 있다. &lt;BR&gt;
&lt;BR&gt;
다음은 한 때 정계를 은퇴하여 영국에 ‘유학’ 했을 때의 글이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내가 고국에 두고 온 친구는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영국으로 떠나오기 전날까지 정성스레 가꾸었던 우리 집의 화초도 나의 잊을 수 없는 친구였습니다. 꽃은 내가 감옥에 있을 때나 바깥세상과 단절돼 연금 상태에 있을 때 내 마음을 달래 주고 위로해 주던 좋은 친구였습니다. 나는 꽃의 정직성에 반했습니다. 정성을 쏟으면 쏟은 만큼 아름다운 모습을 오랫동안 간직해주었습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3)&lt;/span&gt;&lt;BR&gt;
&lt;BR&gt;
꽃이나 화초를 좋아하는 김대중은 분재를 싫어한다. 간혹 잘 기른 분재를 선물로 받아도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린다. 나무를 철사로 꽁꽁묶어 난쟁이로 만드는 것이 자연에 대한 학대라는 이유에서다. &lt;BR&gt;
&lt;BR&gt;
‘투사’ 김대중만을 연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쉽게 납득이 안될 것이겠지만, 어쩌면 이것은 김대중의 ‘본령’ 이기도 하다.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&lt;BR&gt;
주석&lt;BR&gt;
12) &amp;lt;김대중 자서전(2)&amp;gt;, 157 ~158쪽.&lt;BR&gt;
13) &amp;lt;김대중,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amp;gt;, 51~52쪽, 김영사, 1992.&lt;/span&gt;&lt;/font&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4802628&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18장] 청주교도소 2년 반, 책읽고 ‘옥중서신’</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Mon, 16 Nov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138회] 토인비 &lt;역사의 연구&gt;에서 큰 영향받아</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303709</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김대중이 옥중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책을 특별히 선정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 중에 한 권은 토인비의 &amp;lt;역사의 연구&amp;gt;가 아닐까 싶다. 과거 정치 강연을 할 때면 가끔 토인비의 말을 인용하고 자신의 저서에서도 이를 언급하곤 했다. &lt;BR&gt;
&lt;BR&gt;
“나는 그에게서 직접 배운 바는 없지만 항상 그를 마음의 스승의 한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할 만큼 여러 차례 그의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사관과 역사철학으로 정립해 왔다라고 밝혔다.&lt;BR&gt;
&lt;BR&gt;
김대중은 부인에게 보낸 ‘옥중서한’에서 토인비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토인비의 도전과 응전 관계에서 파악한 역사철학이 나에게 많은 깨우침과 신념을 주었습니다. 당신이 아시다시피 나는 그의 저서를 거의 읽었는데, 그의 역사파악의 기본 시점(視點)은 도전과 응전의 관계에서 문명의 발생ㆍ쇠퇴ㆍ붕괴가 결정되어 가는 거대한 드라마라는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나는 그에게서 직접 배운 바는 없지만 항상 그를 마음의 한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과 친지들이 이 유례없는 고난의 도전에 처해서 우리의 후회없는 응전을 마련하기 위해서 토인비의 교훈을 중심으로 내 의견을 적어 봅니다. 첫째는 약한 내 자신의 확신을 위해서, 다음에는 당신과 자식들의 도움을 위해서입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8)&lt;/span&gt;&lt;BR&gt;
&lt;BR&gt;
그는 토인비가 영어로 3천 쪽이 넘는 방대한 저술을 통해 인류문명을 ‘도전과 응전’이라는 틀로 해석한 데 크게 감명 받았던 것이 틀림없다. 토인비는 &amp;lt;역사의 연구&amp;gt;에서 역사의 개시 이래 지상에 발생한 문명을 20여 개로 분류하면서, 문명이 성장ㆍ쇠태ㆍ해체ㆍ사멸의 과정에서 공통적인 리듬과 유형적인 현상을 발견하고, 또한 문명간의 접촉과 계승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토인비는 여기서 거시적이고 포괄적인 문명사관을 제시한다.&lt;BR&gt;
&lt;BR&gt;
토인비의 문제의식은 문명의 운명, 특히 서구문명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하면서, 이 물음은 궁극적으로 지상문명의 배후에서 신의 의지를 예감하는 종교관과 결부되어 있다. 김대중이 이 책에 빠져든 것도 이와 같은 토인비의 역사관에 공감한 까닭인 듯하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도전에 대해서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응전을 한다고 해서 그 당대에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담 이래 인류의 죄악사에 대한 예수님의 응전은 가장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당대에는 참담한 실패로 귀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는 우리의 일시적인 환각이었을 뿐 예수님께서 행하신 바 종래의 징벌의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의 하느님으로서의 진리 설파, 십자가상에서의 인류죄악의 대속, 죽음에서의 부활로 이루어진 일련의 응전은 인간의 역사를 완전히 바꿔놓은 사상최대의 승리였습니다. &lt;BR&gt;
&lt;BR&gt;
우리 역사에서의 사육신ㆍ최수운ㆍ전봉준ㆍ안중근ㆍ윤봉길ㆍ이봉창ㆍ기독교 박해의 순교자들 모두 그 당대의 성공자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국민 누구도 그들이 자기 당대의 최고 성공자였던 신숙주나 이완용보다 실패한 이들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습니다. &lt;BR&gt;
&lt;BR&gt;
사실 우리 역사에서 그들의 이름이 없다고 가정할 때 그것이 얼마나 우리 역사를 적막한 황무지로 만들며, 얼마나 우리의 긍지를 빼앗는 일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응전은 운명적으로 유한한 자기당대에서의 성패에서 결승의 깃발을 꽂는 근시안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정의와 인간의 양심에 충실한 응전자에게는 일시적인 좌절은 있어도 영원한 패배는 결코 없다는 신념속에 사는 것만이 우리의 생의 태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9)&lt;/span&gt;&lt;BR&gt;
&lt;BR&gt;
김대중은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의 사관에서 자신의 역사관을 정립한다. &lt;BR&gt;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극한과 시련을 겪으면서 거기에 응전할 수 있는 철학과 신념의 근거가 바로 토인비의 문명사관이 “궁극적으로 지상 문명의 배후에서 신의 의지를 예감하는 종교관과 결부되어” 있다는 그 정신이 바로 김대중 자신의 역사관과도 부합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lt;BR&gt;
&lt;BR&gt;
김대중은 감옥에서 부인과 세 아들 그리고 며느리에게 편지를 쓰고 아직 어린 손녀들과 친지ㆍ동지들의 안부를 묻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많이 쓴 편지는 역시 “존경하고 사랑하는 당신에게”로 시작되는 동지이자 부인인 이희호에게였다. 세상의 수많은 부부 가운데서도 이들 부부처럼 부부 이상의 동지적 관계도 흔치 않을 것이다. 김대중은 인간적 극한 상황에서 신앙심으로 자신을 격려하고 가정을 지켜준 부인에게 감사와 사랑을 표시하였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오늘로 내가 집을 뜬 지 만 8개월이 되었소, 그동안 당신과 가족 친구들의 고초가 얼마나 컸습니까? 당신에 대해서는 감사한 말뿐이오. 하느님이 돌보셔서 우리 가족과 형제들이 모두 그분 사랑 아래 모이게 되었으며, 믿음을 통해서 난관을 극복해 왔으니 크신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나는 자랑스러운 아내, 사랑스러운 자식들, 그리고 며느리와 손녀들을 가지고 있으니 참 행복하오. 형제들에게도 사랑하는 마음 뿐이오.&lt;BR&gt;
&lt;BR&gt;
나는 내 운명이 어떻게 되더라도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 뜻대로 이루어지기만을 매일 기구합니다. 나는 온 세상 사람이 예수님을 부인해도 그분을 사랑하겠소. 나는 모든 신학자들이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해도 그분을 믿겠소. 모든 과학자들이 그분의 부활을 조롱해도 나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소.&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0)&lt;/span&gt;&lt;BR&gt;
&lt;BR&gt;
김대중은 1982년 3월 1일 전두환의 5공 출범 1주년 기념 대사면조치의 일환으로 무기형에서 징역 2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58세의 중년에게 무기형이나 20년형의 의미는 ‘오십보 백보’의 차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크게 생색을 내면서 ‘은전’을 베풀었다고 선전하였다. &lt;BR&gt;
&lt;BR&gt;
하지만 수형 생활에서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신문ㆍTVㆍ라디오는 여전히 금지되었다. 어느 때는 하도 커피가 마시고 싶어 사 마실 수 있도록 요청하여 교도소장이 몇 차례 이를 들어 주었는데, 안전기획부에서 알게 되면서 그마저 금지시켰다. 그럴수록 커피에 대한 마음 간절했지만 ‘금지’의 푯말은 치워지지 않았다.&lt;BR&gt;
&lt;BR&gt;
수형생활 1년 쯤이 지난 1982년 1월 6일, 58세의 생일을 맞아 세 아들이 면회를 와서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올렸다. 아비는 감동해서 편지지에 36행의 즉흥 시조를 지었다.&lt;BR&gt;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옥중단시&lt;BR&gt;
&lt;BR&gt;
면회실 마루위에 세자식이 큰절하며&lt;BR&gt;
새해와 생일하례 보는 이 애끓는다&lt;BR&gt;
아내여 서러워마라 이 자식들이 있잖소&lt;BR&gt;
이 몸이 사는 뜻을 뉘라서 묻는다면&lt;BR&gt;
우리가 살아온 서러운 그 세월을&lt;BR&gt;
후손에 떠넘겨주는 못난조상 아니고저&lt;BR&gt;
&lt;BR&gt;
추야장 긴긴밤에 감방안에 홀로누워&lt;BR&gt;
나라일 생각하며 전전반측 잠못잘 때&lt;BR&gt;
명월은 만건곤하나 내마음은 어둡다&lt;BR&gt;
&lt;BR&gt;
둥실뜬 저구름아 너를 빌려 잠시돌자&lt;BR&gt;
강산도 보고싶고 겨레도 찾고싶다&lt;BR&gt;
생시에 아니되겠으면 꿈이라면 어떨까&lt;BR&gt;
&lt;BR&gt;
지난겨울 모진추위 눈물로 지샛는데&lt;BR&gt;
무정한 꽃샘바람 끝끝내 한을 맺네&lt;BR&gt;
우습다 천지이치를 심술편들 어쩌랴&lt;BR&gt;
&lt;BR&gt;
내게도 올것인가 자유의 기쁜날이&lt;BR&gt;
와야만 할것인데 올때가 되었는데&lt;BR&gt;
시인의 애타는 심정 이내한을 읊었나&lt;BR&gt;
&lt;BR&gt;
가족이 보고싶다. 벗들이 보고싶다&lt;BR&gt;
강산도 보고싶고 겨레도 보고싶다&lt;BR&gt;
그렇다 종소리퍼지는날 얼싸안고 보리라.(하략)&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1)&lt;/span&gt;&lt;BR&gt;
&lt;BR&gt;
&lt;BR&gt;
우리의 전통적인 정형 시조라고 하기에는 격식이나 시어(詩語)에 걸맞지 않는 표현이 적지 않지만, 한 양심수가 옥중에서 자식들의 세배를 받고 쓴 즉흥 시조라는 점, 그 마디마디에서 통절함이 배어 있다. 글은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함을 느끼게 한다.&lt;BR&gt;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lt;BR&gt;
8) &amp;lt;김대중 옥중서신(1)&amp;gt;, 제12신, '토인비에게 배우는 도전과 응전'&lt;BR&gt;
9) 앞과 같음.&lt;BR&gt;
10) &amp;lt;김대중 옥중서신(1)&amp;gt;, 제5신, '부활에의 확신'&lt;BR&gt;
11) 앞의 책, 401~408쪽.&lt;/span&gt;&lt;/font&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4790213&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18장] 청주교도소 2년 반, 책읽고 ‘옥중서신’</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Sun, 15 Nov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137회] ‘옥중서신’ 주제어와 읽고 싶은 책</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303706</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출옥 뒤에 붙힌 ‘옥중서신’의 주제(제목)은 다음과 같다.(괄호 안은 집필 날짜)&lt;BR&gt;
&lt;BR&gt;
제1신 － 죽음 앞에서의 결단 (1980년 11월 21일).&lt;BR&gt;
제2신 － 사랑없이는 평화도 화해도 없다 (1980년 11월 24일).&lt;BR&gt;
제3신 － 원망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는다 (1980년 12월 7일).&lt;BR&gt;
제4신 － 무리하지도 말고 쉬지도 말자 (1980년 12월 19일).&lt;BR&gt;
제5신 － 부활에의 확신 (1981년 1월 17일).&lt;BR&gt;
제6신 － 새로운 삶의 출발 (1981년 1월 29일).&lt;BR&gt;
제7신 － 죽음의 고비 뒤에 오는 고독 (1981년 2월 21일).&lt;BR&gt;
제8신 － 용서와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겨낸다 (1981년 3월 19일).&lt;BR&gt;
제9신 － 하느님 앞에 솔직하고 겸손하게 (1981년 4월 2일).&lt;BR&gt;
제10신 － 은혜와 감사 (1981년 5월 22일).&lt;BR&gt;
제11신 － 성인은 위대한 실천자 (1981년 6월 23일).&lt;BR&gt;
제12신 － 토인비에게 배우는 도전과 응전 (1981년 7월 29일).&lt;BR&gt;
제13신 － 인류의 역사와 미래 (1981년 8월 23일).&lt;BR&gt;
제14신 － 우리민족의 장점과 단점 (1981년 8월 30일).&lt;BR&gt;
제15신 － 개인의 구원과 사회적 구원은 하나 (1981년 10월 28일).&lt;BR&gt;
제16신 － 위대한 선각자 － 원효ㆍ율곡ㆍ수운 (1981년 11월 27일).&lt;BR&gt;
제17신 － 예수탄생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1981년 12월 16일).&lt;BR&gt;
제18신 － 현대사회의 도덕적 위기와 그 원인 (1982년 1월 29일).&lt;BR&gt;
제19신 － 조선왕조의 자기형벌 (1982년 2월 23일).&lt;BR&gt;
제20신 － 운명을 사랑한다 (1982년 3월 25일).&lt;BR&gt;
제21신 －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1982년 4월 26일).&lt;BR&gt;
제22신 － 인류문명과 우리의 과제 (1982년 5월 25일).&lt;BR&gt;
제23신 － 주는 사랑과 받는 사랑 (1982년 6월 25일).&lt;BR&gt;
제24신 － 간디는 예수의 참 제자 (1982년 7월 27일).&lt;BR&gt;
제25신 － 민주의 역사 (1982년 8월 25일)&lt;BR&gt;
제26신 － 경제발전의 핵심은 사람 (1982년 9월 23일).&lt;BR&gt;
제27신 － 한반도의 평화와 4대국 (1982년 11월 2일).&lt;BR&gt;
제28신 － 철학자들의 정치관비판 (1982년 11월 26일).&lt;BR&gt;
제29신 － 민족을 위한 기도 (1982년 12월 15일).&lt;BR&gt;
&lt;BR&gt;
김대중은 청주교도소로 이감된 뒤부터 쓴 편지의 말미에는 “책을 넣어 달라”면서 저자와 책명을 기록했다. 그리고 차입된 이 책들을 하루 평균 10시간씩 읽었다. ‘옥중서신’에서 명기한 책은 다음과 같다. 그의 ‘독서의 편역’을 알아보기 위해 전재한다. &lt;BR&gt;
&lt;BR&gt;
칸트 － &amp;lt;실천 이성비판&amp;gt;&lt;BR&gt;
갈브레이드 － &amp;lt;불확실성의 시대&amp;gt;, &amp;lt;경제학과 공공목적&amp;gt;&lt;BR&gt;
솔제니친 － &amp;lt;암병동&amp;gt;(영문)&lt;BR&gt;
월터 닉 － &amp;lt;프리드리히 니체&amp;gt;&lt;BR&gt;
월터 닉 － &amp;lt;도스토예프스키&amp;gt;&lt;BR&gt;
월터 닉 － &amp;lt;위대한 성인들&amp;gt;&lt;BR&gt;
니 체 － &amp;lt;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mp;gt;&lt;BR&gt;
B . 러셀－ &amp;lt;서양철학사 상ㆍ하&amp;gt;&lt;BR&gt;
마루야마－ &amp;lt;일본의 현대사상&amp;gt;&lt;BR&gt;
존 힉 － &amp;lt;종교철학&amp;gt;&lt;BR&gt;
최명관 － &amp;lt;플라톤의 대화&amp;gt;&lt;BR&gt;
지베스 － &amp;lt;과학정신과 기독교신앙&amp;gt;&lt;BR&gt;
wㆍ리프만 － &amp;lt;민주주의 몰락과 재건&amp;gt;&lt;BR&gt;
진단학회 － &amp;lt;한국사&amp;gt; 전 7권&lt;BR&gt;
&amp;lt;일본문화의 원류로서의 비교 한국문화&amp;gt;&lt;BR&gt;
버클리 － &amp;lt;바울로의 인간과 사상&amp;gt;&lt;BR&gt;
로빈슨 － &amp;lt;신에게 솔직히&amp;gt;&lt;BR&gt;
코 헨 － &amp;lt;만민의 탈무드&amp;gt;&lt;BR&gt;
노만 제이콥스 － &amp;lt;대중시대의 문화와 예술&amp;gt;&lt;BR&gt;
버 논 － &amp;lt;대국적 기업&amp;gt;&lt;BR&gt;
변형윤 － &amp;lt;한국경제의 진단과 반성&amp;gt;&lt;BR&gt;
임종철 － &amp;lt;국제경제론&amp;gt;&lt;BR&gt;
－ &amp;lt;신전략 사상사&amp;gt;&lt;BR&gt;
Eㆍ카잔 － &amp;lt;아메리카 아메리카&amp;gt;&lt;BR&gt;
유동식 － &amp;lt;한국종교와 기독교&amp;gt;&lt;BR&gt;
도스토예프시키 － &amp;lt;백치&amp;gt;. &amp;lt;악령&amp;gt;. &amp;lt;미성년&amp;gt;&lt;BR&gt;
톨스토이 － &amp;lt;부활&amp;gt;&lt;BR&gt;
고골리 － &amp;lt;죽은 넋&amp;gt;&lt;BR&gt;
까 뮈 － &amp;lt;이방인&amp;gt;, &amp;lt;시지프스의 신화&amp;gt;&lt;BR&gt;
디킨스 － &amp;lt;크리스마스 캐롤&amp;gt;&lt;BR&gt;
Sㆍ모 음 － &amp;lt;인간의 굴레&amp;gt;&lt;BR&gt;
파스테르나크 － &amp;lt;의사 지바고&amp;gt;&lt;BR&gt;
니 체 － &amp;lt;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amp;gt;&lt;BR&gt;
사마원태랑 － &amp;lt;덕천가강 상ㆍ하&amp;gt;&lt;BR&gt;
&amp;lt;제2차 바티간공의회 문헌&amp;gt;&lt;BR&gt;
&amp;lt;하나의 믿음&amp;gt;&lt;BR&gt;
라이샤워ㆍ페어벵크 － &amp;lt;동아시아 문화사&amp;gt;&lt;BR&gt;
토 인 비 － &amp;lt;역사의 연구&amp;gt;(도설축소판)&lt;BR&gt;
Aㆍ토플러 － &amp;lt;제3의 물결&amp;gt;&lt;BR&gt;
jㆍjㆍsㆍ쉬라이버 － &amp;lt;미국의 도전&amp;gt;&lt;BR&gt;
로스토우 － &amp;lt;경제발전의 제단계&amp;gt;&lt;BR&gt;
드러커 － &amp;lt;단절의 시대&amp;gt;&lt;BR&gt;
갈브레이드－ &amp;lt;불확실성의 시대&amp;gt;, &amp;lt;경제학과 공공목적&amp;gt;&lt;BR&gt;
변 형 윤 － &amp;lt;한국경제의 진단과 반성&amp;gt;&lt;BR&gt;
G 뮈르달 － &amp;lt;경제학 비판&amp;gt;&lt;BR&gt;
최 남 선 － &amp;lt;조선상식&amp;gt;&lt;BR&gt;
아담 스미스 － &amp;lt;국부론&amp;gt;&lt;BR&gt;
윤 성 범 － &amp;lt;한국사상과 기독교&amp;gt;&lt;BR&gt;
유 홍 열 － &amp;lt;한국천주교회사&amp;gt;&lt;BR&gt;
슘 페 터 － &amp;lt;자본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amp;gt;&lt;BR&gt;
헤밍웨이 － &amp;lt;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amp;gt;&lt;BR&gt;
마가레트 미첼 － &amp;lt;바람과 함께 사라지다&amp;gt;&lt;BR&gt;
황 석 영 － &amp;lt;어둠의 자식들&amp;gt;&lt;BR&gt;
니 체 － &amp;lt;이 사람을 보라&amp;gt;&lt;BR&gt;
레이몽 아롱 － &amp;lt;사회철학사&amp;gt;&lt;BR&gt;
&amp;lt;영어사전&amp;gt;(단권)&lt;BR&gt;
&amp;lt;백과사전&amp;gt;(최신판, 단권)&lt;BR&gt;
이 만 갑 － &amp;lt;한국사회&amp;gt;&lt;BR&gt;
진순신 － &amp;lt;중국인과 일본인&amp;gt;&lt;BR&gt;
에르라 보겔 － &lt;lapan&gt;&lt;BR&gt;
신 용 석 － &amp;lt;유럽합중국&amp;gt;&lt;BR&gt;
디 킨 스 － &amp;lt;두 도시 이야기&amp;gt;&lt;BR&gt;
스 탕 달 － &amp;lt;적과 흑&amp;gt;&lt;BR&gt;
톨스토이 － &amp;lt;전쟁과 평화&amp;gt;&lt;BR&gt;
헤밍웨이 － &amp;lt;노인과 평화&amp;gt;&lt;BR&gt;
앙드레 모로아 － &amp;lt;프랑스사&amp;gt;&lt;BR&gt;
레이몽 아롱 － &amp;lt;사회사상의 흐름&amp;gt;&lt;BR&gt;
Kㆍ야스퍼스 － &amp;lt;철학적 신앙&amp;gt;&lt;BR&gt;
소 홍 열 － &amp;lt;논리와 사고&amp;gt;&lt;BR&gt;
Cㆍ로웬탈 － &amp;lt;문학과 인간상&amp;gt;&lt;BR&gt;
요셉 회프너 － &amp;lt;그리스도교 사회론&amp;gt;&lt;BR&gt;
Gㆍ구티에레즈 － &amp;lt;해방신학&amp;gt;&lt;BR&gt;
배한국 역 － &amp;lt;본 회퍼의 사상&amp;gt;, &amp;lt;법전&amp;gt;, &amp;lt;손자&amp;gt;&lt;BR&gt;
푸쉬킨 － &amp;lt;예브게서오네킨&amp;gt;&lt;BR&gt;
디킨즈 － &amp;lt;데이비드 코퍼필드&amp;gt;&lt;BR&gt;
G.짐멜 － &amp;lt;사회학&amp;gt;&lt;BR&gt;
서인석 － &amp;lt;성서의 가난한 사람들&amp;gt;&lt;BR&gt;
J.듀이 － &amp;lt;경험과 자연&amp;gt;, &amp;lt;논리학&amp;gt;&lt;BR&gt;
이기백 － &amp;lt;한국사신론&amp;gt;, &amp;lt;신과정치사회사&amp;gt;&lt;BR&gt;
변태섭 － &amp;lt;고려정치제도사&amp;gt;&lt;BR&gt;
천관우(편) － &amp;lt;한국상고사&amp;gt;&lt;BR&gt;
앙드레모로아 － &amp;lt;미국사&amp;gt;&lt;BR&gt;
볼트만 － &amp;lt;희망의 신학&amp;gt;&lt;BR&gt;
A.모로아 － &amp;lt;미국사&amp;gt;&lt;BR&gt;
보마르세 － &amp;lt;휘가로의 결혼&amp;gt;&lt;BR&gt;
뒤 마 － &amp;lt;몬테크리스토 백작&amp;gt;&lt;BR&gt;
야스퍼스 － &amp;lt;니체와 기독교&amp;gt;&lt;BR&gt;
강주진 － &amp;lt;고기봉의 생애와 사상&amp;gt;&lt;BR&gt;
한스 켈젠 - &amp;lt;민주주의와 종교 철학 경제&amp;gt;&lt;BR&gt;
E.프롬 - &amp;lt;소유냐 존재냐&amp;gt;&lt;BR&gt;
최준영 - &amp;lt;경영인&amp;gt;&lt;BR&gt;
해음사조랑(海音寺潮郞) - &amp;lt;시경&amp;gt;&lt;BR&gt;
박영문고 - &amp;lt;니체의생애와 사상&amp;gt;, &amp;lt;파스칼의 생애와 사상&amp;gt;, &amp;lt;한국사상의 원천&amp;gt;&lt;BR&gt;
분도출판사 - &amp;lt;왜그리스도인가&amp;gt;&lt;BR&gt;
경향잡지사 - &amp;lt;한국가톨릭지도서&amp;gt;&lt;BR&gt;
천주교서점 - 떼이야르드 샤르텡신부의 저서&lt;BR&gt;
이어령 - &amp;lt;축소지향의 일본인&amp;gt;(일어판)&lt;BR&gt;
민경배 - &amp;lt;한국기독교회사&amp;gt;&lt;BR&gt;
황석영 - &amp;lt;돼지꿈&amp;gt;&lt;BR&gt;
프로이드 - &amp;lt;심리학입문&amp;gt;&lt;BR&gt;
정우사 - &amp;lt;잠깐 보고 온 사후의 세계&amp;gt;&lt;BR&gt;
노명식 - &amp;lt;현대역사ㆍ사상&amp;gt;&lt;BR&gt;
카노이 - &amp;lt;교육과 문화적 식민주의&amp;gt;&lt;BR&gt;
엘리아데 － &amp;lt;우주와 역사&amp;gt;&lt;BR&gt;
유동식 - &amp;lt;민속종교와 한국문화&amp;gt;&lt;BR&gt;
조승혁 - &amp;lt;도시산업선교의 인식&amp;gt;, &amp;lt;성서&amp;gt;(영문판, 가톨릭의 것), &amp;lt;맹자&amp;gt;, &amp;lt;장자&amp;gt;, &amp;lt;시경&amp;gt;&lt;BR&gt;
리지웨이 - &amp;lt;한국전쟁&amp;gt;&lt;BR&gt;
송건호 - &amp;lt;서재필과 이승만&amp;gt;&lt;BR&gt;
주석균 - &amp;lt;농민을 위하여&amp;gt;&lt;BR&gt;
삼민사 - &amp;lt;사하로프의 목소리&amp;gt;&lt;BR&gt;
이순열 - &amp;lt;음악을 찾아서&amp;gt;&lt;BR&gt;
박영문고 - &amp;lt;야스퍼스의 생애와 사상&amp;gt;, &amp;lt;니체의 생애와 사상&amp;gt;, &amp;lt;정다산의 생애와 사상&amp;gt;, &amp;lt;슈바이처의 생애와 사상&amp;gt;&lt;BR&gt;
까 뮈 - &amp;lt;적지와 왕국&amp;gt;&lt;BR&gt;
칸 트 - &amp;lt;도덕형이상학 원론&amp;gt;&lt;BR&gt;
괴 퇴 - &amp;lt;젊은 베르테르의 슬픔&amp;gt;&lt;BR&gt;
요세프스 - &lt;the&gt;&lt;BR&gt;
EㆍHㆍ카 - &amp;lt;역사란 무엇인가&amp;gt;&lt;BR&gt;
러셀 외 - &amp;lt;인생이란 무엇인가&amp;gt;&lt;BR&gt;
Hㆍ콜만 - &amp;lt;신약성서신학&amp;gt;(한국 신학연구소)&lt;BR&gt;
유인호 - &amp;lt;한국경제의 실상과 허상&amp;gt;&lt;BR&gt;
차인석 - &amp;lt;현대정치와 철학&amp;gt;&lt;BR&gt;
장을병 - &amp;lt;정치의 파라독스&amp;gt;&lt;BR&gt;
Jㆍ네루 - &amp;lt;세계사편력&amp;gt;&lt;BR&gt;
박현채 - &amp;lt;민중과 경제&amp;gt;&lt;BR&gt;
&lt;BR&gt;
&lt;/font&gt;&lt;BR&gt;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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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18장] 청주교도소 2년 반, 책읽고 ‘옥중서신’</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Sat, 14 Nov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136회] 유언장과 같은 옥중서신</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303701</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김대중이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 수감되어 처음으로 부인에게 쓴 ‘옥중서신’은 1980년 11월 21일, 아직 사형선고에서 감형조치가 되기 전이다. 그러니까 ‘사형수’로서 유언장과 같은 글인 셈이다. 1981년 1월 23일자로 쓴 제5신까지는 사형수로서 유언을 남기는 심경으로 쓴 서신이다. 그래서 거의 전문을 ‘샘플’로 인용한다.&lt;BR&gt;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존경하며 사랑하는 당신에게&lt;BR&gt;
&lt;BR&gt;
지난 5월 17일 이래 우리 집안이 겪어 온 엄청난 시련의 연속은 우리가 일생을 두고 겪은 모든 것을 합친다 해도 이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당신이 맡아서 감당해야 했던 고뇌와 신산은 그 누구의 것보다 컸고 심한 것이었습니다. &lt;BR&gt;
&lt;BR&gt;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과 자제로써 이를 극복해 온 당신의 신앙과 용기에 대해서 나는 한없이 감사하며, 이러한 믿음과 힘을 당신에게 주신 하느님의 은혜를 감사해 마지않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그리고 당신의 힘이 없었던들 우리가 어떻게 이 반년을 지탱해 올 수 있었겠습니까?&lt;BR&gt;
&lt;BR&gt;
이번 일에 있어서 무엇보다 기쁘고 감사한 것은 당신과 나를 포함해서 우리 가정과 주위가 더욱 굳은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겪은 두 자식이 다 같이 큰 믿음의 발전을 보였으며, 대현(막내아우) 이와 기타 고난 중인 비서실 동지들의 신앙의 소식을 들을 때 믿음은 고난 속에서 자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lt;BR&gt;
&lt;BR&gt;
나는 지금까지 나 자신이 어느 정도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이제 죽음을 내다보는 한계상황 속에서의 자기실존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 믿음 속의 그것인가 하는 것을 매일 같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lt;BR&gt;
&lt;BR&gt;
희망과 좌절, 기쁨과 공포 그리고 해결과 의혹의 갈등과 번민을 매일 같이 되풀이해 왔고 지금도 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으며, 그 분이 나와 같이 계시며,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며, 그 사랑 때문에 지금의 이 고난을 허락하셨으며, 나를 위하여 모든 사소한 일까지도 돌보시며, 지금 이 시간에도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기 위한 역사(役事)를 쉬지 않고 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나의 감정이나 지식으로 해서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든 것인가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통감하면서 부족한 믿음에 절망하고 화를 낸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lt;BR&gt;
&lt;BR&gt;
그러나 나는 수많은 갈등과 방황 속에서 “믿음이란 느낌이나 지식에 기반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의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러한 의지의 결단은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기쁨과 감사와 찬양도 먼저 의지로써 행하고 뒤따라가는 것이다.”는 판단 아래 오직 눈을 우리의 주님께 고정시키고 흔들리지 않도록 성신께서 도와주시도록 기구하고 있습니다.&lt;BR&gt;
&lt;BR&gt;
나의 의지의 결단을 세운 최대의 기초는 주님의 복음이며, 그 중에서도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다면 하느님의 계심, 죄의 구속, 성신의 같이 계심과 그 인도, 언제나 돌보시는 하느님의 사랑, 그리고 천국영복(天國永福)의 소망 등 모든 것이 믿어질 수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lt;BR&gt;
&lt;BR&gt;
예수님의 부활은 신앙의 신비이기도 하지만, 역사적 사실로서도 근거가 상당히 객관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의 수난 때 그 분을 버리고 자기 살기 위해서 도망쳤던 사도들이 그 분이 그렇게도 비참하고 무력하게 돌아가신 후에 새삼스럽게 목숨을 건 신앙을 가지고 온갖 고난과 죽음을 감수하면서 복음전달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예수의 체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예수 생존시는 대면조차 없었으며 그가 돌아가신 후에는 열정과 사명감을 가지고 그리스도교 교도를 박해한 사도 바울의 회심과 그의 초인간적이며 결사적인 포교활동, 그리고 마침내 겪은 순교는 그가 체험한 부활하신 예수 없이는 설명할 길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lt;BR&gt;
&lt;BR&gt;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는 것이 현재 나의 믿음을 지탱하는 최대의 힘이며, 언제나 눈을 그 분에게 고정시키고 결코 그 분의 옷소매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항시 기도하기를 “하느님은 저를 사랑하시는 것을 제가 믿습니다. 저의 현재의 환경도 주님이 주신 것이며, 주님이 보실 때 이것이 저를 위하여 최선이 아니면 허락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제가 주님의 뜻하심과 앞으로의 계획하심을 알 수는 없으나 오직 주님의 사랑만을 믿고 순종하며 찬양하겠습니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lt;BR&gt;
&lt;BR&gt;
나는 나의 감정이 어떠하든, 외부적 환경이 얼마나 가혹하건, 내 일의 운명이 어떻게 되건,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시며, 나를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는 소망으로 일관할 결심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같이 계심과 깊은 사랑은 당신과 우리 자식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정다운 형제들에게도 함께 하심을 믿고 기구하고 있습니다.&lt;BR&gt;
&lt;BR&gt;
세속적으로 볼 때 나는 결코 좋은 남편도 못 되며, 좋은 아버지도 못 되었습니다. 그리고 형제들, 친척들에게 얼마나 누를 끼쳤습니까? 또한 가슴 아픈 것은 나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과 고난을 당한 사실인데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메어지는 듯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이 모든 일을 위해서 주님의 은총이 내려지도록 기구하고 또 기구하는 것 뿐입니다. (후략)&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7)&lt;/span&gt;&lt;BR&gt;
&lt;BR&gt;
사형선고를 받고 상고심을 기다리는 기간에 쓴, 주기도문과 같은 양심수 김대중의 심경을 읽을 수 있는 첫 서한이어서, 뒷 부분의 가족관계를 빼고 전문을 실었다. 그는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절제절명의 상황에서 예수의 부활사상을 믿고 하느님의 의지를 통해 자신을 지키려 했다. &lt;BR&gt;
&lt;BR&gt;
“눈을 그 분에게 고정하고 결코 그 분의 옷소매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김대중의 절박하면서도 확고한 신앙심은 극한의 상황을 견디게 하는 구원의 손길이었다. 이 ‘옥중서신’에서 김대중의 ‘내면’을 찾을 수 있다. &lt;BR&gt;
&lt;BR&gt;
‘옥중서신’은 제5신까지는 사형선고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기 전에 쓴 것이어서인지, 종교적인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제6신부터는 청주교도소에서 무기수로 또는 20년 장기수로 복역하면서 신학ㆍ역사ㆍ민족ㆍ사회ㆍ도덕ㆍ운명ㆍ문명ㆍ사랑ㆍ민중ㆍ경제ㆍ한반도ㆍ평화ㆍ철학 등 다방면에 걸쳐 폭넓은 사유와 독후감을 기술했다. 청주교도소에 수감된 뒤에는 한 달에 한 편밖에 쓸 수가 없어서 29편에 이른다.&lt;BR&gt;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lt;BR&gt;
7) 앞의 책, 21~24쪽, 2000년.&lt;/span&gt;&lt;BR&gt;
&lt;/font&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4773016&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18장] 청주교도소 2년 반, 책읽고 ‘옥중서신’</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Fri, 13 Nov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135회] 하루 10시간씩 독서, 편지쓰기</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303697</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김대중은 청주교도소에서 수도사처럼 ‘내면의 세계’를 찾고자 많은 책을 읽고, 틈나는 대로 부인과 가족에게 편지를 썼다.&lt;BR&gt;
&lt;BR&gt;
이희호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남편에게 편지를 써서 2년간 640여통, 아들 셋은 약 200통을 써 보냈다. &lt;BR&gt;
세계 행형사(行刑史)에서 이와 같은 사례도 흔치 않은 일이다. 진주교도소에 이어 청주교도소에서 하루 평균 10시간 씩의 책읽기는 김대중에게 지식과 식견을 더욱 넓고 깊게 만들어 주었다. &lt;BR&gt;
&lt;BR&gt;
그는 이 기간에 수 백 권의 책을 독파했다. 그리고 ‘독후감’을 가족에게 보낸 봉함엽서에 오롯이 담아냈다. 뒷날 &amp;lt;김대중 옥중서신&amp;gt;로 묶인 편지글은 신영복의 &amp;lt;감옥으로부터의 편지&amp;gt;와 더불어 대표적 옥중기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희호가 구해서 차입한 책만도 500여 권에 이른다.&lt;BR&gt;
&lt;BR&gt;
무기수에 대한 전두환 정권의 박해는 세월이 가도 달라지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 밖에 편지를 쓰지 못하도록 하고, 그나마 규격된 봉함엽서에 국한시켰다. 그래서 김대중은 내용을 요약하고 문자를 축소해서 쓰는 ‘기술’을 연마했다. 편지지 한 장에 200자 원고지 104매 분량의 글로 쓴 적도 있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나는 월 1회에 한해 한 장의 편지지에만 편지를 쓸 수 있었다. 그런 제한은 어떤 교도소에도 없었다. 나는 용지를 더 달라고 요청했지만 헛수고였다. 결국 문자를 축소해서 쓰는 습관을 들였다. 일본 매스컴이 내 글씨 크기가 쌀알 반 정도라고 묘사했지만 그건 결코 과장이 아니다. 나는 편지지 한 장에 약 1만 4천자나 써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잔 글씨로 편지 한 통을 다 쓰려면 거의 12시간 내지 13시간이나 걸렸고 때로 이틀간이나 걸릴 때도 있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5)&lt;/span&gt;&lt;BR&gt;
&lt;BR&gt;
1980년대 중기에 국내에서 초간되었다가 2000년 7월 한 출판사를 통해 재간되고, 김대중 사후인 2009년 9월 &amp;lt;시대의 창&amp;gt;에서 대폭 보완하여 발간한 &amp;lt;김대중 옥중서신&amp;gt;은 한승헌 변호사가 추천사 '불행한 공간, 위대한 증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옥중’은 불행한 공간의 극(極)입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그런 숨막히는 극한상황 속에서 전후 6년 동안이나 갇혀 사셨습니다. 이 책에 담긴 ‘옥중서신’은 그런 불행 속에서 싹트고 자라서 꽃이 핀 위대한 간증의 글입니다. 김 대통령께서 독재자의 거듭된 박해로 감옥에 드나들지 않으셨다면 이런 기념비적인 편지 모음은 세상에 나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lt;BR&gt;
&lt;BR&gt;
다시 말해서 김 대통령께서 군사독재를 물리치기 위한 민주화투쟁의 선봉에 서서 치열하게 싸웠기 때문에 ‘옥중’으로 가셨고, 거기서 ‘서신’이 나오게 된 것일진대, 여기 수록된 옥중편지는 그것을 주고받은 내외분 사이의 서신에 그치지 아니하고, 한국 현대사를 밝혀보는 감정문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6)&lt;/span&gt;&lt;BR&gt;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lt;BR&gt;
5) 앞의 책, 156쪽.&lt;BR&gt;
6) &amp;lt;김대중이 이희호에게 - 옥중서신(1)&amp;gt;, 6~7쪽.&lt;/span&gt;&lt;BR&gt;
&lt;/font&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4762148&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18장] 청주교도소 2년 반, 책읽고 ‘옥중서신’</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Thu, 12 Nov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134회] 철통 감시 속의 수인(囚人)번호 ‘9’</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303693</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감옥은 노예의 나라에서 자유인이 명예롭게 살 수 있는 유일한 집이다.” &lt;BR&gt;
&lt;BR&gt;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말이다. &lt;BR&gt;
1980년대 초 한국사회는 소로우의 말처럼 자유인들이 감옥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노예의 나라’였다.&lt;BR&gt;
&lt;BR&gt;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된 김대중은 1981년 1월 24일 육군교도소에서 충청도 청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 &lt;BR&gt;
머리를 깎이고 푸른 죄수복에 수인번호 ‘9’를 단 그를 수감하기 위해 정부는 1.742평의 특별감방을 만들었다.&lt;BR&gt;
&lt;BR&gt;
독방의 양 옆은 모두 비워 놓고 감방 주위는 벽돌로 쌓아서 아무나 들어올 수 없도록 차단시켰다. 간수 2명씩이 24시간 교대로 감시하였다. 감방 안에는 작은 창이 하나 붙어 있었는데, 이마저 2중 철망으로 씌워서 하늘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들었다. 한자 ‘수인(囚人)’의 글자처럼 사방이 막힌 공간에 사람을 가두는, 형상 그대로였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내 감방은 세 겹으로 막아져서 교도소의 다른 곳과는 완전 격리되었다. 나는 감방 한가운데 수용되어 다른 한 군데는 나를 감시하는 간수가 묵고 있었고, 다른 한 곳은 욕실이었다. 거기에는 샤워할 때 쓰는 바가지 한 개만 놓여 있었다.&lt;BR&gt;
&lt;BR&gt;
5명의 간수 중 2명이 한 조가 되어 항상 나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감방에는 10명 정도의 수감자가 있었다. 그래서 간수와 수감자의 비율은 보통 1대 100정도지만, 내 경우에는 5대 1의 비율이었고 500배나 감시가 강화된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그만큼 나를 두려워 한 것일까?&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lt;/span&gt;&lt;BR&gt;
&lt;BR&gt;
우리나라에서 1월 하순이면 계절적으로 가장 추운 절기이다. 난방이 되지 않는 청주교도소 독방의 기온은 추울 때는 영하 15도 내지 18도까지 내려갔다. 혹한기에 이곳에 수감된 김대중은 긴긴 겨울 동안 춥고 눅눅한 감방에서 수형생활을 하게 되었다. 체질적으로 추위에 약한 그에게는 이중삼중의 고통이었다. 여기에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은 무릎관절의 통증으로 바닥에 앉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가부좌도 틀지 못하는 어려움이었다. &lt;BR&gt;
&lt;BR&gt;
많은 시간을 서 있거나 비스듬이 누울 수 밖에 없었다. 이같은 상태를 보다못해 교도소에서 딱딱한 나무 책걸상과 작은 전기스토브를 들여 주었다. 그러나 스토브는 용량이 적어서 감방은 얼음이 얼 정도였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나무 침상과 얇은 모포 3장, 딱딱한 나무 책걸상, 벽에 덩그러니 걸린 비와 쓰레받기, 누렇게 변한 좌변기⋯. 충북 청주교도소는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기념해 김 대통령이 수감됐던 1.742평 독방을 15일 언론에 공개했다. 교도소측은 김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 이 감방을 비워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했다.&lt;BR&gt;
&lt;BR&gt;
이 감방에 이르려면 높은 교도소 담장 한 쪽에 마련된 육중한 철제 출입문을 통과한 뒤 100m의 긴 복도를 지그재그로 지나야 한다. 김 대통령은 신군부 시절 군사법원에서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무기수로 감형된 81년 1월 31일 이 감방에 수감된 뒤 다음해 12월 16일까지 2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2)&lt;/span&gt;&lt;BR&gt;
&lt;BR&gt;
뒤늦게 언론에 비친 청주교도소의 실상이다. 전두환 정부는 청주교도소에서도 가장 구석진 음습한 독방에 그를 가뒀다.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을 무기수로 감옥에 가두고도 비인도적인 방법으로 탄압했다. 법률로 보장된 주일 성당예배도 못가게 막고 한 달에 한 번씩 30분 동안 보장된 가족면회 시간도 10분으로 제한했다. &lt;BR&gt;
&lt;BR&gt;
감방에 가족이 보낸 편지를 보관하는 것도, 손녀들의 사진을 몸에 지니는 것도 허락하지 않고 모두 수거해 갔다. 매정하기 그지없는 처사였다. 여러 달 뒤에야 법률 조항과 교도소 수칙을 들어 담당관들과 논쟁 끝에 가족면회를 월 2회, 20분으로 늘릴 수 있었다. 그러나 편지 수신은 철저하게 통제하여 직계 가족과 형제들만으로 제한하였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나는 당국과 셀 수 없을 정도로 논쟁한 끝에 겨우 면회를 월 2회, 시간은 20분으로 늘릴 수 있었다. &lt;BR&gt;
그러나 직계 가족에 한해서만 면회가 허락되었을 뿐이다. 그나마 대화만 할 수 있게끔 구멍이 뚫린 두꺼운 유리가 가로막힌 탓에 가족들이 와도 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이런 상태로 2년간 나는 가족의 얼굴을 확실히 볼 수 없었다. 물론 우리의 대화는 모두 록음되었고, 교도관에 의해 기록까지 되고 있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3)&lt;/span&gt;&lt;BR&gt;
&lt;BR&gt;
김대중이 감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책을 읽는 것 뿐이었다. 하루 평균 10시간 이상 책을 읽으면서 고달픈 옥살이를 책읽기에 활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감방 안에는 책을 10권 이내로 제한하여 책의 차입이 늦어질 때면 읽은 책을 다시 보는 적도 적지 않았다. 이것 역시 교섭 끝에 30권까지 보관 할 수 있게 되었다. 좁은 감방에 읽고 싶은 책 30여 권을 쌓아 놓을 때는 동교동 집 자하의 서재에 앉은 것처럼 흐뭇해졌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나는 양서를 읽을 때마다 “만약 내가 여기 오지 않았다면 이 진리를 알 수 없었을 것”이라며 감격했다. &lt;BR&gt;
그런 의미에서 교도소에 수감된 것을 정말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독서를 하면서 나는 인간에게는 완벽한 불행은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4)&lt;/span&gt;&lt;BR&gt;
&lt;BR&gt;
김대중은 언제 풀려날 지 기약없는 옥중 생활을 사색하고 책을 읽으면서 내면을 충실히 하는 계기로 삼았다. ‘완벽한 불행’이 없다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lt;BR&gt;
&lt;BR&gt;
&amp;lt;자유의 감옥&amp;gt;을 쓴 미하엘 엔데는 “인간이 자기에게 내면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자신의 진정한 가치도 잊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바깥세상과 연결시켜 주어야 하고, 늘 새로워지도록 끊임없이 보살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가끔씩 내면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 자신의 가치를 찾아내지 않으면, 그것은 영영 잃어버리게 된다.”고 의미있는 말을 남겼다.&lt;BR&gt;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lt;BR&gt;
1) &amp;lt;김대중자서전(2)&amp;gt;, 154쪽.&lt;BR&gt;
2) &amp;lt;동아일보&amp;gt;, 2000년 10월 16일.&lt;BR&gt;
3) &amp;lt;김대중자서전(2)&amp;gt;, 155쪽.&lt;BR&gt;
4) 앞의 책, 157쪽.&lt;/span&gt;&lt;BR&gt;
&lt;/font&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4749993&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18장] 청주교도소 2년 반, 책읽고 ‘옥중서신’</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Wed, 11 Nov 2009 23:00:00 GMT</pubDate>
		</item>
	</chan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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