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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nnel>
		<title>김삼웅의 후광(後廣) 김대중 평전</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link>
		<description>&lt;대한매일신보(서울신문)&gt;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4년여동안 독립기념관장에 재직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 제주 4.3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국회 추천),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친일파 인명사전 편찬부원장 등을 맡아 바른 역사 찾기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Fri, 03 Jul 2009 23:05:10 GMT</pubDate>
		<item>
			<title>[3회] 보수의 철벽을 깬 최초의 생존자</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86458</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031079371.jpg&quot; width=&quot;320&quot; height=&quot;428&quot; alt=&quot;&quot; style=&quot;cursor: pointer&quot; onclick=&quot;open_img('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031079371.jpg')&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정원에서 앨빈 토플러의 저서를 열독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lt;/p&gt;&lt;/div&gt;해방 이후 한국현대사는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봉건왕조 사회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lt;font color=&quot;#0000ff&quot;&gt;해방→분단→단독정부 수립→6ㆍ25전쟁→이승만 백색독재→4월 혁명→장면정부 수립→박정희 군사쿠데타→냉전체제→유신독재→산업화→민주화운동→10ㆍ26사태→신군부 등장→광주민주화운동→전두환 폭압통치→6월 항쟁→IMF지배체제→수평적 정권교체→→남북화해협력→이명박의 제2냉전시대&lt;/font&gt;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대이다. &lt;BR&gt;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선진 국가들에서 1000년 동안에 겪을까말까한 사건과 격변을 우리는 60여년 만에 다 겪었거나 겪고 있다. 그 결과 흔히 산업화와 민주화를 압축적으로 성취하였다는 평가를 받는 한편, 다시 20년 전으로 회귀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lt;BR&gt;
&lt;BR&gt;
질풍노도의 시대에 숱한 정치인들이 정계에 나왔다가 사라지고 대권의 꿈을 키웠다가 무산되었다. 처음에는 큰 꿈을 갖고 출발했다가 권력이나 돈뭉치에 팔려 소초(小草)로 변해버린 정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질풍노도의 시대에 한 포기 질풍 경초(勁草)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lt;BR&gt;
&lt;BR&gt;
&lt;strong&gt;&lt;font color=&quot;#cc9900&quot;&gt;경초 ― 사전에는 질풍에도 부러지지 않는 썩 강한 풀,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뜻을 꺾거나 굽히거나 하지 않는 굳센 기개를 가진 사람&lt;/font&gt;&lt;font color=&quot;#cc9900&quot;&gt;을 일컫는다.&lt;/font&gt;&lt;/strong&gt;&lt;BR&gt;
&lt;BR&gt;
김대중은 80년대 이후 자신의 정치적 상징으로 ‘인동초’를 내걸었지만, 생태학적으로 보아 온대지방에서 피는 인동초보다는 그의 입지와 투쟁, 고난과 재기의 과정은 한 포기 '경초'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겠다.&lt;BR&gt;
&lt;BR&gt;
김대중에 대한 평가는 시기상조일 수 있다. 그는 생존 인물이고 여전히 일정한 정치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다. 그는 2009년 초 이명박정부 1년 만에 민주주의, 중산층과 서민경제, 남북관계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이것은 이명박 집권 1년의 실정을 가장 극명하게, 압축적으로 비판한 내용이 되었다.&lt;BR&gt;
&lt;BR&gt;
한나라당 소속 어느 국회의원이 지난해 가을 국정감사장과 언론에서 ‘DJ의 100억 원짜리 양도성 예금증서(CD)설’을 제기했고, 이를 수사해 온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관련이 없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대해 김대중 전대통령측은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훼손 혐의로 아무개 의원을 고소할 정도로, 그는 아직도 정치의 경계선상에서 음해를 받고 있고, 반대 세력의 적대감도 변하지 않고 있다. 최근 한나라당 소속 여성의원 후원회에서는 “노무현처럼 투신자살해 죽으라”는 막말까지 나오는 판이다.&lt;BR&gt;
&lt;BR&gt;
그는 지난 5월 중국의 차기 국가주석으로 유력시 되는 시진핑 국가부주석과 만나 나눈 대담과, 베이징대학 특별강연을 통해 “북핵 문제를 중국이 나서 풀어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비슷한 시기 스티븐 보즈웨스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동교동 사저 방문을 받고, 6자회담 재개를 비롯 한반도 문제를 심도있게 논의했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을 포함하여 미 고위 인사들이 방한할 때는 어김없이 동교동을 찾거나 전화로라도 그와 접촉한다. 그의 활동이 진행형이고, 그에 관한 역사적 평가가 아직 이르지 않느냐는 배경이 된다.&lt;BR&gt;
&lt;BR&gt;
조선 초기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은 “남아미진관(男兒未盡棺) 막도사기기(莫道事己己), 즉 남아가 관뚜껑을 덮지 않았다면 일이 벌써 끝났다고 말하지 말라.”는 글을 남겼다. 우리 속담에 “관에 못을 박기 전에는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는 말도 전한다.&lt;BR&gt;
&lt;BR&gt;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평전을 시도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lt;BR&gt;
‘민주정부’의 동지이자 후임대통령인 노무현의 ‘죽임당한 자결’ 그리고 김대중이 이루고자 했던 꿈과 이룬 업적이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는 터에, 그의 인성과 생애, 정책과 실천과정, 국가적 아젠다와 비젼, 그리고 그의 한계와 문제점 등을 점검하고 분석해 보고자 함이다. &lt;BR&gt;
&lt;BR&gt;
이미 생존인물에 대한 평전이 나온 사례도 없지 않고, 평전이란 시각을 달리하여 얼마든지 쓸 수 있기 때문에, 생과 사의 울타리가 꼭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덧붙이면 살았을 때에 본인의 의견과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평전을 정정, 보완의 기회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lt;BR&gt;
&lt;BR&gt;
기왕에 김대중에 관한 책과 자료집, 보고서는 무수하게 나왔다. &lt;BR&gt;
보수 신문들이 왜곡된 렌즈로 조명한 기사와 논평은 태평로와 광화문거리를 몇 번이나 뒤덮을 만큼 쌓여 있다. 1970년에 중앙정보부가 각종 정보력을 동원하여 그에 대한 방대한 조사보고서를 만든 이후 각급 정보기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출생 이래의 모든 것을 샅샅이 뒤지고 가공하여 만든 보고서 여러 편이 남아 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318347820.jpg&quot; width=&quot;300&quot; height=&quot;362&quot; alt=&quot;&quot; style=&quot;cursor: pointer&quot; onclick=&quot;open_img('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318347820.jpg')&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1969년 삼선개헌반대 부산유세&lt;/p&gt;&lt;/div&gt;1970년대 이래 그가 야당과 재야의 중심인물로 떠오르면서 보수언론과 적대세력에서 활용한 김대중 공격자료는 대부분 중앙정보부에서 만든 보고서가 텍스트가 되었다. 김대중은 1993년 대선에서 패배한 뒤에 “공정한 언론의 평가를 받아보았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유신체제 이래 보수(수구) 세력에 편입된 거대 언론 매체들은 ‘반DJ노선’에는 항상 혼연일체가 되었고, 그를 적대시하는 데 연합전선을 폈다. 그리고 ‘이념적 색안경’을 끼고 온갖 음해를 일삼았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이들은 김대중이 평의원이거나 정계은퇴를 했을 때는 보편적이거나 우호적이지만, 정권에 도전하거나 집권했을 때, 또는 자신들의 이해와 맞는 정권을 비판했을 때는 적대적이 되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할 대상으로 상정한 때문이다. 언론의 정도나 상궤에서 벗어난 타락현상이다.&lt;/p&gt;&lt;/font&gt;&lt;BR&gt;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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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1장] 서설 “행동하는 양심으로”</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Fri, 03 Jul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2회]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민적 현실감각” 갖춰</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86008</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001367619.jpg&quot; width=&quot;300&quot; height=&quot;449&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제6대 국회에서 대정부질의를 하는 김대중 의원.&lt;/p&gt;&lt;/div&gt;한 연구자는 김대중의 저작이나 연설을 분석하면서 김대중의 철학에 대해,&lt;font color=&quot;#cc9900&quot;&gt; “기독교적 소명의식, 도덕주의와 정의감, 실용주의, 이 세 가지가 핵심기조이고, 여기에 정치인으로서의 권력의지 역시 기본요소의 하나였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5)&lt;/span&gt;고 정리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김대중은 한국정치판에서는 특이한 존재이다. 
&lt;/fon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&lt;BR&gt;
&lt;BR&gt;
그는 제6대 국회의원 때부터 “서생적(書生的) 문제의식과 상인적(商人的) 현실감각을 아울러 갖추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현실정치에 접근하면서 이상주의와 실용주의의 가치관을 접목시키고 활용해 왔다. 이것은 그가 혹독한 권력의 탄압과 저주에 가까운 보수언론의 공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철학이고 비결이었다. &lt;BR&gt;
&lt;BR&gt;
김대중은 분단과 정부수립 반세기만에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고, 북한 지도자와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 평화체제를 선언하고,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며,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식민통치를 조기에 종식시켰다.&lt;BR&gt;
&lt;BR&gt;
정치적 민주주의, 권위주의 해체, 정보화강국, 국가인권위원회 설치, 여성권익 향상, 국민기초생활보장제 등이 업적으로 열거되기도 한다. 그리고 미국과의 종속관계의 저울추를 수평쪽으로 ‘약간’ 옮겨놓은 일이나,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한국의 ‘국격’(國格)을 높였다는 평가도 따른다. ‘한류’열풍도 그의 문화정책에서부터 비롯되었다.&lt;BR&gt;
&lt;BR&gt;
한국사에서 진보와 개혁의 기치를 든 지도자 치고 보수의 ‘총구’앞에서 온전히 버텨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신라 말기의 장보고, 고려시대의 만적ㆍ묘청ㆍ신돈, 조선왕조의 정도전ㆍ조광조ㆍ홍경래ㆍ최제우ㆍ전봉준ㆍ김옥균, 현대의 여운형ㆍ김구ㆍ조봉암ㆍ장준하ㆍ노무현 등 진보 개혁주의자 모두가 참살되거나 자살하였다. 완고한 보수의 칼날 앞에서 제 명에 죽은 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렸으나 그 바퀴에 깔리고 말았다. &lt;BR&gt;
&lt;BR&gt;
한국의 전통적인 수구 보수세력은 외세에는 엎드려 예속국가, 식민지의 적자가 되더라도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 하고, 외적과는 타협하더라도 동족 간의 화해와 협력, 내부의 개혁ㆍ혁신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 대가로 기득권을 보장받고 이것은 누대에 걸쳐 지속되었다.&lt;BR&gt;
&lt;BR&gt;
왕조시대에는 신진사류, 산림학파들이 개혁의 뜻을 품고 힘차게 나섰다가 보수의 반격에 침몰되었던 사례가 적지 않았고, 공화정시대에도 개혁ㆍ민주화의 기치를 들었다가 독재에 부역하거나 굴복한 정치인ㆍ지식인들이 적지 않았다.&lt;BR&gt;
&lt;BR&gt;
개혁 진보가 용납되지 않는 역사풍토에서 김대중의 살아남음과 집권은 특이할 만한 현상이다. &lt;BR&gt;
그가 과연 투철한 개혁ㆍ진보주의자인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민중의 힘과 국민의 역량이 그만큼 성숙해졌다는 시대의 변화도 김대중이 살아남고 집권하게 된 이유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lt;BR&gt;
&lt;BR&gt;
덧붙여 말한다면 그는 대단히 이상적 실용주의자라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이명박 대통령이 ‘실용주의’를 들고나오면서 이 용어의 의미가 크게 변질되고 말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실용주의는 미국의 고유한 사회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을 말한다. &lt;BR&gt;
&lt;BR&gt;
역사적으로 진보 개혁주의자들은 이상주의적인 측면이 강했다. &lt;BR&gt;
이에 비해 김대중은 이상주의적 측면과 실용주의의 양면을 겸비하였다. 예컨대 진시황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과는 다른 역사인식이다. 그의 엄청난 과오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에게 준 이득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즉 춘추전국시대의 전란과 주나라의 1천년에 걸친 봉건제도를 종식시키고, 군현제를 창시하여 백성들을 안정시켰으며, 문자통일과 법률제도 확립, 도량형 개혁 등을 통해 통일중국의 체제를 확립했다는, 실용주의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거창한 명분보다 백성들의 삶 위주의 실용성을 중시한다. &lt;BR&gt;
&lt;BR&gt;
그는 군사독재 시대에 극심한 탄압을 받으면서 비반미ㆍ비용공ㆍ비폭력의 이른바 ‘삼비(三非)정책’을 표방하였다. 그는 비반미적 민족자주, 비용공적 평화통일, 비폭력적 민주회복론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하였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하는 자리에서 주한미군 주둔의 필요성을 강조할만큼, 이런 용어가 가능하다면 그는, ‘비반미적 민족주의자’인 셈이다. “그는 미국과 의존적 동맹 안에서 자율성을 찾고자 했다”(문정인 교수).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김대중은 “나는 내 자신을 철저한 민족주의자라고 확신하고 있다.”고 말하고, “그러나 나는 결코 국수주의자는 아니다. 나는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국제주의를 지지한다. 진정한 민족주의자는 당연히, 이와 같은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되며,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민족주의를 승화 발전시키게 된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6)&lt;/span&gt;고 주장한다. 1980년대 초에 &amp;lt;김대중의 정치사상&amp;gt;을 쓴 가지무라 히데끼(柅村秀樹)는&lt;font color=&quot;#cc9900&quot;&gt; “김대중씨는 보편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가운데 독자성을 믿는 ‘개화된 민족주의자’&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7)&lt;/span&gt;라고 평가하였다. &lt;/p&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285462042.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41&quot; alt=&quot;&quot; style=&quot;cursor: pointer&quot; onclick=&quot;open_img('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285462042.jpg')&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이른바 &amp;lt;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재판정&amp;gt;. 전두환 정권에 의해 내란 수괴로 몰려 재판정에 서다&lt;/p&gt;&lt;/div&gt;
김대중은 70년대 초기부터 4대국 보장론과 북한 유엔가입론 등 한반도 문제해결의 다원성을 제시하면서도, 일본납치의 절체절명의 위기 때에 미국의 도움으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노선이 ‘반미’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백범 김구의 암살과 죽산 조봉암 처형의 배경을 살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을 선고 받을 때에도 용공이나 폭력행사 등 어디에서도 ‘내란음모’의 빌미를 주지 않았던 비용공, 비폭력주의도 살아남게 된 배경이 된다. &lt;BR&gt;
&lt;BR&gt;
그는 1973년 납치당하기 전 미국 망명시절에 워싱턴 교포인 최석남 예비역 장군 등이 미국에 ‘망명정부’를 수립하자는 주장을 단호히 배격하면서 ‘대한민국 수호 독재정권 반대’를 다짐했었다. 그는 교포 지도자들에게 ‘선민주화 후통일’의 원칙을 분명히 하였다.&lt;BR&gt;
&lt;BR&gt;
김대중은 오랜 세월 정치활동을 하는 동안 보수 수구세력으로부터 끊임없이 ‘용공좌경’의 색깔론에 시달렸다. 아마 그만큼 매카시즘에 시달린 정치인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김대중처럼 ‘반공주의’또는 미국 중시의 외교정책을 제시한 정치인도 흔치 않은 터에 가혹하게 붉은색이 덧칠되었다는 점이다.&lt;BR&gt;
&lt;BR&gt;
1960년대 청년시절에 쓴 각종 반공주의 내용의 기고문이나, 민주당 정부의 대변인으로서 발표한 성명, 1970년 첫 대선후보에 나서면서 제시한 ‘4대국 보장론’의 핵심은 미국중시의 입장이었다. 그의 외교 안보론의 핵심은 이른바 ‘1동맹 3우호체제’를 말한다. 미국중시의 다원외교, 안보체제론이다. 이를 두고 “자유주의적 외교철학”(박건영, 정욱식)이란 분석이 따른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우리도 다극화해야 한다. 우리는 미국과 군사동맹을 유지하면서 중ㆍ러ㆍ일과는 우호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1동맹 3우호체제’가 우리가 나갈 길이다. 중ㆍ러가 다 우리를 침략했고, 마침내 일본이 병탄하지 않았나? 미국이 일본의 식민지 침략을 지지해 줬는데 만약 미국이 그때 반대했으면 일본이 못했다.&lt;/font&gt;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미국은 그렇게 중요하다. 미국이 안정자, 균형자 역할을 해주면 그 셋에 대한 견제가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세 나라와도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안정이 되는데, 그게 6자가 되면 동북아 안보체제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8)&lt;/span&gt; &lt;BR&gt;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lt;BR&gt;
5) 박명림, 김대중 전대통령 인터뷰, '민주적 시장경제와 평화공존에의 여정', &amp;lt;역사비평&amp;gt;, 2008년 가을호, 60쪽. &lt;BR&gt;
6) 김대중, '민족에의 경애와 신뢰', &amp;lt;씨알의 소리&amp;gt;, 1975년 4월호.&lt;BR&gt;
7) 가지무라 히데끼, 김대중 지음, &amp;lt;무궁화여 영원히&amp;gt;, 219쪽, 동경, 1980.&lt;BR&gt;
8) &amp;lt;한겨레&amp;gt; 인터뷰, 2008년 5월 19일.&lt;/span&gt;&lt;BR&gt;
&lt;/font&gt;&lt;BR&gt;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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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1장] 서설 “행동하는 양심으로”</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Thu, 02 Jul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1회] 무수한 ‘총구’앞에서 살아남아</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86007</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black&quot;&gt;&lt;font size=&quot;2&quot;&gt;30여 년 동안 베트남 민족해방운동의 지도자로서 제2차 세계대전 뒤 아시아의 반식민지운동을 이끈 호치민(胡志明)이 1969년 9월 2일 79세로 사망하자 미국의 시사주간지 &amp;lt;타임&amp;gt;은 “민족지도자 가운데에 그만큼 꿋꿋하게 오랫동안 적의 총구 앞에서 버텼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헌사를 썼다.&lt;br /&gt;
&lt;BR&gt;
한국현대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하 경칭 생략)은 개인이나 지역ㆍ계층간의 호오와는 상관없이 거대한 족적을 남긴 역사적 인물이다. 그를 빼놓고는 한국현대사 특히 정치사는 구성되기 어렵다. 적어도 1970년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40여년 동안 그의 존재는 정치사에서 적어도 동심원(同心圓)의 한 축을 이루었다. 엄혹했던 독재 시절, 그는 민주화를 이끌었고, 한국 최초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달성했다. &lt;BR&gt;
&lt;BR&gt;
김대중, 질풍노도의 한국현대사에서 그의 이름은 고유명사이기보다 보통명사이고 동사(動詞)이며, 때로는 이름을 잃어버린 ‘재야’라는 추상명사, 그리고 ‘동교동’이라는 마을이름으로 대칭되는 존재가 되었다.&lt;BR&gt;
&lt;BR&gt;
그를 두고 열렬하게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극렬하게 반대하는 측도 있다. &lt;BR&gt;
반대 세력은 기회만 있으면 죽이려들고, 투옥ㆍ연금ㆍ용공음해를 일삼았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 김대중만큼 “오랫동안 적의 총구 앞에서 버텼던”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다. &lt;BR&gt;
&lt;BR&gt;
조선왕조 시대에 송시열처럼 극단적으로 애증이 갈린 사람도 없었다.&lt;BR&gt;
&amp;lt;조선왕조실록&amp;gt;에 5천번 이상 등재된 사람은 송시열이 유일하다. 어느 군왕보다 등재 횟수가 많을 만큼 그는 정치ㆍ사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래서 그를 존경하는 측에서는 ‘송자’(宋子)라는 경칭으로 부르고, 반대하는 측에서는 ‘송자’(宋者)라는 멸칭을 썼다. 공자ㆍ장자ㆍ노자 등에 쓰이는 최상의 ‘子’자 경칭과, 하인들에게 쓰는 멸칭의 ‘者’자로 나뉘었다. 김대중에 대한 인식과 평가에 있어서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은 양상이다. &lt;BR&gt;
&lt;BR&gt;
김대중ㆍ노무현 정권 시절에 극단적인 보수ㆍ수구인사들 사이에서는 술좌석에서 “박정희와 전두환이 다 잘하였는데 딱 한 가지 잘못한 일이 있다.”라는 술안주깜 험담이 나돌았다고 한다. 그것은 “김대중이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란다. 김대중을 죽이지 않아서 정권을 빼앗기게 되고 자기들이 ‘찬밥’신세가 되었다는 증오와 푸념이었다.&lt;BR&gt;
&lt;BR&gt;
그만큼 김대중의 존재는 한국의 보수ㆍ수구세력에는 증오ㆍ멸살의 대상이 되었다. &lt;BR&gt;
그런 ‘정서’에서 숱한 투옥, 연금, 납치살해 기도, 사법살인 시도, 언론의 왜곡보도 등이 자행되었고, 그를 향한 ‘총구’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버텨냈고,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139785933.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557&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29일 오전 경복궁 앞뜰에서 열린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영결식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권양숙 여사의 손을 잡고 오열하고 있다. ⓒ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장의위원회 제공 &lt;/p&gt;&lt;/div&gt;
&lt;BR&gt;
김대중은 2009년 5월 29일, 서울 경복궁에서 거행된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헌화를 마친 뒤 휠체어를 타고 권양숙 여사의 손을 잡고 애도를 표시하면서 오열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김 전 대통령이 공개석상에서 이토록 오열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건호씨도 어머니 옆에서 흐느끼며 김 전대통령에게 마음을 기댔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lt;/span&gt;&lt;BR&gt;
&lt;BR&gt;
김대중은 이에 앞서 노 전대통령의 부엉이바위 투신 서거 소식을 전해 듣고, “내 몸의 반쪽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비통한 심경을 토로하였다. 6월 11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6.15 남북정상회담 9주년 기념행사 연설에서는 ‘농민의 아들’, ‘상고졸업’, ‘반독재투쟁’, ‘남북화해협력’ 등 닮은 점이 너무 많다면서 “전생에 무슨 형제간이냐”라며 애틋한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247803637.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41&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김대중 전 대통령이 11일 오후 서울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김대중평화센터 주최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에서 '6·15로 돌아가자!'(Let's Return to 6.15)의 주제로 특별강연을 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유성호 &lt;/p&gt;&lt;/div&gt;
&lt;BR&gt;
김대중은 이날 연설에서 강한 어조로 이명박 대통령에게 ‘충고’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지금 우리나라 도처에서 이명박 정권에 대해 민주주의를 역행시키고 있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에 전국에서 500만 명이 문상한 것을 보더라도 우리 국민의 심정이 어떤지 알 수 있다. 만일 이명박 대통령 정부가 현재와 같은 길로 간다면 국민도 불행하고 이명박 정부도 불행해진다는 것을 확신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큰 결단을 내리기 바란다.&lt;BR&gt;
&lt;BR&gt;
과거 50년간 피흘려 쟁취한 10년간의 민주주의가 역행하고 위태로워졌다. 과거에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세 대통령을 국민의 힘으로 굴복시켰다. 우리 국민은 독재가 나왔을 때 반드시 이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했음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lt;BR&gt;
&lt;BR&gt;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간곡히 말하고 싶다. 이것은 제가 마음으로부터 피맺힌 심정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독재자가 칼날을 휘두르면서 백수십 명 죽이고, 그렇게 얼마나 많은 사람 죽였나. 그런 것에 대해서 우리는 결코 그분들의 죽음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 국민이 피땀으로 이룬 민주주의 위해 우리 할 일을 다해야 한다. &lt;BR&gt;
&lt;BR&gt;
행동하는 양심, 행동할 때 누구든지 사람들은 마음 속에 양심이 있다. &lt;BR&gt;
그러나 행동하면, 그것이 옳은 줄 알면서도 무서우니까 시끄러우니까 손해보니까, 이렇게 해서 양심을 도피한다. 그런 국민의 태도 때문에 의롭게 싸운 사람들이 죄없이 이 세상을 뜨고, 여러가지 수난을 받는다. 이것이 과연 우리의 양심에 합당한 일인가.&lt;BR&gt;
&lt;BR&gt;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만일 그렇게 고초를 겪을 때 500만 문상객의 10분의 1이라도 그럴 수 없다, 전직 대통령에 대해 이런 예우할 수 없다, 증거도 없이 매일 신문에 발표해서 정신적 타격주고 수치주고….이렇게 할 순 없다. 50만만 그렇게 소리를 냈다면 노무현 대통령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나 부끄럽고,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이웃 사람들이 희생된 데 대해 가슴 아파하고. &lt;BR&gt;
&lt;BR&gt;
나는 여러분께 말씀드린다. 자유로운 나라가 되고 싶으면 양심을 지키라. &lt;BR&gt;
우리가 균등하게 평화롭게 정의롭게 사는 나라를 만드려면 행동하는 양심이 돼야 한다. (행동) 안하고 방관하는 것도 악의 편입니다. 독재자에 고개를 숙이고 아부하고, 이런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나라가 자유롭게 확고한 민주주의 국가, 정의로운 경제, 남북간 화해 협력을 이룩할 그런 모든 조건은 우리가 마음에 있는 양심의 소리에 순종해서 그렇게 해서 온 국민이 바른 생각 갖고, 생각만 갖는 게 아니라 행동을 해야 한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2)&lt;/span&gt;&lt;BR&gt;
&lt;BR&gt;
이에 대해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연일 연설내용을 거두절미하거나 악의적으로 왜곡하여 비난을 퍼붓고, 동교동 자택에는 ‘노인 시위대’가 몰려가 소란을 벌였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이 6월 14일자로 발표한 “MB정권·조중동, 이번엔 'DJ 죽이기'인가”의 논평 요지를 싣는다.&lt;BR&gt;
&lt;BR&gt;
&lt;/font&gt;&lt;font size=&quot;2&quot;&gt;&lt;font face=&quot;batang&quot;&gt;&lt;font color=&quot;#cc9900&quot;&gt;&lt;strong&gt;MB정권·조중동, 이번엔 'DJ 죽이기'인가&lt;/strong&gt;&lt;BR&gt;
&lt;ins&gt;김대중 전 대통령 '6.15 기념연설' 관련 조중동 사설에 대한 민언련 논평&lt;/ins&gt;&lt;BR&gt;
&lt;BR&gt;
이명박 정권과 조중동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6.15 남북공동선언 9돌 기념 특별연설'을 악의적으로 왜곡하며 벌떼처럼 달려들어 비난을 퍼붓고 있다.&lt;BR&gt;
&lt;BR&gt;
12일 청와대 이동관 대변인은 &quot;사회갈등을 치유하고 화합을 유도해야 할 분이 오히려 선동을 조장하는 것 같다&quot;, &quot;530만표라는 사상 최대 표차로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마치 독재정권인 것처럼 비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quot;며 김 전 대통령을 비난했다. 또 &quot;북핵개발은 6·15선언 이후 본격 시작된 일&quot;, &quot;현 정부 들어 빈부격차가 완화되는 추세&quot;라는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lt;BR&gt;
&lt;BR&gt;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도 김 전 대통령이 &quot;'독재자에 아부하지 말고 들고일어나야 한다'는 등 이명박 대통령 퇴진운동을 부추기는 말을 노골적으로 했고,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는 '오늘날 북한이 많은 어려움을 당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quot;며 발언 내용을 거두절미 왜곡했다. 나아가 &quot;김대중씨는 말 없는 다수가 동의하지 않는 이런 발언을 그만두고 침묵해주기 바란다&quot;며 전직 대통령을 '씨'라고 부르는 무례를 서슴지 않았다.&lt;BR&gt;
&lt;BR&gt;
장광근 사무총장은 한술 더 떴다. &quot;'독재자에게 아부하지 말고 들고일어나야 한다'는 발언에서는 내전이 발발하고 있는 아프리카 후진국의 반군 지도자의 선동을 듣고 있는 착각까지 들 정도&quot;라고 비난했다. 박희태 대표는 &quot;김 전 대통령이 수십 년 전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다가 환각을 일으킨 게 아닌가 여겨진다&quot;며 인신공격성 발언까지 했다. &lt;BR&gt;
&lt;BR&gt;
13일에는 조중동이 들고일어났다.&lt;BR&gt;
&lt;BR&gt;
조중동은 각각 &amp;lt;김대중 전 대통령, 국가 원로다운 언행을&amp;gt;(조선), &amp;lt;전직 대통령의 금도(襟度)가 아쉽다&amp;gt;(중앙), &amp;lt;'민주' 탈 쓰고 反민주 부추긴 DJ의 정권타도 선동&amp;gt;(동아)이라는 사설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의 발언을 왜곡하고 비난했다.&lt;BR&gt;
&lt;BR&gt;
조중동은 자신들의 특기인 '거두절미', '짜깁기' 실력을 발휘해 김 전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quot;이명박 정권 타도&quot;를 부추긴 것처럼 몰았다.&lt;BR&gt;
&lt;BR&gt;
동아일보는 아예 제목부터 &quot;정권타도 선동&quot;이라고 썼고, &quot;폭동이라도 부채질하려는 속셈&quot;이냐고 질타했다.&lt;BR&gt;
&lt;BR&gt;
중앙일보는 김 전 대통령이 &quot;행동하는 양심이 돼서 모두 들고 일어나야한다&quot;고 &quot;몰아쳤다&quot;면서 &quot;정부를 타도하자는 선동과 다름없다&quot;고 강변했다. 조선일보도 김 전 대통령이 &quot;'독재자에게 고개 숙이고 아부하지 말자. 이 땅에 독재가 다시 살아나고 있고 빈부 격차가 사상 최악으로 심해졌다'며 '우리 모두 행동하는 양심으로 들고 일어나야 한다'고 말했다&quot;면서 &quot;반(反)정부 투쟁을 선동하는 듯한 발언&quot;이라고 주장했다.&lt;BR&gt;
&lt;BR&gt;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의 연설을 제 정신으로 들었다면 이렇게 몰아붙일 수 없는 일이다.&lt;BR&gt;
&lt;BR&gt;
김 전 대통령은 이명박 정부 아래 벌어지는 민주주의 후퇴를 비판하고, 국민들에게 &quot;행동하는 양심&quot;으로 민주주의 후퇴를 막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연설 어디에서도 조중동과 한나라당 인사들이 주장하는 '이명박 정권 타도' 선동을 찾을 수 없다. 민주주의 후퇴에 맞서 양심에 따라 행동하라는 말이 &quot;정권 타도&quot; 선동이란 말인가?&lt;BR&gt;
&lt;BR&gt;
김 전 대통령은 &quot;양심에 따른 행동&quot;을 강조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lt;BR&gt;
&lt;BR&gt;
&quot;선거 때는 나쁜 정당 말고 좋은 정당 투표해야 하고, 여론조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4700만 국민이 모두 양심을 갖고 서로 충고하고 비판하고 격려한다면 어디서 이 땅에 독재가 다시 일어나고, 어디서 소수 사람들만 영화를 누리고, 다수 사람들이 힘든 이런 사회가 되겠습니까.&quot;&lt;BR&gt;
&lt;BR&gt;
투표 제대로 하고, 여론조사에서 정확하게 의견을 표현하자는 것도 &quot;정권 타도&quot; 선동인가? 게다가 조중동과 한나라당 인사들이 집중 부각하는 &quot;들고 일어나야한다&quot;는 발언의 전후 맥락을 살펴보면 이들이 얼마나 악의적으로 김 전 대통령을 공격하는지 알 수 있다.&lt;BR&gt;
&lt;BR&gt;
김 전 대통령은 연설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lt;BR&gt;
&lt;BR&gt;
&quot;우리 국민들은 핵실험과 미사일 반대입니다. 그렇지만 반대는 어디까지나 6자회담에서, 미국과의 회담에서 반대해야지, 절대로 전쟁의 길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통일을 할 때 100년, 1000년 걸려도 전쟁으로 해서 하는 통일은 안 됩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서 자유를 지키고, 서민경제 지키고, 평화로운 남북관계 지키는 이 일에 모두 들고 일어나서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 희망 있는 나라를 만듭시다.&quot;&lt;BR&gt;
&lt;BR&gt;
조중동과 한나라당 인사들은 이 대목을 &quot;행동하는 양심이 되어 모두 들고 일어나야 한다&quot;고 거두절미 하고 이를 다시 &quot;정권 타도 선동&quot;, &quot;반정부 투쟁 선동&quot;이라고 몰아붙인 것이다. 특히 &quot;빈부격차 사상 최악&quot; 운운한 조선일보는 도대체 누구의 말을 인용한 것인지 묻고 싶을 정도다.&lt;BR&gt;
조선일보는 김 전 대통령의 이명박 정부 비판이 &quot;충격&quot;과 &quot;불만&quot;에서 비롯된 것인 양 몰았다. &quot;김 전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의 급작스런 죽음에 충격을 받고, 이 정부가 자신의 주장과 다른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불만스러울 수 있다&quot;는 것이다. 그러면서 &quot;전직 대통령도 정부 정책에 이견을 표시하고 반대할 수&quot; 있지만 &quot;국민의 투표로 선출된 정부를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독재'라고 부르고 '들고 일어나라'고 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일뿐더러 국가 원로가 취할 태도는 더욱 아니다&quot;라며 점잖은 척 질책했다.&lt;BR&gt;
&lt;BR&gt;
조선일보의 교활함을 거듭 확인하는 대목이다. 김 전 대통령의 연설은 자신과 다른 정책을 폈다는 이유로 이명박 정권을 깎아내린 게 아니다. 수 십년 민주화 역사를 환기시키면서 우리사회 민주주의가 후퇴해서는 안된다는 호소이자, 우리 민족의 안위를 위해 한반도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호소였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을 향해서도 국민과 이명박 정부 모두를 위해 &quot;이명박 대통령이 큰 결단 내리기를 바라마지 않는다&quot;고 간곡하게 호소했다.&lt;BR&gt;
&lt;BR&gt;
이밖에 조중동의 비뚤어진 김 전 대통령 공격은 일일이 거론하기도 어렵다.&lt;BR&gt;
&lt;BR&gt;
일례로 동아일보는 이번에도 색깔론을 들고 나왔다. 동아일보는 김 전 대통령의 북한 핵문제 관련 발언을 거두절미해 &quot;'북한이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한 것을 알고 있다'고 북의 대변인처럼 말했다&quot;. &quot;DJ가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하면서 북을 비호한 것은 자기모순의 극치다&quot;라며 색깔공세를 폈다.&lt;BR&gt;
&lt;BR&gt;
이 역시 연설의 전체 내용을 본다면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색깔공격인지 알 수 있다. '핵문제를 극단으로 끌고 가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이 김 전 대통령 연설의 핵심 메시지였다. 그런데도 동아일보는 김 전 대통령이 북한을 감싸고 비호한 것처럼 왜곡해 누구보다 색깔론의 큰 피해자였던 원로 정치인에게 거듭 색깔공격을 퍼부은 것이다. &lt;BR&gt;
&lt;BR&gt;
또 중앙일보는 김 전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안타까워한 것에 대해 &quot;전직 대통령은 죄가 있어도 수사하면 안된다는 논리로 몰아가는 것은 곤란하다&quot;고 몰아붙이기도 했다. &lt;BR&gt;
&lt;BR&gt;
우리는 청와대와 한나라당, 조중동이 김 전 대통령을 향해 쏟아내는 비난과 막말, 왜곡을 접하며 역설적으로 이들이 얼마나 불안해하는가를 알게 됐다.&lt;BR&gt;
&lt;BR&gt;
김 전 대통령은 정치 일선을 떠난 고령의 전직 대통령이다. 그의 연설이 설령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의 귀에 거슬린다 해도 '국가 원로의 충고로 받아들이겠다'고 품위 있게 반응했다면 국민들은 그 태도만큼은 '높은 점수'를 매겼을 것이다.&lt;/font&gt; &lt;/font&gt;&lt;font face=&quot;돋움&quot;&gt;&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lt;font face=&quot;돋움&quot;&gt;(주석 3)&lt;/font&gt;&lt;/span&gt;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black&quot;&gt;&lt;font size=&quot;2&quot;&gt;&lt;font color=&quot;black&quot;&gt;&lt;font size=&quot;2&quot;&gt;한국사회연구소(KSOI)가 실시한 6월 17일 정기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김대중의 발언에 &quot;공감이 간다&quot;는 응답은 51.7%, &quot;공감이 가지 않는다&quot;는 응답은 35.5%, &quot;잘 모르겠다&quot;는 응답은 12.8%로 나타났다. 김대중의 현시국에 대해 정치적 견해를 대외적으로 표명한 것에 대해서는 56%가 &quot;문제없다&quot;, &quot;문제가 있다&quot;는 38.2%에 그쳤다.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068888791.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28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여론조사 결과 ⓒ KSOI&lt;/p&gt;&lt;/div&gt;
&lt;BR&gt;
청와대와 한나라당의 날선 공격은 정치적이라 치더라도 조ㆍ중ㆍ동의 이성을 잃은 듯한 공격은 다분히 정파적이다. 고질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국민의 뜻과도 배치되고 발언 내용과도 상치되는 ‘김대중 죽이기’의 연장선상이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한 평론가는 1995년 1월 “적어도 십수 년간 한국정치와 관련하여 가장 두드러진 음모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김대중 죽이기’라면서 “집단적인 탐욕과 음모와 무지와 위선과 기만에 희생된, 앞으로도 희생이 될 수 있는 인물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바로 김대중이다.”&lt;/font&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4)&lt;/span&gt;라고 썼다. 그의 ‘예언’대로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지금에도 김대중에 대한 보수 권력과 보수 언론의 ‘김대중 죽이기’는 그치지 않는다.&lt;BR&gt;
&lt;BR&gt;
김대중으로 말하면 이승만ㆍ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ㆍ김영삼ㆍ이명박 정권 등 6개 정권과 싸우고 핍박받는 기록을 갖게 되었다. 김대중 반세기 정치역정의 신산함과 한국현대사의 파행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lt;BR&gt;
&lt;BR&gt;
&lt;BR&gt;
&lt;/font&gt;&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lt;font size=&quot;2&quot;&gt;주석&lt;BR&gt;
1) &amp;lt;경향신문&amp;gt;, 2009년 5월 30일.&lt;BR&gt;
2) &amp;lt;서울신문&amp;gt;, 2009년 6월 1일.&lt;BR&gt;
3) &amp;lt;민주언론시민연합&amp;gt;, 2009년 6월 14일, &amp;lt;오마이뉴스&amp;gt;에서 전재.&lt;BR&gt;
4) 강준만, &amp;lt;김대중죽이기&amp;gt;, 개마고원, 1995.&lt;/span&gt;&lt;/font&gt;&lt;/p&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3558148&quot;&gt;&lt;/embed&gt;&lt;/font&gt;&lt;/font&gt;&lt;/font&gt;&lt;/font&gt;&lt;/font&gt;&lt;/font&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1장] 서설 “행동하는 양심으로”</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Thu, 02 Jul 2009 01:28:00 GMT</pubDate>
		</item>
		<item>
			<title>[죽산 조봉암선생 연재를 마치고] 교수형과 투신형의 정치공학</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81991</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390265889.jpg&quot; width=&quot;508&quot; height=&quot;37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농림부 장관 시절의 죽산 조봉암 선생&lt;/p&gt;&lt;/div&gt;
조봉암 평전의 마무리 단계에서 노무현 전대통령이 서거하셨습니다.&lt;BR&gt;
죽산의 처형을 흔히 ‘사법살인’이라 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는 권력자의 지침에 사법부가 하수인 노릇을 한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몇 차례나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법치’를 강조한 데서도 드러납니다. &lt;BR&gt;
&lt;BR&gt;
용기 있는 정상적인 사법부라면 권력자의 위법적인 재판개입을 단호히 거부해야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걸 바라기는 쉽지 않습니다. 검찰과 사법부에서 ‘충견(忠犬)’이란 치욕적인 꼬리표를 떼어내는 날 죽산 선생이나 노 전대통령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입니다.&lt;BR&gt;
&lt;BR&gt;
죽산 선생의 교수형과 노 전대통령의 투신사에는 정치공학이 어떻게 작용했을까요. &lt;BR&gt;
또 두 분의 죽임과 죽음에는 어떤 유사점이 있을까요.&lt;BR&gt;
&lt;BR&gt;
죽산의 처형이 권력자와 사법부의 합작품이라면 노 전대통령의 서거에는 여기에 수구언론이 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권력의 작용이나 검찰의 수사보다 언론의 인격살인이 더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육신을 찢는 가혹한 고문보다 정신을 작살내는 언론의 인격고문에는 살아 숨쉬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152707477.jpg&quot; width=&quot;550&quot; height=&quot;369&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왼쪽은 이승만 전 대통령, 오른쪽은 죽산 조봉암 선생. 이승만은 조봉암 선생을 간첩으로 단죄하고, 자신은 그로부터 9개월후 4.19혁명으로 권좌에서 밀려났다.&lt;/p&gt;&lt;/div&gt;죽산은 1950년대 ‘멸균실 수준’의 반공 분위기에서 이승만의 권력욕과 여기에 기생하는 만송족 법조인들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투철한 독립운동가, 진보적인 평화통일론자, 양심적인 개혁정치인이었던 그는 타락한 기득세력에게 위협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용공좌경’의 딱지를 붙혀 목에 밧줄을 걸었습니다. 중세시대 이단 처형의 모습을 꼭 그대로 닮았습니다.
&lt;BR&gt;
&lt;BR&gt;
문제는 이같은 야만의 현상이 1950년대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lt;BR&gt;
4월혁명으로 이들의 뿌리가 뽑히는 듯 했지만, 5ㆍ16쿠데타와 더불어 소생하고 더욱 깊은 뿌리 굳은 가지 왕 성한 줄기를 나부끼면서 여전히 비슷한 수법이 동원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혁당의 애꿎은 죄목으로 유망한 인물 8명을 죽이고 장준하 선생을 비롯하여 수많은 민주ㆍ통일ㆍ진보 인사들을 ‘용공좌경’의 딱지를 붙여 죽이거나 투옥시켰습니다.&lt;BR&gt;
&lt;BR&gt;
죽산은 1951년 6월 30일부터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프랑크푸르트선언’(민주사회주의의 목적과 임무)에서 인류의 미래상을 읽었던 것 같습니다. 노동독재도 자본독재도 거부하는, 민중이 대접받고 주인이 되는 사회를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분별없이 남북대결을 조성하면서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이 대통령의 대결노선을 비판하면서 평화통일론을 주창하다가 ‘용공좌경’의 덫에 걸렸습니다.&lt;BR&gt;
&lt;BR&gt;
산기슭에 설치한 덫(올가미)은 무고한 산짐승의 발목을 채이지만, ‘용공좌경’의 덫에는 얼마나 많은 양심적인 사람들이 채였는지 우리는 압니다. 최근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아람회사건도 그중의 하나였습니다.&lt;BR&gt;
&lt;BR&gt;
우리 역사에서 개혁ㆍ진보의 가치를 든 지도자는 살아남기 어려웠습니다. &lt;BR&gt;
멀리 신라의 장보고에서 고려의 만적ㆍ묘청ㆍ신돈, 조선조의 정도전ㆍ조광조ㆍ홍경래ㆍ최제우ㆍ전봉준ㆍ김옥균ㆍ김구ㆍ조봉암ㆍ장준하에 이어 노무현에 이르기까지 권력의 참살 아니면 자살로 생을 접어야 했습니다. &lt;BR&gt;
&lt;BR&gt;
수구세력은 외세에는 빌붙어 강아지 노릇을 하면서도 내부의 진보ㆍ개혁세력에는 사납게 물어 찢는 승냥이가 되었습니다. 외세에는 잘 붙으면 기득권을 지킬 수 있지만 진보ㆍ개혁에서는 자칫 기득권을 잃을지 모른다는 위기의식 때문이겠지만, 6월 항쟁, 민주정부 10년 동안에도 그들의 재부는 빼앗기기는커녕 더욱 늘어났습니다.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344570962.jpg&quot; width=&quot;550&quot; height=&quot;408&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제2대 후반기 국회 의장단 선출, 1952년 7월 10일 새로 선출된 국회의장단. 좌로부터 윤치영 부의장, 신익희 의장, 조봉암 부의장&lt;/p&gt;&lt;/div&gt;
오는 7월은 죽산 선생이 돌아가신지 50주년이 됩니다. &lt;BR&gt;
제가 평전에서 열거한 대로 그는 애국자이고 반공주의자이며 평화통일론자입니다. 때론 권력과 타협하기도 하고 비겁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누구보다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했고 이 땅의 민중을 아꼈습니다. 그는 유언에서, 자신은 ‘평화통일의 씨앗’을 뿌린 것이고 열매는 후대에 맡긴다고 말했지만, 50년이 지난 지금 이 땅은 통일은커녕 평화가 심대한 위협에 직면해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lt;BR&gt;
&lt;BR&gt;
“역사는 시간을 따라 흘러오지만 역사의식은 시간을 거슬러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lt;BR&gt;
투철한 역사의식으로 지난날을 돌이켜보고 현실을 직시하면서 다시는 이 땅에서 ‘사법살인’되거나 ‘권ㆍ검ㆍ언 합작 살인’이 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권리는 스스로 지키는 힘이 없으면 빼앗기게 된다는 너무나 평범한 상식이 교훈이라면 교훈입니다.&lt;BR&gt;
&lt;BR&gt;
정부는 더 늦기 전에 죽산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여 그의 시련에 찬 항일운동을 평가하고, 사법부는 부끄러운 선배들의 죄상을 보상하기 위해서라도 재심청구를 통해 ‘사법’의 올가미를 벗겨주었으면 합니다.&lt;BR&gt;
&lt;BR&gt;
그동안 변변치 못한 글을 읽어주시고 추천ㆍ 격려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lt;BR&gt;
미흡한 부문은 단행본으로 엮을 때 보완하겠습니다. &lt;BR&gt;
연재를 해주신 이 시대의 정론 매체〈오마이뉴스〉에 경의를 표합니다. &lt;BR&gt;
&lt;BR&gt;
2009년 6월 3일&lt;BR&gt;
김 삼 웅 &lt;/font&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3317860&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lt;죽산 조봉암 평전&gt; 연재를 마치고</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Wed, 03 Jun 2009 01:01:44 GMT</pubDate>
		</item>
		<item>
			<title>[106회] 죽산 조봉암 선생 연보</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80475</link>
			<description>&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027929832.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382&quot; alt=&quot;&quot; style=&quot;cursor: pointer&quot; onclick=&quot;open_img('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027929832.jpg')&quot;/&gt;&lt;/div&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396736798.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402&quot; alt=&quot;&quot; style=&quot;cursor: pointer&quot; onclick=&quot;open_img('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396736798.jpg')&quot;/&gt;&lt;/div&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294888044.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418&quot; alt=&quot;&quot; style=&quot;cursor: pointer&quot; onclick=&quot;open_img('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294888044.jpg')&quot;/&gt;&lt;/div&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058264045.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359&quot; alt=&quot;&quot; style=&quot;cursor: pointer&quot; onclick=&quot;open_img('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058264045.jpg')&quot;/&gt;&lt;/div&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298017527.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418&quot; alt=&quot;&quot; style=&quot;cursor: pointer&quot; onclick=&quot;open_img('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298017527.jpg')&quot;/&gt;&lt;/div&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075318625.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410&quot; alt=&quot;&quot; style=&quot;cursor: pointer&quot; onclick=&quot;open_img('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075318625.jpg')&quot;/&gt;&lt;/div&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085848955.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282&quot; alt=&quot;&quot; style=&quot;cursor: pointer&quot; onclick=&quot;open_img('http://blogimg.ohmynews.com/attach/17866/1085848955.jpg')&quot;/&gt;&lt;/div&gt;&lt;BR&gt;
&lt;BR&gt;
박태균, &amp;lt;조봉암 연구&amp;gt;, 전재.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3310607&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부록</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Mon, 01 Jun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105회] 죽산 조봉암에 대한 평가 ②</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79059</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lt;strong&gt;&lt;font color=&quot;#cc9900&quot;&gt;&lt;font size=&quot;3&quot;&gt;&lt;BR&gt;
&lt;div align=&quot;center&quot;&gt;&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lt;strong&gt;&lt;font color=&quot;#cc9900&quot;&gt;&lt;font size=&quot;3&quot;&gt;선구적 안목 갖춘 정치인&lt;BR&gt;
&lt;/font&gt;&lt;/font&gt;&lt;/strong&gt;&lt;/font&gt;&lt;/font&gt;&lt;BR&gt;
&lt;div align=&quot;right&quot;&gt;이동화(전 민주사회주의연구소 의장)&lt;/div&gt;&lt;/div&gt;&lt;/font&gt;&lt;/strong&gt;&lt;BR&gt;
죽산은 해방 이후 과거 그가 몸 담았던 공산주의 즉 폭력혁명을 제창하는 볼셰비즘에서 의회민주주의를 인정하고 점진적으로 자본주의를 개혁해 나가려는 민주사회주의로 옮아온 것이다.&lt;BR&gt;
&lt;BR&gt;
죽산의 이 같은 변신은 2차 대전 후 소련의 공산주의와 결별을 선언한 서구의 사회주의자들과 이념적으로 같은 자리에 놓여질 수 있다. 서구의 사회주의자들이 2차 대전 이후의 새 시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혁명적 방법 대신 민족적인 길을 걸었던 것과 같이 죽산도 해방된 조국을 위해서는 수정공산주의 즉 민주사회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lt;BR&gt;
&lt;BR&gt;
죽산의 판단이 탁월했던 것은 전후의 유럽세계의 발전 과정이 입증해주고 있다. 죽산은 그만큼 선구적 안목을 갖췄던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6ㆍ25 이후 분단 고착화에 따른 극우 세력의 대두 즉 이승만 일당과 한민당까지를 포함한 반동세력이 주도권을 잡았던 시대가 그를 불행으로 몰고 갔다.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1)&lt;/span&gt;&lt;BR&gt;
&lt;BR&gt;
&lt;strong&gt;&lt;font color=&quot;#cc9900&quot;&gt;&lt;font size=&quot;3&quot;&gt;&lt;BR&gt;
&lt;div align=&quot;center&quot;&gt;&lt;strong&gt;&lt;font color=&quot;#cc9900&quot;&gt;&lt;font size=&quot;3&quot;&gt;진보주의자이면서 대중정치가&lt;/font&gt;&lt;/font&gt;&lt;/strong&gt;&lt;/div&gt;&lt;/font&gt;&lt;BR&gt;
&lt;div align=&quot;right&quot;&gt;&lt;strong&gt;&lt;font color=&quot;#cc9900&quot;&gt;서중석(성균관대학 교수)&lt;/font&gt;&lt;/strong&gt;&lt;BR&gt;
&lt;/div&gt;&lt;/font&gt;&lt;/strong&gt;&lt;BR&gt;
조봉암이 대중들로부터 지지를 받은 것은 진보주의자이면서 현실정치가이자 대중정치가로서 뛰어난 자질을 보여준 것과 함께, 그의 평화통일론과 피해대중단결론, 피해대중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주장이 대중한테 어필하였기 때문이었다. &lt;BR&gt;
&lt;BR&gt;
또 평화통일론과 피해대중단결론은 극우반공체제를 위협하고 해체하는 기능을 가졌다. 휴전협정 체결에 즈음하여서부터 전개되어 한국형 파시즘 동원체제로 1950년대 내내 계속된 북진통일운동은 북과의 대결태세를 극대화하고 전시사태와 같은 긴장을 고조시켜, 한편으로는 분단고착화를 강화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도자 이승만의 권력과 극우반공체제를 강화하는 데 뛰어난 효능을 발휘하였다. &lt;BR&gt;
&lt;BR&gt;
그런데 조봉암은 북진통일론의 허구성을 매섭게 공격하면서 평화통일론을 폈고, 이 평화통일론은 더 이상 동족상잔의 전쟁을 원하지 않고 평화적 통일을 원했던 피해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2)&lt;/span&gt;&lt;BR&gt;
&lt;BR&gt;
&lt;strong&gt;&lt;font color=&quot;#cc9900&quot;&gt;&lt;font size=&quot;3&quot;&gt;&lt;BR&gt;
&lt;div align=&quot;right&quot;&gt;&lt;strong&gt;&lt;font color=&quot;#cc9900&quot;&gt;&lt;font size=&quot;3&quot;&gt;&lt;BR&gt;
&lt;div align=&quot;center&quot;&gt;&lt;strong&gt;&lt;font color=&quot;#cc9900&quot;&gt;&lt;font size=&quot;3&quot;&gt;짧지만 굵게 산 민족주의자&lt;/font&gt; &lt;/font&gt;&lt;/strong&gt;&lt;/div&gt;&lt;/font&gt;&lt;/font&gt;&lt;/strong&gt;&lt;/div&gt;&lt;/font&gt;&lt;BR&gt;
&lt;div align=&quot;right&quot;&gt;&lt;strong&gt;&lt;font color=&quot;#cc9900&quot;&gt;박태균(&amp;lt;조봉암연구&amp;gt; 저자)&lt;/font&gt;&lt;/strong&gt;&lt;BR&gt;
&lt;/div&gt;&lt;/font&gt;&lt;/strong&gt;&lt;BR&gt;
식민지에서 해방으로, 그리고 전쟁에서 분단으로 이어져 온 한국의 현대사는 우리 민족에게 수많은 굴절과 왜곡을 강요해 왔다. 순탄치 않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민족 성원 개개인들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했으며, 개개인의 인생 그 자체가 역사이며, 또한 대하소설이었다.&lt;BR&gt;
&lt;BR&gt;
조봉암이라는 일 개인 역시 이러한 역사적 흐름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평범한 삶을 살지 않고 각각의 역사적 국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한국현대사의 굽이굽이마다 그 중심에 등장했다. 일제시대에는 공산주의운동 주도자의 한 사람으로써, 단독정부 수립 직후에는 초대 농림부장관이자 국회부의장으로서, 1950년대에는 이승만 정권과 보수야당에 대항하는 혁신정당의 지도자로서, 이와 같이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 위치했던 만큼 그의 정치노선과 활동은 여러 사람의 구설수에 올랐다. 그에 대한 평가 또한 공산주의자에서부터 사회민주주의자, 변절자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였다. 시기시기마다 그의 활동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많았지만, 그에 대한 비난도 적지 않았다. &lt;BR&gt;
&lt;BR&gt;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조봉암이라는 이름 석 자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의 다양한 활동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화려한 변신 때문이기도 하다.&lt;BR&gt;
&lt;BR&gt;
그러나 우리가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1950년대 이승만 정권의 독재 속에서 과감하게 전개했던 ‘평화통일운동’과 진정한 민주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진보당’ 활동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참여했던 이승만 정권의 반공이데올로기의 칼날은 맞고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150년대 이후 남한 사회에서 혁신운동을 통해 민족주의 노선을 추구하다가 짧지만 굵은 일생을 마감한 것이다.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3)&lt;BR&gt;
&lt;/span&gt;&lt;BR&gt;
&lt;strong&gt;&lt;font color=&quot;#cc9900&quot;&gt;&lt;font size=&quot;3&quot;&gt;&lt;BR&gt;
&lt;div align=&quot;center&quot;&gt;&lt;strong&gt;&lt;font color=&quot;#cc9900&quot;&gt;&lt;font size=&quot;3&quot;&gt;그의 질주 보수세력에 위협돼&lt;BR&gt;
&lt;/font&gt;&lt;/font&gt;&lt;/strong&gt;&lt;/div&gt;&lt;/font&gt;&lt;BR&gt;
&lt;div align=&quot;right&quot;&gt;이영석(&amp;lt;죽산 조봉암&amp;gt; 저자)&lt;/div&gt;&lt;/font&gt;&lt;/strong&gt;&lt;BR&gt;
조봉암의 삶과 죽음만큼 슬픈 사연은 없다. 파란과 굴곡의 생애 - 그 마지막의 참담함에서 한(恨)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걸었던 길은 나라를 잃었던 암흑의 시기를 살던 세대엔 숙명이기도 했던 수난의 길이었다. 그는 독립운동가 → 사회운동 → 사회주의운동이라는 길을 걸었다. 그는 20년대 조선공산당 창당의 주역이자 지도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7년의 옥고도 치렀다. 그는 8ㆍ15와 함께 공산주의를 청산했다. 그는 공산당과 대결해 싸웠고 건국에 헌신했다.&lt;BR&gt;
&lt;BR&gt;
그는 초대 농림부장관이었고 2대 국회부의장이었다.……그는 50년대 이 나라 진보세력을 대표했다. 그는 진보주의의 씨를 뿌리고 가꾸겠다고 했다. 그의 정치적 질주는 이승만 박사에게만이 아니라 이 나라 보수진영에 위협으로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의 정치행동엔 언제나 사신(死神)이 그림자처럼 따랐다.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4)&lt;/span&gt;&lt;BR&gt;
&lt;BR&gt;
사람들은 그를 공산주의에서 전향했다고 한다. 그랬지만 그 스스로는 전향이라는 말을 가장 싫어했다. 그는 스스로를 민족주의자라고 했고 평등사회의 구현이 그의 이상이라고 했다. 그런 그가 소련의 괴뢰로 전락한 공산당과 대결하는 것은 전향이 아니라 그의 사상적 성숙이고 정착이라고 했다. 그는 정치적 좌표를 민중의 편이라고 했다. 그를 따랐던 사람들의 기억속에 죽산은 가장 서민적인 정치인으로 남아있다.&lt;BR&gt;
&lt;BR&gt;
그는 농림장관이던 때 오버코트를 오래 지니지를 못했다. 항일운동을 함께했던 가난한 동지가 그를 찾아왔을 때 그 사람이 코트를 입지 않고 있으면 자기 코트를 입고 가도록했기 때문이다. 죽산의 이런 성격 때문에 비서들은 곤란을 겪기도 했다. “자네, 돈 가진 것 있나.” 그렇게 해서라도 돈을 마련해 그를 찾아온 사람에게 건네주곤 했다.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5)&lt;/span&gt;&lt;BR&gt;
&lt;BR&gt;
&lt;strong&gt;&lt;font color=&quot;#cc9900&quot;&gt;&lt;font size=&quot;3&quot;&gt;&lt;BR&gt;
&lt;div align=&quot;center&quot;&gt;&lt;strong&gt;&lt;font color=&quot;#cc9900&quot;&gt;&lt;font size=&quot;3&quot;&gt;“법무장관의 배신. 식언이었다”&lt;/font&gt;&lt;/font&gt;&lt;/strong&gt;&lt;/div&gt;&lt;/font&gt;&lt;BR&gt;
&lt;div align=&quot;right&quot;&gt;장택상(전 국무총리)&lt;/div&gt;&lt;/font&gt;&lt;/strong&gt;&lt;BR&gt;
죽산은 머리가 명민한 사람이라 그가 정신착란증에 걸리지 않는 이상 김일성의 첩자로부터 돈 몇 푼에 팔릴 사람이 아니라고 나는 믿고 싶다.&lt;BR&gt;
&lt;BR&gt;
이야말로 그 진상이야 하늘이나 땅이나 알지 인간으로서는 모를 일이지만 나는 부산으로 떠날 때 죽산에게 진 부채를 어느 정도나마 보상한 것으로 알고 있다.&lt;BR&gt;
&lt;BR&gt;
그것은 다름 아니라 죽산이 처형당할 무렵, 하루는 죽산의 영양 호정이가 내 집을 찾아왔다. 그는 “일이 닥쳐온다”는 뉴스를 내게 전하고는 하염없이 눈물을 흐리고 있었다.&lt;BR&gt;
&lt;BR&gt;
나는 즉시 구명운동에 나서 법무부장관을 만났다. 법무부장관은 두 가지 조건을 내세우면서 이 조건들이 이루어질 때 죽산의 처형을 익년 3.15선거 후로 미루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나는 시기를 놓치지 않고 두 가지 조건을 완수하였다. 그 조건 중의 하나는 죽산의 성명서 발표였다. 그 성명서는 공산당이 아니라는 성명서로서 이는 내가 저작했고 윤길중 군이 받아 쓴 것이다.&lt;BR&gt;
&lt;BR&gt;
윤군은 이 성명서를 가지고 내 차로 형무소로 직행, 죽산에게 온 이유를 설명하고 성명서 내용을 말하려고 하자 죽산은 듣기도 전에 노기를 띠우며 “창랑이 집필했으면 그만이지 내게 설명은 무슨 설명이야 …” 하고 윤군을 나무라면서 돌아서 나갔다. 나는 윤군으로부터 이 말을 전해 듣고 안타까운 마음에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사람은 지기(知己)를 취하여 죽는다는 말이 옛날부터 있어왔다.&lt;BR&gt;
&lt;BR&gt;
그러나 결국 이것은 다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으며, 죽산은 끝내 처형되고 말았다.&lt;BR&gt;
이것은 법무장관의 배신이었고 식언이었다. 이 배신에 대한 심판은 이 세상에서 받지 아니하면 천국에 가서라도 받을 것이다. 내가 똑똑히 말해두고 싶은 것은 죽산은 비겁한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죽산은 성격상 자기의 실날만한 생명을 붙들기 위하여 자기가 평소에 품은 뜻을 속여 가면서까지 내가 집필한 그 성명서를 수락할 리가 없다.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6)&lt;/span&gt;&lt;BR&gt;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lt;BR&gt;
11) &amp;lt;현대공론&amp;gt;, 1989년 6월호.&lt;BR&gt;
12) 서중석, &amp;lt;역사비평&amp;gt;, 1999년 여름호.&lt;BR&gt;
13) 박태균, &amp;lt;조봉암 연구&amp;gt;, '머리말'에서.&lt;BR&gt;
14) 이영석, &amp;lt;죽산 조봉암&amp;gt;, '머리말'에서,&lt;BR&gt;
15) 이영석, 앞의 책, 289쪽.&lt;BR&gt;
16) 장택상, &amp;lt;대한민국 건국과 나&amp;gt;, 124 ~ 125쪽, 장병혜 . 장병초 편, 1992.&lt;BR&gt;
&lt;/span&gt;&lt;/font&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3299373&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부록</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Sun, 31 May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104회] 죽산 조봉암에 대한 평가 ①</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79056</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lt;strong&gt;&lt;font color=&quot;#cc9900&quot;&gt;&lt;BR&gt;
&lt;div align=&quot;center&quot;&gt;&lt;font color=&quot;black&quot;&gt;&lt;strong&gt;&lt;font color=&quot;#cc9900&quot; size=&quot;3&quot;&gt;영도자로서 품격 엿보여&lt;/font&gt;&lt;/strong&gt;&lt;/font&gt;&lt;/div&gt;&lt;BR&gt;
&lt;div align=&quot;right&quot;&gt;유병용 (1심재판 배석판사)&lt;/div&gt;&lt;/font&gt;&lt;/strong&gt;&lt;BR&gt;
법정의 태도로서도 태연자약하여 한 당의 영도자로서의 품격이 엿보이는 바 특히 그의 왼손가락은 끝이 문드러져 있는 바 한격만 변호사의 변론에 의하면 일제 경찰의 혹독한 고문이 남겨준 쓰라린 상처라 하니 백전불굴의 지조가 흐르는 듯이 보였다. 그의 법정진술은 담담한 데가 있고 시(是)와 비(非)가 명확한 것이 특색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lt;BR&gt;
&lt;BR&gt;
다만 양이섭 피고인과 서로 상반된 진술로서 대립할 때에는 그저 어째서 저와 같은 거짓말을 하는지 알 수 없다고 하면서 재판부에서 흑백을 가려달라고 할 뿐 굳이 변명하려 들지 않는 것은 보통 피고인들의 법정태도와는 좀 다른 데가 있는 듯이 보였다.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6)&lt;/span&gt;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lt;strong&gt;&lt;font size=&quot;3&quot;&gt;&lt;BR&gt;
&lt;div align=&quot;center&quot;&gt;&lt;font color=&quot;#cc9900&quot;&gt;&lt;strong&gt;&lt;font size=&quot;3&quot;&gt;공산주의자 아닌 것 인정&lt;/font&gt;&lt;/strong&gt;&lt;/font&gt;&lt;/div&gt;&lt;/font&gt;&lt;BR&gt;
&lt;div align=&quot;right&quot;&gt;김갑수(당시 대법원 판사)&lt;/div&gt;&lt;/strong&gt;&lt;/font&gt;&lt;BR&gt;
나도 죽산이 전향 이후에 있어서 공산주의자와 그 동조자가 아닌 것을 인정한다. 간첩이라면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간첩을 생각하기 쉬우나 죽산이 그런 의미의 간첩이 아님도 사실이다.&lt;BR&gt;
&lt;BR&gt;
그러나 우리 나라의 법은 이북에 신문 한 장이라도 보내면 그것을 간첩으로 처벌하기로 되어 있으니 법 앞에 만민이 평등하여야 한다면 죽산의 처형은 부득이한 일이다.&lt;BR&gt;
&lt;BR&gt;
흔히들 죽산에 대한 사형을 정치와 결부시켜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재판에 관한 한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죽산이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여 기백만 표를 얻고 기소의 시기로 본 오해로 생각되나 이 박사를 대통령이 되게 하기 위하여 죄가 없다고 인정한 죽산을 어떻게 극형에 처할 수 있겠는가.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7)&lt;/span&gt;&lt;BR&gt;
&lt;BR&gt;
&lt;strong&gt;&lt;font color=&quot;#cc9900&quot;&gt;&lt;font size=&quot;3&quot;&gt;&lt;BR&gt;
&lt;div align=&quot;center&quot;&gt;&lt;strong&gt;&lt;font color=&quot;#cc9900&quot;&gt;&lt;font size=&quot;3&quot;&gt;진보당강령 합법분장한 공산주의 전술원칙&lt;/font&gt;&lt;/font&gt;&lt;/strong&gt;&lt;/div&gt;&lt;/font&gt;&lt;BR&gt;
&lt;div align=&quot;right&quot;&gt;오제도 (부장검사)&lt;/div&gt;&lt;/font&gt;&lt;/strong&gt;&lt;BR&gt;
조봉암은 청년시절부터 국제공산주의운동을 하여 왔으며 8ㆍ15 이후에도 공산주의 이념을 지속하면서 우리 나라의 공산화를 획책하다가 당시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이가 맑스 레닌의 전략전술 원칙에 위반되는 방향에서 당을 영도함으로 자기는 그와 같은 철저하지 못한 박헌영이와 동조할 수 없다고 하여 그와 결별하고 박헌영은 그 후 월북하여 조봉암이가 지적한 과오로 인하여 처단되었다.&lt;BR&gt;
&lt;BR&gt;
그러면 조봉암은 김일성보다 9년 전에 박헌영을 반당분자로 지적한 당의 선구자로 결과하는 것이다. 그는 계속 남한의 사회주의 변혁을 위하여 침투… 기회를 엿봐 온 사람이라는 것을 상도할 적에 진보당의 강령정책이 얼마나 교묘히 공산주의 전술원칙에 적응하게 작성되었으며 적절하게 합법을 분장하였겠는가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8)&lt;/span&gt;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cc9900&quot;&gt;&lt;strong&gt;&lt;font size=&quot;3&quot;&gt;&lt;BR&gt;
&lt;div align=&quot;center&quot;&gt;&lt;font color=&quot;#cc9900&quot;&gt;&lt;strong&gt;&lt;font size=&quot;3&quot;&gt;‘비미비소’의 민족자존 노선&lt;/font&gt;&lt;/strong&gt;&lt;/font&gt;&lt;/div&gt;&lt;/font&gt;&lt;BR&gt;
&lt;div align=&quot;right&quot;&gt;정태영(진보당원, &amp;lt;조봉암과 진보당&amp;gt; 저자)&lt;/div&gt;&lt;/strong&gt;&lt;/font&gt;&lt;BR&gt;
얄타체제의 붕괴라는 세계사적 대변혁은 마침내 분단국가 독일의 통일을 가져왔고, 우리 한반도 통일의 가능성도 가져다주었다. 이제 조국의 통일을 가로막았던 국제적 제약 요인은 독일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완전히 제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얄타체제가 붕괴되는 이 시점에서조차 통일을 위한 노력은 그리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지 않다. &lt;BR&gt;
&lt;BR&gt;
지난 1991년 2월 우리 나라를 방문한 바 있는 폰 바이체커 독일연방 대통령이 지적했듯이 우리의 통일에 있어서도 첫째, 민주주의의 철저한 실천, 둘째, 사회정의의 실현, 셋째, 서로를 이해하려는 사심 없는 교류의 증대 등이 요청되고 있다. 조봉암과 진보당은 이미 50년 전에 이 같은 세계사적 변혁원리를 간파했으며, 민족이 강대국의 농락 대상이 되지 않고 민족자존의 길을 걸을 수 있는 ‘비미비소’ 노선을 제시한 바 있다.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9)&lt;BR&gt;
&lt;/span&gt;&lt;BR&gt;
&lt;strong&gt;&lt;font color=&quot;#cc9900&quot;&gt;&lt;font size=&quot;3&quot;&gt;&lt;BR&gt;
&lt;div align=&quot;center&quot;&gt;&lt;strong&gt;&lt;font color=&quot;#cc9900&quot;&gt;&lt;font size=&quot;3&quot;&gt;너무 조급한 노선의 야심가&lt;/font&gt;&lt;/font&gt;&lt;/strong&gt;&lt;/div&gt;&lt;/font&gt;&lt;BR&gt;
&lt;div align=&quot;right&quot;&gt;&lt;strong&gt;&lt;font color=&quot;#cc9900&quot;&gt;주요한 (당시 민의원)&lt;/font&gt;&lt;/strong&gt;&lt;BR&gt;
&lt;/div&gt;&lt;/font&gt;&lt;/strong&gt;&lt;BR&gt;
조봉암씨의 노선은 너무 조급하였고 너무 야심적이었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의식적인 가장 전술이었다는 판정을 불면하는 것이다. 선의로 해석하면 너무 조급했기 때문에 자금조달에 있어서 중대한 과오를 범했다고 볼 것이다. 그 원인의 하나는 조씨가 두 번 대통령으로 입후보하여 비정상적인 우연의 소치로 의외의 득표를 한데 대하여 스스로 과대평가했는데 있었을지 모른다.&lt;BR&gt;
&lt;BR&gt;
진보당사건의 정치적 의의는 여러모로 논할수 있겠지만, 공산독재정치의 본질과 그 침투전술(최근 용어로 말하면 ‘간접적 침략’)에 대한 일층 명료한 판단력을 우리 국민에게 주었다는 것이 하나의 결정적인 수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요, ‘진보적’인 대중에게 자기 평가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10)&lt;BR&gt;
&lt;BR&gt;
&lt;BR&gt;
주&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석&lt;BR&gt;
6) &amp;lt;한국평론&amp;gt;, 1958년 7월호.(제목은 저자가 붙힌 것임 - 모두 같음)&lt;BR&gt;
7) &amp;lt;신동아&amp;gt;, 1965년 10월호.&lt;BR&gt;
8) &amp;lt;인물계&amp;gt;, 1959년 4월호.&lt;BR&gt;
9) &amp;lt;조봉암과 진보당&amp;gt;, 1991년 6월.&lt;BR&gt;
10) &amp;lt;인물계&amp;gt;, 1958년 9월호.&lt;BR&gt;
&lt;/span&gt;&lt;/span&gt;&lt;/font&gt;&lt;BR&gt;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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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부록</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Sat, 30 May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103회] 비문(안) - 민족의 큰 별 이곳에 잠드시다</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79030</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민족의 큰 별 이곳에 잠드시다.&lt;BR&gt;
1899년 9월 25일에 태어나 1919년 3ㆍ1운동 시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강화의 청년 지도자로서 그 선두에 섰다가 왜경에게 피체, 투옥된 것을 효시로 일제하 감옥에서 수삼 차에 걸쳐 10여 년의 옥살이를 하시다. &lt;BR&gt;
&lt;BR&gt;
항일 민족해방투쟁의 한 방편으로 택했던 일제하 사회주의(= 공산주의)운동에서는 1925년의 국내당 조직을 위시하여 1932년 상하이에서 왜경에게 체포 투옥될 때까지 조직의 다수파를 주도적으로 이끄셨으며 항일 노동쟁의와 만주 간도사건 등을 지도하시다. &lt;BR&gt;
&lt;BR&gt;
1945년 8ㆍ15해방과 더불어 반민족적 프롤레타리아 국제노선과 계급독재노선을 추구하는 재건공산당과 결별, 미소 편의(偏倚) 세력에 의한 극좌 극우 독재노선 추구에 반대, 비미ㆍ비소의 민주적 중앙노선을 추구하시며 김규식ㆍ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에 참여, 민주주의 민족전선과 대립된 민주주의 독립전선을 결성하여 미소공위 활동의 성공을 위해 힘쓰시다.&lt;BR&gt;
&lt;BR&gt;
1947년 3월 투루먼 독트린 선포로 미소냉전이 공식화되고 남북에 각각 미소 헤게모니하의 단독선거에의 참여 불가피론을 제기, 중간파 민족지도자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5ㆍ10단독선거에 참여, 제헌의회 의원이 되시다. &lt;BR&gt;
&lt;BR&gt;
제헌의원이 되어 소장파 의원들로 무소속구락부를 조직하셨고, 초대 농림장관으로 입각하여서는 농림부 직제를 개편하고 농지국, 농정국들에게 농지개혁법ㆍ농업협동조합법을 입안케 하였으며 농민신문도 발간하여 비전과 소신 있는 지도자로 농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시다.&lt;BR&gt;
&lt;BR&gt;
1950년 5ㆍ30선거에 출마 재당선되어 국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시고, 부의장직에 있으면서는 명사회, 명조정자로서 그 이름을 날리시다. 1952년 2대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시어 무능 부패한 이승만에 맞서 싸우시다. 일제하 항일투쟁 경력과 농림장관시절 발휘한 탁월한 행정력, 부의장으로서의 원만한 통솔력 등이 상승되어 대중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시다. 호표ㆍ샌드위치표로 비록 낙선되었으나 이 선거에서 이겼을 것이라는 것이 정평이다. &lt;BR&gt;
&lt;BR&gt;
1950년 이승만 독재정권의 탄압으로 일시 정계은퇴를 강요당하였으나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파동으로 정계에 복귀, 민주대동운동과 혁신대동운동을 거쳐 사회적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한 진보당을 창당하시기에 이르다.&lt;BR&gt;
&lt;BR&gt;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에 다시 입후보하여 이승만과 겨루시다. 공칭 200만 표의 득표로 낙선하였으나 이번에도 부정 투ㆍ개표로 낙선된 것이어서 국민 대다수는 선생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lt;BR&gt;
&lt;BR&gt;
새로운 무기체제 개발경쟁으로 미소 냉전이 극에 이르렀던 1950년대 후반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평화통일을 내걸고 친미 편의세력에 도전하여 사실상 승리한 것과 진보당이 전국적으로 뿌리를 내린 것은 얄타체제에의 중대한 도전이요 친미 보수세력에의 일대 위협이었다.&lt;BR&gt;
&lt;BR&gt;
1958년 정월 드디어 세칭 진보당사건이 날조되어 국내외적으로 고립된 선생은 이승만 독재의 독아에 걸려 법의 이름으로 죽음을 당하시다. 향년 61세, 때는 1958년 7월 31일.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5)&lt;BR&gt;
&lt;BR&gt;
&lt;BR&gt;
주석&lt;BR&gt;
5) 앞의 책, 319~321쪽.&lt;/span&gt;&lt;/font&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3287893&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부록</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Fri, 29 May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102회] 추도문</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79029</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조봉암 선생!&lt;BR&gt;
7월의 열기가 조국의 땅을 태우고 있던 31일, 선생의 혈맥에는 차가움이 흘러 식어가고 말았습니다.&lt;BR&gt;
&lt;BR&gt;
전 민족이 걱정하고 또한 있을 수 없는 일로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선생의 사형이권력자의 악마와 같은 허수인에 의해 집행되었다는 보도는 우리에게는 실로 경천동지의 일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자기의 눈과 귀를 의심하고, 이것이 현실 아닌 꿈이기를 바란다는 생각을 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lt;BR&gt;
&lt;BR&gt;
선생의 무죄를 천지신명께 맹세코 확신해왔던 수천만 동포의 외침과 기도는 선생의 육체를 말살코자 기도한 권력자의 포악과 야욕 앞에는 너무도 무력했습니다. 뜨거운 염원을 모아 희구해온 선생의 석방이, 생명이 끊긴 차가운 시체가 되어버리리라고 그 누가 생각이라도 했을 것입니까.&lt;BR&gt;
&lt;BR&gt;
조국 강토가 이국인 땅이 되고, 일제의 군화가 복종을 강요하고 있던 암담하던 시절, 인적 없는 대륙의 광야에 홀로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자유를 찾아 헤매었던 선생의 역사를 알고 있던 우리들은, 잔인한 일경의 처참한 고문에 의해 오른손을 못 쓰게 만들어지면서도 결코 굴종하는 일이 없던 숭고한 민족정신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선생이 국적의 오명을 둘러쓰고 이처럼 비명에 생애의 막을 내리리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lt;BR&gt;
&lt;BR&gt;
너무도 분하고 통탄을 금할길이 없나이다. 민족에 바치셨던 찬연한 그 생애를 그리워하며, 조국의 전도를 비쳐주신 그 지도로 해서 숭양해 온 수백만 농민ㆍ노동자, 그리고 지식인들은 실로 선장을 잃은 배를 창해에 띄워 놓은 느낌입니다.&lt;BR&gt;
&lt;BR&gt;
조봉암 선생!&lt;BR&gt;
민족 통일에의 길은 아직도 멀고 험하며, 민족의 비원인 이 과업은 선생이 쓰러지신 지금,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lt;BR&gt;
&lt;BR&gt;
선생이 목숨 바쳐 사랑하시던 가난한 대중과 짓밟혀 온 대중은 지금도 기아와 추위를 면하지 못한 채 버려지고 있는데 선생이 가신 뒤, 누가 그들의 권리를 주장해주고 지켜준다는 말입니까. &lt;BR&gt;
&lt;BR&gt;
창궐의 극을 다한 독재정치의 탄압 속에서 국민의 민주적 권리가 여지없이 짓밟히고 있는 이때, 선생이 아니고서 그 누가 압제자에게 대항할 민주세력을 조직 지도해나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lt;BR&gt;
&lt;BR&gt;
선생이야말로 바로 살아 계셔야 되고, 선생의 생명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추의 저주를 한 몸에 지녀야 할 반역자의 철퇴는 선생의 동맥을 끊고야 말았습니다. &lt;BR&gt;
&lt;BR&gt;
선생의 존재는 이정표를 잃고 진로를 잃은 조국의 등불이었습니다. 어둔 밤을 밝게 물들인 그 등불이야말로 마치 동해 저편으로부터 희망의 태양이 솟아오르고, 백두산과 압록강, 지리산과 낙동강, 남북 삼천리 금수강산을 아름답게 물들일 그날까지 꺼져서는 안 될 불이었습니다. &lt;BR&gt;
&lt;BR&gt;
우리들은 선생의 그 깊은 애정어린 면모와 불덩이 같은 사상에서 타오르는 휘황한 불빛을 통해 뒤덮고 있는 암운을 쓸어내고 민족의 미래를 전망할 수 있으며, 통일된 민족의 행복된 생활을 상상할 수도 있었습니다. &lt;BR&gt;
&lt;BR&gt;
그러나 암흑의 범죄자는 자기의 야망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 등불이 무엇보다도 큰 장애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적 완전 범죄자의 손으로 민족의 광명은 지워지고 선생은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신 것입니다. &lt;BR&gt;
&lt;BR&gt;
그러나 7월 31일 선생이 남기신 마지막 말씀을 우리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lt;BR&gt;
“모든 사람이 평등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회의 실현을 위해 노력합시다” 라던 그 말씀을! &lt;BR&gt;
&lt;BR&gt;
그래서 참살된 7월의 운명을 우리들은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lt;BR&gt;
세월이 흐르고 흥분이 가라앉는다 해도 우리는 결단코 선생에 대한 불법적인 처형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수년 후 조국의 영광이 회복되고 분열된 민족의 통일이 전취된 그날이 왔을 때, 선생의 생명을 박탈한 교수대의 둔중한 울림은 비겁한 반역자의 목 위에서 다시 울려 퍼질 것입니다. 준엄한 세계사의 심판의 하나가 선생의 육체를 손상시키고 선생의 명예를 더럽힌 그 형장에서 추상같은 민족의 고발에 의해 장엄하게 개정될 것입니다. 그 날 그 일을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 설사 우리들의 위에 떨어지는 한이 있다 해도 승리의 영광은 우리들의 것이고 우리들 형제 위에 찬연할 것입니다. &lt;BR&gt;
&lt;BR&gt;
조봉암 선생!&lt;BR&gt;
조국의 평화통일과 민주주의의 확립을 폭력에 의해 저해하는 세력을 타도하기 위해 선생의 묘를 기지로 삼아 민주주의의 군세를 정비하여 행진을 개시할 것입니다. 이 군세는 선생이 높이 드신 기를 앞세워 그들 반민족세력을 정복하고 분쇄할 것입니다. 이 대열에는 민족을 위해 생명을 바치신 선열의 영혼이 참가하실 것이며 원한을 품고 쓰러지신 김구 선생의 유지와 여운형 선생의 정열, 그리고 송진우 선생의 지혜와 장덕수 선생의 천재가 가세하게 될 것입니다.&lt;BR&gt;
&lt;BR&gt;
조봉암 선생!&lt;BR&gt;
선생의 유지를 계승하는 우리들은 선생이 남기신 위대한 통일사업을 완수하는 일을 여기 선생의 영전에 삼가 서약하는 바입니다.&lt;BR&gt;
&lt;BR&gt;
조봉암 선생!&lt;BR&gt;
선생은 마침내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다고는 하더라도 선생의 사상과 정신은 우리들과 함께 살고 계심을 믿습니다. 선생의 죽음을 통곡하는 수천만 동지들은 힘을 결집해서 선생의 길을 오로지 뒤따를 것입니다. 내일도, 모래도, 1개월 뒤에도 우리들의 애수와 비탄이 그칠줄 모르는 것은 선생을 죽음에 이르게 한 지배자들에 대한 끝없는 증오 때문입니다. &lt;BR&gt;
&lt;BR&gt;
선생은 생전, 우리 사회가 수탈 없는 경제체제가 확립된 복지사회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내던져 선생의 유언 실현에 몸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그것은 세계가 지향하는 이상사회의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lt;BR&gt;
&lt;BR&gt;
선생은 생전, 피를 흘리지 않는 평화통일을 주장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명예에 걸고 그 실현을 위해 싸워나갈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피가 명령하는 윤리이기 때문입니다. &lt;BR&gt;
&lt;BR&gt;
조봉암 선생!&lt;BR&gt;
편히 잠드소서. 지금 권력의 폭풍이 선생의 묘까지 황량하게 하고 있지만 밤이 되면 수 많은 별들이 선생의 영을 달래는 전 민족의 눈물과 함께 아름답게 빛날 것입니다.&lt;BR&gt;
&lt;BR&gt;
민족의 지도자여!&lt;BR&gt;
선생의 죽음을 우리 민족은 결코 헛되이 하지 않을 것입니다.&lt;BR&gt;
부디 편히 쉬옵소서! &lt;BR&gt;
&lt;BR&gt;
&lt;div align=&quot;right&quot;&gt;1959년 8월 12일 &lt;BR&gt;
죽산 조봉암 선생 추도 실행 위원회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4)&lt;/span&gt;&lt;/div&gt;&lt;BR&gt;
&lt;BR&gt;
&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lt;BR&gt;
4) 앞의 책, 302~305쪽.&lt;/span&gt;&lt;BR&gt;
&lt;/font&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3279447&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부록</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Thu, 28 May 2009 23:00:00 GMT</pubDate>
		</item>
		<item>
			<title>[101회] 조사(弔辭) - 애국정신 이어받아 싸우자</title>
			<link>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79028</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black&quot; size=&quot;2&quot;&gt;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애국자 조봉암선생은 끝내 처형되었다. 향년 61세. &lt;BR&gt;
선생의 재심 청구가 각하된 다음날 아침이고 보면 즉시 항고의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이 도(道)에 어긋나는 조치가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취해졌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lt;BR&gt;
&lt;BR&gt;
조봉암 선생은 이승만 대통령의 주구들에 의해서 북한의 첩자라는 허울을 뒤집어 썼다. &lt;BR&gt;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날조된 것인가는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민의 누구도 선생을 북한의 첩자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기는커녕 선생을 위대한 애국자라 생각하고있다. &lt;BR&gt;
&lt;BR&gt;
왜냐하면 선생은 3천만 동포가 염원해 마지않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과감히 제창, 의연히 싸우시다 태연히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동포는 모두 선생의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을 머금고 울며 선생을 처형한 원흉에 대한 노여움이 머리끝까지 치밀고 노기 하늘을 찌를 기운이기 때문이다. 그저 동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외국인들, 그들조차 지나칠 정도의 그 비인도적 조치에 대하여 끓어오르는 의분을 금할 길 없다.&lt;BR&gt;
&lt;BR&gt;
선생의 주장은 옳았고 선생의 태도는 훌륭했다. &lt;BR&gt;
선생은 바로 조국의 미래며 빛나는 희망의 별이었다. &lt;BR&gt;
그것을 시기하고 선생을 없앤 이승만 대통령은 스스로 정의와 인도를 모르는 악마임을 실증했다.&lt;BR&gt;
&lt;BR&gt;
이승만 대통령은 끝내 자신의 묘혈을 팠다. &lt;BR&gt;
이승만 대통령은 이제 백성의 뜻이 하늘의 뜻임을 알 것이다. 총검을 가지고서도 이 소리를 어찌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을 알게 하는 것은 바로 바르고 행복되게 살려는 모든 동포의 의욕이기도 하다.&lt;BR&gt;
&lt;BR&gt;
애국자 조봉암 선생은 처형되었다. &lt;BR&gt;
그러나 선생의 주장은 영원히 빛날 것이다. 모든 동포는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우러르고 기리며, 스스로의 생을 바로잡게 하는 목소리로서 가슴 깊이 간직할 것이기 때문이다.&lt;BR&gt;
&lt;BR&gt;
우리들 또한 조국의 평화통일의 선구자 조봉암 선생의 위대한 애국적 정신을 기리고, 그 뒤를 잇기를 바라며 미력이나마 힘을 모아 싸울 것을 이에 엄숙히 맹서함으로써 선생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&lt;BR&gt;
&lt;BR&gt;
&lt;/font&gt;&lt;BR&gt;
&lt;div align=&quot;right&quot;&gt;&lt;font size=&quot;2&quot;&gt;1959년 8월 2일 일본 도쿄에서&lt;BR&gt;
조봉암 구명위원회&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주석 3) &lt;/span&gt;&lt;/font&gt;&lt;/div&gt;&lt;span style=&quot;padding-right: 1px; padding-left: 1px; padding-bottom: 0px; color: #202020; padding-top: 3px; background-color: #c9edff&quot;&gt;&lt;BR&gt;
&lt;BR&gt;
&lt;font size=&quot;2&quot;&gt;주석&lt;BR&gt;
3) 앞의 책, 300~301쪽.&lt;/font&gt;&lt;/span&gt;&lt;BR&gt;
&lt;BR&gt;
&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3270397&quot;&gt;&lt;/embed&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부록</category>
			<author>solwar (김삼웅)</author>
			<pubDate>Wed, 27 May 2009 23:00:00 GMT</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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