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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nnel>
		<title>이 풍진 세상에</title>
		<link>http://blog.ohmynews.com/q9447/</link>
		<description>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위에 서서</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Sat, 21 Nov 2009 07:51:34 GMT</pubDate>
		<item>
			<title>한 외고 졸업생의 편지에 대한 답신</title>
			<link>http://blog.ohmynews.com/q9447/255244</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003366&quot;&gt;&lt;BR&gt;
&lt;p&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63766014.jpg&quot; width=&quot;502&quot; height=&quot;337&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영어 몰입교육'은 계급구획의 표지로서 영어가 기능한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던 듯하다.&lt;/p&gt;&lt;/div&gt;&lt;/p&gt;
&lt;BR&gt;
&lt;div style=&quot;padding-right: 10px; padding-left: 10px; padding-bottom: 10px; padding-top: 10px; background-color: #e4e4e4&quot;&gt;내가 쓴 기사 “&lt;a href=&quot;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60851&quot;&gt;&lt;font color=&quot;#0000ff&quot;&gt;토플 만점 여중생 반대편엔 '루저'가 우글 - 특수 사례를 보편적 사례로 포장하는 언론 보도&lt;/font&gt;&lt;/a&gt;”가 나간 건 지난 11월 16, 17일 이틀에 걸쳐서다. 머리기사 바로 아래 자리를 잡은데다가 예민한 영어 문제 탓이었는지 조회수가 십만을 넘어버렸다. 댓글도 근 스무 개 달렸고 소액이나마 오랜만에 ‘좋은 기사 원고료’를 보내 준 독자도 있었다. 고마운 일이다.&lt;BR&gt;
&lt;BR&gt;
나는 내 기사가 그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여지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댓글도 그랬지만, 쪽지로 내게 자신의 의견을 전해오는 이는 두 갈래였다. 내 의견에 동의한다는 쪽이 하나요, 그런 부정적인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이 나머지였다. &lt;BR&gt;
&lt;BR&gt;
몇 편의 시선을 끄는 의견 가운데서 유독 장문의 편지가 하나 끼어 있었다. 일본에 유학 중이라는 21살의 여학생이다. 이 학생은 내 기사를 읽고 ‘예전부터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있었던 생각을 꼭 말씀드리고 싶’어서 내게 편지를 썼다고 했다. 붙인 문서파일은 A4 세 쪽이나 되었다.&lt;BR&gt;
&lt;BR&gt;
다음 글은 이 학생에 편지에 대한 나의 답신이다. 학생은 내 기사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자신의 의견을 펴면서 시종 정중한 어투로 잃지 않았다. 나는 아주 간단히 답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세 쪽의 지면에 담긴 그의 의견을 읽으면서 피차간 소통에서 쉬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의례적인 답신이 아니라 진지한 응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lt;BR&gt;
&lt;BR&gt;
이 학생은 서울의 어떤 외고를 나와서 현재 일본 유수의 대학교에 유학중이라고 했다. 그는 내가 ‘편견을 가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자신의 ‘실명과 가족 상황, 주거지, 그리고 공부 방법까지 상세하게 공개’한다고 했다. 나는 그가 원한 대로 편견 없이 이 기사와 그의 의견에 대한 내 생각을 밝힐 작정이다. &lt;BR&gt;
&lt;BR&gt;
학생은 실명과 학교 등을 모두 공개했지만 나는 이를 모두 익명으로 처리한다. 답신이므로 그의 편지 원문을 공개하는 게 이해를 돕겠지만, 여기서는 최소한의 필요한 부분만 인용하기로 한다. 본인의 의사 확인 없이 원문을 공개하는 것도 사생활 침해가 될 수 있겠기 때문이다. &lt;BR&gt;
&lt;/div&gt;&lt;BR&gt;
&lt;p&gt;&lt;strong&gt;&lt;font face=&quot;dotum&quot; size=&quot;3&quot;&gt;나리 양에게&lt;br /&gt;
&lt;/font&gt;&lt;/strong&gt;&lt;BR&gt;
보내준 편지를 잘 받았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기사에 대한 의견을 장문의 편지에 담은 나리 양의 마음은 미루어 짐작할 만합니다. 무엇보다 그 내용과 무관하게 시종 정중한 태도로 문제를 제기해 준 것에 대해서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예절이란 때로 불편한 것이라고도 하지만, 그걸 다함으로써 나리 양은 내가 진득하게 그 글을 다 읽도록 만들었으니까요.&lt;BR&gt;
&lt;BR&gt;
우선 그간 나리 양이 이룩한 성취를 치하해야겠습니다. 편지에 드러난 바를 보면 영어 공부를 위해 나리 양이 들인 노력은 가히 초인적이지 않았나 싶네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영어를 &amp;lt;거의 모르는&amp;gt;(이하 편지 인용은 모두&amp;lt;&amp;gt;로 처리함) &amp;lt;평범한 사업가&amp;gt;, &amp;lt;가정주부&amp;gt;일 뿐인 부모님 아래서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영어 공부를 계속해 온 나리 양의 성취는 칭찬 받아야 마땅해 보입니다. &lt;BR&gt;
&lt;BR&gt;
&lt;font face=&quot;dotum&quot; size=&quot;3&quot;&gt;&lt;strong&gt;나리 양이 이룬 '성취'는 축하할 만합니다&lt;/strong&gt;&lt;/font&gt;&lt;BR&gt;
&lt;BR&gt;
영어 성경책과 테이프, 자막을 가린 영화, 영어 만화책 등을 통해서 나리 양은 영어를 공부했고, 그 결과는 놀랄 만하네요. &amp;lt;토익 950점(990점 만점), 토플 106점(120점 만점)의 성적&amp;gt;과 고교 때는 프랑스어를 전공해서 &amp;lt;프랑스에서 주관하는 능력시험 DELF B1(중급 정도 됩니다)&amp;gt;도 갖고 있다니 그건 외국어에 문외한인 내게는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lt;BR&gt;
&lt;BR&gt;
다만 &amp;lt;영어 교육에 매우 열성적&amp;gt;인 어머니의 배려만으로 이러한 성과를 거두었으니, 요즘 말로 나리 양은 ‘자기주도적 학습’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하겠습니다. 더구나 &amp;lt;어머니께 사달라고 요청하기 죄송&amp;gt;하여 보고 싶은 영어책이나 영어 만화책을 &amp;lt;서점에 가서 쭈그려 앉아 읽곤&amp;gt; 한 결과이니 나리 양의 성취를 바라보는 부모님께서도 무척 흐뭇하셨겠습니다.&lt;BR&gt;
&lt;BR&gt;
나는 지금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현직 교사입니다. 당연히 나는 아이들의 ‘영어 공부’에 대한 고민을 잘 알고 있고, 교사로서 그런 아이들을 돕지 못하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유감스럽게도 나리 양이 선택한 방식을 아이들에게 권하지는 못할 듯합니다. 왜냐하면 저마다 다른 수준과 조건의 아이들에게 일률적 방식을 적용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지요.&lt;BR&gt;
&lt;BR&gt;
먼저 나는 몇 가지 사소한(그러나 매우 중요한!) ‘오해’를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나리 양은 내 글을 상당히 심각한 수준에서 ‘잘못’ 읽은 듯합니다. 그 ‘오독(誤讀)’은 단순히 글을 급하게 읽었거나 몇몇 문장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선 입장의 차이, 달리 말하면 우리가 서로 다른 계층(계급)의 이해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993366&quot;&gt;&amp;lt;기자님께서 김현수 양의 사례(토플 만점 받은 중학생)를 부정적으로 일반적인 사람들의 경우와 비교하신 글을 보고, 혼자서 공부해서 외국어 실력을 쌓은 사람들은 얼마나 억울해 할지, 특히 혹시라도 김현수 양이 (정말로 자기의 힘으로 그 경지까지 다른 것일 경우)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얼마나 억울해 할지 단 한 번만이라도 생각해 주세요.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제 메일을 보시고, 그 생각이 조금이라도 바뀌셨으면 좋겠네요.&amp;gt;&lt;BR&gt;
&lt;/font&gt;&lt;BR&gt;
나리 양은 내 기사가 토플 만점을 받은 중학교 1학년 여학생의 성취를 폄하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건대 나는 그 어린 여학생의 이룬 ‘토플 만점’을 ‘장하고 대단한 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이면 열네 살, 솜털도 가시지 않은 어린 여학생이 어른들도 골머리를 앓는 영어 시험에 도전해 그런 믿어지지 않는 성적을 거둔 것은 축하할 일이지, 폄하하거나 무시할 일은 결코 아닙니다. &lt;BR&gt;
&lt;BR&gt;
&lt;font face=&quot;dotum&quot; size=&quot;3&quot;&gt;&lt;strong&gt;오독 1 : 토플 만점은 훌륭하나 그것은 특수사례일 뿐 &lt;BR&gt;
&lt;/strong&gt;&lt;/font&gt;&lt;BR&gt;
나리 양은 내가 김 양의 사례를 &amp;lt;부정적으로&amp;gt; 일반과 &amp;lt;비교&amp;gt;했다고 했는데, 그것 역시 오독입니다. 김양의 사례는 특수한 경우입니다. 그것은 원칙적으로 일반적 사례와 단순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나는 김양의 성취를 놀라워하면서도 그 성취가 일반적 사례와는 다른 특수한 상황 변수의 산물이라는 것을 지적한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amp;lt;혼자서 공부해서 외국어 실력을 쌓은 사람들&amp;gt;이 억울해 할 일은 없을 터입니다. &lt;BR&gt;
&lt;BR&gt;
편지에 따르면 나리 양은 단지 &amp;lt;영어 교육에 매우 열성적&amp;gt;인 어머니의 배려 외에는 어떤 부모의 도움 없이 일정한 성취를 이루었다고 구체적인 점수까지 밝혔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리 양의 영어 성적이 오직 나리 양 자신의 노력의 결과라는 데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50554941.jpg&quot; width=&quot;302&quot; height=&quot;42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서울 영어마을&lt;/p&gt;&lt;/div&gt;기사에서 밝혔듯이 우리 시대의 ‘수학능력’이란 학생의 능력뿐 아니라 부모의 경제력까지 포함하는 매우 확장된 개념입니다. 학생들의 학력이란 그 자신의 지능을 포함한 개인적 요소뿐 아니라, 그보다 훨씬 광범위한 변수들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 변수란 부모의 경제력 등 사회적 지위, 사는 곳과 수학한 학교 등 가정환경, 갖가지 형태의 사교육과 해외연수의 경험 유무 들이라 할 수 있겠지요.
&lt;BR&gt;
&lt;BR&gt;
여느 사람보다 훨씬 집요하고 끈질기게 자기 성취를 위해 자신의 욕망을 다스려온 강인한 의지는 몰론 나리 양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토익과 토플 성적, 그리고 현재 일본의 명문대에서 공부하게 되기까지 그 모든 과정이 나리 양의 개인적 선택이고, 개인적 역량의 결과물이라고는 결코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lt;BR&gt;
&lt;BR&gt;
하나의 현상은 단일한 원인으로 생성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삶이든 역사든 마찬가집니다. 나리 양은 여느 학생이라면 감히 꿈도 꾸어보지 못하는 명문 외고를 다녔고, 별 성과가 없었다고는 했지만 &amp;lt;3주간&amp;gt;의 &amp;lt;어학연수&amp;gt;를 받았고, &amp;lt;강남구 대치동&amp;gt;에서 살 만큼의 여유 있는 부모님을 두고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지능(이 역시 부모님에게서 받은 것이긴 하지만)을 빼면 나머지 존재 조건들은 나리 양 개인의 역량과는 무관한 것들입니다. &lt;BR&gt;
&lt;BR&gt;
그러나 이 조건들은 결국 나리 양의 성취를 가능하게 한 변수로서 유의미하게 작용해 왔지요. 또 그것들이 서로 상승·순환하면서 나리 양의 오늘을 있게 한 것이라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걸 부정하는 것은 좋든 싫든 나리 양이 몸담고 있는 현실을 부정하는 일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lt;BR&gt;
&lt;BR&gt;
영어를 바라보는 나리 양과 나의 상이한 태도는 앞서 말한 우리가 소속된 계층의 이해에서 비롯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나리 양은 우리 사회의 영어 열기를 심상하게 받아들이고 거기에 발 빠르게 적응해 왔지만 나는 영어 능력이 계급을 결정해 주는 사회 시스템을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의 사실을 바라보는 두 개의 다른 시선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라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겠지요.&lt;BR&gt;
&lt;BR&gt;
내 주변에도 집안 형편 때문에 어학연수는커녕 ‘사교육’조차 받지 못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습니다. ‘영어교육’에 ‘열성적’이고 싶지만 고단한 삶 때문에 휴일에도 잔업이나 특근에 시달려야 하는 많은 노동자 부모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우리 사회가 ‘부모의 직업과 경제적 능력이 자식들의 미래를 결정’하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나리 양은 무심할지 모르지만 내게 그것은 매우 불편한 일입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993366&quot;&gt;&amp;lt;제가 부모님을 잘 만나서 다행히 영어책들을 많이 사주신 건 맞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 가자면, 전 요즘 세상에 돈이 없어서 영어 공부하기 힘들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형 서점에 가서 쭈그려 앉아 책을 읽으면 누가 쫓아내기라도 하나요?&amp;gt; &lt;BR&gt;
&lt;/font&gt;&lt;BR&gt;
‘돈과 영어공부’와의 관계에 대한 나리 양의 항변은 농담으로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가난은 불편할 뿐,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는 얘기는 60년대에나 먹힐 오래된 농담이지요. 가난이란 단순히 불편뿐 아니라, 한 인간의 존엄을 깃털처럼 가볍게 날려 버리기도 하니까 말이지요.&lt;BR&gt;
&lt;BR&gt;
&lt;font face=&quot;dotum&quot; size=&quot;3&quot;&gt;&lt;strong&gt;오독 2 : 승자의 논리…, 그러나 실패는 '노력 부족'의 결과가 아니다&lt;BR&gt;
&lt;/strong&gt;&lt;/font&gt;&lt;BR&gt;
나리 양의 두 번째 오독은 내 기사가 바라보고 있는 ‘지점’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달을 가리키는데 왜 손가락을 쳐다보느냐는 얘기를 덧붙이지는 않겠습니다. 나는 기사에서 지극히 '특수한 사례'에 불과한 이야기들을 '보편·일반적 사례'로 부당하게 바꾸어내는 보도나 성공담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즉 나는 예의 보도태도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지, 토플 만점에 시비를 건 것은 아니었다는 얘기지요.&lt;BR&gt;
&lt;BR&gt;
김양의 사례가 보편적인 일반 사례라고 보지는 않겠지요. 그것은 평균적인 학생과는 무관한, 어릴 적부터 ‘영어 신동’으로 자라 온, 전직 영어 교수를 어머니로 둔 어학적 재능이 아주 비범한 학생의 이야깁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사교육이나 어학연수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오늘에 이른 나리 양 자신의 경우도 일반적인 경우라 하기는 어렵겠지요. &lt;BR&gt;
&lt;BR&gt;
그리고 그런 ‘특수 사례를 보편·일반적 사례’로 포장하는 언론의 의도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승자의 논리’와 닿아 있습니다. ‘승자의 논리’란 말 그대로 그들이 거둔 승리가 '땀과 열정',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와 비전'의 결과라고 여기는 것이고, 그것은 거꾸로 패자들의 그것이 ‘무능’과 ‘나태’의 ‘당연한 결과’라고 규정하는 것과 표리를 이룹니다. &lt;BR&gt;
&lt;BR&gt;
기사에서 밝혔듯 우리 시대의 실패와 좌절은 99%에 못 미치는 ‘노력과 성실’ 때문이 아니라 이들이 승자들이 가진 다른 유효한 변수를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노력'과 '성실'이 사업의 성패를 결정짓는다면 이 땅의 모든 서민들은 성공의 성채 위에 앉아 있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자본’이라는 변수는 힘이 아주 세답니다. 그것은 서민들의 실패를 매정하게 확정해 주면서도 치솟는 건물 임대료나 부동산 차액 등을 통하여 골프로 소일하는 유한계급의 부를 두터이 해 주는 것이니까요. &lt;BR&gt;
&lt;BR&gt;
중언부언했습니다만, 내 말의 본뜻은 나리 양이 생각하는 것처럼 패자들의 실패가 반드시 노력이나 성실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승리자들이 열심히 일하고 싸운 결과로 승리했다면 패자들 역시 힘들여 일한 점에서는 승자와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은 성공 대신 실패의 성적표를 받아들었을 뿐이지요. &lt;BR&gt;
&lt;BR&gt;
실패한 이들을 향해 나는 ‘루저(loser)’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특별한 뜻은 없었습니다. 마침 어느 방송에서 ‘루저 논란’이 시끄러웠는데 나는 그게 우리 시대의 계급 고착화 현상에 대한 은유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거지요. 일정한 기준에 이르지 못한 이들을 ‘루저’라 한다면 영어 고득점에 실패한 이도 ‘루저’임에는 틀림이 없지요.&lt;BR&gt;
&lt;BR&gt;
짐작했겠지만 나는 그 낱말을 ‘반어적 의미’로 썼습니다. 그러나 그 반어를 이해하지 못했던지 몇몇 분은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나리 양도 그랬던 것 같네요. 키 작은 사람을 루저로 부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영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결코 아무도 루저라 부르지 않습니다.&lt;BR&gt;
&lt;BR&gt;
그러나 이 사회는 다르네요. 이 사회는 키 작은 루저 파동에서 드러난 것처럼 일정한 기준에 이르지 못한 이들을 패배자로 분류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나라가 지금 지향하고 있는 저열한 시장주의에 따르면 합당한 분류가 되겠지요. ‘아무도 2등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이 땅에선 마치 신성불가침의 불문율처럼 보이니까요.&lt;/p&gt;&lt;BR&gt;
&lt;p&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315761525.jpg&quot; width=&quot;502&quot; height=&quot;33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경기영어마을. 영어마을은 우리 사회의 영어 광풍을 고스란히 드러내준다.&lt;/p&gt;&lt;/div&gt;&lt;/p&gt;
&lt;p&gt;나리 양이 내가 쓴 루저라는 말을 싫어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나리 양의 아래 발언에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게 나리 양의 정직한 마음의 표현이라는 걸 이해하면서도 나는 그 문맥 속에 숨어 있는 '승자의 논리'가 가슴 아팠습니다.&lt;br /&gt;
&lt;BR&gt;
&lt;font color=&quot;#993366&quot;&gt;&amp;lt;취업을 위해 스펙을 쌓으려고 미친 듯이 토익 준비들을 하고 있겠지요. 저도 공공 도서관에 갔을 때 수많은 대학생들이 '토익 700점 돌파하기' 와 같은 책들을 끼고 씨름하고 있던 게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데도 왜 토익 700점을 넘기가 힘든지, 토플 만점을 받은 아이의 해맑은 얼굴 위에 정처를 읽고 길 위에 서 있는 청년들의 어두운 얼굴들이 겹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고 싶으십니까?&lt;BR&gt;
&lt;BR&gt;
7개 대회 연속 우승을 차지한 김연아 선수는, 하루 종일 아이스링크 장에서 피겨스케이트만 탈까요? LPGA 상금왕에 확정된 신지애 선수는, 하루 종일 골프장에 틀어 박혀서 샷 연습만 할까요? 노력형 축구 천재 박지성 선수는 종일 슛 연습만 하고, 효녀 복서 김주희 선수는 체육관에서 샌드백만 두드리고 있을까요?&lt;BR&gt;
&lt;BR&gt;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피겨스케이팅, 골프, 축구, 복싱은 당연히 기본적으로 하면서 로드웍, 웨이트 트레이닝, 스피드 훈련, 체력 훈련, 마인드 트레이닝도 같이 열심히 해주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결과들이죠. 영어 공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lt;BR&gt;
&lt;BR&gt;
토익 점수를 올리겠다고 애초에 뒷받침되는 영어 실력도 없으면서 오직 토익책만 끌어안고 살기 때문에 그런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는 거죠. 전 토익 950점 받았을 때, 토익책 한 번도 안보고 가서 시험 봤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학원을 안 다녀서가 아닙니다. 부모가 교수가 아니어서가 아니라는 겁니다. 모를 뿐이에요. 바로 앞의 이익에만 눈이 멀어서요.&amp;gt;&lt;BR&gt;
&lt;/font&gt;&lt;BR&gt;
나리 양의 관점은 아주 단순명료하네요. 나는 단순히 개인적 능력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의 결과로서 ‘길 잃은 청년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나라에서 이제 영어 실력은 젊은이들의 능력을 재는 만만찮은 척도로 군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지요. 이미 영어는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서, 또 다른 '루저'를 양산하는 새로운 잣대가 되어 버렸다는 얘깁니다. &lt;BR&gt;
&lt;BR&gt;
일정한 토익 점수를 얻지 못해서 서류전형에서 탈락한 숱한 구직희망자에게 영어는 계급을 구획하는 표지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요. 시험이 가진 변별기능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인간의 능력을 단지 영어 능력으로만 평가한다는 것은 결코 공정하지 않으며, 그런 획일적 능력만을 요구하는 사회 역시 건강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lt;BR&gt;
&lt;BR&gt;
그러나 나리 양은 김연아, 신지애, 박지성, 김주희 등 승리의 상징으로 떠오른 스포츠 스타의 예를 빌려 그들의 성공과 승리가 ‘노력’과 ‘체계적 훈련’의 결과라고 강조하는군요. 물론입니다. 훈련과 자기관리에 실패한 선수가 스타가 될 수는 없을 테니까요.&lt;BR&gt;
&lt;BR&gt;
그러나 앞서 말했듯 영어 고득점에 실패한 이들 역시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한 것은 분명합니다. 나리 양은 그들의 잘못된 공부 방식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진단하지만 글쎄요, 그 실패를 그렇게 단순하게 분석할 수 있을까요. 그런 단순한 방식이 관철될 수 있는 사회라면……, 그런 세상은 차라리 행복하지 않을까 싶네요.&lt;BR&gt;
&lt;BR&gt;
&lt;strong&gt;&lt;font face=&quot;dotum&quot; size=&quot;3&quot;&gt;성공적인 삶은 '이웃·사회와 공감하는 능력'으로부터&lt;BR&gt;
&lt;/font&gt;&lt;/strong&gt;&lt;BR&gt;
정돈되지 못한 채 논의가 제법 길어졌습니다. 이제 장황한 글을 맺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나는 나리 양의 생각과 관점을 반박했습니다. 나는 글을 통해서 드러난 나리 양 의 견해나 생각을 ‘인간적 미성숙’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앞만 보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과정에서 주변과 우리 사회에 대해 달리 이해하고 고민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으로 말이지요. &lt;BR&gt;
&lt;BR&gt;
성공적인 삶은 영어 실력이나 시험 성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그걸로 성취되는 것은 가시적 지위고 형식일 뿐이지요. 아름다운 삶이란 오히려 우리 사회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이 낳는 여러 가지 문제를 가슴으로 느끼고 공감하는 능력에서 비롯한다고 나는 믿습니다. &lt;BR&gt;
&lt;BR&gt;
나는 나리 양의 편지와 함께 1982년생 사회 초년생이라고 소개한 어느 대기업 신입사원의 편지도 함께 받았습니다. 1982년생이라면 우리 나이로 스물여덟, 무쇠라도 녹일 만한 기개가 빛나는 젊음입니다. 그는 내게 추천할 만한 도서가 없는가 하고 물었지요.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993366&quot;&gt;기사 잘 읽었습니다. 현재 사회로 첫 발을 내 디딘 회사원이지만, 엔지니어로서 편협한 시각에 치우치는 게 두려워 균형 잡힌 사고를 할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고자, 서적 추천을 받으려고 이렇게 쪽지를 드립니다. 작은 조언 하나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lt;BR&gt;
&lt;/font&gt;&lt;BR&gt;
이 어려운 시기에 대기업에 취업한 청년이니 자신감이 넘칠 만한데도 청년은 겸손과 진정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의 태도에서 뭐랄까, 인간과 인간성에 대한 신뢰 같은 것을 뚜렷하게 느꼈습니다. 나는 요즘도 이런 젊은이가 있다는 사실에 큰 위로를 받았음을 고백합니다.&lt;BR&gt;
&lt;BR&gt;
스물한 살인 나리 양에 비기면 청년은 일곱 살쯤 연상이네요. 나는 몇 년 후에 나리 양도 사회 진출을 앞두고 비슷한 고민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나는 나리 양이 '빛'을 추구하되 그것이 그려내는 '그늘'을 이해하고 그것을 따뜻한 눈길로 지켜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lt;BR&gt;
&lt;BR&gt;
나리 양은 &amp;lt;토익, 토플, 텝스에서 다 만점을 받는 목표&amp;gt;를 갖고 있다고 했지요. 나는 나리 양이 그것을 달성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비록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리 양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도 잊지 말기 바랍니다. &lt;BR&gt;
&lt;BR&gt;
나는 시험에서 얻는 만점보다 삶을 통해서 이웃과 나누는 기쁨과 슬픔을 이해하고 우리 사회와 역사 발전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 것이 더 값지고 보배로운 일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나는 나리 양이 인간적 성숙을 통해 우리 사회의 건강한 시민으로 성장하리라는 걸 믿습니다. &lt;BR&gt;
&lt;BR&gt;
나리 양의 건승을 빕니다. &lt;/p&gt;&lt;BR&gt;
&lt;div align=&quot;center&quot;&gt;&lt;BR&gt;
&amp;lt;2009. 11. 19.&amp;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63924563.jpg&quot; width=&quot;70&quot; height=&quot;41&quot; alt=&quot;&quot;/&gt;&lt;/div&gt;&lt;BR&gt;
&lt;/div&gt;&lt;/font&gt;&lt;BR&gt;
&lt;BR&gt;
&lt;div style=&quot;padding-right: 10px; padding-left: 10px; padding-bottom: 10px; padding-top: 10px; background-color: #e4e4e4&quot;&gt;&lt;font color=&quot;#333333&quot;&gt;이 글이 나간 뒤 많은 분들이 의견을 밝혀 주었다. 그 의견도 첨예하게 갈라지는 것 같다. 다른 의견을 가진 분들끼리 댓글로 토론이 이루어지는 걸 보면서 민주적 의사소통의 힘을 새로 깨달아보기도 한다. &lt;BR&gt;
&lt;BR&gt;
오늘 아침, 나는 다시 ‘나리’양으로부터 쪽지를 받았다. 쪽지를 여기 전재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텍스트 파일로 온 거라서 문단 구분이 잘 안 되어 있어서 구분해 준 것 외에는 본인의 글 전문이다. ‘오해’가 있다면 이 글이 그것을 해소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이 글에 나의 해명이나 의견은 따로 붙이지 않는다. &lt;BR&gt;
&lt;BR&gt;
나리 양은 내게 자신의 양해를 구하지 않고 일부를 공개한 것에 대해 무척 화가 났던 모양이다. 나는 그 점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나는 나리 양의 편지에 드러난 생각과 현상을 개인의 문제로 여기기보다 우리 사회가 가진 단면의 일부라고 이해했던 것이다. &lt;BR&gt;
&lt;BR&gt;
뒤늦었지만 나리 양에게 사과의 마음을 전한다. 나리 양의 편지가 단순히 반대 의견에 그치고 말았다면 나는 답신을 따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의 진지한 마음에 이끌렸고, 그래서 꽤 긴 글로 내 생각을 밝히면서 그가 훌륭한 시민으로 성장했으면 하고 바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두 번째 편지를 받은 지금까지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lt;BR&gt;
&lt;BR&gt;
&amp;lt;2009. 11. 21.&amp;gt;&lt;BR&gt;
&lt;/font&gt;&lt;/div&gt;&lt;BR&gt;
&lt;font face=&quot;dotum&quot; color=&quot;#0000ff&quot; size=&quot;3&quot;&gt;&lt;strong&gt;나리 양의 두 번째 편지&lt;BR&gt;
&lt;/strong&gt;&lt;/font&gt;&lt;BR&gt;
&lt;font color=&quot;#003366&quot;&gt;안녕하세요. '나리'입니다.&lt;BR&gt;
어디서부터 글을 써야할지 잘 모르겠네요. 먼저 다녀가신 분들께서 이 글을 볼 기회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마음에 쓰는 글이 두서없어 보이실 거라 생각하여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우선, 제 실명은 '나리'가 아닙니다. 제게도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예쁜 이름이 있습니다 ^^; &lt;BR&gt;
&lt;BR&gt;
걱정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마음을 조금 가라 앉혔지만, 저는 솔직히 낮달 기자님의 두 번째 기사를 보고 분노와 배신감을 느꼈었습니다. 저는 어제 낯달 기자님으로부터 메일로 답신을 받았습니다. 여전히 저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셨지만, 제 편협한 시각을 제 글처럼 역시 긴 글로 지적해주신 기자님께 감사했습니다. &lt;BR&gt;
&lt;BR&gt;
기분이 상하는 표현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서로 의견을 전달하고 소통하고 싶어하는 마음에는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현재 교편을 잡고 계시다길래, 한 가지를 가르쳐주셔도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저는, '기자님'이란 호칭 대신 '선생님' 이라는 호칭으로 제 고마운 마음과 미처 전달하지 못한 제 생각 몇 줄을 짧게 적어 보내려고 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는 웹검색을 하려고 네이버에 들어갔다가 '외고 졸업생의 편지에 대한 답신' 이란 제목을 보고 '설마..' 했습니다. &lt;BR&gt;
&lt;BR&gt;
기자님, 저는 개인적으로 메일을 보내서 의견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메일 답신을 받았기에, 기자님께서 이렇게 공개적으로 기사로 쓰실 거라는 건 전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제게 양해를 구하셨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신지요? &lt;BR&gt;
&lt;BR&gt;
이름만 가명으로 바꿔준 게 사생활을 보호해주신 건가요...공인어학점수와 자격증, 주거지, 유학중인 나라는 여과 없이 쓰여졌네요. 제가 기자님께 허세를 부리려고 점수를 공개한 것도 아니고 개인정보를 공개하면서까지 제 의견을 오해 없이 전달하고 싶었을 뿐인데...차라리 제가 쓴 글의 전문이 공개되었다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 않았을 겁니다. &lt;BR&gt;
&lt;BR&gt;
제 글이 부족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오해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속상합니다. 기자님이 쓰신 글로 인해 전 저의 제2의 모국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애착을 가지고 있는 영어를 '도구'라고 생각하며 '시험에서 만점 받으려는, 눈앞의 이익만인 잘못된 목표'를 가지고, '배움의 끝이 오직 만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lt;BR&gt;
&lt;BR&gt;
앞,뒤 말을 모두 잘라내고 &amp;lt;토플,토익,텝스 만점&amp;gt;이라는 내용만 뽑아 공개하셔서 그런 것 같은데, 전 기자님께 보낸 메일에서, &quot;그 꿈을 이뤘을 때, 혹시 제게 언론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전 꼭 말하고 싶습니다. 사교육에 의존하는 게 다가 아니라구요. 사교육 없이도 충분히 영어 잘할 수 있다고, 방법이 잘못 되었을 뿐이라고, 꼭 말해주고 싶습니다. &lt;BR&gt;
&lt;BR&gt;
넌 아무리 3주라도 미국에도 갔다 온 적이 있고, 학원 다니면서 사교육도 받았으면서 뭐가 그렇게 당당하냐고, 해볼 꺼 다 해봤으니까 그런 말 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비난한다면 그런 사람들에게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경험해봤기에 가장 좋은 방법을 알려줄 수 있을 거라고 전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quot; 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사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사람들에게 제 영어 공부 방법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싶은 의도는 잘 전달되지 못했나 보네요. 제 표현이 부족했던 탓일 거라 생각하겠습니다. &lt;BR&gt;
&lt;BR&gt;
그리고...기자님께선 제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을 잘라버리셨네요. 전 영어에 능통하게 된 여러 사람들의 예와 공부 방법을 말씀드렸었습니다. 외진 산골마을에서 학력이 높지 않으신 부모님과 사는 한 여자아이가 혼자 CNN을 보면서 영어를 깨우친 일화가 가장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인데,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나 봅니다. 또한, 저는 기자님께 &quot;전 '루저'라는 표현을 정말 싫어하고, 영어를 못한다고 해서 '루저'인 이유도 모르겠지만, 그 사람들이 그, 소위 말하는 '루저' 가 되는 이유라면 알 것 같습니다.&quot; 라고 말씀드렸었습니다. &lt;BR&gt;
&lt;BR&gt;
영어를 좀 할 줄 아는 사람들은 특권 계층인냥 '유세'떠는 경우가 많다고 말씀하신 분이 계시던데, 저는 맹세코 단 한 번도 영어 실력으로 유세 떤 적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머릿속에 들어 있는 지식으로 우쭐되는 것은 참 치사하고 못난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모든 사람이 영어를 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lt;BR&gt;
&lt;BR&gt;
다만, 영어 성적이 그 사람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어버린 요즘의 사회 현실에 대해서 낮달 기자님께서 안타까운 듯이 말씀하셨길래 부족한 실력이지만, 전 그저, 사교육을 받지 않아도 영어를 잘 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 방법, 그리고 잘못된(?) 공부방법이 야기하는 결과를 전달하려는 의도 였는데, 대체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lt;BR&gt;
&lt;BR&gt;
사실 말씀드리고 싶은게 더 있지만, 정말 밤을 새도 지금 심정을 다 표현하지 못할 것 같기에, 몇 자만 더 적고 줄일 생각입니다. 저 역시 배경의 차이를 십분 인정합니다. 저는 과외를 한 번 해 본 것을 제외하고는 아르바이트를 하여 돈을 벌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번 학기부터 장학금을 받고 있어서, 조금만 더 아껴쓰면 집에 큰 부담은 드리지 않을 것 같길래 아직 이곳에서도 일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lt;BR&gt;
&lt;BR&gt;
그렇지만, 지금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혼자 밥하고 도시락 반찬 만들고, 공과금 내고 빨래하고 집 청소하면서 공부와 운동까지 다 하려다 보니 정말 힘들더군요. 밤늦게까지 노동을 하시거나 맞벌이를 하시는 분들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 지치고 힘드시겠죠. 아이들에게 신경 쓰실 여유가 정말 없으실 거라 생각이 됩니다. &lt;BR&gt;
&lt;BR&gt;
하지만 저는, '그런 형편과 환경에서 자란 애들이 잘사는 집 애들보다 못하는 건 어쩌면 필연적일지 모른다'라는 생각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이 사실일지라도,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떤 분이 말씀하셨죠, '가난이란 장벽으로 인해 재능을 발견할 수 없는 이들에게 발전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어려울 거 잘 압니다. 저는, 그 환경을 완벽히 이해한다고 감히 말씀 드리진 않겠습니다.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니, 자격도 없고요. &lt;BR&gt;
&lt;BR&gt;
얼마나 안 좋은 환경일지는 짐작이 갑니다. 공부하고 싶은데 가정 형편상 돈을 벌어야 하는 경우도 있을 테고, 주변 환경 때문에 공부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비단 공부뿐만 아니라 자기의 흥미와 적성이 맞는 분야에서 '될 수 있는 한' 열심히 노력하길 바랍니다. 그렇기에, '가진 자보다 더 못해도, 그건 당연한 거다'라고 절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quot;그래, 힘들지. 그렇지만 너도, 잘 할 수 있어.&quot;라며 희망을 주고 싶습니다. &lt;BR&gt;
&lt;BR&gt;
기자님께서는 특수 사례를 보편화 시키는 것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셨는데요, 저는 그 '특수 사례'를 보면서 이러한 사람들이 &quot;아, 나도 하면 될 수 있어.&quot; 라는 생각을 가지길 바랍니다. (이 부분에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낮달 기자님께서는 특수 사례라고 생각하시고, 저는 특수 사례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&lt;BR&gt;
&lt;BR&gt;
지금 우리는 이미, 무한 경쟁 시대에 들어서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웃과 나누는 기쁨과 슬픔... 네, 제가 '노력'이라는 기준에 치중하는 바람에 간과했지만, 기자님 말씀대로 정말 중요한 것이죠. 소수의 사람들이 노력 부족을 탓하지 않고 환경을 탓하는 합리화에 빠질까 염려되서 '노력하면 안되는 게 없다' 라는, 다른 모든 조건이 배제된 논리를 펼쳤습니다. 이해하려는 마음이 부족했다는 제 잘못을 인정합니다. 언짢으셨던 분들께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제 입장에서 억울한 점이 있는 만큼, 그 분들 역시 제 표현들을 보며 억울하셨을 거라는 점을 받아들이겠습니다. &lt;BR&gt;
&lt;BR&gt;
저는 낮달 기자님의 이 두 번째 기사와 댓글들을 보면서, 지금 16시간째 생각에 빠져있었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비교적 서로 예의를 지켜가며 진지하게 토론(?)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대체로 기자님의 의견에 동의하시는 분들과 동의하지 않으시는 분들로 나뉘는 것 같은데, 전 낮달 기자님으로부터 여러 지적을 받았지만, 아직도 제가 '틀렸다' 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 저는 두 의견 모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lt;BR&gt;
&lt;BR&gt;
그리고 그 어떤 분도 정답을 제시하진 못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이번에 배운 바에 의하면, 사람은 환경과 배경에 따라서 각각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요. 노력의 결과가 옳다고 주장하시는 분에게는 어김없이 기득권층이냐는 화살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저는 아직도 우리 사회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느꼈습니다. (물론, 저부터가 그랬지요 ^^;) 어찌됐던 간에, 인터넷이라는 공간 안에서 서로의 의견을 펼치면서 다른 사람의 의견도 알아가는 건 굉장히 바람직한 일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lt;BR&gt;
&lt;BR&gt;
이러한 '토론의 장'(?) 을 통해, 가진 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발휘하며 가지지 못한 자를 포용하며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가지지 못한 자 역시 가진 자의 혜택을 '미움'으로만 덮으려 하지 않고 인정하며 열심히 노력해서 낮달 기자님께서 말씀하신 '계층 간의 차이'가 좁혀지길 소망해봅니다. &lt;BR&gt;
&lt;BR&gt;
제 양해를 구하지 않고 인터넷에 게시하셔서 정말 분하고 황당했지만, 그래도 의도적이진 않으셨을 거라 믿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신 낮달 기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활발하게 의견을 내주신 많은 분들께도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lt;BR&gt;
&lt;BR&gt;
P.S. : 이미 글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문득 생각이 나는 댓글이 있네요. &quot;대형 서점에 가서 쭈그리고 앉아 책을 보면 누가 쫓아내나?&quot; 라는 생각은요, 다큐멘터리들 보면, 아이의 학습 능력이 뛰어나지만 그걸 뒷받침 해 줄 재력이 없고 지식이 없을 때 부모님들께서 많이 쓰시는 방법이더라구요. 일이 없는 날, 서점이나 도서관에 데리고 가주는 거요. 딱 그 나이에 생각할 만한 수준이라고 말씀하셨는데..뭐..크게 문제 삼진 않겠습니다만...이게 유치한건가요...잘 이해가 가지 않네요 ㅜㅜ&lt;BR&gt;
&lt;BR&gt;
P.S. 2 : 정말 그만 쓰려고 했는데, 가장 제 자신을 변호하고 싶었던 댓글이 갑자기 생각났네요. 전 외고 입학 당시 프랑스어과를 1지망에 쓴 게 맞습니다 ^^; 영어 만화책과 영어 소설책을 보며 영어를 공부했지만, 프랑스어에 대한 동경도 있었거든요. 지금도 대학에서 계속 프랑스어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래요 ^^&lt;BR&gt;
&lt;BR&gt;
&lt;/font&gt;&lt;BR&gt;
&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4829542&quot;&gt;&lt;/embed&gt;&lt;/div&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길위에서</category>
			<author>q9447 (낮달)</author>
			<pubDate>Thu, 19 Nov 2009 03:54:37 GMT</pubDate>
		</item>
		<item>
			<title>토플 만점 여중생 반대편엔 '루저'가 우글</title>
			<link>http://blog.ohmynews.com/q9447/255123</link>
			<description>&lt;strong&gt;&lt;font size=&quot;3&quot;&gt;-&lt;/font&gt;&lt;/strong&gt;&lt;font color=&quot;#003366&quot;&gt;&lt;font size=&quot;3&quot;&gt;&lt;strong&gt; 특수 사례를 보편적 사례로 포장하는 언론 보도 &lt;BR&gt;
&lt;/strong&gt;&lt;BR&gt;
&lt;/font&gt;09.11.16 10:37 ㅣ최종 업데이트 09.11.16 10:57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amp;nbsp; 장호철 (q9447) &lt;BR&gt;
&lt;BR&gt;
태그 : 토플 만점, 루저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367710329.jpg&quot; width=&quot;502&quot; height=&quot;34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토플 시험 ⓒ I.L.L &lt;/p&gt;&lt;/div&gt;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993366&quot;&gt;&quot;유학無 사교육無' 여중1년생 토플 만점&quot;&lt;BR&gt;
&lt;/font&gt;&lt;BR&gt;
일요일 오전 인터넷에 접속하자 포털 대문에 걸린 기사 제목이다. 늘 이런 게 뉴스가 되는 세상이긴 하지만 씁쓸한 기분을 어쩌지 못한다. 여중 1학년생이 미국 교육평가원(ETS)이 주관한 지난달 24일 iBT(internet-Based Toefl) 토플시험에서 120점 만점을 받았다는 기사다. &lt;BR&gt;
&lt;BR&gt;
나는 토플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다. 그런 시험이 있다는 정도만 알 뿐, 그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시험에 응시해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평균 78점(세계 평균 79점)이라는 한국인의 토플성적을 감안하면 어린 학생이 이룬 성과가 얼마나 '대단하고 장한 일'인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lt;BR&gt;
&lt;BR&gt;
'토플 만점'이 물론 중요하지만, 이 기사가 던지는 더 핵심적인 메시지는 ①14살짜리 여중생이 주인공이라는 것이며, ②이 학생이 해외유학이나 영어 사교육의 경험이 '없다'는 점이다. 영어 사교육과 해외 연수가 필수가 되어버린 '영어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이니 이는 '대단'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993366&quot; size=&quot;3&quot;&gt;&lt;strong&gt;&lt;font color=&quot;#003366&quot;&gt;토플 만점, 해외연수·사교육 없이도 가능하다?&lt;/font&gt;&lt;BR&gt;
&lt;/strong&gt;&lt;/font&gt;&lt;BR&gt;
포털 대문에서 이 뉴스를 본 순간 나는 그 뒷이야기가 훨씬 궁금해졌다. 14살짜리 여자애가, 그것도 '해외유학은 물론 사교육조차 받은 적이 없는'(!) 중학생이 토플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다는 이 뉴스를 구성하고 있는 게 '소 뒷걸음질에 쥐 잡은 격'과 같은 '우연'이 아니라면 그 '필연'의 증거들은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lt;BR&gt;
&lt;BR&gt;
그 증거들은 그 아이가 ③말도 많던 '국제중학교'인 대원중 1학년생이며 ④4살 때 영어로 쓴 일기 &amp;lt;나는 특별한 아이인가&amp;gt;(웅진북스)를 펴냈고, 방송 영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등 '영어 신동'으로 불리며 자랐다는 것 등이다. 이쯤 되면 이 기사의 '가치'는 반감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면 그렇지! 난 또 무슨, 강원도 산골 아이라고!&lt;BR&gt;
&lt;BR&gt;
마지막 증거 ⑤는 &quot;영어 유치원을 보낸 적도, 과외를 시켜본 적도 없다&quot;던 아이의 어머니가 '전직 영어 교수'라는 사실인데 까짓것, 이것쯤은 접어줘도 좋다. '딸이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접하며 싫증 내지 않도록 다양한 환경을 만들어준 것'이라는 그 어머니의 언급도 ⑥쯤에 들어갈 만한 배경이 아닌가.&lt;BR&gt;
&lt;BR&gt;
글쎄, 과문하지만 서울에 산다고 해서 모든 부모가 자기 아이를 국제중에다 진학시키려고 하지 않을 터이다. 국제중학교로 진학시킨다는 것은 그 만만치 않은 학비부담을 포함하여, 아이에게 영어로 진행한다는 수업을 감당할 만한 어학 능력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수학능력이란 학생뿐 아니라 부모의 경제력까지 확장된 개념인 것이다.&lt;BR&gt;
&lt;BR&gt;
'딸에게 해준 가장 큰 것은 많은 영어 동화책을 사다준 것'이고, 그것은 '관심만 있다면 어떤 부모라도 할 수 있는 아주 작고 기본적인 일'이라고 아이 어머니는 겸손을 자랑했다. 그러나 영어 동화책쯤이야 누구나 사다줄 수 있지만, 그걸 읽어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찌 아이의 능력이라고만 말할 것인가. 그 어머니의 겸사는 자녀에게 동화책을 사주지 못하는 부모에겐 힐난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래서다.&lt;BR&gt;
&lt;BR&gt;
이 기사는 해마다 수능시험 최고득점자를 소개하는 우리 언론 풍토로 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소식이다. 최고점을 받은 수험생의 &quot;'과외'보다 '학교 수업'에 충실했다&quot;는 언급은 판에 박힌 얘기이긴 하지만 간접적으로나마 '공교육'의 중요성을 환기해 주는 긍정적 의미도 담겨 있다. 마찬가지로 이 기사는 우리 시대의 화두인 '영어'가 반드시 '해외연수'나 '과외'를 통해서만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는 일반론을 강조하는 것으로 새길 수도 있겠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993366&quot;&gt;&lt;font color=&quot;#003366&quot; size=&quot;3&quot;&gt;&lt;strong&gt;'특수 사례'를 '보편·일반적 사례'로 '성공 담론의 확대 재생산'&lt;/strong&gt;&lt;/font&gt;&lt;BR&gt;
&lt;/font&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311968342.jpg&quot; width=&quot;200&quot; height=&quot;31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자녀교육지침서'도 인기ⓒ대교출판&lt;/p&gt;&lt;/div&gt;그러나 나는 이런 류의 기사가 가진 함의는 여전히 '승자의 논리'와 잇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승자들은 자신이 거둔 승리는 당연히 '땀과 열정',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와 비전'의 결과라고 여긴다. 그것은 숱한 실패자를 향해서 그들의 패배가 '스스로의 무능과 나태'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lt;BR&gt;
&lt;BR&gt;
흔히들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여러 종류의 입지전적 '성공·승리담'은 그러한 담론들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지극히 '특수한 사례'에 불과한 이들 이야기들을 '보편·일반적 사례'로 부당하게 바꾸어낸다. 예의 저작들은 그러한 방식을 통해 독자들을 오도하는 셈이고 순진한 독자들은 즐겨 그 허망한 신화에 편승해 잠깐 동안의 대리 만족을 구하는 것이다. &lt;BR&gt;
&lt;BR&gt;
'공부가 제일 쉬웠다'는 진술은 한 명석한 수재의 발언이지, 누구나 갈고 닦으면 이를 수 있는 일반적 사례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미국 명문고와 대학을 우등으로 다녔다는 이의 '7막 7장'은 한 사회 엘리트의 출세 과정이었지, 갑남을녀들이 겨냥할 수 있는 삶의 도정은 아닌 것이다. 결코 이들의 성공을 폄하하거나 시샘하는 게 아니다. &lt;BR&gt;
&lt;BR&gt;
'훌륭하게'('명문대 진학'이 반드시 포함된 개념이다) 세 아이를 길러낸 여성학자가 아이들이 '믿는 만큼 자라더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일정한 조건과 환경을 전제로 했을 때 가능한 이야기일 뿐이다. &lt;BR&gt;
&lt;BR&gt;
달동네나 외진 두메산골에서 자연을 벗 삼아 자란 뭇 아이들의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성공 이야기(석세스 스토리)' 붐은 그칠 수 없는 서민들의 꿈을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lt;BR&gt;
&lt;BR&gt;
&lt;strong&gt;&lt;font size=&quot;3&quot;&gt;영어, 또 다른 '루저'를 양산하는 '표준'이 되다&lt;BR&gt;
&lt;/font&gt;&lt;/strong&gt;&lt;BR&gt;
그러나 세상에는 실패하는 이들이 훨씬 많다. 그들의 실패는 99%에 못 미치는 노력 때문이 아니라, 다른 유효한 변수들에서 이미 성공하는 사람의 그것을 따르지 못하고 있어서이기 십상이다. &lt;BR&gt;
&lt;BR&gt;
먹고 살기 위해서 서민들이 너나없이 진입하는 '밥과 술을 파는 식당'은 비슷한 조건으로 동분서주해야 하는 동업자들이 차고 넘치는 '레드오션'이니 실패의 가능성은 시작 때부터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lt;BR&gt;
&lt;BR&gt;
사업의 승패를 결정짓는 게 만약 '노력'과 '성실'이라면 이 땅의 숱한 서민들은 모두 성공의 성채 위에 앉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본'이라는 변수 앞에서 그것은 이미 무력하다. 성공을 유지하는 게 '땀'이 아니라 '총알'이라는 사실, 돈을 버는 게 '돈'이라는 걸 깨달을 때쯤, 그들은 실패를 인정하고 전을 걷어야 하는 것이다. &lt;BR&gt;
&lt;BR&gt;
열네 살짜리 여자애가 토플 만점을 받았다는 이 기사는 최근 한 지상파 방송에서 촉발된 '루저'논란을 떠올리게 한다. 키 180센티미터를 기준으로 거기 미치지 못한 이들을 '패배자'로 규정한 이 황당한 사태는 우리 사회에 드리워진 계급 고착화 현상에 대한 현실적 은유로 읽힌다.&lt;BR&gt;
&lt;BR&gt;
취업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우리 시대의 대학 졸업생들이 스펙 확보를 위해 기를 쓰지만 만족스런 성과를 얻는 게 쉽지 않다는 토익과 토플 점수를 생각하면 중학교 1학년생이 얻은 토플 만점은 마치 만화나 신기루처럼 여겨진다. 어느덧 영어는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서, 또 다른 '루저'를 양산하는 표준(스탠다드)이 되어버린 것이다.&lt;BR&gt;
&lt;BR&gt;
점수와 경쟁으로 견고하게 쌓아올린 이 사회진입의 장벽 앞에서 이 땅의 대다수 젊은이들은 필연적으로 루저가 될 수밖에 없다. 토플 만점을 받은 아이의 해맑은 얼굴 위에 정처를 잃고 길위에 서 있는 청년들의 어두운 얼굴들이 겹치는 것은 순전히 그런 이유에서인 것이다.&lt;BR&gt;
&lt;BR&gt;
출처 : &lt;a href=&quot;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60851&amp;amp;PAGE_CD=&quot;&gt;&lt;font color=&quot;#0000ff&quot;&gt;토플 만점 여중생 반대편엔 '루저'가 우글&lt;/font&gt; &lt;/a&gt;- 오마이뉴스&lt;BR&gt;
&lt;/font&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길위에서</category>
			<author>q9447 (낮달)</author>
			<pubDate>Tue, 17 Nov 2009 03:02:41 GMT</pubDate>
		</item>
		<item>
			<title>어때요? '노이즈 마케팅' 대신'구설(수) 홍보'는?</title>
			<link>http://blog.ohmynews.com/q9447/255074</link>
			<description>&lt;BR&gt;
&lt;p&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07280928.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46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말터 누리집(http://www.malteo.net/)&lt;/p&gt;&lt;/div&gt;
&lt;BR&gt;
&lt;font color=&quot;#003366&quot;&gt;&lt;a href=&quot;http://www.korean.go.kr/08_new/index.jsp&quot;&gt;&lt;font color=&quot;#0000ff&quot;&gt;국립국어원&lt;/font&gt;&lt;/a&gt;과 한국방송(KBS)이 펴고 있는 ‘모두가 함께하는 우리말 다듬기’는 기왕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외래어·외국어를 우리말로 다듬어 쓰자는 취지의 우리말 순화운동이다. 2004년 7월 12일 ‘리플’을 ‘댓글’로 다듬은 것을 시작으로 어느 덧 273회째(2009. 11. 15. 현재)를 맞이했다. &lt;BR&gt;
&lt;BR&gt;
‘모두가 함께하는 우리말 다듬기’(이하 ‘다듬기’)는 전용 &lt;a href=&quot;http://www.malteo.net/&quot;&gt;&lt;font color=&quot;#0000ff&quot;&gt;누리집&lt;/font&gt;&lt;/a&gt;(말터, www.malteo.net)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다듬기’는 누리꾼들의 ‘제안’과 ‘투표’를 통해 선정하는 쌍방향의 의사결정 구조를 가진 게 특징이다. 다듬을 말의 제안하는 것부터, 그것을 대신할 우리말의 공모, 제안된 우리말 가운데 하나를 투표로 선정하는 것까지 모두 누리꾼들의 참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lt;BR&gt;
&lt;BR&gt;
그뿐이 아니다. 확정된 다듬은 말의 최초 제안자에게는 ‘30만원 상당의 문화상품권’이, 투표 참여자와 순화대상어 제안자에게는 추첨을 통해 ‘3만원 상당의 문화상품권’이 주어지니,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다. 투표에 참여하는 인원은 한 회에 대략 1,500에서 2,000명 정도이니 문화상품권을 받을 수 있는 확률은 ‘로또’에 비길 바가 아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81398851.jpg&quot; width=&quot;435&quot; height=&quot;119&quot; alt=&quot;&quot;/&gt;&lt;/div&gt;&lt;BR&gt;
&lt;BR&gt;
‘다듬기’가 제한된 누리꾼의 잔치에 그친다거나 다듬은 말이 보편적 사용의 단계를 거쳐 언중들의 승인을 얻어 사전에 오르는 게 쉽지 않다든가 하는 한계는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나날이 늘어가는 외래어와 외국어 사용에 대한 주체적 대응으로서 ‘다듬기’는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다. 이 운동은 우리말의 저변을 넓히는데 이바지할 뿐더러 성공적인 다듬기가 새말로 이어지는 사례도 만들어냈다. &lt;BR&gt;
&lt;BR&gt;
‘다듬기’ 초기에 선정된 ‘댓글(←리플)’, ‘다걸기(←올인)’, ‘누리꾼(←네티즌)’ 등은 이미 저항 없이 쓰이고 있는 듯하다. 일부만 추렸는데 표에 나타난 다듬은 말 중에 아래와 같은 말들은 매우 훌륭한 대체어로 보이지 않는가. &lt;BR&gt;
&lt;BR&gt;
&lt;/p&gt;&lt;BR&gt;
&lt;div style=&quot;padding-right: 10px; padding-left: 10px; padding-bottom: 10px; padding-top: 10px; background-color: #e4e4e4&quot;&gt;&lt;font color=&quot;#993366&quot;&gt;- ‘가십(gossip) 거리 → 입방아 거리&lt;BR&gt;
- 네이미스트(Namist) → 이름설계사 &lt;BR&gt;
- 레시피(recipe) → 조리법 &lt;BR&gt;
- 아이콘(Icon) → 상징(물) &lt;BR&gt;
- 정크푸드(junk food) → 부실음식(식품) &lt;BR&gt;
- 줌마테이너 → 재치부인 &lt;BR&gt;
- 키덜트(kidult) → 어른왕자 &lt;BR&gt;
- 킬힐(kill heel) → 까치발구두 &lt;BR&gt;
- 팝업창 → 알림창 &lt;BR&gt;
- 패키지(package) 상품 → 꾸러미상품 &lt;BR&gt;
- 핫이슈(hot issue) → 주요쟁점 &lt;BR&gt;
&lt;/font&gt;&lt;/div&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41954508.jpg&quot; width=&quot;420&quot; height=&quot;1227&quot; alt=&quot;&quot;/&gt;&lt;/div&gt;&lt;BR&gt;
&lt;BR&gt;
나머지 다듬은 말도 우선은 낯설어 뵈지만 쓰다 보면 익숙해지는 게 어렵지 않을 터이다. 새말은 언중의 승인을 받을 때까지는 낯섦과 어색함을 견뎌내야 한다. 변화에 민감하긴 하지만 사람은 주어진 변화에 언제나 잘 적응하니 말이다.&lt;BR&gt;
&lt;BR&gt;
지지난 회의 다듬은 말은 ‘구설(수) 홍보(←노이즈 마케팅 noise marketing)’이고, 이번 회의 다듬은 말은 ‘짝꿍차림(←커플룩 couple look)’이다. ‘자신들의 상품을 각종 구설에 휘말리도록 함으로써 소비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켜 판매를 늘리려는 마케팅 기법’을 가리키는 ‘노이즈 마케팅(noise marketing)’을 ‘구설(수) 홍보’로 옮긴 것은 ‘딱’이다. &lt;BR&gt;
&lt;BR&gt;
‘옷이나 장식물, 신발 등 남들이 보기에 짝(커플)으로 비춰질 수 있도록 상대방과 똑같이 맞춰 입거나 갖추는 것’을 뜻하는 ‘커플룩(couple look)’ 대신 ‘짝꿍차림’이라고 쓰는 건 어떤가. 다소 어색한 느낌이 있긴 하지만, 원래 낱말의 뜻을 고스란히 옮긴 말이니 자연스레 쓰다 보면 입에 익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말의 외연이 늘어날 뿐 아니라, 외래어 낱말을 하나를 줄이게 되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lt;BR&gt;
&lt;BR&gt;
&lt;div align=&quot;center&quot;&gt;&amp;lt;2009. 11. 16.&amp;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72851494.jpg&quot; width=&quot;70&quot; height=&quot;41&quot; alt=&quot;&quot;/&gt;&lt;/div&gt;&lt;/font&gt;&lt;/div&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가겨 찻집</category>
			<author>q9447 (낮달)</author>
			<pubDate>Mon, 16 Nov 2009 04:46:45 GMT</pubDate>
		</item>
		<item>
			<title>그의 '가을'은 풍성하고 아름답다</title>
			<link>http://blog.ohmynews.com/q9447/254867</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003366&quot;&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94044442.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그의 '가을'은 풍성하고 아름답다.  그는 이 가을을 고스란히 보내주었다.&lt;/p&gt;&lt;/div&gt;
&lt;BR&gt;
이웃 시군에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하나 있다. 내가 몇 살쯤 위기는 하나 그깟 나이야 무슨 상관인가.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더러 우의를 나누는 사이다. 나눈다고 했지만 사실은 내가 일방적으로 받기만 했던 것 같다. &lt;BR&gt;
&lt;BR&gt;
그는 지금 사는 데 집을 짓고 부근의 땅 마지기를 이루어 농사를 짓는데 올해도 감이며 밤 같은 과실을 보내주었다. 얼마 전에는 그간의 정성이 고마워서 책 몇 권을 보냈더니 이내 연락이 왔다. 잘못 보낸 거 아닙니까? 제대로 갔네. 읽을 만한 책 같아서 보낸 거니까…….&lt;BR&gt;
&lt;BR&gt;
말보다 행동이 빠른 사람이다. 바로 쪽지 하나와 함께 우체국 택배가 날아왔다. 이건 또 뭐야, 했더니 그가 몸소 지은 가을걷이의 일부다. 콩이 있고, 팥이 있고, 강냉이, 곶감에다가 수세미, 박 바가지도 있다. 콩도 갖가지다. 노란 콩, 작두콩에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푸른 콩도 있다. 거기다 마지막 고명은 작은 병에다 담은 ‘앵두주’다. 그의 가을은 풍성하고도 아름답다. &lt;BR&gt;
&lt;!--StartFragment--&gt;&lt;BR&gt;
&lt;p&gt;농부에게 ‘가을’은 그 삶의 전부다. 그것은 지난 시간을 거두는 일이며, 동시에 다음 해를 예비하는 일이다. 비록&amp;nbsp;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주긴 하지만, 틈틈이 일구는 농사가 그의 전부가 아니라고는 못한다. 하루바삐 전업 농부가 되기를 소망하지만 여의치 않아 실행을 미루고 있을 뿐인 그이기에 더욱 그렇다. &lt;/p&gt;
&lt;BR&gt;
&lt;p&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28122451.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5&quot; alt=&quot;&quot;/&gt;&lt;/div&gt;&lt;br /&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07051610.jpg&quot; width=&quot;412&quot; height=&quot;557&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수세미(위)도 바가지도 그가 지은 농사의 일부다.&lt;/p&gt;&lt;/div&gt;&lt;/p&gt;
&lt;BR&gt;
&lt;blockquote&gt;&lt;font color=&quot;#993366&quot;&gt;(……) 제가 관리기로 로타리 치고, 골 만들고, 모종 부어 혼자 옮겨 심고, 또 어떤 것은 따서 톱으로 썰고, 삶아서 속은 파서 내고 껍질은 벗겨서 말린 것입니다. 또또 어떤 것은 따고 깎아서 볕과 바람에 일광욕시킨 것입니다. &lt;BR&gt;
&lt;BR&gt;
저라고 어디 비닐 쓰고 싶은 마음 없겠습니까? 저라고 어디 비료 주고 싶은 마음 없었겠습니까? 저것들이 병에, 충에 괴로워하는데 어디 약 치고 싶은 생각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오직 이 세계의 환경을 생각해서, 이 땅과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밟아버렸습니다. 이런 마음 헤아려 기꺼이 받아주시고 드시어 주십시오.&lt;BR&gt;
&lt;BR&gt;
엿 같은 역겨운 세상입니다. 매일 술로 쓸어내고 싶지만 몸이 견뎌 주지 못하니 맘만 간절합니다. 어제 휴업하고 놈들 집으로 보내면서 월요일 살아서 만나자고 했는데, 저도 이 정권 망할 때까지 살아야겠습니다.(ㅠ.ㅠ) &lt;/font&gt;&lt;BR&gt;
&lt;BR&gt;
&lt;/blockquote&gt;&lt;BR&gt;
&lt;div align=&quot;left&quot;&gt;&lt;BR&gt;
&lt;div align=&quot;left&quot;&gt;더 이상 무엇을 말하랴. 그의 마지막 말에 나는 백번 공감한다. 좋아, 그러자고. 이 정권 망할 때까지, 마땅히 살아야지! 그것도 기죽지 말고 씩씩하고 용감하게. 가슴 속 가득 푸른 희망의 끝자락을 놓지 말고. 주말쯤엔 앵두주를 마시면서 나는 그 약속을 아내하고도 나눌까 한다.&lt;BR&gt;
&lt;/div&gt;&lt;BR&gt;
&lt;BR&gt;
&lt;div align=&quot;center&quot;&gt;&amp;lt;2009. 11. 13.&amp;gt;&lt;BR&gt;
&lt;BR&gt;
&lt;/div&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38014828.jpg&quot; width=&quot;70&quot; height=&quot;41&quot; alt=&quot;&quot;/&gt;&lt;/div&gt;&lt;/div&gt;&lt;/font&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길위에서</category>
			<author>q9447 (낮달)</author>
			<pubDate>Fri, 13 Nov 2009 02:02:52 GMT</pubDate>
		</item>
		<item>
			<title>등겨장, 한 시절의 삶과 추억</title>
			<link>http://blog.ohmynews.com/q9447/254740</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003366&quot;&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31086714.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아내가 담근 등겨장. 원래 등겨장 빛깔은 춘장 빛이다.&lt;/p&gt;&lt;/div&gt;
&lt;BR&gt;
‘등겨장’이라고 있다. 고운 보리쌀겨로 만드는 경상북도 지역의 별미다. 두산백과사전에는 ‘시금장’이라는 이름으로 올라 있다. 그러나 경상도에선 ‘딩기장’이라 하면 훨씬 쉽게 알아듣는다. ‘딩기’는 ‘등겨’의 고장말이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만 해도 우리는 봄이나 가을에 등겨장의 그윽한 맛을 즐길 수 있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box_entry' style='float:right;margin-left:10px;width:3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시금장&lt;/strong&gt;&lt;br /&gt;&lt;font color='#757575'&gt;보리쌀겨로 만든 경상북도 지역의 향토음식&lt;/font&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 &lt;br /&gt;
국적 / 한국 경상북도  &lt;BR&gt;
구분 / 장류  &lt;BR&gt;
주재료 / 보리쌀겨, 메주가루, 무청, 풋고추, 당근  &lt;BR&gt;
 &lt;BR&gt;
경상북도 포항 지역의 시금장은 염도가 3% 정도로서 저장기간이 보통 1달 이내였고 용도로는 비빔용, 쌈용, 찌개용, 반찬용 등 이용 폭이 다양하다. 담그는 시기는 일반적으로 한 여름이나 한 겨울을 제외한 기본장이 떨어지는 시기인 이른 봄으로 입맛이 없는 시기에 시금장을 담근다. &lt;BR&gt;
&lt;BR&gt;
보리쌀겨(등겨가루)를 반죽하고 작은 그릇 크기의 메주덩어리처럼 뭉쳐 왕겨 태우는 재에 넣고 은근히 갈색이 되게 2시간 정도 굽는다. 햇볕에 건조시켜 1달 정도 그늘에 달아매어 띄운 것을 말려 가루를 만든다. &lt;BR&gt;
&lt;BR&gt;
보리쌀을 갈아서 엿기름에 삭힌 감주물을 달여 보리쌀겨의 가루, 메주가루, 무청, 풋고추, 당근 등을 넣고 마늘, 산초가루, 고춧가루 등 갖은 양념을 넣어 5-7일쯤 삭혀 먹는다. &lt;BR&gt;
&lt;BR&gt;
한여름과 한겨울을 피하고는 다 만들어 먹을 수 있으며 비타민 및 무기질을 다량 섭취할 수 있고 입맛을 돋울 수 있는 향토음식으로 시금장을 지방에 따라 보리등겨장, 개떡장이라고도 한다. 서늘한 온도에서 식혀야 제 맛이 나므로 한여름은 피한다.  &lt;BR&gt;
 /두산백과사전&lt;/div&gt;&lt;/div&gt;등겨도 종류가 여럿이다. 일찍이 부모님의 방앗간에서 방아를 찧었던 전력이 있어 나는 등겨에 대해서 알 만큼 안다. 벼를 찧을 때 현미기를 거쳐 나온 등겨는 ‘왕겨’인데 이는 주로 땔감이나 거름으로 쓰인다. &lt;BR&gt;
&lt;BR&gt;
껍질이 벗겨진 현미가 정미기를 여러 차례(이 횟수에 따라 ‘7분도, 8분도’라고 하는 ‘분도’가 정해진다.) 돌아 나오면 쌀이 되는데 이 과정에서 나오는 등겨는 ‘쌀겨’라고 한다. 처음은 거칠고 누런 겨지만, 나중에는 ‘싸라기’라 하여 쌀알 부스러기까지 나온다.&lt;BR&gt;
&lt;BR&gt;
보리를 찧을 때 나오는 등겨는 벼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벼는 껍질을 벗기는 게 가능하지만, 보리는 낟알의 가장자리를 갈아내 보리쌀을 만드는 것이다. 당연히 처음에는 거칠고 누런 겨가 나오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겨는 부드러워진다. 보리쌀 모양이 갖추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나오는 겨는 흔히 경상도에서 ‘당가루’라고 한다. 이&amp;nbsp; 당가루를 그게 나오기 직전의 조금 거친 겨와 섞어서 등겨장을 담근다. &lt;BR&gt;
&lt;BR&gt;
‘등겨장’을 먹지 못한 지 십 년도 넘었다. 고향에서 어머니를 모셔온 이후, 우리는 한 번도 등겨장을 구경하지 못했다. 재료 구하기도 쉽지 않았고, 그걸 구워 말리고 장으로 담그는 일을 어머니께 주문하는 것도 어려웠던 탓이다. 만년의 어머니는 기력도 쇠하신데다 솜씨도 예전 같지 않았던 것이다.&lt;BR&gt;
&lt;BR&gt;
입맛이 떨어지는 늦봄이면 아내와 나는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신 등겨장의 맛을 오래 추억하곤 한다. 나는 가끔 식성이 한 집안의 내력이나 기호를 가장 솔직 담백하게 보여주는 표지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과거의 시간과 그 시간 속에 어룽져 있는 한 시절의 삶을 아주 명료하게 떠올리게 하면서 동시에 가족적 동질성을 환기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lt;BR&gt;
&lt;BR&gt;
어머니께서 담갔던 우리 집 등겨장의 빛깔은 중국 음식점에서 내 놓는 춘장을 닮았다. 물론 춘장처럼 새까맣지는 않지만 그것은 미각을 되살려주거나 군침을 흘리게 하는 빛깔은 전혀 아니다. 그런데 그 수더분하고 어쩌면 텁텁해 뵈는 장류의 맛은 뭐라고 할까, 마치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까마득한 과거를 떠올리게 해 주는 것이다.&lt;BR&gt;
&lt;BR&gt;
동기간에도 그 오래된 맛에 대한 기억은 동질적인가. 형님 댁에 들렀더니 지리산에 갔다가 ‘등겨장’이라 해서 사 왔는데 전혀 아니더라고 했다. 지리산까지 가서 ‘등겨장’에 낚인 형님의 미각과 내 그것은 결코 다르지 않을 터이다. &lt;BR&gt;
&lt;BR&gt;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뒤, 나는 아주 등겨장 따위는 잊고 살았다. 나는 그게 이미 실전(失傳)의 과정을 밟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의심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맛’에 대한 사람들의 지향은 끈질기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맛’을 찾는 탐구는 계속되었던 모양이다. 등겨장은 그런 이들의 수요에 힘입어 경상도의 대부분의 재래시장에서 팔리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완제품이 아니라 등겨가루메주의 형태로 말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36862345.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경남 창녕읍에서 만난 등겨가루메주. 인근 시군의 재래시장에도 판다고 한다.&lt;/p&gt;&lt;/div&gt;
&lt;BR&gt;
지난 10월의 우포여행 중에 우리는 창녕읍의 상설시장에 들렀었다. 술정리동3층석탑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무심코 시장통을 지나다 나는 한 식료품 가게에서 등겨가루메주를 발견했다. 그 가게 처마에 잘 구워진 등겨가루메주가 주렁주렁 걸려 있었던 것이다.&lt;BR&gt;
&lt;BR&gt;
이전에 나는 한 번도 그 메주를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걸 본 순간, 내 머릿속에 있던 원초적 감각이 소스라치게 깨어났던 것일까. 나는 그게 내가 찾고 있었던 그 오래된 맛의 원천이라는 걸 단박에 눈치 채었다. 나는 금방이라도 그게 다 팔려 없어질 것같이 조급해져서 서둘러 메주 한 덩이를 주문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993366&quot;&gt;- 이게 등겨장 담그는 거 맞지요? 보리쌀겨로 만든…….&lt;BR&gt;
- 그럼요. 잘 아네요. &lt;BR&gt;
- 한 덩이 주소.&lt;BR&gt;
- 메주 말고 가루로 갈아놓은 걸 사 가이소.&lt;BR&gt;
- 왜요?&lt;BR&gt;
- 메주는 갈아야 하는데 그거 성가시잖우?&lt;BR&gt;
&lt;/font&gt;&lt;BR&gt;
나는 가게 주인의 충고를 받아들여 갈아놓은 등겨가루를 만 원에 샀다. 그 전에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고 반색하는 아내의 허락을 얻었다. 나는 마치 푸짐한 전리품을 노획한 선사시대의 가장처럼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lt;BR&gt;
&lt;BR&gt;
아내는 어머니께 ‘등겨장 담그는 법’을 전수 받지 못한 걸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러나 내가 사다준 등겨가루를 보더니 새로운 전의를 불태우는 듯했다. 아내는 누구에게 물어 등겨장을 담글까를 고민하더니 영천이 고향인 내 친구의 아내를 통해 그의 모친에게 비법(?)을 전수받았다.&lt;BR&gt;
&lt;BR&gt;
등겨장을 담가 놓고도 아내는 좀 긴가민가한 표정이었다. 전수해 준 대로 하긴 했지만 예전의 그 ‘맛’을 재현할 수 있을지를 걱정했다. 담가 놓은 등겨장을 봤더니 빛깔이 예전의 그것과 달랐다. 좀 칙칙하게 밝은 갈색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적이 실망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 제대로 숙성된 등겨장은 춘장과 비슷한 빛깔을 띠는 것이다. &lt;BR&gt;
&lt;BR&gt;
두 개의 작은 단지에 담겨 베란다와 김치냉장고에서 숙성에 들어간 등겨장을 나는 느긋하게 기다렸다. 그 사이에 아내는 부지런히 인터넷을 들락거리더니 기어코 ‘빛깔의 비밀’을 알아냈다. 이제 생각나요. 어머님께서 늘 콩 삶은 찐득한 물을 쓰더라구요. 보니까 콩 삶은 물을 넣으면 빛깔이 검어진대요. 됐다. 나는 쾌재를 불렀다.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저 맛은 기대해도 되겠다.&lt;BR&gt;
&lt;BR&gt;
정확히 엿새쯤의 숙성을 거쳐 아내가 처음으로 담근 등겨장이 밥상에 올랐다. 나는 한 숟가락을 떠 먹어 보고 그게 내 미각이 기억하고 있는 옛날의 ‘맛’에 얼추 가깝다는 걸 알았다. 여보, 이만하면 성공이야! 됐어! 다음엔 훨씬 나은 맛이 나길 기대하면서 나는 요즘 조금씩 아껴가며 등겨장을 맛보고 있다.&lt;BR&gt;
&lt;BR&gt;
거듭 말하지만 등겨장의 빛깔은 일단 식욕을 자극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거기다 삶아 넣은 보리밥알이 드러나기도 하고 함께 썰어 넣은 무 조각이 씹히기도 한다. 벗의 모친은 풋고추를 넣으라고 했지만 아내는 모험을 피했다. 등겨장은 조청이 들어가 약간 달착지근한 맛이 난다. 게다가 먹고 나면 거친 가루 맛이 좀 알싸하게 입안에 남는다. &lt;BR&gt;
&lt;BR&gt;
그 맛을 객관적으로 표현할 만한 재주가 내겐 없다. 한 번도 등겨장을 맛보지 못한 이에게도 한입만 먹어보면 입에 감길 거라고도 말하지 못하겠다. 이 맛은 한 시대의 추억과 애환이 곁들여진 별미의 음식인 것이다. 곰삭은 등겨장을 먹을 때마다 아내와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억하고 어머니 솜씨를 그리워하곤 한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391682068.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5&quot; alt=&quot;&quot;/&gt;&lt;/div&gt;&lt;BR&gt;
&lt;BR&gt;
인근 시군의 재래시장마다 등겨가루메주를 팔고 있다는 걸 우리만 몰랐던 것 같다. 의성 장에 가도 있고, 대구 도깨비 시장에도 있대요. 아내는 억울하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등겨가루를 반죽하여 도넛처럼 만들어 구워놓은 등겨장 메주를 필요하면 언제나 살 수 있다……. &lt;BR&gt;
&lt;BR&gt;
우리는 등겨장을 잊지 못하는 형님께 이 장을 조금 보낼까 했었다. 그러나 날씨가 여의치 않았다. 까딱하면 가는 동안 맛이 변해버릴 같았다. 서두를 일은 없다. 시간은 많고, 맘만 먹으면 인근 시군의 재래시장에 달려가면 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갑자기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lt;BR&gt;
&lt;BR&gt;
등겨장을 ‘시금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걸 나는 이번에 알았다. 그러나 아내와 내게 그것은 언제나 ‘등겨장’이다. 그것은 안동사람들이 ‘골짠지’라고 부르는 무말랭이김치를 우리 가족들이 굳이 고향말인 ‘오그락지’로 부르는 것과 같다. 그것 역시 타관에 살고 있지만 우리를 고향과 이어주는 정체성(Identity)의 한 표지인 것이다. &lt;BR&gt;
&lt;BR&gt;
등겨장은 흔히 곡식을 찧을 때 얻는 겨로 만든 별미라고 한다. 그러나 그걸 ‘별미’로 떠올리는 건 이 풍요한 21세기다. 거기엔 가난했던 시절, 온갖 방법으로 먹을거리를 지어냈던 옛 사람들의 삶과 설움이 녹아 있을지도 모른다. 끼니마다 식탁에 오른 등겨장을 맛보며 우리 내외는 우리의 핏속에 흐르는 한 시절의 삶과 추억을 떠올리며 그것을 겨워하곤 한다.&lt;BR&gt;
&lt;BR&gt;
&lt;div align=&quot;center&quot;&gt;&lt;BR&gt;
&amp;lt;2009. 11. 11.&amp;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76413720.jpg&quot; width=&quot;70&quot; height=&quot;41&quot; alt=&quot;&quot;/&gt;&lt;/div&gt;&lt;/div&gt;&lt;/font&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길위에서</category>
			<author>q9447 (낮달)</author>
			<pubDate>Wed, 11 Nov 2009 02:29:24 GMT</pubDate>
		</item>
		<item>
			<title>시인의 마을, 생명의 숲을 찾아서</title>
			<link>http://blog.ohmynews.com/q9447/254719</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003366&quot;&gt;경북 영양 '주실마을' 기행 &lt;br /&gt;
&lt;BR&gt;
09.11.10 10:56 ㅣ최종 업데이트 09.11.10 10:57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amp;nbsp; 장호철 (q9447) &lt;BR&gt;
&lt;BR&gt;
태그 : 조지훈, 주실마을 &lt;/p&gt;&lt;BR&gt;
&lt;p&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65151601.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4&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조지훈 생가에서 바라본 문필봉. 가을이 깊었다. &lt;/p&gt;&lt;/div&gt;
&lt;BR&gt;
전날 마신 술이 미처 깨지 않은 주말 아침에 아내를 재촉하여 길을 나선다. 오늘의 여정은 경북 북부의 3대 오지인 이른바 '비와이시(BYC, 봉화·영양·청송)' 가운데 하나인 영양이다. 내 계산은 아주 단순했다. 나는 영양 '주실마을'을 들렀다가 그 마을 숲을 만난 뒤 '대티골 숲길'을 한 바퀴 돌아보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lt;BR&gt;
&lt;BR&gt;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注谷里) 주실마을 숲은 지난해에 베풀어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생명상'(대상)을 받았다. 올해는 같은 면 용화리의 '대티골 숲길'이 어울림상을 받았으니 영양의 숲은 시방 이태에 걸쳐 '아름다운 숲'으로 기려지고 있는 참이다. &lt;BR&gt;
&lt;BR&gt;
그뿐이 아니다. 주실마을이 어디인가. 청록파 시인 조지훈(1920∼1968)이 태어난 동네다. 1920년 이 마을에서 태어난 지훈은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보통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혜화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려 상경한 열일곱 살 때까지 그는 이 마을에서 살았던 것이다.&lt;BR&gt;
&lt;BR&gt;
내비게이션에 의지하여 집을 나선 건 10시가 겨워서였다. 아내와 함께 인근 가게에서 '비상식량'으로 김밥 몇 줄을 샀다. 답사를 다녀보면 때맞추어 끼니를 챙기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아내와 나누어 먹는 김밥은 훌륭한 한 끼 식사가 되는 것이다. &lt;BR&gt;
&lt;BR&gt;
영양은 안동 인근이지만 정작 우리에게 주실마을은 초행이다. 글쎄, 기회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었을까. 다른 볼일로라도 그 인근을 스쳐간 일도 없었고, 굳이 시간을 내어 그의 자취를 더듬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었던 것이다. &lt;BR&gt;
&lt;BR&gt;
영양은 몇 사람의 굵직한 문인을 낳은 고장이다. 영양읍 감천리는 '내 소녀'라는 시를 남긴 오일도(1901~1946) 시인의 고향이고, 석보면 원리리 두들마을은 소설가 이문열이 태어난 곳이다. 흔히들 영양을 '문향(文鄕)'으로 부르면서 이들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터이다. &lt;BR&gt;
&lt;BR&gt;
&lt;strong&gt;&lt;font face=&quot;dotum&quot; size=&quot;2&quot;&gt;'지조론'의 시인 조지훈을 낳은 영양 주실마을&lt;BR&gt;
&lt;/font&gt;&lt;/strong&gt;&lt;BR&gt;
두어 해 전에 나는 감천리의 오일도 시인의 생가를 찾았고, 지난봄에는 이문열의 두들마을에 들렀었다. 그의 선조인 존재 이휘일에 관한 기사를 쓰기 위해서였다. 나는 마을을 둘러보긴 했지만, 작가가 세웠다는 무슨 문학연구소 근처에는 가지 않았다. 흔히 그를 '국민작가'로 부르는 모양인데, 나는 거기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잘 팔리는 작가'라는 사실과 '국민'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lt;BR&gt;
&lt;BR&gt;
그러나 지훈은 내게 호오의 감정과는 무관한 인물이다. 나는 중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청록파 시인의 한 사람으로, '승무'의 시인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청록파'는 아마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문학 유파가 아닐까 싶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369756776.jpg&quot; width=&quot;250&quot; height=&quot;371&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조지훈(1920 ∼1968)&lt;/p&gt;&lt;/div&gt;중학교에 들어가면 국어 교과서에서 배우는 시 중에 청록파 시인의 작품은 반드시 끼어 있게 마련이다. 스물네 살의 동갑내기였던 박목월과 박두진, 네 살 터울의 갓 스물 조지훈은 1939년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amp;lt;문장&amp;gt;지로 등단한다. 이들이 '청록파'가 된 것은 이들이 해방 이듬해 공동시집 &amp;lt;청록집(靑鹿集)&amp;gt;을 펴내게 되면서부터다. 
&lt;BR&gt;
&lt;BR&gt;
이들 시인들의 작품 가운데서 대체로 '해'(박두진), '나그네'(박목월), '승무'(조지훈) 등을 대표작으로 치는 듯하다. 박두진과 박목월의 그것은 등단 이후의 작품이지만, 조지훈의 대표작인 '승무'는 또 다른 그의 대표작 '고풍의상', '봉황수' 등과 함께 &amp;lt;문장&amp;gt;지 추천작이다. &lt;BR&gt;
&lt;BR&gt;
이는 세 시인 중에 유독 조지훈에 대한 인상이 뚜렷하지 못한 것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박두진과 박목월이 7, 80년대에도 꾸준히 시작활동을 계속한 반면 조지훈은 만년에는 시작보다는 주로 국문학자로 활동(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장으로 &amp;lt;한국문화사대계&amp;gt; 편찬)했던 것이다. &lt;BR&gt;
&lt;BR&gt;
조지훈은 나머지 두 시인보다 네 살이나 아래였지만 가장 단명했다. 그는 우리 나이로 마흔아홉 살에 세상을 떠났다. 박목월은 그보다 10년을 더 살았고, 박두진은 무려 30년이나 더 작품활동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조지훈이 주는 인상은 시인보다 지사(志士)로서의 풍모가 더 확연하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993366&quot;&gt;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지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장사꾼과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식견(識見)은 기술자와 장사꾼에게도 있을 수 있지 않는가 말이다. 물론 지사(志士)와 정치가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독립 운동을 할 때의 혁명가와 정치인은 모두 다 지사였고 또 지사라야 했지만, 정당 운동의 단계의 들어간 오늘의 정치가들에게 선비의 삼엄한 지조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일인 줄은 안다. &lt;BR&gt;
&lt;BR&gt;
그러나 오늘의 정치―정당 운동을 통한 정치도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한 정책을 통해서의 정상(政商)인 이상 백성을 버리고 백성이 지지하는 공동 전선을 무너뜨리고 개인의 구복(口腹)과 명리(名利)를 위한 부동(浮動)은 무지조(無志操)로 규탄되어 마땅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lt;BR&gt;
&lt;/font&gt;&lt;BR&gt;
-조지훈 '지조론(志操論)' 중에서&lt;BR&gt;
&lt;BR&gt;
발표(1960)한 지 반세기가 가까워오는 글이지만 그의 글이 전하는 메시지는 여전하다. 오늘의 삶과 세상이 반세기 이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욕된 일이다. 한국 사회의 도덕과 윤리, 민주주의가 여전히 50여 년 전의 수준을 답습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 말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27280492.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호은종택. 조지훈 시인의 생가로 호은은 주실마을의 입향조 조전을 이른다. &lt;/p&gt;&lt;/div&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12385100.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옥천종택. 호은 조전의 증손인 조덕린의 종택이다.&lt;/p&gt;&lt;/div&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70696603.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월록서당. 지훈이 한문을 배운, 주실마을 신교육의 전당이었다. &lt;/p&gt;&lt;/div&gt;
&lt;BR&gt;
&lt;BR&gt;
안동에서 입암과 영양읍을 거쳐 일월 쪽으로 접어들자 가로의 나무와 주변의 빛깔이 짙어진다. 이도 위도의 탓일까. 주실마을이 눈앞에 다가오는데 정작 마을은 보이지 않고 에스자로 굽은 도로 양편으로 펼쳐진 주황과 노랑빛이 뒤섞인 마을 숲이 한눈에 들어왔고 아내가 탄성을 질렀다.&lt;BR&gt;
&lt;BR&gt;
주실마을은 한양 조씨가 세거해 온 오래된 마을이다. 전통마을이면서도 실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일찍이 개화를 받아들인 진취적인 고장이다. 양반마을이라면 꼬장꼬장한 선비들의 외곬이 연상되겠지만, 정작 시인의 선조들은 유교적 전통을 이으면서도 인습은 과감히 떨쳐 버렸다. &lt;BR&gt;
&lt;BR&gt;
박정희 정권 때의 '가정의례준칙'이 바로 이 마을에서 유래된 것은 그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일본을 따른다고 민족주의자들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양력설을 쇤 것도 객지에 나간 자식들이 다 모일 수 있어서였다. 이들은 명분보다 실리를 선택했던 합리주의자였던 셈이다.&lt;BR&gt;
&lt;BR&gt;
&lt;font face=&quot;dotum&quot;&gt;&lt;strong&gt;'삼불차(三不借)'를 지킨 지훈의 생가 호은종택&lt;/strong&gt;&lt;/font&gt;&lt;BR&gt;
&lt;BR&gt;
마을 어귀에 전통 한옥 형식으로 커다랗게 지어놓은 조지훈 문학관을 우리는 건성으로 한 바퀴 돌았다. 시간에 쫓긴데다가 내겐 그런 형식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 있다. 현실적으로 한 인물을 기리는 방식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긴 하다. 그러나 입구 자 모양으로 덩실하게 올린 문학관은 내게 마치 지방자치시대에 시나브로 상품화하고 있는 '문화'의 표지처럼 보였던 것이다.&lt;BR&gt;
&lt;BR&gt;
지훈의 생가 호은종택은 마을 앞 들판 너머 문필봉을 바라보며 호젓하게 서 있었다. 솟을대문 앞 커다란 바위에다 '호은종택(壺隱宗宅)'이라 새겨져 있다. 맞배지붕의 口자형 전통한옥인 종택은 그리 위압적인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호은은 한양 조씨 입향조 조전(趙佺)의 아호로 그는 1629년(인조 7년) 주실에 처음 들어와 이 동네를 일구었다. &lt;BR&gt;
&lt;BR&gt;
앞면과 옆면이 각각 7칸이고 앞면 사랑채가 정자 형식인 이 종택에서 지훈은 호은의 14대 후손으로, 제헌·2대 국회의원이었던 한의학자 조헌영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짐작하였겠지만 그의 가계는 만만찮다. 지훈은, 한일합병 후 곡기를 끊고 죽음을 선택한 한말 의병장 조승기,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항거하다 자결한 지훈의 조부 조인석 등이 태어난 이 종택의 태실에서 태어난 것이다.&lt;BR&gt;
&lt;BR&gt;
개화와 새로운 시대를 무난히 받아들이긴 했지만, 꼬장꼬장한 선비정신이란 그리 녹록하지 않다. 호은종택에선 예부터 '삼불차(三不借)'를 지켰다 한다. '삼불차'는 세 가지를 빌리지 않는다는 말로, '인물'을 빌리지 않고(즉 양자를 들이지 않는다는 뜻), '재물'과 '문장'을 빌리지 않는 것을 이른다. &lt;BR&gt;
&lt;BR&gt;
다른 가문의 '인물'을 빌리지 않는다는 데에 이들의 고집과 기백이 드러난다. 그것은 대가 끊어지는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만만찮은 선언인 것이다. 그런 기백과 정신이 '지조론'의 시인이자 지사였던 지훈을 낳은 것일까.&lt;BR&gt;
&lt;BR&gt;
'지조론'으로 도저한 선비의 기개를 밝힌 지훈은 자신의 생각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1942년 봄부터 조선어학회의 &amp;lt;큰사전&amp;gt; 편찬을 돕던 지훈은 경찰의 신문을 받고 풀려난 후 오대산 월정사에 은거했다. 이 시기 대부분의 문인들은 '조선문인보국회'라는 친일문학단체에서 활동했지만, 그는 시 몇 편 발표로 시인이겠냐며 붓을 꺾어 버렸다. '친일문학론'의 저자 임종국도 일제에 협력하지 않은 문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조지훈을 꼽는 까닭이 여기 있는 것이다. 그는 자유당 정권 말기에도 독재에 항거하는 민간단체에서 활동했다. &lt;BR&gt;
&lt;BR&gt;
주실마을에는 오래된 고가가 많다. 호은의 증손 조덕린의 옥천종택, 문중의 서원 노릇을 했던 창주정사, 지훈이 한문을 배웠던 신교육의 전당 월록서당 등이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다. 일찍 개화한 마을답게 마을 한복판에는 교회가 서 있다. 독실한 기독인인 아내조차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다. 즐비한 고가와 담장 너머로 언뜻언뜻 보이는 예사롭지 않은 형상의 그 콘크리트 건물이 좀 '거시기한'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41348457.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지훈 시공원. 마을 한쪽 산자락 아래 공원을 조성, 지훈의 동상과 시비를 모아놓았다. &lt;/p&gt;&lt;/div&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94566650.jpg&quot; width=&quot;501&quot; height=&quot;37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지훈 시공원에는 이런 형식의 시비가 무려 27개나 있다. &lt;/p&gt;&lt;/div&gt;
&lt;BR&gt;
더 거시기한 것은 마을 뒤편에 조성한 '지훈 시 공원'이다. 작은 계곡 옆 산자락을 따라 오르게 되어 있는 시공원에는 조지훈의 동상과 시 27편을 새긴 돌비가 줄을 이어 서 있다. 시공원이니 '시'를 새긴 돌을 나무랄 수는 없는데, 어쩐지 그게 지훈이나 그의 시편들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lt;BR&gt;
&lt;BR&gt;
공원 안 쉼터 옆에 선 지훈의 동상은 너무 크고 높고 우람했다. 펴들고 있는 책이 아니었다면 그는 시인이 아니라, 무슨 정치적 지도자처럼 보일 듯했다. '승무'와 '봉황수' 따위를 새긴 시비 옆의 관련 조각 작품들도 어쩐지 공원의 분위기와 따로 노는 것처럼 들떠 보였다. 거기 드리워진 것은 어쩌면 관광 상품화에 급급한 지자체가 단기간에 조성한 '날림'의 혐의 같은 것은 아닐는지…….&lt;BR&gt;
&lt;BR&gt;
&lt;font face=&quot;dotum&quot;&gt;&lt;strong&gt;마을과 사람과 나무의 공존, 주실마을 숲&lt;BR&gt;
&lt;/strong&gt;&lt;/font&gt;&lt;BR&gt;
좀 씁쓸해지는 마음으로 마을을 등지면 곱게 단풍든 마을 숲이 길을 막는다. 마을사람들이 '주실쑤'라고 부르는 이 숲은 마을로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막는 보호숲이다. 밖에서 보면 숲에 가려 마을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장승을 뜻하는 사투리를 섞어 '수구막이 숲'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53928012.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주실마을. 맞은편에 월록서당, 오른편은 주실마을 숲이다. &lt;/p&gt;&lt;/div&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14311276.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주실마을 숲 지난 백여 년 동안 마을과 숲이 나눈 세월은 공존이라 이름 붙일 만하다. &lt;/p&gt;&lt;/div&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38121673.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숲과 길. 주실마을 숲을 가로지르는 영양-봉화간 도로 &lt;/p&gt;&lt;/div&gt;
&lt;BR&gt;
수백 년 된 아름드리나무들이 모여서 이룬 이 숲이 본격적으로 조성된 것은 백여 년 전이라고 한다. 마을 입구의 우거진 숲에 소나무를 심으면서 문중에서는 숲을 마을의 일부로 편입시켰던 것이다. 당나무인 느티나무와 느릅나무 등이 연출해 내는 이 숲의 풍경은 고즈넉하고 넉넉하다.&lt;BR&gt;
&lt;BR&gt;
이 숲이 마을과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온 지난 세월은 '공존'이라 이름 붙일 만하다. 지난해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이 숲이 받은 생명상(대상)은 '숲과 마을(사람)이 서로를 지켜내고 가꾸어 온 교감의 세월'에 대한 상찬이었던 것이다. &lt;BR&gt;
&lt;BR&gt;
숲 안에는 '빛을 찾아가는 길'을 새긴 지훈의 시비와 스물한 살에 요절한 지훈의 형 세림 조동진의 시비도 있다. 나지막한 돌비에 새긴 형제의 시는 주변의 노랗고 푸른 단풍빛 속에서 살갑게 녹아 있다. 숲으로 들어서자 가슴 높이까지 차오른 숲의 기운이 온몸에 빛처럼 쏟아지는 듯했다.&lt;BR&gt;
&lt;BR&gt;
숲 사이를 휘돌아 나가는 도로 저편으로 가을이 잔명(殘命)처럼 깊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용화리로 차를 몰았으나,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다. 다음 일정 때문에 우리는 대티골 숲길 어귀에서 발걸음 돌려야 했다. 우리는 나중을 위하여 대티골 숲길을 아껴두기로 했다. &lt;/p&gt;&lt;BR&gt;
&lt;p&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390817162.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대티골 숲길 어귀. 촉박한 일정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발길을 돌렸다. &lt;/p&gt;&lt;/div&gt;
&lt;BR&gt;
우리가 늦은 점심을 든 것은 오후 3시가 겨워서였다. 그것도 읍내에서 마땅한 식당을 찾지 못해 읍 외곽의 손 자장면 집에서였다. '옛날식'을 강조하고 있었지만 우리가 먹은 그 집의 '간짜장' 맛은 별로였다. '김밥'이 없었다면 아내는 나를 용서하지 않았을 거였다. 우리는 김밥의 공로를 과장해 치하하면서 귀로에 올랐다.&lt;BR&gt;
&lt;BR&gt;
&lt;BR&gt;
&lt;div id=&quot;Gallery25471912&quot;&gt;&lt;/div&gt;&lt;script type=&quot;text/javascript&quot;&gt;var Gallery25471912 = new TTGallery(&quot;Gallery25471912&quot;);Gallery25471912.appendImage(&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46498302.jpg&quot;, &quot;&quot;, 500, 335);Gallery25471912.appendImage(&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49431765.jpg&quot;, &quot;&quot;, 500, 335);Gallery25471912.appendImage(&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360464838.jpg&quot;, &quot;&quot;, 267, 400);Gallery25471912.appendImage(&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83193087.jpg&quot;, &quot;&quot;, 500, 335);Gallery25471912.appendImage(&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333107441.jpg&quot;, &quot;&quot;, 500, 335);Gallery25471912.appendImage(&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94517402.jpg&quot;, &quot;&quot;, 267, 400);Gallery25471912.appendImage(&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22203178.jpg&quot;, &quot;&quot;, 500, 335);Gallery25471912.appendImage(&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78559643.jpg&quot;, &quot;&quot;, 500, 335);Gallery25471912.appendImage(&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84520356.jpg&quot;, &quot;&quot;, 500, 335);Gallery25471912.appendImage(&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79852864.jpg&quot;, &quot;&quot;, 597, 400);Gallery25471912.appendImage(&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16708079.jpg&quot;, &quot;&quot;, 597, 400);Gallery25471912.appendImage(&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86108753.jpg&quot;, &quot;&quot;, 267, 400);Gallery25471912.show();&lt;/script&gt;
&lt;BR&gt;
&lt;a href=&quot;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56763&amp;amp;PAGE_CD=N0000&amp;amp;BLCK_NO=5&amp;amp;CMPT_CD=M0034&quot;&gt;출처 : 시인의 마을, 생명의 숲을 찾아서 - 오마이뉴스&lt;/a&gt;&lt;BR&gt;
&lt;/font&gt;&lt;/p&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안동 이야기</category>
			<author>q9447 (낮달)</author>
			<pubDate>Tue, 10 Nov 2009 22:57:13 GMT</pubDate>
		</item>
		<item>
			<title>간판 구경, '고등어 &amp; 콩나물'</title>
			<link>http://blog.ohmynews.com/q9447/254427</link>
			<description>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88819472.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고등어'와 '콩나물' 사이에 낀 '&amp;amp;'을 애교로 봐 줄 수 있을까. &lt;/p&gt;&lt;/div&gt;
&lt;BR&gt;
&lt;font color=&quot;#003366&quot;&gt;출퇴근을 걸어서 하면서 자연스럽게 연도의 간판들을 눈여겨보게 된다. 기억력이 왕성할 때야 엔간한 상호쯤은 외워 버리기도 했지만, 요즘은 집 앞 가게 이름도 긴가민가할 때가 많다. 어쨌든 나는 길 건너편에 죽 이어진 가게들의 상호나 취급품목 따위를 무심히 읽으면서 걷는 게 어느 새 버릇이 되었다.&lt;BR&gt;
&lt;BR&gt;
그런데 직업의식은 참 무섭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늘 색연필을 들고 가게 이름, 거리에 걸린 펼침막, 전봇대에 붙은 광고전단을 하나하나 점검하고 있는 것이다. 블로그에 붙인 댓글조차도 교정을 본다는 '편집자'들의 습관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뜻밖에 맞춤법에 어긋난 표기가 제법 있다.&lt;BR&gt;
&lt;BR&gt;
&lt;div style=&quot;padding-right: 10px; padding-left: 10px; padding-bottom: 10px; padding-top: 10px; background-color: #e4e4e4&quot;&gt;&lt;font color=&quot;#993366&quot;&gt;· 갈메기살 → 갈매기살&lt;BR&gt;
&lt;/font&gt;- 갈매기살은 돼지의 횡격막과 간 사이에 있는 근육질의 힘살이다. 기름이 없고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한 맛을 내기 때문에 귀한 육질로 치는데 ‘안창고기’라고도 한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993366&quot;&gt;· 희노애락 → 희로애락&lt;BR&gt;
&lt;/font&gt;- 희로애락(喜怒哀樂)의 ‘怒(노)’는 원래 소리가 ‘성낼 노’다. 그러나 발음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서 ‘로’로 읽는다. ‘허낙(許諾)’을 ‘허락’으로 표기하는 것과 같은 ‘활음조 현상’이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993366&quot;&gt;· 송이꾸이 → 송이구이&lt;BR&gt;
&lt;/font&gt;- ‘구이’는 ‘굽다’에서 온 명산데 경상도 사람은 대체로 ‘꿉다’로 발음한다. 물론 표준발음은 아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993366&quot;&gt;· 솜 탐니다 → 솜 탑니다&lt;BR&gt;
&lt;/font&gt;- ‘탑니다’의 받침 ‘ㅂ’이 뒤의 ‘ㄴ’ 때문에 자음동화되어 ‘ㅁ’으로 발음되었다. 자음동화는 표준발음이긴 하지만 표기는 형태를 밝혀 적어야 한다.&lt;BR&gt;
&lt;/div&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384905424.jpg&quot; width=&quot;300&quot; height=&quot;1025&quot; alt=&quot;&quot;/&gt;&lt;/div&gt;1km 남짓한 거리에서 발견한 잘못된 표기가 네 개나 된다. 주인은 자기 가게에 쓰인 글귀가 잘못이라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지 모르겠다. 설사 안다고 한들 적잖은 돈을 들여서까지 그걸 바꿀 엄두를 내는 것도 쉽지는 않겠다.&lt;BR&gt;
&lt;BR&gt;
요즘 간판은 꽤 재미있다. 114 상담원을 웃긴 상호로 ‘누렁이도 찰스로’(애견가게), ‘드가장 여관’(숙박업소), ‘회밀리가 떴다’(횟집) 등이 있다고 했다. 출근길의 거리에서 만난 가게이름 가운데 기중 마음에 드는 것은 도로변의 조그만 반찬가게다. &lt;BR&gt;
&lt;BR&gt;
이름 하여 ‘고등어와 콩나물’. 어떤가, 지극히 평범하지만 범상치 않은 격조(!)가 보이지 않는가. 그런데 나는 예의 간판에서 ‘&amp;amp;’를 ‘와’로 읽었다. '콩나물과 고등어'로 얻은 정겹고 포근한 격조는 예의 생뚱맞은 영자 탓에 어정쩡한 모양새가 되었다. 이런 걸 ‘옥에 티’라고 하나 보다.&lt;BR&gt;
&lt;BR&gt;
뜻밖에 우리말 속에 이런 형식의 영어 기호나 문자가 심심찮게 쓰이고 있는 듯하다. 둘을 비교하거나 대조할 때 ‘:’ 대신에 쓰는 ‘vs’, ‘기타’를 뜻하는 ‘etc’, ‘예’로 쓰이는 ‘ex’ 등이 그렇다. &lt;BR&gt;
&lt;BR&gt;
보니까 '&amp;amp;'는 주변 간판, '구두수선 &amp;amp; 운동화 세탁', '지 앤 미' 등에서도 쓰였다. 미용실 이름인 '지 앤 미'에서 '지못미'를 떠올리면 꽝이다. 보아하니 이건 '지(智) &amp;amp; 미(美)'인 듯하니 말이다.&lt;BR&gt;
&lt;BR&gt;
요즘 아이들은 편지를 쓸 때, ‘to’나 ‘from’ 따위를 마치 한글 조사처럼 사용한다.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가 한문에다 한글 토씨만 붙인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lt;BR&gt;
&lt;BR&gt;
하긴 우리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땐 대부분의 사진관이 ‘DP &amp;amp; E’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이들 영자는 각각 ‘현상(developing), 인화(printing), 확대(enlarging)’의 머리글자를 따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에 사진관 간판의 뜻을 새길 수 있었던 사람은 얼마나 되었을까.&lt;BR&gt;
&lt;BR&gt;
인근에 있는 실내장식 전문점의 상호는 ‘집과 사람들’이다. 우리말을 쓴데다가 구의 형식으로 쓴 것도 독특하다. 그러나 옥에 티는 여기에도 있다. 상호 아래에 일렬로 세운 글자는 모두 외래어다. ‘인테리어, 씽크대, 브라인더’인데, ‘인테리어’는 순화하여 ‘실내장식’으로 쓰고, 나머지는 ‘싱크대’와 ‘블라인드’가 바른 표기다. &lt;BR&gt;
&lt;BR&gt;
영어가 저도 몰래 주인 못지않은 대접을 받는 나라여서인가. 일상생활은 영자와 그 부스러기 말로 얼룩진다. ‘D/C, PC, A/S, T/O’ 등의 영자가 아무런 저항 없이 자연스레 쓰인다. 심지어는 ‘올리다, 내리다’를 ‘업(up)과 다운(down)’으로 쓰는 게 무슨 유행처럼 퍼지고 있다.&lt;BR&gt;
&lt;BR&gt;
시민단체에서 연 집회의 사회자가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993366&quot;&gt;- 분위기가 너무 ‘다운’되어 있네요. 분위기를 ‘업’시키는 의미에서 구호 한번 하죠.&lt;BR&gt;
&lt;/font&gt;&lt;BR&gt;
한때 나는 운동권의 언어관이 다분히 이중적이지 않나 싶었다. ‘오전’, ‘오후’로 써도 될 터인데 굳이 ‘이른’, ‘늦은’이라고 모호한 용어를 쓰면서도 정작 문건에서는 ‘항상성(恒常性)’, ‘형해화(形骸化)’ 따위의 관념어로 칠갑을 하곤 했으니까 말이다. &lt;BR&gt;
&lt;BR&gt;
세월이 하 수상해서일 테다. 이제 사람들은 잡탕이 되고 있는 말글살이조차 심상하게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그랜드 바겐’과 ‘원 샷 딜’, ‘에코 프렌즈’, ‘한강 르네상스’, ‘윈드 앤 바이시클 플라자’ 따위가 정부에서 펴는 정책 이름이니 더 무엇을 말하랴.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322881456.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5&quot; alt=&quot;&quot;/&gt;&lt;/div&gt;&lt;BR&gt;
&lt;BR&gt;
그나마 이 도시에 살면서 다행스러운 것은, 안동의 지자체 상징 구호(도시 브랜드 슬로건)가 여전히 한글이라는 점이다. ‘굳 앤 디퍼런트 영주’와 ‘파인토피아 봉화’, ‘싱 어 청송’, ‘핫 영양’, ‘러닝 문경’, ‘저스트 상주’ 등의 혀 짧은 구호에서 안동의 그것은 좀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를 달리 영자로 표기할 방법이 따로 있겠는가 말이다.&lt;BR&gt;
&lt;BR&gt;
&lt;div align=&quot;center&quot;&gt;&amp;lt;2009. 11. 6.&amp;gt;&lt;BR&gt;
&lt;/div&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51321548.jpg&quot; width=&quot;70&quot; height=&quot;41&quot; alt=&quot;&quot;/&gt;&lt;/div&gt;&lt;/font&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가겨 찻집</category>
			<author>q9447 (낮달)</author>
			<pubDate>Fri, 06 Nov 2009 11:24:00 GMT</pubDate>
		</item>
		<item>
			<title>우포(牛浦), 2009년 가을</title>
			<link>http://blog.ohmynews.com/q9447/254366</link>
			<description>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87040310.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402&quot; alt=&quot;&quot;/&gt;&lt;/div&gt;&lt;BR&gt;
&lt;font color=&quot;#003366&quot;&gt;&lt;BR&gt;
지난 10월 말께에 우포를 다녀왔다. 우연한 여행이다. &amp;lt;오마이뉴스&amp;gt; 블로그의 이웃들과 함께였다. 애당초 내가 정한 행선지가 아니었기에 그것은 내게 아주 가볍고 부담 없는 시간이었다. 사진기를 갖고 갈까 말까 하고 망설였지만 나는 줌렌즈를 끼운 카메라를 맹꽁이 가방에 넣고 동행했다.&lt;BR&gt;
&lt;BR&gt;
1박 2일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같이한 시간은 길지 않다. 심야에 술을 좀 마셨고, 이른 새벽에 서둘러 숙소를 떠나 안개 자욱한 우포늪 주변을 서성였다. 나는 빛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되는 대로 셔터를 눌렀다. 늘 그렇듯이 나중에 이미지를 통해 여정을 복기(復碁)하면서 쓸 만한 사진만 고르면 될 터이니까.&lt;BR&gt;
&lt;BR&gt;
동류의 사람들이 만나는 건 즐거운 일이다. 유유상종이라 하지 않는가. 비슷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걸 나누는 것은 유쾌한 일인 것이다. 나이와 사는 곳, 하는 일도 제각기 달랐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삶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아주 정겹고 유쾌하게 나누었던 것 같다. &lt;BR&gt;
&lt;BR&gt;
만남은 짧고 작별의 시간은 서둘러 다가온다. 이튿날 오후 늦게, 우리는 악수를 나누고, 뒷날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다른 벗들은 모두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2009년 가을의 우포행을 정리한 듯하다. 이제 내 차례인 것이다. 굳이 차례를 기다렸던 것은 아니다. &lt;BR&gt;
&lt;BR&gt;
몇 장의 사진을 고르고 규격에 맞게 보정한 뒤, 그것을 천천히 한 장 한 장 바라보았다. 그것을 렌즈에 담을 때의 공기, 숨결, 풍경과 느낌 따위를 새롭게 복기하면서. 시간이 흘러도 그것들은 아주 생생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기억될 터이다. &lt;BR&gt;
&lt;BR&gt;
우포 곳곳을 안내한 부지런한 초석님의 넘치는 에너지와 우포가 연출해 내는 모든 풍경을 담으려 했던 해를그리며님의 한결같은 눈길을. 그리고 시종 몸 가볍게 일행을 챙겨준 얄랴셩님의 바지런과 군말 없이 늠름하게 우포를 돌아본 리수와 리준 자매, 그리고 리수 어머니의 너그럽고 푸근한 미소를.&lt;BR&gt;
&lt;BR&gt;
&lt;div align=&quot;center&quot;&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34770142.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402&quot; alt=&quot;&quot;/&gt;&lt;/div&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355308934.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402&quot; alt=&quot;&quot;/&gt;&lt;/div&gt;&lt;/font&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407427972.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402&quot; alt=&quot;&quot;/&gt;&lt;/div&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83226300.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402&quot; alt=&quot;&quot;/&gt;&lt;/div&gt;&lt;/div&gt;&lt;BR&gt;
&lt;p&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93577667.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402&quot; alt=&quot;&quot;/&gt;&lt;/div&gt; &lt;/p&gt;
&lt;BR&gt;
&lt;p&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389149519.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402&quot; alt=&quot;&quot;/&gt;&lt;/div&gt; &lt;/p&gt;
&lt;BR&gt;
&lt;p&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53759927.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402&quot; alt=&quot;&quot;/&gt;&lt;/div&gt;&lt;br /&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40668386.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402&quot; alt=&quot;&quot;/&gt;&lt;/div&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35599031.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402&quot; alt=&quot;&quot;/&gt;&lt;/div&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45564848.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402&quot; alt=&quot;&quot;/&gt;&lt;/div&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26242415.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402&quot; alt=&quot;&quot;/&gt;&lt;/div&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303847676.jpg&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598&quot; alt=&quot;&quot;/&gt;&lt;/div&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70183083.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402&quot; alt=&quot;&quot;/&gt;&lt;/div&gt;&lt;/p&gt;&lt;BR&gt;
&lt;p&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68270248.jpg&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598&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국보 제34호)&lt;/p&gt;&lt;/div&gt; &lt;/p&gt;
&lt;BR&gt;
&lt;p&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367201857.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창녕시장의 등겨가루메주(?). 등겨장의 재료다. 우포행 수확 중 하나다. ⓒ해를그리며&lt;/p&gt;&lt;/div&gt; &lt;/p&gt;
&lt;BR&gt;
&lt;BR&gt;
&lt;div align=&quot;center&quot;&gt;&amp;lt;2009. 11. 5.&amp;gt;&lt;/div&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77442834.jpg&quot; width=&quot;70&quot; height=&quot;41&quot; alt=&quot;&quot;/&gt;&lt;/div&gt;&lt;BR&gt;
&lt;BR&gt;
&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4681900&quot;&gt;&lt;/embed&gt;&lt;/div&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풍경</category>
			<author>q9447 (낮달)</author>
			<pubDate>Thu, 05 Nov 2009 11:22:20 GMT</pubDate>
		</item>
		<item>
			<title>애비가 죽고 없어도 굳게 살아라</title>
			<link>http://blog.ohmynews.com/q9447/254223</link>
			<description>&lt;font face=&quot;dotum&quot; color=&quot;#003366&quot; size=&quot;3&quot;&gt;&lt;strong&gt;'고 권재혁 선생 40주기' 추모제 기사를 읽고&lt;BR&gt;
&lt;/strong&gt;&lt;/font&gt;&lt;BR&gt;
&lt;font color=&quot;#003366&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52311988.jpg&quot; width=&quot;502&quot; height=&quot;377&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경기 남양주시 모란공원에서 열린 ‘고 권재혁 40주기 추모제'. ⓒ 한겨레&lt;/p&gt;&lt;/div&gt;
&lt;BR&gt;
오늘 아침 &amp;lt;한겨레&amp;gt;에서 ‘고 권재혁 40주기 추모제’란 기사를 읽었다. 기사의 제목은 &lt;a href=&quo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85695.html&quot;&gt;&lt;font color=&quot;#0000ff&quot;&gt;“간첩 낙인 40년, 아버지 원망 이젠 내려놔”&lt;/font&gt;&lt;/a&gt;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가 발표한 ‘간첩’과 ‘빨갱이’ 조작 사건이 한둘이 아니어서 좀 심상해져 있는 게 사실이다. 워낙 생소한 이름이라 기사를 찾아 읽었는데, 마음이 여간 애잔해지지 않는다.&lt;BR&gt;
&lt;BR&gt;
권재혁은 생소한 이름이다.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의 글(&lt;a href=&quot;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85736.html&quot;&gt;&lt;font color=&quot;#0000ff&quot;&gt;권재혁을 아십니까&lt;/font&gt;&lt;/a&gt;)에 따르면 그는 이른바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의 주범으로 사형을 당한 진보적 경제학자다. 지난 11월 4일이 그의 40주기였던 것이다.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권씨는 1955년 미국 오레곤대학 경제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귀국해 건국대와 육사에서 강사로 있던 장래가 촉망되는 학자였다고 한다. &lt;BR&gt;
&lt;BR&gt;
촉망되는 경제학자를 ‘간첩’으로 만들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것은 독재정권의 권력기구가 자행한 무자비한 고문이고, 그것을 추인한 사법부다. 늘 그렇듯이 진실과 정의가 밝혀지는 데는 너무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 지난 4월 진실화해위가 “중앙정보부가 1968년 ‘권재혁 등 13명이 반국가단체인 남조선해방전략당을 조직했다’고 발표한 사건은 고문에 의한 조작이었다”고 진실 규명 결정을 내린 것(&lt;a href=&quot;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35371&amp;amp;PAGE_CD=N0000&amp;amp;BLCK_NO=3&amp;amp;CMPT_CD=M0009&quot;&gt;&lt;font color=&quot;#0000ff&quot;&gt;관련 기사&lt;/font&gt;&lt;/a&gt;)이다.&lt;BR&gt;
&lt;BR&gt;
고인의 큰아들 권병덕(59)씨 얘기 앞에서 나는 한참 동안 먹먹해졌다. 가족들은 서로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는 걸 꺼리며 살아왔고, 한 번도 아버지 묘소를 함께 찾지 않았다고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수사기관에 연행된 아버지는 곧 처형되었다. “앞으로 면회 오지 말아라.”가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lt;BR&gt;
&lt;BR&gt;
&lt;font face=&quot;dotum&quot; size=&quot;3&quot;&gt;&lt;strong&gt;40년, 유족들에게 과연 '나라'는 무엇일까&lt;BR&gt;
&lt;/strong&gt;&lt;/font&gt;&lt;BR&gt;
아버지를 잃은 슬픔보다는 ‘간첩의 자식’이란 굴레가 더 끔찍했을 것이었다. 1975년 인혁당 사건의 한 희생자의 막내아들은 네 살이었는데, 동네 아이들이 ‘빨갱이 새끼’라고 나무에 묶어놓고 사형을 시키는 놀이를 했다고 하니 간첩으로 낙인찍힌 유족들이 견뎌야 했던 고통은 가히 ‘천형’ 수준이었으리라.&lt;BR&gt;
&lt;BR&gt;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으로 복역하다 대전교도소에서 암으로 숨진 이강복 씨의 아들은 38년 전 아버지의 주검을 찾으러 갔다. 그가 유언이라면서 받은 건 종이 한장. 거기엔 “풀잎도 꽃잎도 애비 없듯이, 애비가 죽고 없어도 굳게 자활해 살아라.”란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lt;BR&gt;
&lt;BR&gt;
&lt;font face=&quot;dotum&quot; color=&quot;#993366&quot; size=&quot;2&quot;&gt;&lt;strong&gt;“풀잎도 꽃잎도 애비 없듯이, 애비가 죽고 없어도 굳게 자활해 살아라.”&lt;/strong&gt;&lt;/font&gt;&lt;BR&gt;
&lt;BR&gt;
죽음을 앞두고 자식들에게 남길 유언을 쓰고 있는 아버지를 생각한다. 이 땅의 곡절 많은 현대사 곳곳에 얼룩진 것은 이런 죽음과 피눈물이다. ‘간첩’으로 ‘빨갱이’로 지탄 받으며 숨죽이며 살아온 세월, 40년이 지난 이제야 그게 ‘고문에 의한 조작’이라 한다. 그들이 감내한 그 40년의 세월은, 그 세월의 갈피마다 엉키고 서린 회한과 상처는 어쩌란 말인가.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70755952.jpg&quot; width=&quot;205&quot; height=&quot;388&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69. 5. 28 &amp;lt;조선일보&amp;gt;&lt;/p&gt;&lt;/div&gt;40주기 추모제를 치르며 유족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고통의 세월을 떠올리고 뒤늦은 국가의 참회와 고백 앞에서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들에게 국가는 무엇이었을까. 40년이라면 보통사람들의 반평생에 해당하는 시간이다. 그 반평생을 숨죽여 살 수밖에 없도록 강제한 국가, 그리고 40년이 지난 뒤 그것이 ‘조작’이었다는 한 장의 결정문으로 내키지 않는 참회를 마감하는 국가란 대체 무엇인가.
&lt;BR&gt;
&lt;BR&gt;
다행히 그런 역사의 굴곡과는 먼, ‘장삼이사’ 아버지를 둔 것을 우리는 행운이라 생각해야 할까. 그 역사의 모진 손길이 나와는 무관하게 지나갔다고 가슴을 쓸어내려야 할까. 그래서 그게 몇몇 사람의 문제였다고, 분단 상황에서 부득이하게 일어난 일이라고, 시대적 특수 상황이라고 눙치고 말 수 있을까.&lt;BR&gt;
&lt;BR&gt;
&lt;font face=&quot;dotum&quot; size=&quot;3&quot;&gt;&lt;strong&gt;국가보안법 등으로 사형 당한 이는 모두 180여 명&lt;/strong&gt;&lt;/font&gt;&lt;BR&gt;
&lt;BR&gt;
한홍구 교수에 따르면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으로 사형을 당한 이는 박정희 정권 때 170여 명, 전두환 정권 때 10명가량이라고 한다. 또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남쪽 당국이 적발한 간첩이 1천여 명이고, 그 가운데 진짜 북에서 남파시킨 간첩은 50명이 안 된다고 한다. &lt;BR&gt;
&lt;BR&gt;
그나마 해외 유학을 했거나 나름의 인맥도 있고, 또 민주화 운동이라도 했던 분들의 경우는 언론의 조명을 받고 과거사위의 조사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억울한 ‘소시민’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국선변호인조차 귀 기울여 주지 않아 혼자서 맞춤법도 맞지 않는 탄원서 한 장 남겨놓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돈도 없고 빽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증거도 없었던 사람들…….’(한홍구)이다. &lt;BR&gt;
&lt;BR&gt;
그러나 그나마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해 독립적인 국가기관으로 설치된 &quot;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quot;(이하 과거사위)는 오는 2010년 4월 해산된다. 아직 과거사 조상의 대상으로조차 오르지 못한 숱한 억울한 누명과 억울한 죽음은 어쩌란 말인가. &lt;BR&gt;
&lt;BR&gt;
&lt;font face=&quot;dotum&quot; size=&quot;3&quot;&gt;&lt;strong&gt;과거사정리위원회는 내년 4월 해산&lt;/strong&gt;&lt;/font&gt;&lt;BR&gt;
&lt;BR&gt;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 4년 동안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한계 때문에 만족스런 성과를 내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도 집권 여당은 국감 현장에서 &quot;과거는 '역사'에 묻고 이제 정리할 때&quot;, &quot;과거사위 운영은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것&quot;, &quot;좌파 편향&quot; 등의 발언을 하며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고 한다. &lt;BR&gt;
&lt;BR&gt;
과거사 정리는 말 그대로 ‘진실’과 ‘화해’를 위해서다. 그리고 진실이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화해가 불가능하다는 건 상식이다. 과거사 정리를 ‘국론 분열’ 쯤으로 이해하는 보수세력의 인식은 걱정스러운 이유다. 그렇잖아도 과거 군부 독재시절의 폭압 통치 기구였던 안기부, 보안사 등이 이름을 바꿔 국정원, 기무사 등 새로운 폭압 통치 기구로 바뀌고 있다는 여론이 심상치 않다.&lt;BR&gt;
&lt;BR&gt;
경제학자 권재혁을 비롯한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 관련자들이 40년 만에 신원(伸寃)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뒤 늦었지만 이들의 명복을 빈다. 지난 시대의 어두운 역사를 되돌아 보는 뜻은 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고자 함이다. 그러나 되돌아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여전히 역사의 신원을 기다리는 우리 시대의 한과 슬픔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amp;nbsp; &lt;BR&gt;
&lt;BR&gt;
&lt;div align=&quot;center&quot;&gt;&amp;lt;2009. 11. 4.&amp;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36401038.jpg&quot; width=&quot;70&quot; height=&quot;41&quot; alt=&quot;&quot;/&gt;&lt;/div&gt;&lt;/div&gt;&lt;/font&gt;&lt;BR&gt;
&lt;BR&gt;
&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4667835&quot;&gt;&lt;/embed&gt;&lt;/div&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길위에서</category>
			<author>q9447 (낮달)</author>
			<pubDate>Wed, 04 Nov 2009 05:42:27 GMT</pubDate>
		</item>
		<item>
			<title>숱한 백성이 무참히 죽어 원혼이 떠돌던 곳</title>
			<link>http://blog.ohmynews.com/q9447/254222</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003366&quot;&gt;&lt;font size=&quot;3&quot;&gt;&lt;strong&gt;&lt;font face=&quot;dotum&quot;&gt;[경북 북부지역의 시가기행 ⑧] 안축의 경기체가 &amp;lt;관동별곡&amp;gt;·&amp;lt;죽계별곡&amp;gt;&lt;/font&gt; &lt;br /&gt;
&lt;/strong&gt;&lt;/font&gt;&lt;BR&gt;
09.11.03 12:22 ㅣ최종 업데이트 09.11.03 12:25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amp;nbsp; 장호철 (q9447) &lt;BR&gt;
&lt;BR&gt;
태그 : 안축, 죽계별곡, 관동별곡 &lt;BR&gt;
&lt;/font&gt;&lt;/p&gt;&lt;BR&gt;
&lt;p&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384251058.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소수서원을 끼고 흐르는 죽계천은 &amp;lt;죽계별곡&amp;gt;의 고향이라 할 만하다. &lt;/p&gt;&lt;/div&gt;
&lt;font color=&quot;#003366&quot;&gt;&lt;BR&gt;
가을이 깊었다. 한가위가 지나면서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이 예사롭지 않더니 어느 새 우리는 겨울의 어귀에 서 있다. 곱게 물들며 지는 나뭇잎, 그 조락이 환기하는 것은 시간, 그 세월의 무상이다. 그것은 또 우리 역사 속에 스러져 간 시인들의 삶과 그들의 노래를 덧없이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lt;BR&gt;
&lt;BR&gt;
오늘의 여정은 영주 순흥 쪽이다. 순흥, 소백산 자락으로 한 시인의 노래와 그 자취를 찾아나서는 길이다. 그는 본관을 '순흥'으로 쓰는 고려 말의 문신 근재(謹齋) 안축(安軸,1287~1348)이다. 근재는 경기체가인 &amp;lt;관동별곡&amp;gt;(조선조 중기에 송강 정철이 쓴 가사 &amp;lt;관동별곡&amp;gt;과는 다른 노래다)과 &amp;lt;죽계별곡&amp;gt;을 지은 이다. &lt;BR&gt;
&lt;BR&gt;
후렴에 나오는 '경(景)긔엇더니잇고'라는 구절 때문에 '경기체가'라는 이름이 붙은 이 노래는 경기하여가, 경기하여체가 또는 별곡체 등으로도 불린다. 흔히 경기체가는 고려가요로 널리 알려졌지만, 기실 고려시대의 작품은 &amp;lt;한림별곡&amp;gt;, &amp;lt;관동별곡&amp;gt;, &amp;lt;죽계별곡&amp;gt; 등 세 편에 불과할 뿐이다. &lt;BR&gt;
&lt;BR&gt;
&lt;font face=&quot;dotum&quot; size=&quot;3&quot;&gt;&lt;strong&gt;경기체가, 신흥사대부의 세계관을 반영한 시 양식&lt;BR&gt;
&lt;BR&gt;
&lt;/strong&gt;&lt;/font&gt;경기체가의 첫 작품 &amp;lt;한림별곡&amp;gt;은 교과서를 통해 두루 소개된 노래다. 경기체가의 성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계층은 &amp;lt;한림별곡&amp;gt;을 지은 여러 유학자들, &amp;lt;죽계별곡&amp;gt;·&amp;lt;관동별곡&amp;gt;의 안축 등 고려 후기의 '신흥 사대부'들이다. 고려 후기에 역사의 새로운 주도 세력으로 부상한 이들 계층은 한시 창작만으로 충족될 수 없는 욕구를 경기체가 형식을 이용하여 표출한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317268444.jpg&quot; width=&quot;499&quot; height=&quot;394&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안축의 경기체가 &amp;lt;관동별곡&amp;gt;(왼쪽)과 &amp;lt;죽계별곡&amp;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lt;/p&gt;&lt;/div&gt;
&lt;BR&gt;
경기체가는 무신집권기 문인의 현실 도피적 성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들 신흥 사대부의 '세계관과 미의식'을 반영한 시 양식으로 보는 게 통설이다. 경기체가는 이들 신진사류들의 '주변 사물에 대한 관심과 득의에 찬 기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lt;BR&gt;
&lt;BR&gt;
&amp;lt;한림별곡&amp;gt;은 &amp;lt;악학궤범&amp;gt;·&amp;lt;악장가사&amp;gt;에 국한문 가사가 전하는 까닭에 교과서에 실려 낯설지 않다. 그러나 근재의 문집에 전하는 &amp;lt;죽계별곡&amp;gt;과 &amp;lt;관동별곡&amp;gt;은 한문과 이두로 쓰여 낯설기만 하다. 엄밀히 보면 경기체가가 한글시가라기보다 한문시가로 보는 게 더 타당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360640207.jpg&quot; width=&quot;300&quot; height=&quot;449&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순흥 금성단에 있는 금성대군의 신단비&lt;/p&gt;&lt;/div&gt;안동에서 순흥까지는 중앙고속도로를 타면 금방이다. 그러나 고속도로는 큰 굽이가 없는 밋밋한 길이 재미없는데다가 굳이 유료도로로 가야 할 만큼 바쁜 것은 아니어서 아내와 나는 국도를 탔다. 순흥에 닿는 데 40분쯤이 걸렸다. 중간에 잠깐 길이 헛갈렸던 것이다.
&lt;BR&gt;
&lt;/font&gt;&lt;/p&gt;&lt;BR&gt;
&lt;p&gt;&lt;font color=&quot;#003366&quot;&gt;순흥은 여말 성리학의 비조인 회헌 안향과 그 후손인 안축을 낳은 순흥안씨의 고향이다. 안축과 안보(安輔) 형제는 고려조뿐 아니라, 원나라의 대과에까지 나란히 급제한 재원들이다. 조선조 개국 초 '나라 안 전체의 학문을 다 합쳐도 이들의 학문을 당할 수 없다'는 말을 있을 정도였다. 당대의 석학인 목은 이색은 안보의 비문을 썼고, 그의 아버지 이곡은 안축의 문하생으로서 근재 사후 그의 비문을 썼으니 두 집안의 인연도 만만하지 않다.&lt;br /&gt;
&lt;BR&gt;
순흥은 고려 충렬왕과 충목왕이 태를 봉안하여 순흥부가 되었고, 조선조 태종 때 순흥도호부로 바뀌었다. 그러나 금성대군이 단종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순흥에 유배 와 있다가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다시 거사를 도모하다 실패한 사건은 순흥을 뒤흔들었다. 숱한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고 순흥부는 폐부되었던 것이다. 순흥이 다시 도호부의 지위를 회복한 것은 숙종 때에 이르러서다. &lt;BR&gt;
&lt;BR&gt;
&lt;font face=&quot;dotum&quot; size=&quot;3&quot;&gt;&lt;strong&gt;순흥 안씨가 세거해 온 고을, 죽계(순흥)&lt;BR&gt;
&lt;/strong&gt;&lt;/font&gt;&lt;BR&gt;
이중환은 &amp;lt;택리지&amp;gt;에서 &quot;영천(榮川) 서북쪽 순흥부에 죽계라는 계곡이 있는데, 죽계는 소백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다. 이곳은 들이 넓고 산은 낮으며 물과 들이 맑고 깨끗하다. …… 참으로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이다&quot; 라고 하였다. 순흥은 한 명문가가 세거하기에는 충분한 고을인 셈이다.&lt;/p&gt;&lt;BR&gt;
&lt;p&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01073386.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순흥면사무소 뒤편에 있는 봉도각(蓬島閣) 공원에도 가을이 깊었다. &lt;/p&gt;&lt;/div&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15758069.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봉도각 공원의 경로소(敬老所). 매우 단정한 모양새의 팔작집이다. &lt;/p&gt;&lt;/div&gt;
&lt;BR&gt;
순흥은 행정구역으로는 '면'에 불과하다. 그러나 관내에 소수서원과 선비촌 등 유적지와 관광지를 끼고 있는데다가 부석사로 가는 길목이어서 이맘때쯤이면 이미 한적한 시골이 아니다. 더구나 면사무소가 있는 읍내리는 문화부 지정 '전통문화마을'이다. 영주에서 들어가는 순흥 어귀에 덩실하게 솟은 봉서루나, 면사무소 뒤 봉도각 주변의 고색창연한 연못과 경로소 따위가 연출하는 풍경은 순간적으로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lt;BR&gt;
&lt;BR&gt;
소수서원을 지나 읍내리의 '사현정(四賢井)'에 이른다. 사현정은 말 그대로 '어진 이 네 사람의 우물'이다. '어진 이'는 이 동네에 세거했다는 안축의 아버지 안석과 그의 세 아들 축, 보, 집을 이른다. 안석이 호장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고 향리에 묻혀 세 아들을 훌륭히 길러낸 우물이란다. &lt;BR&gt;
&lt;BR&gt;
조선조 인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이 이 우물의 내력을 알고 '사현정'이라는 비를 세우고 네 사람의 덕을 기리게 하였다. 그 후 인조 때 중건하였고 순조 때 다시 비각을 세웠다. 우물 깊이는 약 4m 정도라는데 석재의 뚜껑이 굳게 닫혀 있다. 지상에는 높이 70cm, 폭 1m의 화강암 각석을 우물 정(井)자형으로 3단 조립하였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67862508.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읍내리의 사현정. 사현(四賢)은 안축의 아버지 안석과 그의 세 아들을 이른다. &lt;/p&gt;&lt;/div&gt;
&lt;BR&gt;
안축은 1287년(충렬왕 13)에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문과에 급제하여 단양부주부 등을 지냈고, 1324년(충숙왕 11) 원나라 과거에도 급제하여, 그곳 관리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고려로 돌아와 충혜왕 때 왕명으로 강원도 존무사(충숙왕 때에 임시로 존재했던 지방관)로 파견되었다. 그 후, 상주목사 등을 지내고 충렬·충선·충숙 3조(朝)의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순흥 소수서원에 제향되었는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 &amp;lt;근재집(謹齋集)&amp;gt;이 있다.&lt;BR&gt;
&lt;BR&gt;
&amp;lt;관동별곡&amp;gt;은 1330년(충숙왕 17)에 안축이 강원도 존무사로 있다가 돌아오는 길에 관동지방의 뛰어난 경치와 유적 및 명산물을 노래한 경기체가다. 이때 근재는 마흔네 살. 250년 뒤인 1580년(선조 13)에 역시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던 마흔다섯의 송강 정철이 가사 &amp;lt;관동별곡&amp;gt;을 지었으니 몇 세기를 넘어 강원도를 노래한 두 시인과 노래의 인연은 남다르다. &lt;BR&gt;
&lt;BR&gt;
&amp;lt;관동별곡&amp;gt;은 전체 9장으로, 위풍당당한 순찰의 정경을 노래한 작품의 서사 1장에 이어, 학성, 총석정, 삼일포, 영랑호, 양양, 임영, 죽서루, 정선을 각각 노래했다. &amp;lt;관동별곡&amp;gt;은 '실재하는 자연을 주관적 흥취로 여과하고 관념화하여 나열하여, 그 미감을 절도 있게 표출함으로써 사대부 특유의 세계관을 작품으로 승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993366&quot;&gt;海千重(해천중) 山萬壘(산만첩) 關東別境(관동별경) &lt;BR&gt;
碧油幢(벽유당) 紅蓮幕(홍련막) 兵馬營主(병마영주) &lt;BR&gt;
玉帶傾盖(옥대경개) 黑槊紅旗(흑삭홍기) 鳴沙路(명사로) &lt;BR&gt;
爲(위) 巡察景(순찰경) 幾何如(기하여) &lt;BR&gt;
朔方民物(삭방민물) 慕義趨風(무의추풍) &lt;BR&gt;
爲(위) 王化中興(왕화중흥) 景幾何如(경기하여) &lt;BR&gt;
&lt;BR&gt;
바다 겹겹 산 첩첩인 관동의 절경에서 &lt;BR&gt;
푸른 휘장 붉은 장막에 둘러싸인 병마영주가 &lt;BR&gt;
옥대 매고 일산 받고, 검은 창 붉은 깃발 앞세우며 모래사장으로 &lt;BR&gt;
아, 순찰하는 그 모습 어떠합니까? &lt;BR&gt;
이 지방의 백성들 의를 기리는 풍속을 쫓네. &lt;BR&gt;
아, 임금의 교화 중흥하는 모습 그 어떠합니까? &lt;BR&gt;
&lt;/font&gt;&amp;nbsp; &lt;BR&gt;
&amp;nbsp; &amp;nbsp; - &amp;lt;관동별곡&amp;gt; 제1장 &lt;BR&gt;
&lt;BR&gt;
이 노래는 형식상 여러 가지 파격을 보인다. 이 같은 정제되지 않은 형식은 경기체가 장르의 형성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풀이한다. 실제 노래할 때, 제1장의 4구와 6구는 각각 '위 순찰ㅅ경 긔 엇더니잇고'와 '위 왕화중흥ㅅ경 긔 엇더니잇고'로 불리었을 것이다. &lt;BR&gt;
&lt;BR&gt;
&lt;font face=&quot;dotum&quot; size=&quot;3&quot;&gt;&lt;strong&gt;&amp;lt;관동별곡&amp;gt;에는 피폐한 현실이 없다&lt;BR&gt;
&lt;/strong&gt;&lt;/font&gt;&lt;BR&gt;
&amp;lt;관동별곡&amp;gt;은 송강의 가사와 마찬가지로 금강산 일대의 풍치를 찬양하고 그 자연 속을 노니는 즐거움을 노래했다. 이 노래는 &amp;lt;죽계별곡&amp;gt;과 함께 양반들의 한가한 생활 풍경과 현실도피적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는 근재의 문집 &amp;lt;관동와주(關東瓦注)&amp;gt;에 실린 한시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lt;BR&gt;
&lt;BR&gt;
당대는 외세의 압박과 외세를 등에 업은 권문세족과 사원세력의 횡포에다 계속되는 왜구의 침입 등이 그치지 않는 내우외환의 시대였다. 백성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유리걸식, 권문의 종이나 소작인으로 전락하여 피폐한 삶을 영위해야만 했다. 근재는 &amp;lt;관동와주&amp;gt;의 한시에서 존무사로 강원도를 돌면서 목격한 피폐한 백성들의 삶과 구제창생의 의지를 노래한 것이다. &lt;BR&gt;
&lt;BR&gt;
그러나 안축의 &amp;lt;관동별곡&amp;gt;에서는 피폐한 민중의 모습이나 고뇌하는 관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경기체가라는 장르의 제약이라고도 하고, 여말 신흥사대부 문학의 양면성으로도 설명된다. 현실의 부정적 요소들을 드러내어 비판하고 개혁해 나가는 한편, 자신들의 위치나 풍류가 고려후기 권문세족에 못지않음을 과시할 필요도 있었다는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24619041.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소수서원 경렴정 건너편의 취한대(翠寒臺). 퇴계가 세운 정자다. 정자 앞을 흐르는 시내가 죽계천이다. &lt;/p&gt;&lt;/div&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49234002.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죽계구곡에 세워진 &amp;lt;죽계별곡&amp;gt; 시비 &lt;/p&gt;&lt;/div&gt;
&lt;BR&gt;
근재가 &amp;lt;죽계별곡&amp;gt;을 지은 것은 작가가 세상을 떠나던 해인 충목왕 4년(1348)으로 추정한다. 고향인 죽계(순흥)의 경치를 읊었는데, 여말 신흥사대부의 의욕에 넘치는 생활감정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이 노래는 &amp;lt;한림별곡&amp;gt;과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amp;lt;한림별곡&amp;gt;이 여럿이 놀이를 벌이는 자리에 돌림노래로 지어진 것인데 반해 안축의 &amp;lt;죽계별곡&amp;gt;은 개인이 창작한 노래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lt;BR&gt;
&lt;BR&gt;
&amp;lt;죽계별곡&amp;gt;은 모두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죽계의 지역적 위치와 경관, 제2장은 누·대·정자 위에서의 유흥, 제3장은 향교에서 유생들이 봄에는 경서를 외고 여름에는 현을 뜯는 모습을 노래한다. 마지막 제4장과 제5장은 천리 밖에서 그리워하는 모습과 성대(盛代)를 중흥하여 태평을 길이 즐기는 모습을 각각 노래한다. 다음은 우리말로 풀어낸 노래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993366&quot;&gt;죽령의 남쪽과 영가의 북쪽 그리고 소백산의 앞에,&lt;BR&gt;
천 년을 두고 고려가 흥하고 신라가 망하는 동안 한결같이 풍류를 지닌 순정성(순흥의 옛 이름) 안에,&lt;BR&gt;
다른 데 없는 취화같이 우뚝 솟은 봉우리에는, 왕의 안태가 되므로,&lt;BR&gt;
아! 이 고을을 중흥하게끔 만들어준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lt;BR&gt;
청백지풍을 지닌 두연(杜衍)처럼 높은 집에 고려와 원나라의 관함을 지니매,&lt;BR&gt;
아! 산 높고 물 맑은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lt;BR&gt;
&lt;/font&gt;&amp;nbsp; &amp;nbsp;&amp;nbsp; &amp;lt;제1장&amp;gt;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993366&quot;&gt;숙수사의 누각과 복전사의 누대 그리고 승림사의 정자,&lt;BR&gt;
소백산 안 초암동의 초암사와 욱금계의 비로전 그리고 부석사의 취원루 들에서,&lt;BR&gt;
술에 반쯤은 취하고 반쯤은 깨었는데, 붉고 흰 꽃이 핀 산에는 비가 내리는 속에,&lt;BR&gt;
아! 절에서 노니는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lt;BR&gt;
습욱의 고양지에 노는 술꾼들처럼 춘신군의 구슬 신발을 신은 삼천 객처럼,&lt;BR&gt;
아! 손잡고 서로 의좋게 지내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lt;BR&gt;
&lt;/font&gt;&amp;nbsp; &amp;nbsp; &amp;lt;제2장&amp;gt;&lt;BR&gt;
&lt;BR&gt;
&amp;lt;죽계별곡&amp;gt;은 죽계지방의 풍경을 노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신흥사대부의 왕성한 의욕과 자기 과시를 드러내면서 유학자들의 태평성대의 향유 의지를 표현한 작품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신흥사대부의 부상은 결국 뒤에 조선조 개국으로 이어지게 된다.&lt;BR&gt;
&lt;BR&gt;
&lt;font face=&quot;dotum&quot; size=&quot;3&quot;&gt;&lt;strong&gt;&amp;lt;죽계별곡&amp;gt;, 노래는 남았으나 역사는 덧없어라&lt;BR&gt;
&lt;/strong&gt;&lt;/font&gt;&lt;BR&gt;
근재 안축의 문학은 고려시대 경기체가의 형성과정과 함께 신흥사대부의 진취적 기상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한문과 이두로만 전승된 까닭에 후대의 독자들과는 그리 행복하게 만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의 문학을 고작 &amp;lt;관동별곡&amp;gt;·&amp;lt;죽계별곡&amp;gt;이라는 제목으로만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경기체가라는 장르의 한계 탓이다. &lt;BR&gt;
&lt;BR&gt;
순흥에 더 이상 안축의 자취는 없는 듯하다. 우리는 인근 내죽리에 있는 소수서원을 찾는다. 동방유학의 비조 안향을 모신 이 서원의 원래 이름은 백운동 서원이다.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이 되는데 안축과 그의 아우 안보를 배향한 것은 1544년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91423182.jpg&quot; width=&quot;294&quot; height=&quot;80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amp;lt;죽계별곡&amp;gt;을 새긴 서원의 바위들&lt;/p&gt;&lt;/div&gt;서원 입구 소나무 숲 오른편에 보물 제 59호 숙수사지(宿水寺址) 당간지주가 있다. &amp;lt;죽계별곡&amp;gt; 제2장에 나오는 그 숙수사다. 이 절은 통일신라 전기에 창건되어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오다 소수서원의 건립으로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적어도 근재가 &amp;lt;죽계별곡&amp;gt;을 노래하던 시절까지는 숙수사는 산문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lt;BR&gt;
&lt;BR&gt;
당간지주 옆 서원을 끼고 흐르는 내는 소백산 국망봉에서 발원하여 초암사와 죽계구곡을 거쳐 온 죽계천(竹溪川)이다. 죽계천은 만만찮은 곡절과 한을 품고 있는 내다. 1457년(세조 3),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는 참화가 이 고을과 내를 휩쓸고 지나간 것이다. &lt;BR&gt;
&lt;BR&gt;
순흥에서 일어난 단종복위 운동의 실패로 순흥부는 불타 폐부가 되었고, 숱한 백성들이 무참히 타살되었다. 피가 이 시내를 적시고 흘러, 십 리 아래 '피끝마을(안정면 동촌동)'까지 이어졌다 하니 이 조그만 고을을 덮친 참화의 크기를 짐작할 만하다.&lt;BR&gt;
&lt;BR&gt;
서원 입구의 정자, 경렴정 맞은편의 '경(敬)자 바위'에는 '백운동(白雲洞)' 석 자 아래 '경자'가 새겨져 있다. 정축지변 후, 희생당한 부민들의 시신이 죽계천에 수장되면서 밤마다 억울한 넋들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주세붕 선생이 원혼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경(敬)자를 파고 그 위에 붉은 칠을 하고 위혼제를 지냈더니 울음소리가 그쳤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lt;BR&gt;
&lt;BR&gt;
소수서원 경내를 지나 선비촌으로 가는 길은 죽계천을 따라 나 있다. 그 길가에 군데군데 앉힌 커다란 바위에 안축의 &amp;lt;죽계별곡&amp;gt;이 새겨져 있다. 사람들은 바위를 흘낏 일별하고는 서둘러 길을 재촉한다. 여전히 그의 노래는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lt;BR&gt;
&lt;BR&gt;
그의 시를 새긴 돌비의 행진이 끝나는 길 저편, 느티나무 고목 주변에 단풍이 짙어져가고 있다. 거기 막힌 길 앞에서 우리는 다시 이 계절을 환기해 본다. 시나브로 겨울이 오고 있는 것이다. 700여 년 전, 근재가 읊은 &amp;lt;죽계별곡&amp;gt;은 태평성대의 사계를 노래하면서 맺는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993366&quot;&gt;붉은 살구꽃이 어지러이 날리고 향긋한 풀은 푸른데, 술동이 앞에서 긴 봄날 하루놀이와, &lt;BR&gt;
푸른 나무가 우거진 속에 단청 올린 다락은 깊고도 그윽한데, 거문고 타는 위로 불어오는 여름의 훈풍, &lt;BR&gt;
노란 국화와 빨간 단풍이 청산을 비단처럼 수놓을 제, 말간 가을 밤 하늘 위로 기러기 날아간 뒤라, &lt;BR&gt;
아! 눈 위로 휘영청 달빛이 어리비치는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lt;BR&gt;
중흥하는 성스러운 시대에, 길이 대평을 즐기느니,&lt;BR&gt;
아! 사철을 즐거이 놉시다그려. &lt;BR&gt;
&lt;/font&gt;&amp;lt;제5장&amp;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64024892.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소수서원과 선비촌 사잇길. 가을이 쓸쓸하게 저물어가고 있다. &lt;/p&gt;&lt;/div&gt;
&lt;BR&gt;
'붉은 살구꽃'의 봄, '여름의 훈풍', 가을의 '기러기', 겨울의 '눈'을 그리면서 시인은 중흥의 성대를 노래하고, 그 사계를 즐기자고 권유한다. 그러나 반세기를 지나지 않아 고려 왕조는 그 명운을 다했으니 도도한 역사의 흐름 앞에서 한갓진 노래의 울림은 참으로 덧없이 새겨질 뿐이다. &lt;BR&gt;
&lt;BR&gt;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컬처라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lt;BR&gt;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허용하고 &amp;nbsp;있습니다&lt;/p&gt;&lt;BR&gt;
&lt;p&gt;&lt;a href=&quot;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48621&amp;amp;PAGE_CD=N0000&amp;amp;BLCK_CD=N0000&amp;amp;CMPT_CD=M0011&quot;&gt;&lt;font color=&quot;#0000ff&quot;&gt;출처 : 숱한 백성이 무참히 죽어 원혼이 떠돌던 곳 - 오마이뉴스&lt;/font&gt;&lt;/a&gt;&lt;/font&gt;&lt;/p&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안동 이야기</category>
			<author>q9447 (낮달)</author>
			<pubDate>Tue, 03 Nov 2009 08:55:36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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