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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nnel>
		<title>이 풍진 세상에</title>
		<link>http://blog.ohmynews.com/q9447/</link>
		<description>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위에 서서</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Sat, 04 Jul 2009 01:17:49 GMT</pubDate>
		<item>
			<title>&lt;썸머타임 킬러&gt;의 '칼 말든' 지다</title>
			<link>http://blog.ohmynews.com/q9447/246862</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003366&quot;&gt;&lt;br /&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25825755.jpg&quot; width=&quot;300&quot; height=&quot;402&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칼 말든(Karl Malden, 1912~2009)과 그의 서명&lt;/p&gt;&lt;/div&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83297003.jpg&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492&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amp;lt;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A Streetcar Named Desire, 1951)&amp;gt;&lt;/p&gt;&lt;/div&gt;
&lt;/font&gt;&lt;/p&gt;&lt;BR&gt;
&lt;p&gt;&lt;font color=&quot;#003366&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402021341.jpg&quot; width=&quot;481&quot; height=&quot;379&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amp;lt;썸머타임 킬러(Un Verano Para Matar Summertime Killer), 1972&amp;gt;&lt;/p&gt;&lt;/div&gt;
&lt;/font&gt;&lt;/p&gt;&lt;BR&gt;
&lt;p&gt;&lt;font color=&quot;#003366&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332441435.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78&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amp;lt;워터프론트 (On the Waterfront, 1954)&amp;gt;&lt;/p&gt;&lt;/div&gt;
&lt;/font&gt;&lt;/p&gt;&lt;BR&gt;
&lt;p&gt;&lt;font color=&quot;#003366&quot;&gt;오늘 아침 &amp;lt;한겨레&amp;gt; ‘궂긴 소식’은 미국의 원로배우 칼 말든(Karl Malden, 1912~2009)의 부음을 알린다. 향년 97세. 신문은 그가 ‘1950년대와 60년대를 풍미’한 배우였다고 전하지만, 나는 칼 말든이 출연한 영화 몇 편으로만 그를 기억한다. 그가 출연한 작품 목록을 보면서 나는 아, 잠깐 탄성을 질렀다. &lt;br /&gt;
&lt;BR&gt;
1970년대 흑백 TV 시절에 ‘주말의 명화’나 ‘명화극장’ 등에서 만났던 영화 &amp;lt;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A Streetcar Named Desire, 1951)&amp;gt;나, &amp;lt;워터프론트 (On the Waterfront, 1954)&amp;gt;도 그의 출연작인데, 정작 마론 브란도의 포스가 너무 강렬했는지, 거기서 칼 말든을 보았는지 어땠는지는 기억에 없다.&lt;BR&gt;
&lt;BR&gt;
도시의 중학교로 진학해서 ‘문화교실’로 관람한 첫 영화가 &amp;lt;샤이안 (Cheyenne Autumn, 1964)&amp;gt;이다. 샤이안 인디언들과 백인들의 싸움이 소재인 영화였는데, 정작 주연 배우 제임스 스튜어트보다 리처드 위드마크가 기억에 남는데, 거기서도 칼 말든을 보았던 기억은 없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23432204.jpg&quot; width=&quot;250&quot; height=&quot;159&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amp;lt;썸머타임 킬러&amp;gt;에서&lt;/p&gt;&lt;/div&gt;칼 말든을 뚜렷하게 의식하고 본 영화로 &amp;lt;썸머타임 킬러(Un Verano Para Matar Summertime Killer), 1972&amp;gt;가 있는데 정작 이 작품은 &amp;lt;씨네21&amp;gt;의 칼 말든 필모그라피에도 나와 있지 않다. 
&lt;BR&gt;
&lt;BR&gt;
&amp;lt;썸머타임 킬러&amp;gt;는 로버티 미첨의 아들 크리스 미첨과 당시 &amp;lt;로미오와 줄리엣(1968)&amp;gt;으로 일약 세기의 연인으로 떠오른 올리비아 핫세가 주연한 영화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작품이었다.&lt;BR&gt;
&lt;BR&gt;
영화는 ‘원수의 딸을 사랑하면서 아버지의 복수를 할 수 없는 한 청년의 사랑 이야기’다. 진부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두 청춘 스타의 매력 덕분에 큰 인기를 모았다. 이 영화에서 칼 말든은 주인공 크리스 미첨을 죽이러 온 살인청부업자로 등장한다. &lt;BR&gt;
&lt;BR&gt;
프랑스 배우 장 가방을 떠올리는 특유의 뭉툭한 코, 꽉 다문 입술의 이 조연 배우는 묘한 존재감으로 영화의 격을 살려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냉혹한 살인 청부업자는 두 연인들의 사랑에 감복하여 그들을 탈출시키는데 이 장면은 사춘기 고교생을 감동시키기에 과부족이 없는 것이었다.&lt;BR&gt;
&lt;BR&gt;
그가 출연한 영화로 기억하는 작품은 &amp;lt;패튼 대전차군단 (Patton, 1970)&amp;gt;이다. 패튼 역의 조지 C. 스코트의 카리스마가 너무 강해서 그의 부하로 출연한 칼 말든의 온화함이 더욱 돋보였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조연을 통해서 주연 배우는 물론 영화 전체를 새롭게 빚어내는 뛰어난 배우인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390766948.jpg&quot; width=&quot;200&quot; height=&quot;266&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amp;lt;패튼&amp;gt;에서&lt;/p&gt;&lt;/div&gt;일부 영화에서의 악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그는 ‘도덕적 인물’을 연기했다고 한다. 전적으로 친근하고 신뢰감 가는 외모 덕분이다. 그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의 CF 주인공으로 21년 동안 활약한 것도 외모와 함께 그가 연기한 역할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lt;BR&gt;
&lt;BR&gt;
가난한 체코 이민자의 아들로 1912년 시카고에서 태어난 칼 말든은 철강 노동자로 일하다 연기공부를 시작했고 1937년에 처음으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섰다. 무대와 영화에 단역으로 전전하던 그는 젊은 연출가 엘리아 카잔 감독을 만남으로써 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lt;BR&gt;
&lt;BR&gt;
카잔의 두 작품 &amp;lt;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mp;gt;(1951)와 &amp;lt;워터프론트&amp;gt;(1954)에 출연하게 된 것이다. 말든은 &amp;lt;욕망이란 이름의 전차&amp;gt;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했고, &amp;lt;워터프론트&amp;gt;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lt;BR&gt;
&lt;BR&gt;
그는 1938년에 결혼한 아내와 무려 71년 동안 해로했는데, 이는 2003년에 세상을 떠난 밥 호프의 69년 결혼 기록을 깨는 기록이라고 한다. 자신도 백수(99세)에 가까운 97세의 삶을 누린데다 배우로서 만만치 않은 경력을 더했으니 그는 행복한 배우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의 명복을 빈다.&lt;/p&gt;&lt;BR&gt;
&lt;center&gt;&lt;div class='box_entry' style='clear:both;width:5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칼 말든(Karl Malden) FILMOGRAPHY  &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 &lt;BR&gt;
1. 애프터 투 킬 (With Intent To Kill, 1984)… 토마스 역&lt;BR&gt;
2. 비욘드 포세이돈 어드벤쳐 (Beyond the Poseidon Adventure, 1979)&lt;BR&gt;
3. 사나운 유랑자들 (Wild Rovers, 1971)… 월터 벅맨 역&lt;BR&gt;
4. 꼬리 9개 고양이 (Il Gatto a nove code, 1971)… 프랑코 아르노 역&lt;BR&gt;
5. 패튼 대전차군단 (Patton, 1970)… 오마르 브레들리 역&lt;BR&gt;
6. 신시네티 키드 (The Cincinnati Kid, 1965)&lt;BR&gt;
7. 샤이안 (Cheyenne Autumn, 1964)… 웨슬스 역&lt;BR&gt;
8. 올 폴 다운 (All Fall Down, 1962)… 랄프 윌라트 역&lt;BR&gt;
9. 서부 개척사 (How the West Was Won, 1962)&lt;BR&gt;
10. 버드맨 오브 알카트라즈 (Birdman of Alcatraz, 1962)… 하비 슈메이커 역&lt;BR&gt;
11. 애꾸눈 잭 (One-Eyed Jacks, 1961)… 대드 롱워스 보안관 역&lt;BR&gt;
12. 워터프론트 (On the Waterfront, 1954)… 배리 신부 역&lt;BR&gt;
13. 나는 고백한다 (I Confess, 1953)… 라루 역&lt;BR&gt;
14.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A Streetcar Named Desire, 1951)… 미치 역&lt;BR&gt;
15. 인도가 끝나는 곳 (Where the Sidewalk Ends, 1950)… 토마스 역&lt;BR&gt;
16. 건파이터 (The Gunfighter, 1950)… 맥 역&lt;BR&gt;
17. 죽음의 키스 (Kiss of Death, 1947)&lt;BR&gt;
18. 부메랑! (Boomerang!, 1947)… 화이트 역 /&lt;씨네 21&gt;에서&lt;/div&gt;&lt;/div&gt;&lt;/center&gt;&lt;BR&gt;
&lt;div align=&quot;center&quot;&gt;&amp;lt;2009. 7. 3.&amp;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407435272.jpg&quot; width=&quot;70&quot; height=&quot;41&quot; alt=&quot;&quot;/&gt;&lt;/div&gt;&lt;/div&gt;&lt;/font&gt;&lt;BR&gt;
&lt;BR&gt;
&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3575291&quot;&gt;&lt;/embed&gt;&lt;/div&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길위에서</category>
			<author>q9447 (낮달)</author>
			<pubDate>Fri, 03 Jul 2009 08:18:15 GMT</pubDate>
		</item>
		<item>
			<title>“통일, 안 되었으면 좋겠어요.”</title>
			<link>http://blog.ohmynews.com/q9447/246700</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003366&quot;&gt;&lt;br /&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63499547.jpg&quot; width=&quot;505&quot; height=&quot;313&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의견 ④&lt;/p&gt;&lt;/div&gt;
&lt;/font&gt;&lt;/p&gt;&lt;BR&gt;
&lt;p&gt;&lt;font color=&quot;#003366&quot;&gt;지난 달 일이다. 6·15 남북공동선언 9돌을 맞아 아이들에게 분회에서 준비한 통일사탕을 나누어주었다. 6·15선언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단일기가 그려진 종이를 나눠준 뒤, 나중에 시간 나는 대로 ‘통일’에 대한 생각을 자유롭게 적어 보라고 했다. 막대 달린 사탕을 빨아먹는 아이들은 즐거워 보였다. 통일은 먼 데다 어렵고, 사탕은 가깝고도 달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혼자 속으로 웃었다.&lt;br /&gt;
&lt;BR&gt;
한 동안 잊고 있다가 아이들에게 종이를 받아보았다. 한 줄이라도 감상을 적은 아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 대신 제법 논리적인 의견이 많았다. 충분히 짐작한 일이긴 했지만, 나는 얼결에 따귀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모두 14명이 의견을 적었는데 반대는 7명, 다소 유보적인 생각까지 합치면 11명이었고, 찬성은 고작 3명뿐이었던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395992780.jpg&quot; width=&quot;300&quot; height=&quot;167&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통일사탕&lt;/p&gt;&lt;/div&gt;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우리 세대처럼 분단을 민족사의 문제로 여기는 것과는 달리 요즘 아이들에게 분단은 때로 ‘뜬금없는 문제’로 이해되기도 하는 것 같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아이들은 분단을 
사회적 과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과 무관한 ‘골치 아픈 어떤 것’에 불과하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993366&quot;&gt;- 통일은 꼭 해야 되는 거예요?&lt;BR&gt;
- 그냥 이대로 살면 안 돼요?&lt;BR&gt;
- 통일로 엄청난 혼란이 일어나지 않나요?&lt;BR&gt;
- 북한 때문에 경제가 엄청 나빠지지 않을까요?&lt;BR&gt;
&lt;/font&gt;&lt;BR&gt;
중학생들의 의견은 대충 이런 수준이다. 나름대로 주워들은 바는 있어서 통일비용이나 통일로 인한 경제적 혼란 등을 우려하기도 한다. 통일 문제를 자신의 고민이나 문제로 끌어안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 정도라도 관심을 가지니 기특하다고 해야 할까.&lt;BR&gt;
&lt;BR&gt;
애당초 제대로 된 ‘통일교육’이 존재하지 않는 현재의 학교교육에서 아이들의 의견을 묻는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일지 모른다. 아이들은 ‘분단문제’나 ‘통일’ 문제에 대한 기성세대의 보수적 의견과 논리에 훨씬 익숙할 뿐만 아니라, 그런 논리를 자연스럽게 답습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lt;BR&gt;
&lt;BR&gt;
&lt;font face=&quot;dotum&quot; size=&quot;3&quot;&gt;&lt;strong&gt;“통일, 안 되었으면 좋겠어요.”&lt;BR&gt;
&lt;/strong&gt;&lt;/font&gt;&lt;BR&gt;
아이들이 낸 의견을 읽으면서 나는 그들이 입을 모아 “통일, 안 되었으면 좋겠어요.” 하고 외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선발시험을 거쳐 입학한 우리 아이들은 모두 이른바 ‘범생이’들이어서 주어진 문제에 대한 나름의 판단과 사고에 뒤지는 아이들이 아니다. 그래서인가, 아이들의 반대 주장에선 이상한 결기마저 느껴졌다. 다음은 아이들의 의견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의견에 번호를 붙이고 맞춤법과 띄어쓰기만 바로잡았다.&lt;BR&gt;
&lt;/font&gt;&lt;font color=&quot;#993366&quot;&gt;&lt;/p&gt;&lt;BR&gt;
&lt;div id=&quot;more246700_0&quot; style=&quot;display:block&quot;&gt;&lt;a href=&quot;#&quot; onclick=&quot;hideLayer('more246700_0');showLayer('less246700_0');return false&quot;&gt;more..의견보기&lt;/a&gt;&lt;/div&gt;&lt;div id=&quot;less246700_0&quot; style=&quot;display:none&quot;&gt;&lt;a href=&quot;#&quot; onclick=&quot;showLayer('more246700_0');hideLayer('less246700_0');return false&quot;&gt;less..돌아가기&lt;/a&gt;&lt;BR&gt;
① 지금 현 상태에서 통일을 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경제, 교육, 정치 모든 게 다르고 다만 말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데도 통일을 한다면 서로에게 다가가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남북분단이 예전부터 지속되어 온 거라 나부터도 왠지 모를 거부감이 듭니다.&lt;BR&gt;
&lt;BR&gt;
통일에 대한 준비와 인식이 철저하게 되었을 때까지는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빨리 돌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lt;BR&gt;
&lt;BR&gt;
② 원래부터 한 민족이었고 같은 역사 속에서 살아왔다 할지라도 현재 추구해 나가는 방향이 너무도 다른 이 시점에선 평화적인 통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10년 동안 남측에서 북측으로 퍼준 식량들이 대부분 전쟁 준비하는 군인들에게로 갔고, 개성공단을 가지고 돈을 더 내라 아니면 나가라 하는 이 극단의 상황에서 도저히 대화로써 통일의 방향으로 다가가기엔 너무나도 힘든 시점입니다.&lt;BR&gt;
&lt;BR&gt;
③ 지금 현재 상황으로선 우선 통일을 반대합니다. 역시나 너무 오래 떨어져 있어 아직 다른 부분이 많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갈래에서 사고방식들도 너무 판이합니다. 이 상태로 통일이 되면 얼마 동안은 잘 지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지금 국회의원들이 다투는 모습을 보면 그들 간에 권력싸움이 심해져 더 큰 혼란을 초래해 더 불행한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모두 감싸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이상, 섣불리 통일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lt;BR&gt;
&lt;BR&gt;
④ 지금 상황으로선 통일은 불가능합니다. 지금 북한은 대외적으로 고립되어 있으며, 북한 당국도 벗어나려 노력하지 않습니다. 하지 말라는 짓은 다하고 대화와 타협이란 것도 모르며, 무엇보다 국민들을 아낄 줄 모르는데 그런 사람이 독재정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통일이란, 터무니없는 그런 짓입니다. 멋모르고 죽어가는 무고한 사람들이 불쌍하고 이산가족들이 안쓰럽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북한 사람들이 이건 아니란 것을 깨닫고 김정일을 타도하길 바랄 뿐입니다. 같은 민족, 동족이란 말을 쓰면서 서슴없이 총을 쏘고 위협하는 사람들이 어찌 한 민족이며 한 가족일 수 있습니까?&lt;BR&gt;
&lt;BR&gt;
⑤ 북한이 너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아서 통일하기 싫다. 통일 자체는 이득도 있고 민족적 문제에서도 그렇고 좋은 거 같은데 북한 정부가 너무 핵으로 협박하는 거 같아서 반대.&lt;BR&gt;
&lt;BR&gt;
⑥ 지금처럼 북한이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다. 미사일로 협박하고 군사적 대응한다 하고……. 통일해서 북한이랑 잘 지낸다는 보장도 없잖아. 난 반대하는 입장이다.&lt;BR&gt;
&lt;BR&gt;
⑦ 통일에 대해 찬성 안 한다. 갈등이 많을 것 같다. &lt;BR&gt;
&lt;BR&gt;
⑧ 통일을 하려면 장시간 동안 차근차근 발판을 마련해 놓아야 하는데 지금 우리는 해놓은 게 없습니다. 지금 통일하면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할 것입니다. 좀 더 준비를 해서 통일이 될 수 있도록 발판이나 마련합시다. &lt;BR&gt;
&lt;BR&gt;
⑨ 통일은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 할 민족의 과업이지만 현 상태로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남북을 비롯해 동북아시아 전체에 걸쳐 고조되어 있는 대립 긴장 상태를 완화해 북한과의 대화를 재개해야 한다. &lt;BR&gt;
그러나 무조건 포용하는 정책보다는 적절한 대북제재를 통해, 북한 정부에게 국제사회의 법과 질서를 준수해야 한다는 것도 알려줘야 한다. 그래야 후에 통일 대한민국이 성공적으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 &lt;BR&gt;
&lt;BR&gt;
⑩ 북한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남한에 비해 북한은 항상 적대적이었다. 시간을 두고 통일해 나가야 할 것 같다.&lt;BR&gt;
&lt;BR&gt;
&lt;p class=&quot;바탕글&quot; more=&quot;more..의견보기&quot; less=&quot;less..돌아가기&quot;&gt;&lt;font color=&quot;#993366&quot;&gt;⑪ 통일을 하면 경제나 기술 등 많은 면에서 높은 수준에 도달해 경쟁력이 세질 것 같다.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북한이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그냥 이대로 갈라져 있는 것도 좋을지도 모른다. ㅋㅋ&lt;br /&gt;
&lt;BR&gt;
⑫ 통일은 해야 한다. 처음 몇 십 년 동안은 남북한에 큰 혼란을 주겠지만 점차 적응하고 나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북한의 개발되지 않은 자원과 외국 관광객(지금까지는 관광이 자유롭지 않았으니까)의 관광비로도 큰 수익이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원래 하나였던 것을 다시 합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lt;BR&gt;
&lt;BR&gt;
⑬ 언젠가는 통일이 되겠지……. &lt;BR&gt;
&lt;BR&gt;
⑭ 원래 하나의 뿌리였던 남과 북은 언젠가 통일되어야 한다. 단지 같은 민족이란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한반도가 하나로 합쳐지면 그에 따른 여러 가지 이익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lt;BR&gt;
&lt;BR&gt;
첫 번째로 직접적인 군사적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 동안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데 사용해 왔던 분단에 따른 사회적 비용은 확 줄일 수 있다. 예산을 복지정책, 교육정책 등으로 돌려 국가의 내실을 다질 수 있다.&lt;BR&gt;
&lt;BR&gt;
또한 우리의 발단된 기술력과 북쪽에 있는 자원이 만나면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 &lt;BR&gt;
세 번째 현재 김정일 독재정권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북한 인민들을 자유 민주주의의 기치 아래서 보호하고, 그들을 기근에서 구해 나갈 때 정부가 직접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다. &lt;BR&gt;
&lt;BR&gt;
마지막으로 냉전체제의 산물인 우리나라가 재통합을 하게 되면 완전한 냉전체제의 종식을 선언하여 세계평화의 상징이 될 수 있다.&lt;BR&gt;
&lt;BR&gt;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북한은 핵실험 또는 끊임없는 미사일 발사를 통해 동북아의 안보를 위협하고 국제사회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고수하여 지구촌의 공동적으로 급부상했다. &lt;BR&gt;
&lt;BR&gt;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우리나라는 무조건적으로 북한을 감싸고돌기만 했다. 전 세계 외교가에서는 지난 10년을 남한정부의 포용정책이 북한을 국제적인 제재로부터 보호하고 오히려 김정일 정권의 영향력과 도발 수위를 높이는데 기여(?)했다고 분석한다. &lt;BR&gt;
&lt;BR&gt;
통일도 좋지만 우리는 통일 후 대한민국이 국제사회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것 역시 원치 않는다. 통일 대한민국이 외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적절한 대북조치를 통해 북한에게 국제사회에서 용인되는 행동이 무엇이고 수용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가르쳐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나대는 북한을 무조건 달래 안고 가는 것은 기름을 안고 불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lt;/font&gt;&lt;/p&gt;&lt;/div&gt;&lt;/font&gt;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003366&quot;&gt;대체로 아이들이 서 있는 논리의 출발점은 ‘지금 통일한다면’이다. 마치 언제든 통일하자는 합의만 하면 금방 그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 통일은 민족사의 과제요, 목표이긴 하지만 그것의 실현을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자신들의 의견조차 ‘극복해야 할 조건’이라는 사실 말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75645587.jpg&quot; width=&quot;470&quot; height=&quot;202&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의견 ①&lt;/p&gt;&lt;/div&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302766583.jpg&quot; width=&quot;349&quot; height=&quot;17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의견 ②&lt;/p&gt;&lt;/div&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17176532.jpg&quot; width=&quot;401&quot; height=&quot;243&quot; alt=&quot;&quot; style=&quot;cursor: pointer&quot; onclick=&quot;open_img('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17176532.jpg')&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의견 ③&lt;/p&gt;&lt;/div&gt;
&lt;BR&gt;
&lt;BR&gt;
의견 ①,②,③,④는 아주 낯익은 논리다. 이른바 ‘시기상조론’이다. 그 근거는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현 정부 출범 이래의 남북 경색이나 북핵문제로 인한 국제적 상황에 대한 나름의 이해를 바탕으로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통일은 불가능한 것이므로 이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순진한 상상력’으로서는 매우 현실적인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993366&quot;&gt;- ① 현 상태에서 통일을 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lt;BR&gt;
- ② 이 시점에선 평화적인 통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lt;BR&gt;
- ③…지금 현재 상황으로선 우선 통일을 반대합니다.&lt;BR&gt;
- ④ 지금 상황으로선 통일은 불가능합니다&lt;BR&gt;
&lt;/font&gt;&lt;BR&gt;
그러나 현재의 부정적 상황을 전적으로 북한에 묻는 형식으론 문제에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 무릇 협상에는 상대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는 떨어진다. 전임 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한 현 정부의 부정적 인식이 결과적으로 남북경색을 가져온 요인 중의 하나였다는 것도 아이들은 고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lt;BR&gt;
&lt;BR&gt;
또 하나 아이들이 들고 있는 통일 불가의 논리가 ‘남북의 이질화’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993366&quot;&gt;- ① 경제, 교육, 정치 모든 게 다르고 다만 말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 남북분단이 예전부터 지속되어 온 거라 나부터도 왠지 모를 거부감이 듭니다.&lt;BR&gt;
- ② 원래부터 한 민족이었고 같은 역사 속에서 살아왔다 할지라도 현재 추구해 나가는 방향이 너무도 다른 이 시점에선…&lt;BR&gt;
- ③ …역시나 너무 오래 떨어져 있어 아직 다른 부분이 많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갈래에서 사고방식들도 너무 판이합니다.&lt;BR&gt;
- ④ …하지 말라는 짓은 다하고 대화와 타협이란 것도 모르며, 무엇보다 국민들을 아낄 줄 모르는데 그런 사람이 독재정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통일이란, 터무니없는 그런 짓입니다. &lt;BR&gt;
&lt;/font&gt;&lt;BR&gt;
&lt;BR&gt;
서로 다른 체제가 들어선 지 반세기가 넘었으니 이질화는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여전히 남북이 동일한 언어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이질화를 넘을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동질성’이며 나아가 남북이 공유할 수 있는 ‘민족의 정체성’이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lt;BR&gt;
&lt;BR&gt;
‘정치, 경제, 교육’등이 다르고,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고 ‘민주주의 공산주의의 사고방식’ 따위의 이질성은 남북이 각각 선택한 체제와 제도의 문제이다. 공산주의의 반의어로 ‘민주주의’를 상정하는 오류야 논외로 치더라도 아이들은 여전히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문제가 근본적으로 체제의 상이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lt;BR&gt;
&lt;BR&gt;
북한이 우리와 ‘다르다’는 전제는 모든 이성적 합리적 논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우리가 다르지 않고 같은 정서와 같은 지향을 갖고 있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남쪽이 형이라 친다면 이 말썽 많은 아우를 어떻든 구슬리고 달래는 일까지 마땅히 우리의 몫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lt;BR&gt;
&lt;BR&gt;
아이들은 현재의 대결구조가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와 체제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인다. ‘김정일 타도’나 ‘김정일 위원장이 빨리 돌아가셨으면 좋겠’다는 대목에서 실소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거기 있다. 김일성 사망이 통일 문제를 단박에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한때 유력했던 때가 있긴 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감정적 접근이 가능한 것은 통일에 대한 우리의 패러다임이 여전히 냉전적 사고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lt;BR&gt;
&lt;BR&gt;
의견 ④는 가장 강경한 입장이다. ‘통일이란, 터무니없는 그런 짓’이라고 단정 짓고, ‘…어찌 한 민족이며 한 가족일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모습은 소녀다운 순진함에서 비롯된 비분강개로 여겨지지만 마음 한쪽을 저리게 만든다.&lt;BR&gt;
&lt;BR&gt;
의견 ⑤, ⑥, ⑦은 비교적 짧은 촌평이다. 이들도 위의 의견과 마찬가지로 북한에 대한 ‘비호감’ 위에 서 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993366&quot;&gt;- ⑤ 북한이 너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아서 통일하기 싫다. &lt;BR&gt;
- ⑥ 통일해서 북한이랑 잘 지낸다는 보장도 없잖아. 난 반대하는 입장이다.&lt;BR&gt;
- ⑦ 통일에 대해 찬성 안 한다. 갈등이 많을 것 같다. &lt;BR&gt;
&lt;/font&gt;&lt;BR&gt;
‘통일하기 싫다’는 것은 다분히 감정적이다. 뒤에 언급한 ‘이득과 민족적 문제’와 서로 부딪치는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는 아이의 느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통일해서 ‘잘 지낸다는 보장도 없’고 ‘갈등이 많을 것 같’아서 싫다는 의견은 차라리 솔직해 보인다. &lt;BR&gt;
&lt;BR&gt;
의견 ⑧, ⑨, ⑩, 을 나는 유보적 의견으로 분류했다. 기본적으로 ‘현재 통일은 불가하다’는 전제 위에서 있다는 점에서 앞서의 반대 의견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 의견들은 ‘통일을 위한 준비’가 필요하고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99476315.jpg&quot; width=&quot;328&quot; height=&quot;289&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의견 ⑨&lt;/p&gt;&lt;/div&gt;
&lt;font color=&quot;#993366&quot;&gt;&lt;BR&gt;
- ⑧ …지금 통일하면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할 것입니다. 좀 더 준비를 해서 통일이 될 수 있도록 발판이나 마련합시다. &lt;BR&gt;
- ⑨ …현재 남북을 비롯해 동북아시아 전체에 걸쳐 고조되어 있는 대립 긴장 상태를 완화해 북한과의 대화를 재개해야 한다. &lt;BR&gt;
- ⑩ …시간을 두고 통일해 나가야 할 것 같다.&lt;BR&gt;
- ⑪ 통일을 하면 경제나 기술 등 많은 면에서 높은 수준에 도달해 경쟁력이 세질 것 같다.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lt;BR&gt;
&lt;/font&gt;&lt;BR&gt;
무엇보다도 통일을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 할 민족의 과업’으로 바라보고 있는 관점은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이다. 뒷부분에 ‘적절한 대북제재를 통해, 북한 정부에게 국제사회의 법과 질서를 준수해야 한다는 것도 알려줘야 한다.’는 의견은 아주 낯과 귀에 익은 논리이긴 하지만.&lt;BR&gt;
&lt;BR&gt;
어쨌든 통일을 긍정하거나 민족적 과제로 인식하고 있는 부분은 희망적이다. 의견 에 드러난 ‘경쟁력’이나 ‘국력’ 부분은 통일을 찬성하고 있는 의견 와 마찬가지로 통일이 주는 긍정적 측면을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데 머물고 있다는 점은 매우 아쉽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993366&quot;&gt;- ⑫…무엇보다 원래 하나였던 것을 다시 합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lt;BR&gt;
- ⑬ 언젠가는 통일이 되겠지……. &lt;BR&gt;
&lt;/font&gt;&lt;BR&gt;
원래 하나였다는 것은 생뚱맞은 지적 같지만, 대부분의 냉전적 사고는 이런 기본적 전제를 폄하해 버린다. 근대국가로 서지 못한 상태에서 한반도 분단이 이루어진 것이 그런 사고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한편으로 의견 ⑬ 에서는 통일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잃지 않는 아이들의 건강성을 확인할 수 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68371693.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542&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의견 ⑭ &lt;/p&gt;&lt;/div&gt;
&lt;BR&gt;
의견 ⑭ 는 ‘통일’에 대한 가장 종합적인 안목을 매우 정연한 논리로 설파하고 있다. 나는 이 의견을 찬성 쪽으로 분류했지만 기실 반대로 놓거나 유보로 정리해도 무방한 내용이다. 글을 쓴 아이가 어떤 자료의 도움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lt;BR&gt;
&lt;BR&gt;
통일이 가져다주는 이익을 아이는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는 군사적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고, 분단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남의 기술과 북의 자원이 만나서 경제적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lt;BR&gt;
&lt;BR&gt;
세 번째로 북한 인민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기근에서 구해나갈 수 있으며, 네 번째로 아이는 한반도의 통일이 냉전체제의 종식과 세계평화의 상징이 되리라고 내다본다. 아이가 세 번째로 든 내용은 자신이 말하는 ‘통일’의 성격을 자유민주주의적 통일, 이른바 흡수통일이란 사실을 전제한다. &lt;BR&gt;
&lt;BR&gt;
이어지는 의견은 현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면서 지난 10여 년 동안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햇볕정책이 오히려 문제를 키웠고 현재의 위기를 초래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아이는 통일 이후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의 왕따가 되는 걸 우려하면서 아주 단호한 어조로 대북제재를 말한다. &lt;BR&gt;
&lt;BR&gt;
아무 대책 없이 ‘북한을 무조건 달래안고 가는 것은 기름을 안고 불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는 마지막 문장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보수언론의 냉전적 시각이 겹쳐진다. 아이는 이런 의견들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논리들을 스스로 구하지는 않았으리라. 그게 지금까지 우리 교육의 결과일 수도 있고, 기성세대와 우리 사회의 보수주의가 만들어낸 논리일 수도 있다.&lt;BR&gt;
&lt;BR&gt;
아이들의 의견은 안타깝지만 그게 우리 2009년 현재 우리 아이들의 통일의식이라면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우리 아이들의 이러한 통일관이 같은 세대의 그것과 어떻게 이어지는지에 대해서는 나는 말할 수 없다. 지역의 보수성과 아이들의 문화가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다만, 일방적으로 아이들의 그것을 무시하거나 폄훼할 수만은 없음은 분명하다. 보다 성숙한 통일관을 갖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자기들과 다른 진보적인 시각과 논리에도 열려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 분명해 보인다. &lt;BR&gt;
&lt;BR&gt;
아이들의 의견을 읽으면서 나는 꽤 고민스러웠다. 어떻게 이런 내 느낌과 생각을 여과 없이 아이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그게 잠깐 내 의견을 전달하는 것이라면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아이들이 통일과 분단의 문제를 자기 문제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나는 비록 미처 성숙하지 못했지만 아이들의 유연한 사고방식이 이런 질곡들을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lt;BR&gt;
&lt;BR&gt;
늘 열려 있기를, 그리고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너희들이 통일한국의 중추 세대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하면서 그날의 짧은 수업을 맺었다. 아이들은 금방 통일 따위는 잊어버리고 교과서에다 다시 얼굴을 묻었다. &lt;BR&gt;
&lt;/font&gt;&lt;BR&gt;
&lt;font color=&quot;#003366&quot;&gt;&lt;BR&gt;
&lt;div align=&quot;center&quot;&gt;&lt;font color=&quot;#003366&quot;&gt;&amp;lt;2009. 7. 1.&amp;gt;&lt;BR&gt;
&lt;/font&gt;&lt;/div&gt;&lt;/font&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42923489.jpg&quot; width=&quot;70&quot; height=&quot;41&quot; alt=&quot;&quot;/&gt;&lt;/div&gt;&lt;BR&gt;
&lt;BR&gt;
&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3554201&quot;&gt;&lt;/embed&gt;&lt;/div&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길위에서</category>
			<author>q9447 (낮달)</author>
			<pubDate>Wed, 01 Jul 2009 10:01:37 GMT</pubDate>
		</item>
		<item>
			<title>옛 스승 도광의 시인과 제자들</title>
			<link>http://blog.ohmynews.com/q9447/246500</link>
			<description>&lt;p&gt;&lt;br /&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93969207.jpg&quot; width=&quot;480&quot; height=&quot;356&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도광의 시인의 시집. &amp;lt;갑골길&amp;gt;(1983)과 &amp;lt;그리운 남풍&amp;gt;(2003)&lt;/p&gt;&lt;/div&gt;&lt;/p&gt;
&lt;p&gt;&lt;font color=&quot;#003366&quot;&gt;&lt;br /&gt;
시인 도광의(1941~ ) 선생님을 만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다. 그는 우리들 신입생에게 국어를 가르친, 학교 문예 동아리 ‘태동기(胎動期)’의 지도교사였다. 무엇보다 당시 내가 가지고 있었던 병아리 눈물만한 문재(文才)를 확인해 준 분으로 그를 기억한다. &lt;BR&gt;
&lt;BR&gt;
그해 가을, 선생께서 야심차게 추진한 교내 현상문예공모에서 별 기대 없이 내가 써 낸 소설이 당선작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호마이카 처리가 된 세련된 상패에다 고급 손목시계까지 부상으로 탔는데, 선생님께선 내 작품에 대해 은근히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던 듯하다.&lt;BR&gt;
&lt;BR&gt;
성년으로 가는 어느 시기를 문학 소년으로 보낸 이들은 적지 않다. 사춘기의 문학에 대한 열망은 마치 운명처럼 다가와 열몇 살의 영혼을 뒤흔들어 놓는지 모른다. 내게 그것이 찾아온 것은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나는 늘 허겁지겁 책을 읽어댔고, 습작노트에다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요령부득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lt;/p&gt;&lt;BR&gt;
&lt;div class='box_entry' style='float:right;margin-left:10px;width:300px;'&gt;&lt;div class='box_entrytitle'&gt;&lt;strong&gt;도광의 시인&lt;/strong&gt;&lt;/div&gt;&lt;div class='box_entrycontent'&gt;&lt;div style='float:right;margin-left:10px;width:142px' class='box_entryimg'&gt;&lt;img src='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90760165.jpg' class='box_img' width='142px' /&gt;&lt;/div&gt;- 1941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나 경북대 국문과를 졸업 &lt;BR&gt;
- 196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비 젖은 홀스타인' '해변에의 향수'가 당선 &lt;BR&gt;
- 1978년 ≪현대문학≫에 '甲骨길' 등 6편이 추천되어 등단 &lt;BR&gt;
- 1982년 대구문학상 수상 &lt;BR&gt;
- 2003년 한국예총예술문화상 수상 &lt;BR&gt;
- 현재 한국문인협회 이사 &lt;BR&gt;
- 시집 &lt;甲骨길&gt;(흐름사, 1983) &lt;BR&gt;
- 시집 &lt;그리운 남풍&gt;(문학동네, 2003) &lt;BR&gt;
 /&lt;/div&gt;&lt;/div&gt;&lt;BR&gt;
&lt;p&gt;중학교 3학년 가을이었다. 대한적십자사가 주최하는 시내 중고생 백일장에 나는 학교 대표로 참가했다. 주어진 글제는 ‘수학여행’이었다. 마침 전년도의 수학여행에 불참했던 나는 수학여행에 참가하지 못한 아이의 이야기를 썼고, 뜻밖에 그게 1등상에 뽑혔다. 대구 적십자사 사장실에서 커다란 트로피까지 타고 돌아와 한 동안 나는 거기 잔뜩 고무돼 있었던 것 같다.&lt;br /&gt;
&lt;BR&gt;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나는 먼저 문예 동아리 ‘태동기’에 가입했다. 세상에, 고작 고등학교 동아리 주제에 ‘태동기’는 ‘문학동인회’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는데, 그게 썩 마음에 들었다.(그 당시 대구 시내의 모든 문예동아리는 동인이라는 이름을 썼다.) &lt;BR&gt;
&lt;BR&gt;
우리는 해마다 대구 YMCA의 좁고 어두운 복도에서 시화전을 열었다. 당시 우리 동아리 '태동기'는 신라문화제 등 각종 백일장에 참가하여 여러 명의 입상자를 내기도 해서 대구의 학생문단에서 꽤나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lt;BR&gt;
&lt;BR&gt;
학교에는 ‘문예실’이라는 이름의 교실 한 칸짜리 동아리 방이 있어서 우리는 점심시간과 방과 후의 많은 시간을 거기서 보내곤 했다. 그러나 거기 모여서 우리가 글을 쓰거나 작품 윤독회를 했던 기억은 없다. 우리는 늘 일상적 잡담과 시건방진 요설, 문학적 일탈을 모의하는 것으로 숱한 시간을 때웠던 것이다.&lt;BR&gt;
&lt;BR&gt;
도광의 선생님은 180센티미터를 넘는 훤칠한 키의, 굉장한 귀공자형 미남이었다. 17살배기 까까머리 눈에 그는 시인이란 모름지기 이런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라는 어떤 ‘전형성’으로 비쳤다. 수업 시간에 그는 가끔 자신의 시를 줄줄 외면서 강의하기도 했는데 그 서정성 넘치는 시구를 들으며 나는 설익은 문학적 열정을 키워 나갔던 것 같다.&lt;BR&gt;
&lt;BR&gt;
불행하게도 나는 시는 습작조차 해 본 적이 없어서 학교에서의 공식적인 만남 외에 개인적으로는 선생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게다가 3학년 때 고향으로 학교를 옮기게 되면서 자연스레 소식이 끊겨 버렸다. 군에서 제대한 후 시내에서 한번 잠깐 뵙고 인사를 드린 게 고작이다. 그러고 30년이 훌쩍 지났다. &lt;BR&gt;
&lt;BR&gt;
나는 먹고 사느라고, 교육운동을 한답시고 싸댄 세월이 제법이었다. 그간 벗들을 통해 소식을 간간히 듣기만 했지 인사 한번 여쭙지 못했다. 10여 년 전에, 후배들이 선생을 모시는 만남이 있었는데 나는 거기도 가지 못했다. 올해로 예순여덟. 오래 뵙지 못했지만 7순을 바라보는 풍채 좋은 노시인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lt;/p&gt;&lt;BR&gt;
&lt;p&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86810015.jpg&quot; width=&quot;544&quot; height=&quot;137&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시인·작가로 성장한 제자들. 왼쪽부터 홍승우, 서정윤, 박덕규, 안도현, 이정하&lt;/p&gt;&lt;/div&gt;&lt;/p&gt;
&lt;p&gt;&lt;br /&gt;
수십 년간 남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으니 제자는 좀 많을까. 선생께 시를 배운 제자들 가운데 안도현을 비롯한 여러 명이 시인이 되었다. 쉰이 넘어서 시집(식빵 위에 내리는 눈보라, 나남, 2007)을 상재한, 나와 동기인 홍승우(5대), 시집 &amp;lt;홀로서기&amp;gt;로 유명한 서정윤(7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안도현(10대), 그리고 베스트 셀러 &amp;lt;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amp;gt;를 낸 이정하(11대) 등이 그들이다.&lt;BR&gt;
&lt;BR&gt;
후배 중 서정윤은 나와 학교를 같이 다녔지만, 안도현은 내가 제대했을 때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면서 처음 만난 사이다. 어쩌다 그와는 해직과 복직 동기가 되어서 가끔씩 안부를 나누곤 하지만, 학창시절을 함께 보내지 않았으니 다소 서먹하기도 한 사이다. 그러나 나는 이정하는 만난 적도 그의 글을 읽은 적도 없다. &lt;BR&gt;
&lt;BR&gt;
선생께서 ‘나만큼 제자들 중 시집 많이 판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라’는 농을 하시곤 할 정도로 모두들 재주가 출중한 친구들이다. 소설 쪽으로도 박덕규(8대)라는 친구가 있어 장편소설을 펴냈고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도 나는 꼭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04342591.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406&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도광의 시비. 팔공산 자락인 대구시 동구 도동 향산마을 소재 시비동산.&lt;/p&gt;&lt;/div&gt;
&lt;BR&gt;
&lt;BR&gt;
제자들과는 달리 1966년에 일찌감치 등단하였지만, 선생께서 첫 시집을 낸 게 1983년이다. 그것도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알았다. 2003년에 ‘문학동네’에서 두번 째 시집 &amp;lt;그리운 남풍&amp;gt;을 내셨는데 나는 지난 5월에야 이 시집의 존재를 알고 뒤늦게 이를 구입했다. 사는 게 바쁘다고는 하지만 제자로서 무심했던 걸 뉘우치지 않을 수 없다.&lt;BR&gt;
&lt;BR&gt;
&amp;lt;그리운 남풍&amp;gt;에는 30년도 전에 선생께서 수업 중에 줄줄 낭송해 주시던 시는 보이지 않는다. 그 시들은 첫 시집에 실렸을 터이다. 선생의 시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건 외람된 일이다. 선생의 시에 대한 소개로는 시집 뒤표지에 실린 김명인(시인, 고려대 교수)의 글로 대신한다. &lt;/p&gt;&lt;BR&gt;
&lt;blockquote&gt;&lt;font color=&quot;#993366&quot;&gt;서정성이 한국시의 기본이라 해도 도광의 시인의 서정은 독특하면서도 편안하다. 서정을 관통하는 그의 정신이 인간에 대한 애정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도광의 시인의 시는 늦은 가을 감나무에 높게 매달려 시리고 푸른 하늘에 대비되어 붉게 반짝이는 홍시처럼 외롭게 보이지만 아름답다. 스스로 외롭기에 오히려 그의 시가 사람의 훈기를 가지게 된 것이다.&lt;BR&gt;
&lt;/font&gt;&lt;/blockquote&gt;&lt;BR&gt;
선생님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갑골길”을 다시 읽는다. 인터넷에서 검색했더니 선생의 첫 시집은 헌책으로 올라 있다. 서슴없이 그걸 장바구니에 넣고 몇 번 마우스를 누르는 걸로 구매를 끝낸다. 시절이 좋다고 해야겠지만 선생님께선 이런 문화에 손을 홰홰 저으실 듯하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374603603.jpg&quot; width=&quot;450&quot; height=&quot;1054&quot; alt=&quot;&quot;/&gt;&lt;/div&gt;&lt;BR&gt;
&lt;BR&gt;
함안여고 교정에서 갑골길을 바라보는 ‘사십대 노총각 한 선생’은 아마 당신의 모습이리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선생의 우렁우렁 듣기 좋은 굵은 목소리가 귓전에 지금도 선연하다. 일흔을 바라보는 연세, 늘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언제쯤 벗들과 함께 선생님을 모시고 약주 한 잔 드릴 수 있을는지.&lt;BR&gt;
&lt;div align=&quot;center&quot;&gt;&lt;BR&gt;
&amp;lt;2009. 6. 28.&amp;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317935857.jpg&quot; width=&quot;70&quot; height=&quot;41&quot; alt=&quot;&quot;/&gt;&lt;/div&gt;&lt;/div&gt;&lt;/font&gt;&lt;BR&gt;
&lt;BR&gt;
&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3526405&quot;&gt;&lt;/embed&gt;&lt;/div&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행복한 책읽기</category>
			<author>q9447 (낮달)</author>
			<pubDate>Sun, 28 Jun 2009 02:38:34 GMT</pubDate>
		</item>
		<item>
			<title>전역병의 통과의례-새로 입대하라고?</title>
			<link>http://blog.ohmynews.com/q9447/246329</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003366&quot;&gt;&lt;font face=&quot;dotum&quot;&gt;&lt;strong&gt;&lt;BR&gt;
&lt;div style=&quot;padding-right: 10px; padding-left: 10px; padding-bottom: 10px; padding-top: 10px; background-color: #e4e4e4&quot;&gt;&lt;font face=&quot;dotum&quot; size=&quot;3&quot;&gt;의무복무, 70년대 병영의 추억&lt;/font&gt;&lt;/div&gt;&lt;BR&gt;
&lt;p&gt;&lt;/strong&gt;&lt;/font&gt;&lt;/p&gt;
&lt;p&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49069695.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31&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집단강하. 공수기본교육의 마지막 주에는 모두 4회에 걸쳐 강하훈련이 이어졌다.&lt;/p&gt;&lt;/div&gt;
&lt;BR&gt;
&lt;strong&gt;&lt;font size=&quot;3&quot;&gt;&lt;BR&gt;
&lt;font face=&quot;dotum&quot;&gt;① ‘악몽’의 통과의례-새로 입대하라고?&lt;BR&gt;
&lt;/font&gt;&lt;/font&gt;&lt;/strong&gt;&lt;BR&gt;
군대를 다녀온 평균치의 한국 남자라면 으레 치러야 하는 통과의례가 있다. 그것은 현역을 마치고 예비역이 되는 날부터 시작되어 오랫동안 그의 안면을 어지럽히는 ‘재소집’의 악몽이다. 그쪽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떠나온 병영이다. 그런데 재소집이라니!&lt;BR&gt;
&lt;BR&gt;
악몽의 전개 양상은 대체로 대동소이하다. 재소집은 영장이 아니라 현역 군인에 의해 통보되며, 말미 없이 바로 끌려가야 하는 상황으로 전개된다. 거기 맞서 당사자는 울며불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자신이 현역을, 그것도 만기로 마친 사람이란 걸 눈물로 호소한다. 물론 이 호소는 간단히 묵살되며 주변에 자신의 전역을 증명해줄 어떤 증거도 없는 절망적 상황에서 꿈은 종료된다.&lt;BR&gt;
&lt;BR&gt;
그 악몽의 뒤끝은 그러나 행복하다. 악몽의 끔찍함을 상쇄해 주는 것은 그게 ‘꿈’이라는 벅찬 확인이다. 그것은 동시에 자신이 치러낸 병역이 얼마나 끔찍했던 시간이었던가를 환기해 준다. 이러한 악몽은 짧으면 수년에서 길면 십수 년 간 지속된다. 그 기간의 차는 현역 복무의 강도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lt;BR&gt;
&lt;BR&gt;
사람에 따라 개인차가 있고, 또 그에 관한 공식적 기록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대체로 사람들이 그 악몽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십 년쯤은 족히 걸리는 듯하다. 그것은 현역 복무의 강도와도 일정한 비례 관계에 있을 터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다 되지는 않는다. 군 복무에 대한 판단과 평가란 어쩔 수 없이 주관적인 것이니 말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34516453.jpg&quot; width=&quot;210&quot; height=&quot;147&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귀성부대 휘장&lt;/p&gt;&lt;/div&gt;내가 그 재수집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40대 중반쯤이었던 것 같다. 스물다섯에 전역했으니 거의 스무 해 가까이 나는 그 오래된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대체로 그 꿈은 심리적으로 불안하거나 외부적 자극에 대한 갈등이 고조될 때 찾아온 것 같다. 땀을 흥건히 흘리며 그런 꿈에서 깨어날 때면 나는 내가 심리적으로 쇠약해져 있다는 걸 깨우치곤 했다.&lt;/p&gt;
&lt;BR&gt;
&lt;p&gt;내가 겪은 ‘재소집 악몽’은 두 개의 버전이 있다. 하나는 모든 예비역들이 겪는 버전이니 새삼스러울 게 없다. 문제는 나머지 하나가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공수교육’ 재입교 버전이라는 데 있다. 불운하게도 나는 신병 기본훈련을 받은 뒤, 공수특전대에 차출되었던 것이다.&lt;br /&gt;
&lt;BR&gt;
나는 1977년 5월 13일 입대하여 1980년 2월 7일에 만기 전역했다. 정확히 일주일이 빠지는 33개월 동안 나는 현역으로 복무한 것이다. 나는 논산훈련소에서에서 보낸 6주 간의 신병훈련, 특수전사령부에서의 공수기본교육과 특수전 교육을 뺀 나머지 시간은 인천시 부평구 소재 ‘귀성부대’에서 근무했다. &lt;BR&gt;
&lt;BR&gt;
특전사 산하의 공수여단에서 근무한 것은 순전히 줄을 잘못 서서였다. 논산에서 배출될 때, 우리는 ‘재경(在京)부대’로 전속된다 해 은근히 기대했지만 막상 도착한 곳은 특전사령부였다. 지금도 불거져 있는 정수리의 혹이 만들어진 데가 거기 보충대였다. 불과 사나흘 머무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대가리 박아’ 기합을 받았던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17520495.jpg&quot; width=&quot;250&quot; height=&quot;40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막타워(Mock Tower), 또는 34피트타워&lt;/p&gt;&lt;/div&gt;잠시 자대로 갔다가 다시 사령부 특전교육대에서 나는 공수기본교육(4주)과 특수전 교육(6주)을 받았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던 그 해 7월, 한 달 내내 우리는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교장을 뒹굴어야 했다. 가장 훈련강도가 센 교육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듯 공수기본교육은 병사들의 인내의 한계를 넘나드는 것이었다. 
&lt;BR&gt;
&lt;BR&gt;
아침에 팬티 한 장에 전투복을 입고 교장에 나와 오전 1교시를 마치면 병사들의 상의는 흐른 땀이 말라붙은 소금이 허옇게 묻어났다. 교장에서는 걷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고 삼보 이상은 뛰어야 했다. 걸핏하면 피티(PT) 체조로 골병을 들였는데 우리는 ‘팔 벌려 높이뛰기’ 1천개쯤은 기본으로 소화했다. &lt;BR&gt;
&lt;BR&gt;
10분간 휴식은 용변을 보고 수돗가에 몰려 물을 먹는 것으로도 모자랐다. 교장에서 해산하면 구보로 휴식장으로 갔다가 다시 수돗가로 모였는데 우리는 알철모를 들고 길게 줄을 서야 했다. 수돗가에 몽둥이를 들고 버티고 선 조교들 앞에서 차숟가락 가득 소금을 떠 입안에 털어 넣어야 철모에 수돗물 받는 게 허가되었다. &lt;BR&gt;
&lt;BR&gt;
타는 듯한 갈증을 다스리려 물을 마시러 온 병사들에게 소금을 먼저 먹이는 경우가 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면 적지 않은 수의 병사들이 훈련 중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lt;BR&gt;
&lt;BR&gt;
접지 훈련(낙하산을 타고 착지하는 훈련), 막타워(Mock Tower) 훈련 등을 거쳐 제 4주는 강하훈련이었다. 주간 3차례, 야간 1차례의 강하를 마치고 우리는 사령부 브라스 밴드가 연주하는 ‘최후전선 백팔십 리’를 들으며 가슴에다 낙하산 기본휘장(윙 Wing)을 달았고, 비로소 공수병이 되었다. &lt;BR&gt;
&lt;BR&gt;
모두 네 차례의 강하와 함께, 아무런 사고 없이 교육을 마치게 되었다는 안도감은 황홀했다. 그건 마치 착시처럼 지난 4주 동안의 고통스런 과정을 무화해 버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폭풍구보도, 지옥문이라 불린 모형문, 송풍 훈련도 마치 아득한 시절의 삽화처럼 떠오르게 만들었다. 모든 고통과 불행의 기억은 짧고 안도와 해방의 기쁨은 긴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82863938.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47&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산악강하. 수송기에서 뛰어내리면 바로 낙하산이 펴진다. &lt;/p&gt;&lt;/div&gt;
&lt;BR&gt;
&lt;BR&gt;
그러나 그 착시는 공수교육 재입교라는 악몽으로 재현될 때 완벽하게 해체되었다. 나는 울면서, 내가 공수 168기 수료자라는 걸 절규하곤 했는데, 하필 그럴 때마다 그걸 증언해 줄 사람은 왜 아무도 없었는지……. 그런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마다 나는 내가 재소집 따위와 무관한 ‘민간인’ 신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lt;BR&gt;
&lt;BR&gt;
통과제의가 되어 버린 재소집의 악몽은 군 복무 기간이 신체와 정신이 두루 건강한 한국 청년들에게 일종의 상흔이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거기 무슨 ‘신성한 국방의 의무’나 ‘내 나라 내 민족, 내 가족을 지킨다’는 거룩한 자부심 따위는 없다. &lt;BR&gt;
&lt;BR&gt;
모두가 그렇지 않았겠지만,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게 병역 의무다. 내로라하는 상류계급의 아들들이 ‘신의 아들’로 병역을 면제 받는 대신 숱한 ‘인간의 아들’들이 그들의 의무를 대체하고, 더러는 사고로 더러는 실수로 목숨을 잃는 덕분에 대한민국은 건재한 것이다. &lt;BR&gt;
&lt;BR&gt;
젊은이들이 군 복무 경험이 상처가 되는 것은 그곳이 폐쇄된 공간으로서 인간의 자유로운 영혼을 부정하는 억압적인 집단인 까닭이다. 거기는 오직 ‘수직적 명령’과 ‘복종’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 ‘까라면 까야 하는’ 맹목의 질서만이 강요되는 곳이다. &lt;BR&gt;
&lt;BR&gt;
요즘 군대는 달라졌다고 하지만 그 근본적 성격이 바뀌었다고 할 수는 없으리라. 여전히 병영에서의 자살과 타살 소식이 흔치 않게 들려오는 까닭도 거기 있는 것이다. 분단 조국에 태어난 이 땅의 젊은이들은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의무’의 형식으로 일정한 기간 동안 스스로의 독립된 삶을 유예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삶의 한 시기에 쉬 지워지지 않는 상채기를 남기는 것이다.&lt;BR&gt;
&lt;BR&gt;
&lt;BR&gt;
&lt;strong&gt;&lt;font face=&quot;dotum&quot; size=&quot;3&quot;&gt;③ 오월의 원죄, 공수부대&lt;BR&gt;
&lt;/font&gt;&lt;/strong&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394244751.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58&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1980년 5월, 광주. 거기 투입된 군대가 우리 부대가 아니었다는 게 위안이 되는가.&lt;/p&gt;&lt;/div&gt;&lt;/p&gt;
&lt;BR&gt;
&lt;p&gt;앞서 밝힌 대로 나는 내 의사와 무관하게 우연히 ‘공수부대’로 차출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공수교육과 특수전 교육을 받고 이른바 ‘공수병’이 되었다. 정기적으로 강하훈련, 해상침투훈련, 천리행군 등에도 참여했다. &lt;br /&gt;
&lt;BR&gt;
그러나 나는 다행히 한 번도 시위진압이나 민간인을 통제하기 위한 작전에 투입된 적이 없다. 나는 1980년 2월에 전역했고, 이 땅의 비극적 현대사, 광주민중항쟁은 그로부터 석 달 뒤에 일어났던 것이다. 팔자에 없는 공수특전대로 배속된 게 내 불운이었다면 광주항쟁 이전에 만기 전역할 수 있었던 것은 씁쓸하지만 내가 누린 행운이었다고 말해도 좋다. &lt;BR&gt;
&lt;BR&gt;
1978년 천리행군 도중에 우리 대대는 긴급 전문을 받고 귀환했다. 당시 나라 사정이 어떠했는지 사병들은 아무도 몰랐다. 전투중대는 물론 행정병들마저 ‘폭동진압’ 훈련에 동원되었지만, 그 훈련은 한 일주일 후쯤에 종료되었다.&lt;BR&gt;
&lt;BR&gt;
이듬해 10월 26일 박정희가 중정부장 김재규에게 살해되던 때, 우리 대대는 천리행군 중이었다. 대대 행정병 중 가장 선임이었고, 인사과 필수요원이었던 나는 10여 명의 전역대기병들과 함께 부대에 잔류해 있었다. &lt;BR&gt;
&lt;BR&gt;
저녁 9시께 비상 사이렌이 울렸고 잠시 후에 퇴근했던 인사장교가 숨이 턱에 닿아서 나타났다. 무슨 일이니? 부평 로타리에 여단 병력이 바리바리 출동하고 있는데……. 우리 대대를 제외한 세 개 대대 전 병력이 출동했고 우리들 잔류병은 밤새도록 8개 초소를 운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lt;BR&gt;
&lt;BR&gt;
나는 밤새 말뚝 보초를 서고 교대해 들어온 오전 8시께 후임병이 말했다. 박통이 죽었답니다. 나는 별다른 감회가 없었다. 우선 자리에 들어 눈을 붙이고 싶다는 욕구가 더 컸던 것이다. 독재자의 죽음으로 비로소 그의 유산인 유신시대가 막을 내릴 테지만 정작 사병들에게는 일거에 외출·외박·휴가 일체가 중단된 것이 더 뼈아팠다.&lt;BR&gt;
&lt;BR&gt;
전역을 앞두고 가능하면 늦게 찾아 먹으리라고 일부러 마지막 정기휴가를 유보하고 있었던 나는 거의 공황 상태에 빠졌다. 휴가를 찾아먹지도 못하고 전역마저 늦추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실제로 병사들 사이를 떠돌아 다녔다. &lt;BR&gt;
&lt;BR&gt;
12월, 휴가가 재개되자 나는 일착으로 휴가를 떠났다. 12월 14일 정기휴가를 마치고 귀대했을 때야 나는 이틀 전에 12·12 쿠데타가 있었다는 걸 알았다. 당일 밤에 우리 여단은 서울로 출동하다가 부천 근처에서 회군했다고 했다. 쿠데타군에 대한 진압군으로 우리 여단을 출동시킨 육군 수뇌부가 중도 회군명령을 내린 것은 아군 간의 교전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걸 안 것은 물론 훨씬 이후의 일이다.&lt;BR&gt;
&lt;BR&gt;
이듬해 2월 7일 나는 만기 전역했다. 귀향해서 한 달 뒤에 대학에 복학했고, 복학한 지 석 달이 채 안 돼 광주항쟁이 일어났다. 계엄령과 함께 학교는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다. 나는 나중에 우연히 만난 후임병을 통해 그 5월에 우리 대대는 서울 시내 소재 대학에 진주했고, 경찰과 합동으로 우범자 색출작업을 잔인하게 수행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lt;BR&gt;
&lt;BR&gt;
광주에 출동한 공수여단은 내가 근무한 부대는 아니었다. 그걸 앞서 말한 것 같이 '행운'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그 역사적 사건은 나의 알리바이로 끝날 수 없는 비극, 우리 현대사의 참혹한 상처인 것이다. 개인의 부재나 면책에 앞서 그 아픈 현대사는 우리 모두의 책임인 까닭이다.&lt;BR&gt;
&lt;BR&gt;
광주를, 그리고 호남 사람들을 바라보는 영남 사람들에겐 일종의 원죄의식이 있다. 영남에 살고 있다는 것 외엔 어떤 책임도 없지만 스스로가 가해자의 일부라는 부채의식에서 벗어나는 건 쉽지 않다. 마찬가지 이유로 나는 가끔씩 공수부대에서 근무한 내 전력이 일종의 원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lt;BR&gt;
&lt;BR&gt;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공수교육을 받고 기본휘장을 가슴에 달면서 공수병이 느끼는 일종의 명예감이 있다. 자의가 아닐지라도 어려운 과정과 고통을 이겨낸 성취감이 주는 울림이란 남다른 것이다. 그러나 그걸 입 밖에 내는 건 쉽지 않다. 사람들에게 아픈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는 훨씬 가까운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39726071.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87&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집단강하. 복무 기간 동안 내가 참여한 강하는 10회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lt;/p&gt;&lt;/div&gt;
&lt;BR&gt;
어느 덧, 전역한 지 삼십 년이 가까워 오고, 예비군은 물론 민방위대까지 끝낸 스산한 50대의 중턱에 나는 서 있다. 문득 떠오른 젊음의 한 시절을 유쾌하게만 회상할 수 없는 이 시대는 참, 얼마나 쓸쓸한가. 가뭇한 기억 속에서 나는 C-123 수송기에서 낙하산에 의지해 지상 3천 피트의 허공에 몸을 날리던 때를 설렘으로 떠올린다.&lt;/p&gt;&lt;BR&gt;
&lt;div align=&quot;center&quot;&gt;&amp;lt;2009. 6. 25.&amp;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76481521.jpg&quot; width=&quot;70&quot; height=&quot;41&quot; alt=&quot;&quot;/&gt;&lt;/div&gt;&lt;/div&gt;&lt;/font&gt;&lt;BR&gt;
&lt;BR&gt;
&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3507881&quot;&gt;&lt;/embed&gt;&lt;/div&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길위에서</category>
			<author>q9447 (낮달)</author>
			<pubDate>Thu, 25 Jun 2009 11:05:53 GMT</pubDate>
		</item>
		<item>
			<title>빌라드 &lt;안내를 부탁합니다&gt;</title>
			<link>http://blog.ohmynews.com/q9447/246153</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003366&quot;&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59739296.jpg&quot; width=&quot;250&quot; height=&quot;370&quot; alt=&quot;&quot;/&gt;&lt;/div&gt;뜻밖에 폴 빌라드의 &amp;lt;이해의 선물&amp;gt;은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은 듯하다. 읽은 이는 물론이거니와 처음 이 글을 만난 이들도 잔잔한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작품의 자연스런 전개와 진정성 탓이었으리라. 나는 그게 소설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그게 지은이의 추억과 사랑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한 것이다. &lt;BR&gt;
&lt;BR&gt;
댓글을 달아준 선배 교사가 &amp;lt;이해의 선물&amp;gt;이 ‘소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그이는 또 그의 수필 &amp;lt;안내를 부탁합니다&amp;gt;를 ‘강권’했다. 요샛말로 하면 ‘강추’다. 물론 나는 그 글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폴 빌라드’로 검색하면 어김없이 뜨는 목록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lt;BR&gt;
&lt;BR&gt;
나는 꼼꼼하게 &amp;lt;안내를 부탁합니다&amp;gt;를 읽었다. 강권이든 강추가 마땅한 작품이다. 그것은 소년과 전화 안내원 사이의 오랜 세월에 걸친 우정과 교유의 기록이다. 전화가 막 보급되던 시절의 전화 안내원이라고 해서 이웃 소년의 상담자 역할까지 했을까. 자기 일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이해 없이는 그것은 가능하지 않았으리라. &lt;BR&gt;
&lt;BR&gt;
플라치도님께서 이야기해 주어서 폴 빌라드의 &amp;lt;이해의 선물&amp;gt;이 &amp;lt;위그든 씨의 사탕가게&amp;gt;(문예출판사, 2007)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는 걸 알았다. 댓글을 단 후배의 말대로 &amp;lt;이해의 선물&amp;gt;은 원제가 &lt;span lang=&quot;EN-US&quot; style=&quot;mso-fareast-font-family: 돋움&quot;&gt;&amp;lt;The Gift of Understanding&amp;gt;&lt;/span&gt;&lt;the&gt;이다. 알라딘에서 검색해 보니 이 책엔 &amp;lt;안내를 부탁합니다&amp;gt;도 물론 실려 있다. 나는 책을 내 보관함에다 쟁여 두기로 했다.&lt;BR&gt;
&lt;/font&gt;&lt;BR&gt;
&lt;BR&gt;
&lt;div style=&quot;padding-right: 10px; padding-left: 10px; padding-bottom: 10px; padding-top: 10px; background-color: #e4e4e4&quot;&gt;&lt;BR&gt;
&lt;font face=&quot;dotum&quot; size=&quot;3&quot;&gt;&lt;strong&gt;&lt;font color=&quot;#333333&quot;&gt;안내를 부탁합니다&lt;/font&gt;&lt;BR&gt;
&lt;BR&gt;
&lt;/strong&gt;&lt;/font&gt;&lt;BR&gt;
&lt;div align=&quot;right&quot;&gt;&lt;font color=&quot;#333333&quot;&gt;폴 빌라드&lt;BR&gt;
&lt;/font&gt;&lt;/div&gt;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333333&quot;&gt;내가 아주 어렸을 때 우리 집은 여러 이웃들 중에서 거의 첫 번째로 전화를 설치했다. 광택이 나는 참나무 전화상자가 층계참 벽면에 &amp;nbsp;단단히 부착되던 그날의 일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상자 옆에는 &amp;nbsp;반짝이는 수화기가 매달려 있었다. 105번. 나는 그 때의 전화번호까지도 기억한다. &lt;BR&gt;
&lt;BR&gt;
나는 너무 어려서 전화기에 키다 닿지도 않았지만 엄마가 전화기에 대고 대화하는 것을 호기심에 차서 듣고 했다. 한 번은 &amp;nbsp;엄마가 나를 번쩍 들어 올려 출장 중이신 아버지와 얘길 나누게 해주었다. 그것은 마술 그 자체였다!&lt;BR&gt;
&lt;BR&gt;
얼마 후에 나는 그 경이로운 장치 속 어딘가에 굉장한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여성의 이름은 '전화 안내원'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모르는 건 다른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물을 수 있었다. 또 우리 집 시계가 고장 났을 때도 안내원은 즉각적으로 정확한 시간을 알려 주었다. &lt;BR&gt;
&lt;BR&gt;
이 수화기 속의 요정과 내가 첫 번째로 대화를 나눈 사건은 엄마가 이웃집에 놀러간 사이에 &amp;nbsp;일어났다. 지하실에서 연장통을 갖고 놀던 나는 &amp;nbsp;그만 망치로 손가락을 후려치고 말았다. 아픔을 참을 수가 없었지만 아무리 울어도 소용없을 것만 같았다. &amp;nbsp;집에는 내게 동정심을 표시해 줄 사람이 &amp;nbsp;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lt;BR&gt;
&lt;BR&gt;
나는 욱신거리는 손가락을 빨며 &amp;nbsp;집안을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계단이 있는 곳까지 이르렀다. 그때 전화가 눈에 띄었다. 아, 그렇다! 나는 재빨리 거실에 있는 앉은뱅이 의자를 &amp;nbsp;낑낑거리며 층계참까지 끌고 올라갔다. &amp;nbsp;의자에 올라선 나는 수화기를 &amp;nbsp;들어 귀에 갖다댔다. 그리고는 내 머리보다 &amp;nbsp;약간 위쪽에 있는 전화기 송화구에 대고 &quot;안내원!&quot; 하고 불렀다. &lt;BR&gt;
&lt;BR&gt;
찰칵 하는 소리가 한두 번 &amp;nbsp;난 뒤 작지만 뚜렷한 목소리가 내 귀에 대고 말했다. &lt;BR&gt;
&lt;BR&gt;
&quot;안내원입니다!&quot;&lt;BR&gt;
&lt;BR&gt;
나는 전화기에 대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lt;BR&gt;
&lt;BR&gt;
&quot;손가락을 다쳤어요. 엉엉.&quot;&lt;BR&gt;
&lt;BR&gt;
이제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니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lt;BR&gt;
안내원이 물었다. &lt;BR&gt;
&lt;BR&gt;
&quot;엄마가 집에 안 계시니?&quot;&lt;BR&gt;
&lt;BR&gt;
나는 계속 엉엉 울면서 대답했다. &amp;nbsp;&lt;BR&gt;
&lt;BR&gt;
&quot;집엔 나밖에 없어요.&quot;&lt;BR&gt;
&quot;피가 나니?&quot;&lt;BR&gt;
&quot;아니오. 망치로 손가락을 때렸어요.&quot;&lt;BR&gt;
&lt;BR&gt;
그녀가 물었다. &lt;BR&gt;
&lt;BR&gt;
&quot;집에 얼음통이 있니?&quot;&lt;BR&gt;
&lt;BR&gt;
난 그렇다고 대답했다. &lt;BR&gt;
&lt;BR&gt;
&quot;그럼 얼음 &amp;nbsp;한 조각을 깨서 네 &amp;nbsp;손가락에 대고 있으렴. 그럼 &amp;nbsp;아픔이 가실 거야. 얼음 깰 때 조심하구.&quot;&lt;BR&gt;
&lt;BR&gt;
그러면서 그녀는 부드럽게 타일렀다. &lt;BR&gt;
&lt;BR&gt;
&quot;이제 그만 울어. 괜찮을 테니까.&quot;&lt;BR&gt;
&lt;BR&gt;
그 사건 이후 나는 무슨 일이 있기만 하면 &amp;nbsp;전화 안내원을 찾았다. 내가 지리 숙제에 대한 도움을 &amp;nbsp;요청하면 그녀는 필라델피아가 어디쯤 있고 오리노코 강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었다. 그 낭만적인 강에 대해 들으면서 나는 이다음에 어른이 &amp;nbsp;되면 꼭 그 강을 탐험해 보겠노라고 결심했다. 또 그녀는 내 산수 공부를 도와주었으며, 전날 내가 &amp;nbsp;공원에서 잡아온 애완용 얼룩다람쥐가 과일과 열매만을 먹는다는 것도 가르쳐 주었다. &lt;BR&gt;
&lt;BR&gt;
또 우리 집에서 기르는 &amp;nbsp;애완용 카나리아 새가 죽었을 &amp;nbsp;때도 나는 안내원을 불러 그 슬픈 소식을 전했다. 그녀는 가만히 듣고 &amp;nbsp;있더니 어른들이 흔히 아이들을 달랠 때 &amp;nbsp;하는 말로 나는 위로했다. &amp;nbsp;하지만 아무리 해도 난 &amp;nbsp;슬픔이 가라앉지 않았다. &amp;nbsp;그토록 아름다운 노래로 &amp;nbsp;온 가족에게 기쁨을 주던 &amp;nbsp;새가 왜 갑자기 깃털이 수북이 빠진 채로 새장 바닥에 죽어 있어야 하는지 난 이해할 수 없었다. &lt;BR&gt;
&lt;BR&gt;
그녀는 내 큰 슬픔을 눈치 챈 듯 조용히 말했다. &lt;BR&gt;
&lt;BR&gt;
&quot;폴, 노래 부를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결코 잊으면 안 돼.&quot;&lt;BR&gt;
&lt;BR&gt;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다소 진정이 되었다. &lt;BR&gt;
&lt;BR&gt;
다른 날도 전화기에 매달렸다. 이제는 귀에 익숙해진 목소리가 &quot;안내원입니다.&quot;하고 말했다. &lt;BR&gt;
&lt;BR&gt;
나는 물었다. &lt;BR&gt;
&lt;BR&gt;
&quot;&amp;lt;붙이다&amp;gt;를 어떻게 써요?&quot;&lt;BR&gt;
&lt;BR&gt;
&quot;벽에 붙이는 &amp;nbsp;걸 말하니, 아니면 편지를 &amp;nbsp;부치는 걸 말하니? 벽에 붙이는 것일 때는 &amp;lt;붙-이-다&amp;gt;라고 써야 해.&quot;&lt;BR&gt;
&lt;BR&gt;
그 순간이었다. 나에게 겁주는 걸 광적으로 좋아하는 두 살 위의 누나가 계단에서 점프를 하며 내게 덤벼들었다. 그리고는 &quot;우히히히!&quot; 하고 귀신처럼 고함을 질렀다. 나는 놀라서 앉은뱅이 의자에서 넘어졌다. 그 바람에 수화기가 전화통에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둘 다 겁에 질렸다. 안내원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수화기를 잡아 뽑는 바람에 그녀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 아닌가 몹시 걱정이 되었다. &lt;BR&gt;
&lt;BR&gt;
몇 분 뒤 어떤 남자가 현관에 나타났다. &lt;BR&gt;
&lt;BR&gt;
&quot;난 전화기 수리하는 사람이다. 저 아래서 작업을 하고 &amp;nbsp;있는데 안내원이 너희 집 전화에 문제가 생겼다고 알려 주었다.&quot;&lt;BR&gt;
&lt;BR&gt;
그 남자는 내 손에 들려져 있는 수화기를 바라보았다. &lt;BR&gt;
&lt;BR&gt;
&quot;무슨 일이 난 거니?&quot;&lt;BR&gt;
&lt;BR&gt;
난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lt;BR&gt;
&lt;BR&gt;
&quot;걱정마라. 일이 분 정도면 다시 연결할 수 있으니까.&quot;&lt;BR&gt;
&lt;BR&gt;
그가 전화통 뚜껑을 열자 전선줄과 코일이 미로처럼 연결된 내부가 드러났다. 그는 수화기 코드를 이리저리 만지고는 작은 십자드라이버로 나사 몇 개를 조였다. 그리고는 후크를 몇 차례 누르고 나서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lt;BR&gt;
&lt;BR&gt;
&quot;여보세요. 나 피터요. 105번 전화는 이제 아무 이상 없어요. 아이의 누나가 아이를 미는 바람에 수화기 코드가 전화기에서 빠진 것뿐예요.&quot;&lt;BR&gt;
&lt;BR&gt;
그는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끊은 뒤 머리를 쓰다듬고는 밖으로 나갔다. &lt;BR&gt;
&lt;BR&gt;
이 모든 일이 태평양 북서 해안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났다. 그러다가 내가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우리 집은 대륙 건너편의 보스턴으로 이사를 갔다. 나는 내 가정교사를 잃은 것이 못내 아쉬웠다. 안내원은 옛날에 살던 집의 나무상자로 된 그 낡은 전화통 속에만 살고 있었다. 나는 웬일인지 새로 이사 간 집의 거실 테이블 위에 날렵한 새 전화기를 시험해 볼 마음이 나지 않았다. &lt;BR&gt;
&lt;BR&gt;
하지만 사춘기가 되어서도 어렸을 때의 그 대화에 대한 기억들이 한 번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종종 인생에 대한 의심과 불안과 순간들이 닥쳐올 때면 나는 전화 안내원에게서 올바른 해답을 들었을 때 느꼈던 그 안도감과 마음의 &amp;nbsp;평화를 회상하곤 했다. 그녀가 얼마나 많은 인내심과 친절한 마음을 갖고 한 어린 소년을 대해 주었는가를 깨닫고 나는 뒤늦게나마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lt;BR&gt;
&lt;BR&gt;
몇 해가 흘러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다시 미국 서부로 가던 도중에 내가 탄 비행기가 시애틀에 도착했다. 나는 다른 비행기로 갈아탈 때까지 3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나는 당시 그곳에서 아이의 엄마가 되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누나에게 전화를 하면서 15분을 보냈다. 그러다가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내가 옛날에 살던 고향 마을의 전화 안내원에게로 다이얼을 돌렸다. 그리고는 &quot;안내원 부탁합니다.&quot; 하고 말했다. &lt;BR&gt;
&lt;BR&gt;
기적처럼, 나는 다시금 그 작고 뚜렷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너무도 잘 기억하고 있는 바로 그 목소리였다. &lt;BR&gt;
&lt;BR&gt;
&quot;안내원입니다.&quot; &lt;BR&gt;
&lt;BR&gt;
나는 미리 그럴 계획을 갖고 &amp;nbsp;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lt;BR&gt;
&lt;BR&gt;
&quot;미안하지만 ‘붙이다’를 어떻게 쓰는지 가르쳐 주시겠어요?&quot;&lt;BR&gt;
&lt;BR&gt;
한참 동안 침묵이 있었다. 그런 다음 부드러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lt;BR&gt;
&lt;BR&gt;
&quot;지금쯤 손가락이 다 나았겠지?&quot;&lt;BR&gt;
&lt;BR&gt;
난 웃음을 터뜨렸다.&lt;BR&gt;
&lt;BR&gt;
&quot;정말 아직도 &amp;nbsp;옛날의 당신이군요. 그 시절에 당신이 내게 &amp;nbsp;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 아마 당신은 모르셨을 거예요. 이걸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quot;&lt;BR&gt;
&lt;BR&gt;
그녀가 대답했다. &lt;BR&gt;
&lt;BR&gt;
&quot;그 시절에 네가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 넌 아마 &amp;nbsp;몰랐을 거다. 내게는 아이가 없었지. &amp;nbsp;그래서 난 언제나 네가 전화해 주기를 기다렸단다. 내 얘기가 참 바보처럼 들리지?&quot;&lt;BR&gt;
&lt;BR&gt;
그렇지 않았다. 전혀 바보처럼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난 그렇게 말해 줄 수가 없었다. 그 대신 나는 지난 여러 해 동안 내가 얼마나 자주 그녀를 생각했는가를 말했다. 그리고 첫 학기를 마치고 방학 때 누나를 만나러 올 텐데 그때 다시 전화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lt;BR&gt;
&lt;BR&gt;
그녀는 말했다.&lt;BR&gt;
&lt;BR&gt;
&quot;물론이지. 네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게. 샐리를 찾으면 돼.&quot;&lt;BR&gt;
&quot;그럼 안녕히 계세요. 샐리.&quot;&lt;BR&gt;
&lt;BR&gt;
안내원이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렸다. 난 말했다.&lt;BR&gt;
&lt;BR&gt;
&quot;다음번에 또 얼룩다람쥐를 만나면 과일이나 열매를 먹으라고 말해 줄게요.&quot;&lt;BR&gt;
&lt;BR&gt;
그녀가 말했다. &lt;BR&gt;
&lt;BR&gt;
&quot;그렇게 하렴. 난 네가 오리노코 강을 탐험할 날을 기대하고 있으마. 잘 지내라. 안녕.&quot;&lt;BR&gt;
&lt;BR&gt;
정확히 석 달 뒤 나는 다시 시애틀 공항으로 돌아왔다. 다른 목소리가 대답했다. &lt;BR&gt;
&lt;BR&gt;
&quot;안내원입니다.&quot;&lt;BR&gt;
&lt;BR&gt;
나는 샐리를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 &lt;BR&gt;
&lt;BR&gt;
&quot;샐리의 친구인가요?&quot;&lt;BR&gt;
&lt;BR&gt;
나는 대답했다. &lt;BR&gt;
&lt;BR&gt;
&quot;네, 아주 오래된 친구죠.&quot;&lt;BR&gt;
&quot;그럼 안 좋은 소식이지만 말씀드려야 할 것 같군요. 샐리는 지난 몇 해 동안 시간제로만 여기서 일을 했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샐리는 5주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잠깐만요. 지금 전화 거신 분 이름이 빌라드라고 했나요?&quot;&lt;BR&gt;
&quot;네.&quot;&lt;BR&gt;
&quot;샐리가 당신에게 전해 &amp;nbsp;주라고 메시지를 남겼군요. 짤막한 &amp;nbsp;메모를 남겼어요.&quot;&lt;BR&gt;
&lt;BR&gt;
나는 얼른 알고 싶어 물었다. &lt;BR&gt;
&lt;BR&gt;
&quot;무슨 내용이죠?&quot;&lt;BR&gt;
&quot;이렇게 적혀 있군요. 제가 읽어 &amp;nbsp;드릴게요. “빌라드가 전화를 하면 이렇게 전해 주세요. 나는 아직도 노래 부를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믿는다구요. 그렇게 말하면 무슨 뜻인지 알 거예요.” 이게 전부군요.&quot;&lt;BR&gt;
&lt;BR&gt;
나는 고맙다고 &amp;nbsp;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샐리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amp;nbsp;나는 알았다.&lt;BR&gt;
&lt;/font&gt;&lt;/div&gt;&lt;BR&gt;
&lt;font color=&quot;#003366&quot;&gt;&lt;BR&gt;
&lt;div align=&quot;center&quot;&gt;&lt;font color=&quot;#003366&quot;&gt;&amp;lt;2009. 6. 23.&amp;gt;&lt;/font&gt;&lt;/div&gt;&lt;/font&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47962133.jpg&quot; width=&quot;70&quot; height=&quot;41&quot; alt=&quot;&quot;/&gt;&lt;/div&gt;&lt;BR&gt;
&lt;BR&gt;
&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3486230&quot;&gt;&lt;/embed&gt;&lt;/div&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함께 읽기</category>
			<author>q9447 (낮달)</author>
			<pubDate>Tue, 23 Jun 2009 00:44:23 GMT</pubDate>
		</item>
		<item>
			<title>그 시절엔 30만원으로도 행복했다!</title>
			<link>http://blog.ohmynews.com/q9447/246105</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003366&quot;&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65376497.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74&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오늘 전교조 경북지부 누리집에 오른 글. 18년 전의 삶을 떠올려 주었다. &lt;/p&gt;&lt;/div&gt;
&lt;BR&gt;
오전에 경북지부 누리집에 들어갔다가 글 한 편에 시선이 꽂혔다. 한 활동가가 '조합원 의견마당'에 올린 예의 글 제목은 &amp;lt;91년 1월의 해직교사 생계활동 지급표&amp;gt;다. 지회 20주년 행사를 위해 자료를 찾다가 발견한 팩스서류라고 한다. 얼른 감이 오지 않았는데, 첨부한 이미지 파일을 열자, 18년 전의 세월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lt;BR&gt;
&lt;BR&gt;
1991년이면 해직 2년이 되던 때다. 1989년 9월부터 봉급은 끊어졌고, 현직 교사들이 매월 내던 1만원의 후원금으로 조성한 ‘생계비’를 받아서 살았다. 글쓴이는 그때, 생계비 지급기준에 따라 미혼 교사에게는 20만원이 맞벌이하는 배우자가 있을 경우엔 15만원이 지급되었다고 전한다. &lt;BR&gt;
&lt;BR&gt;
기억이 아련한데, 첨부한 이미지 파일은 나를 비롯하여, 돈을 버는 유능한 아내를 두지 못했던 무능한(?) 가장들에게는 부양가족, 자녀 학령 등을 감안하여 생계비를 지급했던 흔적을 보여준다. 활동비와 특별수당(이게 뭐였는지는 모르겠다.)은 100%, 생계비와 교육비는 50% 지급했다고 하는데 서류에는 내가 지급 받은 액수가 305,000원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lt;BR&gt;
&lt;BR&gt;
해직 2년차니까 한참 쪼들릴 때였는데, 생계비를 받을 때마다 부자가 된 듯 배가 불렀던 기억이 생생하다. 생계비와 교육비를 100% 받게 되면 46만원이 된다고 서류는 전하고 있는데, 글쎄, 몇 번이나 그렇게 받았는지는 기억에 없다. &lt;BR&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56544463.jpg&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554&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1991년 1월의 생계활동 지급표. 나는 30만 5천원을 받았다.&lt;/p&gt;&lt;/div&gt;
&lt;BR&gt;
어느 새, 저 낡은 전송용지가 전하는 시간은 18년 전이다. 해직이라는 이유로 모든 자리에서 '회비'나 '분담'이 면제되던 시기였다.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막내는 늘 담임이 챙겨주는 수련장이나 우유 따위를 들고 귀가하곤 했다. 어쩌다 보니 해마다 이사를 해야 했고, 오르는 전세금을 마련하느라 빚도 적잖이 졌다. &lt;BR&gt;
&lt;BR&gt;
‘없이 사는 데’ 익숙해질 무렵인 1994년 3월에 나는 복직했다. 1/3의 상여금이 포함된 3월의 첫 봉급을 받았는데 봉급명세서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무슨 봉급을 이렇게 많이 주는 거야……. 나는 해직 전에 내가 받았던 봉급이 얼마쯤이었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었다. 그래선지 그 첫 봉급 앞에 나는 잠시 목이 막혔었다.&lt;BR&gt;
&lt;BR&gt;
그러나 ‘엄청난 봉급’이란 느낌은 잠시였다. 일상에 묻혀 살게 되면서 20년, 25년 근속의 내 봉급이 대기업 직원의 그것에 견주면 초라할 뿐이라는 걸 아프게 배웠다. 18년 전, 내가 받았던 30만원에서 빼 쓰던 1만원의 감격은 오늘날 내가 받는 봉급보다 더 크고 설레는 것이었다.&lt;BR&gt;
&lt;BR&gt;
어느 덧 복직한 지 15년째다. 아이들은 모두 자랐고, 나는 학교에서 ‘노땅’이 되었다. 세상은 얼마나 변했나. 교원노조가 합법화되고 공개적 활동이 가능해졌지만, 여전히 우리의 활동은 권력의 간섭과 탄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일제고사 때문에 열몇 명의 교사가 학교에서 쫓겨났고, 시국선언 참여 교사를 징계하겠다는 당국의 엄포는 국민의 기본권 위에서 서슬 푸른 시대다.&lt;BR&gt;
&lt;BR&gt;
18년 전의 낡은 생계비 지급표를 바라보면서 그 헐벗은 날들에도 모두가 잊지 않고 간직했던 꿈과 희망을 생각해 본다. &lt;BR&gt;
&lt;BR&gt;
&lt;div align=&quot;center&quot;&gt;&amp;lt;2009. 6. 22.&amp;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17605611.jpg&quot; width=&quot;70&quot; height=&quot;41&quot; alt=&quot;&quot;/&gt;&lt;/div&gt;&lt;/div&gt;&lt;/font&gt;&lt;BR&gt;
&lt;BR&gt;
&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3486229&quot;&gt;&lt;/embed&gt;&lt;/div&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길위에서</category>
			<author>q9447 (낮달)</author>
			<pubDate>Mon, 22 Jun 2009 11:58:51 GMT</pubDate>
		</item>
		<item>
			<title>이해의 선물</title>
			<link>http://blog.ohmynews.com/q9447/246015</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003366&quot;&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16986336.jpg&quot; width=&quot;300&quot; height=&quot;284&quot; alt=&quot;&quot;/&gt;&lt;/div&gt;중학교 2학년 때였는지 3학년 때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학교에서는 민중서관에서 발행한 ‘Gateway’라는 이름의 영어 교과서를 쓰고 있었는데 나는 그 책에서 ‘이해의 선물’이라는 글 한 편을 만났다. &lt;BR&gt;
&lt;BR&gt;
그 글을 영어로 배웠던 것은 아니다. 나는 아마 번역해 놓은 국판 크기의 자습서에서 그 글의 전편을 읽었던 것 같다. 그 글을 쓴 이가 폴 빌라드(Paul Billard : 1910∼1974)라는 걸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lt;BR&gt;
&lt;BR&gt;
빌라드는 미국의 아동문학가다. 그는 순수한 아동의 심리 세계를 진실하게 묘사하여 참된 사랑의 교훈을 깨닫게 하는 작품을 주로 썼다고 한다.&lt;BR&gt;
&lt;BR&gt;
&amp;lt;이해의 선물&amp;gt;은 누구나 거치는 유년 시절, 그 성장의 민감한 순간을 스쳐간 보편적 공감을 그리고 있는 글이다. 실제로 우리는 버찌씨로 화폐를 대신한 적도, 자라서 비슷한 아이들을 만난 적도 없지만, 글을 읽으면서 자신의 유년 시절이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는 느낌을 생생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lt;BR&gt;
&lt;BR&gt;
아이의 작고 순수한 세계란 어른의 배려와 관용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대의 순환을 통해서 거듭 확인되는 우리네 삶의 진실 같은 것이기도 하다&lt;/font&gt;.&lt;BR&gt;
&lt;BR&gt;
&lt;div style=&quot;padding-right: 10px; padding-left: 10px; padding-bottom: 10px; padding-top: 10px; background-color: #e4e4e4&quot;&gt;&lt;font color=&quot;#0000ff&quot;&gt;&lt;font color=&quot;#333333&quot;&gt;&lt;font face=&quot;dotum&quot; size=&quot;3&quot;&gt;&lt;strong&gt;이해의 선물&lt;BR&gt;
&lt;/strong&gt;&lt;/font&gt;&lt;BR&gt;
&lt;div align=&quot;right&quot;&gt;폴 빌라드 &lt;BR&gt;
유영(柳玲) 옮김&lt;BR&gt;
&lt;/div&gt;&lt;BR&gt;
&lt;BR&gt;
내가 위그든 씨의 사탕 가게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것은 아마 네 살쯤 되었을 때의 일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많은 싸구려 사탕들이 풍기던 향기로운 냄새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내 머릿속에 생생히 되살아난다. &lt;BR&gt;
&lt;BR&gt;
가게 문에 달린 조그만 방울이 울릴 때마다 위그든 씨는 언제나 조용히 나타나서, 진열대 뒤에 와 섰다. 그는 꽤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머리는 구름처럼 희고 고운 백발로 덮여 있었다. &lt;BR&gt;
&lt;BR&gt;
나에게는, 그처럼 마음을 사로잡는 맛있는 물건들이 한꺼번에 펼쳐진 적은 없었다. 그 중에서 한 가지를 고른다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먼저 어느 한 가지를 머릿속으로 충분히 맛보지 않고는 다음 것을 고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서, 마침내 내가 고른 사탕이 하얀 종이 봉지에 담겨질 때에는 언제나 잠시 괴로운 아쉬움이 뒤따랐다. 다른 것이 더 맛있지 않을까? 더 오래 먹을 수 있지 않을까? &lt;BR&gt;
&lt;BR&gt;
위그든 씨는 골라 놓은 사탕을 봉지에 넣은 다음, 잠시 기다리는 버릇이 있었다. 한 마디도 말은 없었다. 그러나 하얀 눈썹을 치켜 올리고 서 있는 그 자세에서, 다른 사탕과 바꿔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계산대 위에 사탕값을 올려놓은 다음에야 비로소 사탕 봉지는 비틀려 돌이킬 수 없이 봉해지고, 잠깐 동안 주저하던 시간은 끝이 나는 것이었다. &lt;BR&gt;
&lt;BR&gt;
우리 집은 전찻길에서 두 구간이나 떨어져 있었는데, 차를 타러 나갈 때에나 차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언제나 그 가게 앞을 지나게 되어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무슨 볼일이 있어 시내까지 나를 데리고 나가셨다가, 전차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위그든 씨의 가게에 들르신 일이 있었다. &lt;BR&gt;
&lt;BR&gt;
&quot;뭐, 좀 맛있는 게 있나 보자.&quot; &lt;BR&gt;
&lt;BR&gt;
어머니는 기다란 유리 진열장 앞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그 때, 커튼 뒤에서 노인이 나타났다. 어머니가 노인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는 동안, 나는 눈앞에 진열된 사탕들만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어머니는 내게 줄 사탕을 몇 가지 고른 다음, 값을 치르셨다. &lt;BR&gt;
&lt;BR&gt;
어머니는 매주 한두 번씩은 시내를 나가셨는데, 그 시절에는 아이 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늘 어머니를 따라다녔다. 어머니는 나를 위하여 그 사탕 가게에 들르시는 것이 규칙처럼 되어 버렸고, 처음 들르셨던 날 이후부터는 먹고 싶은 것을 언제나 내가 고르게 하셨다. &lt;BR&gt;
&lt;BR&gt;
그 무렵, 나는 돈이라는 것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어머니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건네주면, 그 사람은 또 으레 무슨 꾸러미나 봉지를 내주는 것을 보고는 '아하, 물건을 팔고 사는 건 저렇게 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lt;BR&gt;
&lt;BR&gt;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한 가지 결단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위그든 씨 가게까지 두 구간이나 되는 먼 거리를 나 혼자 한번 가 보기로 한 것이다. 상당히 애를 쓴 끝에 간신히 그 가게를 찾아 커다란 문을 열었을 때 귀에 들려오던 그 방울 소리를 지금도 나는 뚜렷이 기억한다.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천천히 진열대 앞으로 걸어갔다. &lt;BR&gt;
&lt;BR&gt;
이쪽엔 박하 향기가 나는 납작한 박하사탕이 있었다. 그리고 저 쪽엔 말갛게 설탕을 입힌 말랑말랑하고 커다란 검드롭스, 쟁반에는 조그만 초콜릿 알사탕, 그 뒤에 있는 상자에는 입에 넣으면 흐뭇하게 뺨이 불룩해지는 굵직굵직한 눈깔사탕이 있었다. 단단하고 반들반들하게 짙은 암갈색 설탕 옷을 입힌 땅콩을 위그든 씨는 조그마한 주걱으로 떠서 팔았는데, 두 주걱에 1센트였다. 물론 감초 과자도 있었다. 그것은, 베어 문 채로 입안에서 녹여 먹으면, 꽤 오래 우물거리며 먹을 수 있었다. &lt;BR&gt;
&lt;BR&gt;
이만하면 맛있게 먹을 수 있겠다 싶을 만큼 내가 이것저것 골라 내놓자, 위그든 씨는 나에게 몸을 구부리며 물었다. &lt;BR&gt;
&lt;BR&gt;
&quot;너, 이만큼 살 돈은 가지고 왔니?&quot; &lt;BR&gt;
&quot;네.&quot; &lt;BR&gt;
&lt;BR&gt;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는 주먹을 내밀어, 위그든 씨의 손바닥에 반짝이는 은박지에 정성스럽게 싼 여섯 개의 버찌씨를 조심스럽게 떨어뜨렸다. &lt;BR&gt;
&lt;BR&gt;
위그든 씨는 잠시 자기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더니, 다시 한동안 내 얼굴을 구석구석 바라보는 것이었다. &lt;BR&gt;
&lt;BR&gt;
&quot;모자라나요?&quot; &lt;BR&gt;
&lt;BR&gt;
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lt;BR&gt;
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나서 대답했다. &lt;BR&gt;
&lt;BR&gt;
&quot;돈이 좀 남는 것 같아. 거슬러 주어야겠는데…….&quot; &lt;BR&gt;
&lt;BR&gt;
그는 구식 금고 쪽으로 걸어가더니, '철컹' 소리가 나는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는 계산대로 돌아와서 몸을 굽혀, 앞으로 내민 내 손바닥에 2센트를 떨어뜨려 주었다. &lt;BR&gt;
&lt;BR&gt;
내가 혼자 거기까지 갔다는 사실을 아신 어머니는 나를 꾸중하셨다. 그러나 돈의 출처는 물어 보지 않으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다만, 어머니의 허락 없이 다시는 거기에 가지 말라는 주의를 받았을 뿐이었다. 나는 확실히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두 번 다시 버찌씨를 쓴 기억이 없는 것으로 보아, 허락이 있었을 때에는 분명히 1, 2센트씩 어머니가 돈을 주셨던 것 같다. 그 당시로서는 그 모든 사건이 내게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바쁜 성장(成長) 과정을 지나는 동안, 나는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lt;BR&gt;
&lt;BR&gt;
내가 예닐곱 살 되었을 때, 우리 집은 동부로 이사를 갔다. 거기서 나는 성장하여 결혼도 하고, 가정도 이루게 되었다. 아내와 나는 외국산 열대어를 길러 파는 장사를 시작했다. 당시는 양어장이 아직 초창기를 벗어나지 못했던 시절이라, 대부분의 물고기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지에서 직접 수입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 쌍에 5달러 이하짜리는 없을 정도였다. &lt;BR&gt;
&lt;BR&gt;
어느 화창한 오후, 남자 아이 하나가 제 누이동생과 함께 가게에 들어 왔다. 남자 아이는 예닐곱 살 정도밖에는 안 되어 보였다. 나는 바쁘게 어항을 닦고 있었다. 두 아이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수정처럼 맑은 물 속을 헤엄치고 있는 아름다운 열대어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남자 아이가 소리쳤다. &lt;BR&gt;
&lt;BR&gt;
&quot;야아! 우리도 저거 살 수 있죠?&quot; &lt;BR&gt;
&quot;그럼.&quot; &lt;BR&gt;
&lt;BR&gt;
나는 대답했다. &lt;BR&gt;
&lt;BR&gt;
&quot;돈만 있다면야.&quot; &lt;BR&gt;
&quot;네, 돈은 많아요.&quot; &lt;BR&gt;
&lt;BR&gt;
하고 남자 아이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 말하는 품이 어딘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은 얼마 동안 물고기들을 살펴보더니, 손가락으로 몇 가지 종류를 가리키며 한 쌍씩 달라고 했다. 나는 그 아이들이 고른 것을 그물로 건져 휴대 용기에 담은 후, 들고 가기 좋도록 비닐봉지에 넣어 남자 아이에게 건네 주며 말했다. &lt;BR&gt;
&lt;BR&gt;
&quot;조심해서 들고 가야 한다.&quot; &lt;BR&gt;
&quot;네.&quot; &lt;BR&gt;
&lt;BR&gt;
남자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 누이동생을 돌아보고 말했다. &lt;BR&gt;
&lt;BR&gt;
&quot;네가 돈을 내.&quot; &lt;BR&gt;
&lt;BR&gt;
나는 손을 내밀었다. 다음 순간, 꼭 쥐어진 여자 아이의 주먹이 내게 다가왔을 때, 나는 앞으로 일어나게 될 사태를 금세 알아챘다. 그리고 그 어린 소녀의 입에서 나올 말까지도. 소녀는 쥐었던 주먹을 펴고, 내 손바닥에 5센트짜리 백동화 두 개와 10센트짜리 은화 한 개를 쏟아 놓았다. &lt;BR&gt;
&lt;BR&gt;
그 순간, 나는 먼 옛날, 위그든 씨가 내게 물려준 유산(遺産)이 내 마음 속에서 작용하는 것을 느꼈다. 그제서야 비로소, 지난날 내가 그 노인에게 안겨 준 어려움이 어떤 것이었나를 알 수 있었고, 그가 얼마나 멋지게 그것을 해결했던가를 깨닫게 되었다. &lt;BR&gt;
&lt;BR&gt;
손에 들어온 그 동전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나는 그 조그만 사탕 가게에 다시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 옛날, 위그든 씨가 그랬던 것처럼, 두 어린이의 순진함과, 그 순진함을 보전할 수도 있고 파괴할 수도 있는 힘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 날의 추억이 너무나도 가슴에 넘쳐, 나는 목이 메었다. 소녀는 기대에 찬 얼굴로 내 앞에 서 있었다. &lt;BR&gt;
&lt;BR&gt;
&quot;모자라나요?&quot; &lt;BR&gt;
&lt;BR&gt;
소녀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lt;BR&gt;
&lt;BR&gt;
&quot;돈이 좀 남는 걸.&quot; &lt;BR&gt;
&lt;BR&gt;
나는 목이 메는 것을 참으며 간신히 말했다. &lt;BR&gt;
&lt;BR&gt;
&quot;거슬러 줄 게 있다.&quot; &lt;BR&gt;
&lt;BR&gt;
나는 금고 서랍을 뒤져, 소녀가 내민 손바닥 위에 2센트를 떨어뜨려 주었다. 그리고 나서, 자기들의 보물을 소중하게 들고 길을 걸어 내려가고 있는 두 어린이의 모습을 문간에서 지켜보고 서 있었다. &lt;BR&gt;
&lt;BR&gt;
가게 안으로 들어와 보니, 아내는 어항 속의 물풀들을 다시 가다듬어 놓느라고, 걸상 위에 올라서서 두 팔을 팔꿈치까지 물속에 담그고 있었다. &lt;BR&gt;
&lt;BR&gt;
&quot;대관절 무슨 까닭인지 말씀 좀 해 보세요.&quot; &lt;BR&gt;
&lt;BR&gt;
아내가 나를 보고 말했다. &lt;BR&gt;
&lt;BR&gt;
&quot;물고기를 몇 마리나 주었는지 아시기나 해요?&quot; &lt;BR&gt;
&quot;한 삼십 달러어치는 주었지.&quot; &lt;BR&gt;
&lt;BR&gt;
나는 아직도 목이 멘 채로 대답했다. &lt;BR&gt;
&lt;BR&gt;
&quot;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어.&quot; &lt;BR&gt;
&lt;BR&gt;
내가 위그든 씨에 대한 이야기를 끝마쳤을 때, 아내의 두 눈은 젖어 있었다. 아내는 걸상에서 내려와 나의 뺨에 조용히 입을 맞추었다. &lt;BR&gt;
&lt;BR&gt;
&quot;아직도 그 검드롭스의 냄새가 생각나.&quot; &lt;BR&gt;
&lt;BR&gt;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마지막 어항을 닦으면서, 어깨 너머에서 들려오는 위그든 씨의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들었다.&lt;/font&gt; &lt;BR&gt;
&lt;/font&gt;&lt;/div&gt;&lt;BR&gt;
&lt;div align=&quot;center&quot;&gt;&lt;font color=&quot;#333333&quot;&gt;&amp;lt;2009. 6. 21.&amp;gt;&lt;/font&gt;&lt;/div&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18029386.jpg&quot; width=&quot;70&quot; height=&quot;41&quot; alt=&quot;&quot;/&gt;&lt;/div&gt;&lt;BR&gt;
&lt;BR&gt;
&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3469638&quot;&gt;&lt;/embed&gt;&lt;/div&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함께 읽기</category>
			<author>q9447 (낮달)</author>
			<pubDate>Sun, 21 Jun 2009 04:42:29 GMT</pubDate>
		</item>
		<item>
			<title>곳곳에 성차별적 표현, 아내는 무어라 부를까</title>
			<link>http://blog.ohmynews.com/q9447/245834</link>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003366&quot;&gt;&lt;br /&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15984034.jpg&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394&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전교조에서 전개한 성차별 근절 운동의 포스터(2007)&lt;/p&gt;&lt;/div&gt;
&lt;BR&gt;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다 보면 의사소통의 수단인 말이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그런 이데올로기의 일부로서 말에 숨겨진 ‘성차별적 표현’의 예는 만만치 않다. 국립국어원이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을 통해 수행한 &amp;lt;사회적 의사소통 연구: 성차별적 언어 표현 사례조사 및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amp;gt;(2007, 이하 연구)를 다시 들여다보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95951603.jpg&quot; width=&quot;300&quot; height=&quot;431&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국립국어원 연구 보고서(2007)&lt;/p&gt;&lt;/div&gt;이 '연구'는 우리가 무심코 쓰고 있는 말 속에 성차별의 남성 지배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숨어 있는가를 실증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lt;BR&gt;
&lt;BR&gt;
연구'는 성차별적 언어 표현 사례를 ①성별언어 구조의 관용화된 표현, ②불필요한 성별 강조, ③고정관념적 속성 강조, ④선정적 표현, ⑤특정 성 비하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우리는 무심코 쓰는 말이건만, 말 속에 담긴 성차별은 생각보다 훨씬 뿌리 깊은 것이다. &amp;lt;맨아래 표 참조&amp;gt;&lt;BR&gt;
&lt;BR&gt;
‘샐러리맨’에 누가 성차별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샐러리우먼’도 포함하고 있으므로 ‘한 성을 통칭하여 남녀를 모두 포괄’하는 표현이 된다. ‘바지사장’과 ‘2관왕’도 마찬가지다. 이들 단어에 여성을 구분하는 ‘치마사장’이나 ‘이관여왕’은 없으니 말이다. &lt;BR&gt;
&lt;BR&gt;
반대로 ‘여성형으로 남성까지 대표하는 단어’로는 ‘성공의 어머니’, 얼굴마담 등이 있다. 이런 낱말은 필경 여성의 출산 기능(~어머니)과 용모 중심으로 여성을 바라보는 편견으로부터 생성된 것(얼굴마담)임은 물어보나 마나다. &lt;BR&gt;
&lt;BR&gt;
‘호명 순서의 불균형으로 인한 성차별’도 적지 않다. 일반적으로는 ‘남성 표준’의 단어들(부모, 자녀, 남녀…….) 등이 쓰이지만, ‘편모편부’나 ‘엄마아빠’ 등은 ‘여성이 표준’이다. 이는 부정적 의미를 포함하거나 비공식적으로 쓰는 말이므로 여성을 앞에 두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연구’의 예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욕설로 쓰는 ‘연놈’이나 ‘암수’ 따위의 비칭도 마찬가지다. 양성평등의 21세기가 무색할 지경이다.&lt;BR&gt;
&lt;BR&gt;
‘성차별적 이데올로기를 포함하는 여성 관련 언어’는 수는 남성 관련 언어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많다. 남성 관련 언어가 고작 ‘백마 탄 왕자, 황제, 황태자, 여성 편력, 원탁의 기사’인데 비해 여성 관련 언어의 수는 몇 곱절이다. &lt;/p&gt;&lt;BR&gt;
&lt;p&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324839975.jpg&quot; width=&quot;502&quot; height=&quot;465&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amp;lt;사회적 의사소통 연구: 성차별적 언어 표현 사례조사 및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amp;gt; 중에서&lt;/p&gt;&lt;/div&gt;&lt;/p&gt;
&lt;p&gt;&lt;br /&gt;
일상 속에서 무심코 쓰는 낱말 가운데 성차별 언어는 골고루도 섞여 있다. 성차별적 이데올로기가 포함된 낱말 가운데 특히 여성 배우자를 이르는 단어가 상당수라는 게 매우 흥미로웠다. ‘집사람’이나 ‘안식구’ 따위의 낱말 등이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성역할 분업적인 이데올로기를 내포하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lt;BR&gt;
&lt;BR&gt;
‘연구’에서 성차별적 이데올로기를 포함하는 여성관련 언어로 제시한 단어는 다음과 같다. &lt;BR&gt;
&lt;font color=&quot;#993366&quot;&gt;&lt;BR&gt;
아내, 집사람, 조강지처, 안주인, 안방마님, 안식구, 친정식구, 내연녀, 재혼녀, 이혼녀, 시집, 새색시, 처남, 처녀, 외가, 처가, 외손자, 미혼모, 씨받이, 미망인, 안방지기, 외할아버지, 억척모정, 처녀성, 동거녀, 강간, 현모양처, 영계 &lt;BR&gt;
&lt;/font&gt;&lt;BR&gt;
‘연구’에서는 이들 단어에 숨겨진 성차별 이데올로기를 따로 풀이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들 낱말 속에 포함된 성차별적 요소는 다음과 같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lt;BR&gt;
&lt;BR&gt;
&lt;strong&gt;① 아내, 집사람, 안주인, 안방마님, 안식구, 안방지기, 미망인, 내연녀 &lt;BR&gt;
&lt;/strong&gt;이들 단어에서 쓰인 ‘안팎’의 의미는 분명하다. ‘안’은 ‘밖’이 뜻하는 ‘사회’, ‘외부’의 의미와 대립하는 가정(집), ‘내부’다. 이는 전통적 성역할 분업적 이데올로기를 직접 드러내는 어휘들이다. 여성을 남성에 속한 존재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이 낱말들의 성차별적 성격은 두드러진다.&lt;BR&gt;
&lt;BR&gt;
‘아내’는 지금은 어형이 변했지만 원래 ‘안’에다 '사람이나 물건을 말할 때 쓰이던 접미사' ‘-해’를 붙여서 만들어진 말이어서 다른 말과 같은 유형이 되었다. ‘내연녀(內緣女)’도 ‘안’을 뜻하는 ‘내(內)’자를 쓰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내’는 ‘공식’이 아닌 ‘비공식’, ‘내밀한 연분’ 정도의 의미로 쓰였다. &lt;BR&gt;
&lt;BR&gt;
‘외가, 외손자, 외할아버지’ 등에서 드러나는 ‘외(外)’는 ‘내’와는 뜻이 반대다. 그러나 이는 친가를 ‘내부’로 보면서 어머니쪽 가계를 외부로 보는 일종의 배제적 개념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성차별적 요소가 다분한 낱말인 것이다. &lt;BR&gt;
&lt;BR&gt;
&lt;strong&gt;② 내연녀, 재혼녀, 이혼녀, 동거녀&lt;BR&gt;
&lt;/strong&gt;이 낱말들에 담긴 의미도 명백히 부정적이다. 여성의 이혼이나 재혼, 동거, 사실혼 관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은연중에 들어 있는 표현인 것이다. 특히 내연녀나 동거녀 따위는 정상성에서 벗어난다고 간주되는 사람을 이를 때 써 그 비하의 뜻이 분명하다. 경우에 따라 ‘내연남, 재혼남’ 등으로 남자에게도 쓰긴 하지만 이는 남성이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한 보조적 표현일 뿐이다.&lt;BR&gt;
&lt;BR&gt;
&lt;strong&gt;③ 친정식구, 처남, 처가, 시집&lt;BR&gt;
&lt;/strong&gt;대체로 시집과 친정을 구분하는 것도 성차별적인 언어 표현으로 본 듯하다. 특히 ‘친정’이라는 단어 속에는 여자의 결혼이 친부모로부터의 단절이라는 고정관념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출가외인’이라는 전근대적 어휘가 아직 살아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특히 시집과 친정을 표현하면서 남편 쪽은 ‘시댁’으로, 아내 쪽은 ‘처가’라 부르는 것은 대표적인 차별의 예에 해당된다. ‘처남’을 성차별 표현으로 본 이유는 좀 헷갈린다.&lt;BR&gt;
&lt;BR&gt;
&lt;strong&gt;④ 조강지처, 억척모정, 현모양처,&lt;BR&gt;
&lt;/strong&gt;여성에 대해 우위에 있는 남성, 또는 그 지배를 의미하는 낱말도 적지 않다. ‘조강지처’나 ‘현모양처’는 이미 하나의 공고한 이데올로기다. ‘어려울 때 같이 한 아내’라는 의미의 조강지처는 ‘버려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 위에 서 있는 낱말이다. 이는 뒤집으면 '아내는 필요하면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는 전제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lt;BR&gt;
&lt;BR&gt;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는 설명이 따로 필요하지 않을 터이다. ‘억척모정’은 ‘모정’의 의미를 과소평가함으로써 성차별적 의미를 드러낸다.&lt;BR&gt;
&lt;BR&gt;
&lt;strong&gt;⑤ 새색시, 처녀, 미혼모, 씨받이, 처녀성, 강간, 영계 &lt;BR&gt;
&lt;/strong&gt;‘처녀, 처녀성, 영계’ 등은 여성의 순수성을 전제로 한 낱말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남성 주류사회가 여성들에게 강요하는 ‘순결 이데올로기’다. 처녀는 실제로 미혼 여성을 이르는 말이지만 이 낱말 속에 포함된 것은 ‘성적 접촉이 없는’ ‘순수성’인 것이다. &lt;BR&gt;
&lt;BR&gt;
‘미혼모’와 ‘씨받이’는 출산과 관련하여 여성을 바라보는 단어들이다. ‘씨받이’는 여성을 출산의 도구로 바라보는 전근대적 어휘고, ‘미혼모’는 혼인 외 출생의 책임과 허물은 여성에게 미루는 형식의 낱말이다. ‘미혼부’ 없는 ‘미혼모’는 없지만, 미혼부라는 낱말은 아예 사전에도 오르지 않은 것이다.&lt;BR&gt;
&lt;BR&gt;
‘강간’이라는 낱말도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완력으로 침해한다는 뜻에서 성차별적이다. 오늘날에는 여성에게도 쓰이기도 하나 예외적인 경우일 뿐, 기본적으로 남성에 의한 여성 유린이라는 성격이 바뀌지는 않는 것이다. &lt;BR&gt;
&lt;BR&gt;
이 ‘연구’에서 제시한 성차별적 언어 표현은 모두 5,087개. 이 중 성차별적 의미가 담긴 여성 관련 표현이 둘째로 많은 896개였다고 한다. 국립국어원은 “성차별적 언어 표현은 성별 간의 편견을 고착화함으로써 성별 간 갈등을 유발하고 궁극적으로는 사회 통합마저 저해할 수 있다”며 성차별적 언어표현 사용의 관행을 개선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lt;BR&gt;
&lt;BR&gt;
‘연구’는 개선방안으로 ① 성별화된 언어표현 최소화, ② 과도한 외모 관련 표현 자제, ③ 특정 성역할을 고정관념으로 결부시킨 성차별적 표현 자제, ④ 비하적 표현은 다른 말로 대체, ⑤ 대안적 표현의 활성화 등을 든다. 개인적 실천도 실천이지만, 대중의 언어를 선도하는 매스컴의 역할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lt;BR&gt;
&lt;BR&gt;
'연구보고서'를 훑고 나니 갑자기 좀 답답해진다. '아내'를 이르는 표현이 마땅찮은 것이다. 아내를 이르는 대부분의 낱말은 성차별적 요소를 담고 있으니 말이다. 한때 노땅들이 한때 즐겨 썼던 ‘밥쟁이’는 말할 것도 없고 아내와 집사람, 안식구 등도 그 성차별적 의미가 가볍지 않다. &lt;BR&gt;
&lt;BR&gt;
젊은이들은 즐겨 쓰는 말로 ‘와이프’가 있긴 하다. 그러나 나는 그걸 매우 천박한 언어 표현으로 여긴다. 배우자를 굳이 외국어로 표현해야 할 까닭도 없을 뿐더러 그건 윗사람 앞에서 쓸 수 있는 말이 못 된다. &lt;BR&gt;
&lt;BR&gt;
‘남편’에 대응하는 낱말로 ‘여편’이 있을 수 있으나, 이 말은 벌써 '집단'을 뜻하는 접미사 ‘-네’가 붙으면서 아주 여성을 낮잡아 보는 말이 되어 버렸다. 언어예절에서는 자기 배우자를 남에게 이르는 말로 ‘아내’나 ‘처’를 권장하고 있다고 하니 아쉬운 대로 그걸 쓰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lt;/p&gt;&lt;BR&gt;
&lt;div align=&quot;center&quot;&gt;&amp;lt;2009. 6.18.&amp;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02527525.jpg&quot; width=&quot;70&quot; height=&quot;41&quot; alt=&quot;&quot;/&gt;&lt;/div&gt;&lt;BR&gt;
&lt;strong&gt;&lt;font color=&quot;#0000ff&quot;&gt;&lt;a href=&quot;http://www.korean.go.kr/08_new/data/report_view.jsp?idx=365&quot;&gt;연구보고서 보기&lt;BR&gt;
&lt;/a&gt;&lt;/font&gt;&lt;/strong&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30349440.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143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amp;lt;사회적 의사소통 연구: 성차별적 언어 표현 사례조사 및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amp;gt; 중에서&lt;/p&gt;&lt;/div&gt;
&lt;/div&gt;&lt;/font&gt;&lt;BR&gt;
&lt;BR&gt;
&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3452761&quot;&gt;&lt;/embed&gt;&lt;/div&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가겨 찻집</category>
			<author>q9447 (낮달)</author>
			<pubDate>Thu, 18 Jun 2009 12:29:24 GMT</pubDate>
		</item>
		<item>
			<title>세대 뛰어넘기 - ‘젝스키스’에서 ‘2PM’까지</title>
			<link>http://blog.ohmynews.com/q9447/245673</link>
			<description>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396815300.jpg&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40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2PM. 나는 이번에 아이들 덕분에 이 친구들을 처음 알았다. &lt;/p&gt;&lt;/div&gt;
&lt;BR&gt;
&lt;font color=&quot;#003366&quot;&gt;다른 세대들이 한 집에서 생활하는 가정처럼 학교도 여러 세대로 구성되어 있다. 10대의 아이들과 20대부터 60대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대의 교사들이 마구 섞여 있는 데가 학교인 것이다. 그러니 거기엔 흔히들 ‘세대차’라고 하는 격차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기 마련이다.&lt;BR&gt;
&lt;BR&gt;
각 세대들이 다른 세대와 구별되는 행동양식, 정서, 가치관, 신념, 이데올로기 등을 갖는 것은 연령 및 사회구조적 조건과 역사적 경험의 특수성으로 말미암는다. 한국전쟁을 겪은 60대와 광주항쟁마저 아련한 역사로 인식하는 1993년생(고1) 사이에 세대차가 존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lt;BR&gt;
&lt;BR&gt;
같은 공간에서 같은 교재로 공부하는 교사와 학생이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이 다른 것은 적어도 우리 사회에선 크게 문제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교사는 자신의 가치관을 투영한 교과서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개중에 적극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학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lt;BR&gt;
&lt;BR&gt;
현실적으로 세대차는 행동양식이나 가치관보다 현재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감각이나 형식에서 더 첨예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아이들이 열광하는 문화의 내용에 대해 교사들은 어둡기 짝이 없다. 20대의 젊은 교사들이야 아이들과 나이차가 크지 않고 관심과 선호도 비슷할 수 있으니 전혀 문제가 아니다. 같은 이유로 30대도 그런 부분에선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라 하겠다.&lt;BR&gt;
&lt;BR&gt;
문제는 40대 이후부터다.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몸의 문제로 그것은 다가온다. 아이들이 즐기고 열광하는 문화에 대해서 마음이 아니라 몸이 쉬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이 되면 이는 개인적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lt;BR&gt;
&lt;BR&gt;
어느 선배 복직교사의 이야기다. 그는 40대 후반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노래 한 곡을 배우기 위해 한 달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다 되는데 가사가 들어오는 데 꼭 한 달이 걸렸어. 그게 그의 솔직한 고백이었다.&lt;BR&gt;
&lt;BR&gt;
아이들과 맞추어 호흡하기 위해서 아이들의 관심사를 찾고 그들이 열광해마지 않는 배우나 가수 등에 대한 정보도 어지간한 건 아는 게 필요하다면 필요한 일이다. 그게 어쩌면 아이들을 취향이나 기호를 이해하는 첫걸음일 수 있으니까.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38494961.jpg&quot; width=&quot;250&quot; height=&quot;360&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반 티셔츠의 등에 2PM을 새겼다.&lt;/p&gt;&lt;/div&gt;아이들은 제가 좋아하는 스타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거기에 무슨 현실적인 고려 따위는 필요 없다. 마음에 드는 연예인은 모두 ‘내 꺼’고 그의 이름은 자신의 이름과 같이 사용된다. 사물함의 전면, 휴대전화 초기화면, 수첩 표지 등은 물론, 반티셔츠의 등에도 그 이름은 스스럼없이 새겨진다. 
&lt;BR&gt;
&lt;BR&gt;
머리가 좀 어지럽기는 하지만 괜찮다. 예전에는 교사들이 그런 데 어두운 것은 저희들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라고 여기기도 했지만 요즘, 아이들은 교사들의 무관심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아이들은 예전과 달리 교사들에게 관심을 별로 두지 않는다. 그들은 교사들과 자신의 '관계나 그 한계'에 대해서 매우 ‘쿨’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lt;BR&gt;
&lt;BR&gt;
학교 체육대회를 전후하여 아이들은 반별로 맞추어 입은 티셔츠를 즐겨 입는다. 우리 반 아이들이 입은 옷은 빨간색이다. 등에는 저마다 좋아하는 문구를 새겼는데 한 아이의 등에는 ‘2PM’이라 적혀 있었다. 정말, 무심코 물었다. “이피엠은 뭔데?” 순간 아이들 속에서 폭소가 터졌다. “투피엠이에요!”&lt;BR&gt;
&lt;BR&gt;
그제야 나는 내가 꼼짝없는 곰팡내 나는 노땅이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적어도 인기 절정의 연예인들이라면 다른 건 몰라도 이름만은 대충 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의 유행시계는 나보다 훨씬 빠른 것이다. &lt;BR&gt;
&lt;font color=&quot;#993366&quot;&gt;&lt;BR&gt;
- 가순가?&lt;BR&gt;
- 네, 그룹이에요.&lt;BR&gt;
- PM이라면 오후 아냐?&lt;BR&gt;
- 그런 뜻이에요. 2AM도 있어요. &lt;BR&gt;
&lt;/font&gt;&lt;BR&gt;
확인해 보니 2PM은 JYP엔터테인먼트 소속의 그룹인데 멤버는 재범, 준수, 우영, 닉쿤, 택연, 찬성, 준호 등 7명이다. 요즘 연예인들은 구차하게 성을 붙이지 않는 추센 듯하다. 부른 노래 중에 ‘10점 만점에 10점’이란 노래가 있다. 아, 저건 귀에 익었다. 그게 이들의 노래였구나.&lt;BR&gt;
&lt;BR&gt;
나는 이들의 노래를 한번 들어보기로 했다. 이들은 ‘온리 유’라는 노래도 불렀다. 잠깐 인터넷으로 들어보았는데 쉽게 귀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아이들과 얘기해 보니 저희들 가운데 팬이 많단다. 이웃 반 아이 하나는 5장의 앨범을 사고 인근 대도시에 가서 이들의 서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 잘생긴 청년들은 바야흐로 여고생들에게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것 같다.&lt;BR&gt;
&lt;BR&gt;
교사의 관심이나 노력이 스타들의 인기주기를 제대로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나는 노래나 이들의 얼굴은 잘 모르지만 가끔 신문에서 이들 '연예가 소식'을 읽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동정은 얼추 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제대로 무식이 들통난 것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19162869.jpg&quot; width=&quot;451&quot; height=&quot;239&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아이들은 스타의 이름과 사진을 곳곳에 새겨놓는다. 왼쪽부터 핸드폰, 사물함, MP3플레이어&lt;/p&gt;&lt;/div&gt;
&lt;BR&gt;
6,7년 전 얘기다. 이웃 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는 친구 하나가 심각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993366&quot;&gt;- 혹시 젝스키스라고 알아요?&lt;BR&gt;
- 알지.(물론 나는 이름만 안다.)&lt;BR&gt;
- 뭐지요?&lt;BR&gt;
- 가수잖아. 그룹 아닌가? 왜 그래요?&lt;BR&gt;
- 아, 나 참, 쪽 팔려서…….&lt;BR&gt;
&lt;/font&gt;&lt;BR&gt;
얘긴즉슨 이렇다. 아이들이 “젝스키스가 은퇴를 선언하자 흥분한 팬들이 매니저의 그랜저 승용차를 부수는 소동을 벌였다”는 얘기를 하자 이 친구, 꼼짝없이 헷갈린 거다. 그는 젝스키스라는 이름만으로 이들이 외국 가수일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는 의아해서 아이들에게 되물었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993366&quot;&gt;- 야, 걔들 매니저가 언제 한국에 왔는데 그랜저 승용차를 다 샀냐?&lt;BR&gt;
&lt;/font&gt;&lt;BR&gt;
더 볼 것 없는 일이다. 아이들은 뒤집어졌고 그는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이 친구 이야기다. 2003년인가, 자매결연하고 있는 일교조의 간부들이 학교를 방문했다. 학생들에게 잠깐 인사를 하고 친구의 통역 아래 질의 답변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lt;BR&gt;
&lt;BR&gt;
한 아이가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수 ‘보아’를 아느냐고 물었다. 순간 통역은 잠깐 헷갈렸다. &lt;BR&gt;
&lt;BR&gt;
&lt;font color=&quot;#993366&quot;&gt;- 보아? 무슨……, 뭘 보아?&lt;BR&gt;
&lt;/font&gt;&lt;BR&gt;
역시 아이들은 뒤집어졌다. 일본에서 잘 나가고 있다던 보아는 일교조의 간부들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 역시 40대 후반의 노땅이었던 것이다.&lt;BR&gt;
&lt;BR&gt;
아이들과 교사들의 세대차는 당연한 일이지, 그게 무슨 문제가 될 일은 없다.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두 시각의 격차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우려할 일도 아니다. 아이들에게 그들 대중 스타는 자신들의 정체성의 일부가 되지만, 교사에게 그것은 청소년들의 일반적인 문화현상의 하나로만 이해되는 것이다.&lt;BR&gt;
&lt;BR&gt;
교사가 아이들의 대중문화에 대한 기호나 취향에 신경을 곤두세울 일은 물론 없다. 그러나 때로 그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로서 아이들의 열광을 이해해 볼 필요는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을 매료시키는 문화에 대한 소박한 이해만으로 아이들의 세계 일부를 엿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다. &lt;BR&gt;
&lt;BR&gt;
&lt;div align=&quot;center&quot;&gt;&lt;BR&gt;
&amp;lt;2009. 6. 17.&amp;gt;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346038393.jpg&quot; width=&quot;70&quot; height=&quot;41&quot; alt=&quot;&quot;/&gt;&lt;/div&gt;&lt;/div&gt;&lt;/font&gt;&lt;BR&gt;
&lt;BR&gt;
&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embed loop=&quot;true&quot; menu=&quot;false&quot; quality=&quot;high&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quot;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nid=3434404&quot;&gt;&lt;/embed&gt;&lt;/div&gt;&lt;BR&gt;&lt;div style='clear: both;'&gt;&lt;/div&gt;</description>
			<category>길위에서</category>
			<author>q9447 (낮달)</author>
			<pubDate>Tue, 16 Jun 2009 11:04:30 GMT</pubDate>
		</item>
		<item>
			<title>우리 시대의 부음, 떠도는 죽음들</title>
			<link>http://blog.ohmynews.com/q9447/245574</link>
			<description>&lt;font color=&quot;#003366&quot;&gt;&lt;BR&gt;
&lt;p&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26829355.jpg&quot; width=&quot;584&quot; height=&quot;282&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용산에서 희생된 고인들. 모두가 주거 세입자나 영세 상가 세입자들이다.&lt;/p&gt;&lt;/div&gt;&lt;/p&gt;
&lt;BR&gt;
&lt;p&gt;&lt;center&gt;&lt;div id=&quot;jukeBox2455742Div&quot; style=&quot;width:250px; height:27px;&quot;&gt;&lt;script type=&quot;text/javascript&quot;
				&gt;writeCode(getEmbedCode('http://blog.ohmynews.com/script/jukebox/flash/main.swf','100%','100%','jukeBox2455742Flash','#FFFFFF',&quot;sounds=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315690078.mp3*!%EB%A7%88%EB%A5%B8+%EC%9E%8E+%EB%8B%A4%EC%8B%9C+%EC%82%B4%EC%95%84%EB%82%98_*&amp;amp;autoplay=1&amp;amp;visible=1&amp;amp;id=2455742&quot;,&quot;false&quot;))&lt;/script&gt;&lt;/div&gt;&lt;/center&gt;&lt;BR&gt;
&lt;BR&gt;
&amp;lt;한겨레신문&amp;gt;에는 ‘궂긴 소식’이란 이름의 부음란이 있다. ‘궂기다’는 ‘(완곡하게) 윗사람이 죽다’(표준국어대사전)는 뜻의 우리말이다. 이 난에는 사회 저명인사들의 죽음은 말할 것도 없고, 게재를 요청하는 일반인들의 부음도 실리는 것 같다. &lt;BR&gt;
&lt;BR&gt;
숱한 죽음이 거기 실리지만 대부분은 나와 무관한 것들이다. 그나마 낯이나 귀에 익은 이름이면 아, 그이가 죽었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다. 나와 무관한 죽음이란 세상에 넘치고 넘친다. 망자를 알든 모르든 그 죽음은 숱한 죽음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 무슨 애달픔으로 다가오지는 않는 것이다.&lt;BR&gt;
&lt;BR&gt;
지난 6월 8일자 신문을 읽다가 나는 문득 한 작가의 부음을 읽었다. 소설가 임동헌 씨. 나는 등허리로 서늘하게 지나가는 전율을 희미하게 느꼈다. 물론 나는 그를 모른다. 그가 ‘민통선 사람들’이라는 소설을 썼다는 것도 부음란에서 읽었다. 그러고 보니 그건 귀에 익은 작품인 것 같기도 하다.&lt;BR&gt;
&lt;BR&gt;
소설을 제대로 읽지도 않으면서 ‘이름 모르는 소설가가 너무 많다’는 시건방진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이 좀 어이없다. 내가 전율한 이유는 따로 있다. 나는 한 일주일 전쯤에 그가 쓴 책 한 권을 샀던 것이다. ‘사진 찍는 소설가 임동헌의 디카 특강’이라는 부제가 붙은 &amp;lt;디카 씨&amp;gt;라는 책이다.&lt;BR&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057300759.jpg&quot; width=&quot;193&quot; height=&quot;276&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amp;lt;한겨레&amp;gt;에 실린 임동헌의 부음&lt;/p&gt;&lt;/div&gt;올해 클럽활동 부서로 나는 ‘디카반’을 열었는데, 아이들 11명이 왔다. 무언가 교재를 읽고 지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싶어서 산 책이다. 50% 할인한데다가 에세이집인 &amp;lt;풍경&amp;gt;이라는 소책자도 끼워주었다. 나는 &amp;lt;디카 씨&amp;gt;를 띄엄띄엄 필요한 부분만 읽었다. 그는 사진을 찍은 경력이 꽤 되었나 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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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한겨레신문&amp;gt;에서 그의 부음을 읽으면서 나는 내 책상 위에 얌전히 모셔 둔 그의 책 두 권을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그가 죽었다고? 아니 나이가 얼만데……. 예상대로 그는 쉰하나, 젊다면 젊디젊은 나이다. 폐암이 그를 데려갔다고 한다. 나는 잠깐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아까운 나인데…….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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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게 다였다. 글쎄, 그건 그가 내가 익히 아는 사람, 이를테면 황석영이나 공선옥이었다 해도 다르지 않았을 거였다. 일상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숱한 죽음들 가운데 하나다. 어떤 죽음은 내게 사무치기도 어떤 죽음은 심드렁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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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날에는 한 후배가 부친상을 당했다. 향년 78세, 좀 더 살아계셔도 좋은 연센데 세상을 버렸다. 밤늦게 문상했는데, 늘 그렇듯 장례식장에 가라앉은 슬픔의 분위기 따위는 없었다. 노령이라면 피할 수 없는 죽음이니, 그게 조금 일찍 오거나 조금 늦게 오거나 하는 차이일 뿐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던 것이다.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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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판에 박힌 정중한 조사를 주고받긴 하지만, 피차간에 알고 있는 것이다. 거기엔 수사 이상의 의미가 거의 없다는 걸. 오히려 망자를 매개로 산 사람들의 우정과 관계가 더 돈독해질 뿐이라는 걸. 일상 속의 죽음, 자연사나 노환 끝에 맞는 죽음은 그렇게 일상의 갈피 속에서 잊히는 것이다.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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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애달프고, 안쓰럽고 안타까이 여기는 죽음은 그런 일상의 질서로부터 떨어져 있는 죽음이다. 갑작스럽고 황망한 죽음, 비명에 스러지거나 너무 이르게 찾아온 죽음, 아이나 젊은이에게 다가온 죽음은 슬프고 참담하다. 그리고 그것이 내 일상의 주변에 이웃한 죽음이라면 더더구나.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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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가 작가의 죽음을 안타까움만으로 받아들인 것은 그의 죽음이 개인적인 것이었던 탓이리라. 내가 그와 생전에 어떠한 교유도 나누지 못한 탓도 있다. 그의 글이라곤 최근에 읽은 디카 특강 몇 자락이 다였으니 말이다. 나는 그가 교직한 세계를 만나지도 그가 창조한 삶에도 동참하지도 못했다. 결국 고인과 나는 아무것도 공유하지 못했던 것이다.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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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적인 부음란에 실린 죽음이 아니라, 그 죽음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사건으로 다가온 죽음을 최근 우리는 여럿 겪었다. 이른바 ‘정치 검찰’과 무책임한 언론에 의한 ‘정치적 타살’로 일컬어지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용산 참사 때 유명을 달리한 철거민들, 그리고 화물연대 박종태 지부장의 죽음이 그것이다.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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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그러나 전혀 새로운 의미로 사람들에게 다가왔던 것 같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선 땅과 삶의 실존을 명징하게 드러내면서 그가 지향했던 가치를 성찰하게 했다. 그는 우리 이웃도 작가도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그가 살았던 삶의 단면을 통하여 그와 숱한 가치와 지향을 공유했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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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63652322.jpg&quot; width=&quot;200&quot; height=&quot;286&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고 박종태(1971∼2009)&lt;/p&gt;&lt;/div&gt;사람들에게는 쉬 잊혔겠지만, 새해 벽두에 용산구 한강로 2가의 건물 옥상 망루에서 점거농성을 벌이다 숨져간 철거민들의 죽음은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 시대의 아픈 표지(標識)로 다가온다. 그들의 희생은 부유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집권여당에 의해 도시테러로 매도당하고 남은 가족들조차 투옥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영면(永眠)에 들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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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라 여겼던 화물연대 박종태는 자기 자신의 이해가 아니라, 택배노동자 78명의 복직을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화물연대와는 ‘30원’도 협상할 수 없다는 자본의 강경대응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뒤늦게 화물연대가 총파업을 벌이고 있지만 그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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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약자에 대한 권력과 자본의 공격은 그것 자체로 폭력이다. 그것은 형식적 법 논리에 기대어 국가의 의무를 방기하고 갈데없는 민중들의 삶을 압박하면서 양극화가 저들만의 새로운 질서라는 것을 은연중 강조하는 것이다. 그들 기득권의 시각에 따르면 철거민들은 이른바 그 ‘신질서’를 거부하는 ‘떼쟁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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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서 일어난 비극적 죽음은 이 화해할 수 없는 간극 사이에 우리가 서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이 도시재개발 세력과 한 몸이 된 ‘공권력’이 벼랑에 몰린 가난한 세입자들을 밀어 버렸다고 한 일각의 평가가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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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서 우리 시대의 가치와 지향을 확인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용산의 죽음에서 우리 시대의 야만적 자본과 권력의 결탁을 확인하고 그것이 이 시대 삶의 현주소라는 걸 새삼스럽게 되새긴 것이다. 그런 뜻에서 이들의 죽음은 개인적 슬픔과 불행, 그 너머에 있다.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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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후배 부친의 부음이 개인적 슬픔과 불행을 환기하는 것이라면 이들의 죽음은 개인사적 불행과 비극을 넘어 한 시대의 한계와 과제를 동시에 드러내 준 셈이다. 노무현의 그것이 여전히 후진적인 이 땅의 정치 문화의 전근대성을 드러내 준 것이었다면 용산에서 숨져 간 사람들의 죽음은 이 ‘묻지 마’ 신자유주의 추종이 창출해 낼 야만의 시대를 증언하는 것이다.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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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148848906.jpg&quot; width=&quot;150&quot; height=&quot;167&quot; alt=&quot;&quot;/&gt;&lt;p class=&quot;cap1&quot; style=&quot;margin-top: 8px&quot;&gt;▲ 고 노무현(1946∼2009)&lt;/p&gt;&lt;/div&gt;어쨌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전 국민적 애도 속에서 한 줌의 재가 되었고 그를 향한 추모와 애도의 물결은 여전히 끊이지 않는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아무도 사과하지 않는 가운데 서거 이후, 바야흐로 새로운 전직 국가원수 죽이기의 에필로그가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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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와 배제의 문법은 이 땅의 천박한 정치문화의 본질 같아 보인다. 정치가 ‘차선’과 ‘대안’의 모색이라는 평범한 명제는 무수히 오가는 증오와 배제의 수사 앞에서 진작 빛을 잃었다. 한 인간의 죽음을 두고 다투는 산 사람의 공방은 금도를 넘은 지 오래다.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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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그리고 박종태와 용산 철거민. 이 두 죽음의 무게를 비교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누가 더 무겁고 누가 덜 가볍다는 논의는 그저 세상의 논리일 뿐, 이 세상에 무겁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한 죽음 앞에서 다른 죽음은 묻히고 잊혀졌다. 한 죽음에 쏟아진 500만의 눈물과 애도 가운데 단 일할이라도 다른 죽음에 대한 위무가 되었다면…, 하는 가정도 부질없기는 마찬가지다.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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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일이 넘도록 영안실 냉동고에서 잠들지 못하고 있는 다섯 사람의 죽음과 10살, 7살배기 남매를 남기고 떠난 서른여덟 살 먹은 사내의, 잊혀 가고 떠도는 이 시대의 죽음들을 생각하며 뒤늦게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을 훔쳐낸다.&lt;/p&gt;&lt;BR&gt;
&lt;div align=&quot;center&quot;&gt;&amp;lt;2009. 6. 15.&amp;gt;&lt;/div&gt;&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 margin-bottom: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537/1203562612.jpg&quot; width=&quot;70&quot; height=&quot;41&quot; alt=&quot;&quot;/&gt;&lt;/div&gt;&lt;/font&gt;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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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길위에서</category>
			<author>q9447 (낮달)</author>
			<pubDate>Sun, 14 Jun 2009 11:38:18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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